아우터 리포트 (1)
진천 제국.
황성에서 12킬로미터 떨어진 숲에 불당이 있었다.
부처를 보며 홀로 앉아 있는 여성은 한때 진천의 황제였던 진성음이었다.
친오빠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고 수행에 들어간 지도 어언 3년째.
인류를 위해 지옥을 선택했던 그녀의 눈빛은 마치 지장보살을 보는 듯했다.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나조차도.
나를 하찮게 여긴다거나, 세상일에 무심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텅 빈 마음으로 임한다.”
“선황이시여.”
불당 앞에 안찰이 무릎을 꿇었다.
“정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진천의 백성들도 앞다투어 세력을 규합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정치는 황제 폐하가 하는 일이다. 이제 와 내가 끼어드는 것도 좋지 않아. 마음이 움직이는 곳에 필요가 있으니 그저 때를 기다릴 뿐.”
‘꼭 남의 일처럼 말씀하시는군.’
안찰은 씁쓸했다.
‘하긴, 지옥에서 돌아온 분이시다. 속세의 번뇌에 쉽게 흔들리는 것도 이상하지만….’
걸리는 것은 있었다.
“어째서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으신 겁니까?”
성음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안찰이 무언의 압박을 가하자 짧게 내뱉었다.
“그들이 부담스러워할 것이다.”
안찰의 생각은 달랐다.
“한때는 시로네에게 연적도 많았지요. 하지만 그날은 모두 참석했습니다.”
“어리석기는. 한때나 연적이었지, 지금은 다들 배필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나는 산속에서 홀로 수행이나 하고 있으니, 그런 내가 가면 두 사람의 마음도 심란해질 것이다. 그 일은 더 말하지 말라.”
그때 황성의 사자가 왔다.
“국장님.”
안찰이 쏘아붙였다.
“무슨 일이냐? 나 이외에는 아무도 이곳을 출입할 수 없다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12사도! 뇌룡 블리츠가 왔습니다. 시로네 님의 전언이라고….”
“시로네?”
성음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이어서 몸을 일으킨 그녀가 황급히 물었다.
“무슨 전언이냐?”
“선황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기별을 받는 즉시 자신에게 와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성음의 뺨에 홍조가 졌다.
“그렇다면 가야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안찰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선황께서는 아직도….’***시로네 일행은 아포칼립스의 황량한 벌판에 장갑차를 세우고 내렸다.
건물들이 전부 쓸려 나간 곳에 높이 8미터의 금속 물체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직육면체에 검은 빛깔을 띠었고, 손을 가져다 대자 미약한 전류가 느껴졌다.
시로네가 중얼거렸다.
“모노리스.”
고대의 사람들이 신과 교류하기 위해 세운 비석의 명칭은 꽤 잘 어울렸다.
페르미가 다가왔다.
“그럴듯하군. 하지만 정말 바깥 세계의 유물일까? 조작 가능성은 없어?”
“저길 봐.”
시로네는 몸을 돌렸다.
모노리스를 중심으로 반경 30미터 영역에 오로라가 넘실대고 있었다.
“준동경계의 시스템을 교란하고 있어. 마치 철극처럼 이곳에 고정되어 있는 거야.”
“말인즉슨….”
페르미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이곳이 아닌 현실에서 다음 말이 들렸다.
“아우터 리포트가 맞다는 거야?”
“그래.”
나란히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에이미와 세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페르미가 물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린 바깥 세계로부터 독립했잖아. 네가 직접 했으니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시로네는 말이 없었다.
“혹시 너….”
“아니.”
시로네는 고개를 저었다.
“바깥 세계는 절대로 우리 세계에 접속할 수 없어. 내가 그렇게 했으니까.”
“그렇군.”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시로네가 감추고 있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들은 기분이었지만, 내색할 수 없는 에이미와 세리엘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차만 홀짝거렸다.
페르미가 팔을 벌렸다.
“그럼 뭐야? 모노리스가 아우터 리포트라면 바깥 세계에서 접속했다는 뜻이잖아. 네 얘기가 사실이라고 쳐도,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
“모르겠어.”
시로네는 솔직히 말했다.
“난 분명히 차단했어. 내가 놓친 부분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바깥 세계의 시스템에 대해서는 나조차도 정확히 알지 못하니까.”
페르미는 뉴럴링크의 감도를 높였다. 그리고 모노리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결국 이걸 해독할 수밖에 없다는 거군. 놈들의 꿍꿍이가 여기에 담겨 있을 테니.”
“울티마는 도움이 안 될 거야. 제트의 구결도 수학적 공식이라서. 솔직히 단말기를 봤을 때 형태의 유사함 외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어.”
페르미가 돌아섰다.
“어쩔 수 없지. 사람 불러서 하는 수밖에. 정보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쉽지만.”
“응? 사람?”
페르미가 웃으며 돌아섰다.
“전문가 말이야.”***진리의 피라미드.
파라스 왕국의 대표적인 오파츠인 진리의 피라미드는 출입이 중단된 상태였다.
관광지로 개방하면 큰돈을 벌 수 있을 테지만 왕성 정부는 철저히 은폐했다.
바깥 세계의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구조물을 조사할 수 있는 것은 정부의 승인을 받은 소수의 팀뿐이었고, 그중에는 카니스와 아린, 아레스와 줄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 봐.”
카니스가 탁본을 가리키며 말했다.
“문자에 시간을 담는 건 단 하나의 언어도 중복되지 않는다는 뜻이지. 즉 4차원 문자. 하지만 우리가 만든 시간 방정식을 적용하면 3.5차원 정도로 줄일 수 있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해독이 된다는 거지.”
아린이 말했다.
“응. 나도 맥락을 알겠어. 의미는 아직이지만. 이대로 가면 정말 세계 최초로 바깥 세계의 언어를 해독하는 팀이 되는 거야. 대단해, 카니스.”
카니스는 미소를 지었다.
“무슨 소리야? 전부 네 덕이지. 초경이 아니고서는 문제를 계측하기도 어려우니까.”
구석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대단한 고고학자들 나셨어. 밖에서는 무슨 순위를 매기고 난리도 아닌 것 같던데.”
에이미의 오빠 아레스가 모닥불을 피워 놓고 냄비에 수프를 끓이고 있었다.
벽 쪽에는 대마법사 줄루가 공갈 젖꼭지를 물고 무심하게 앉아 있었다.
“줄루, 한번 먹어 봐.”
아레스가 국자를 가져다 대자 줄루가 말했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요.”
“무슨 소리야, 누구 먹이려고 요리한 건데. 아 한번 해 봐. 아아.”
줄루는 극단적인 애정 결핍이다.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기에 마음속에 담긴 거라고는 끝이 없는 공허뿐.
‘내가 채워 줄 거야.’
설령 그녀의 공허에 파묻혀 스러진다고 해도.
카니스가 말했다.
“너무 과보호 아냐? 줄루 씨는 대마법사라고. 애처럼 취급하는 건 좋지 않아.”
“하하, 인간의 마음속에는 다 애가 있는 거야. 언젠가 줄루도 내 진심을 알아줄걸.”
“진심이라면, 뭐 저런 거?”
카니스가 벽의 그림자를 가리켰다.
아레스의 그림자가 일어서더니 줄루를 향해 허리를 앞뒤로 흔들기 시작했다.
아레스는 기겁했다.
“야! 내가 그거 하지 말라고 그랬지!”
벽의 그림자가 바닥으로 길게 늘어지더니 하비스트가 수직으로 일어섰다.
“크크, 도와주는 건데 왜 그래? 솔직히 말해서 너도 어른의 사랑이 더 좋잖아.”
줄루가 입을 크게 벌렸다.
“아아.”
잠시 놀라 있던 아레스가 수프를 먹여 주자 꿀꺽 삼킨 그녀가 작게 웃었다.
“아레스.”
“어, 응?”
“항상 고맙다요.”
“….”
이럴 때마다 아레스는 새삼 깨닫는다. 절대로 이 여자 곁을 떠날 수 없을 거라고.
머쓱해진 그가 수프를 휘저으며 말했다.
“쳇, 요리 끝났으니까 다들 와서 먹기나 해. 이러는 것도 다 먹고살자고….”
그때 줄루가 벌떡 일어났다.
“누구냐?”
3티어 몬스터 쿠거가 소환된 가운데 모두가 피라미드 내부로 고개를 돌렸다.
통로 쪽의 어둠이 사라지더니 밝은 조명이 있는 공간과 연결되었다.
“크르르르!”
동양인 여성이 무심히 서 있는 가운데 금발 머리 남자가 옆에서 나타났다.
“시로네?”
에테르 파동의 경계선을 넘은 시로네가 피라미드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줄루 씨.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카니스,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아린과 눈을 마주친 카니스가 콧방귀를 뀌며 다시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돕기는 무슨.”
너한테 진 빚이 얼만데.
“동창 좋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지.”***공사장은 한적했다.
가족이 있는 인부들은 전부 집으로 향했고 남은 건 두 사람뿐이었다.
“한가하네.”
어릴 때부터 친구인 맥버크와 피드로였다.
“한잔해.”
맥버크가 위스키병을 건네자 피드로는 목젖을 껄떡거리며 술을 넘겼다.
“크으.”
알큰하게 취한 그들에게는 도시를 떠나는 인파의 행렬도 별게 아니었다.
“우리도 따라갈까?”
“어디로?”
“큭큭.”
마흔이 넘도록 결혼을 못 했기에 지켜야 할 가족도 없는 그들이었다.
맥버크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슬슬 공개하자고, 우리만 남았으니. 굴종의 낙인인가 뭔가, 너도 찍었지?”
“그래.”
“새끼. 몇 번이야?”
“너는?”
두 사람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늘 그렇듯 이런 경우 선택지는 하나였다.
“동시에?”
“콜.”
두 사람은 각자 낙인을 드러냈다.
맥버크는 4억 6천만 번대였고, 피드로는 3억 2천만 번대의 숫자였다.
“흐, 흐흐흐.”
“푸하하하! 하여튼 너나 나나, 누구 하나라도 제대로 풀리는 게 없냐.”
어차피 세상을 호령할 번호는 아니기에 두 사람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흐으.”
맥버크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담배를 빨아들이는 눈에 약간의 어둠이 스쳤다.
‘왜….’
피드로는 먼저 낙인을 찍었을까?
‘같은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었잖아. 함께 찍을 수도 있었어. 1억이 넘게 차이가 나는데. 아니, 그보다 어째서 나한테 말하지 않았지?’
맥버크는 친구를 돌아보았다.
친구는 30년 동안 그랬듯 눈을 감아도 떠올릴 수 있는 특유의 미소로 화답했다.
“….”
대체 무엇이 있을까?
인간의 거죽 아래에 숨어 있는 진심은 자신의 예상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리퍼를 따르라! 새로운 지도자를 받들라!
저 멀리 인파의 행렬에서 시위 소리가 아련히 넘어왔다.***언더 코더의 밀실.
막대 사탕은 급히 만든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에 시간 방정식을 적용시켰다.
하이 기어에 준하는 연산 처리 속도를 갖춘 장소지만 소음이 엄청났다.
“벌써 3시간째. 꽤 걸리겠는데요?”
카니스가 말했다.
“4차원 문자를 해독하는 거니까. 보통 우리가 쓰는 문자는 특정 단어 몇 개를 알면 퍼즐의 빈칸을 채우듯이 의미가 연결되지만, 바깥 세계의 언어는 다른 방식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통째로 해독한 다음 한 단어를 찾고, 다시 통째로 해독한 다음 단어를 찾고. 이런 식이지.”
페르미가 물었다.
“시간의 순서대로 펼치는 방식이라면, 해독도 처음에서 끝으로 진행되는 건가?”
“그렇겠지.”
카니스는 덧붙였다.
“솔직히 나도 장담 못 해. 최후의 전쟁 당시에 남은 파라스 왕국 쪽 자료로 의미를 분류하기는 했지만,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시로네가 말했다.
“잘될 거야. 그리고 고마워. 평생의 연구였을 텐데 우리랑 공유해 줘서.”
“세상이 이 지경이 됐는데 내 밥그릇만 챙길 수 있냐? 어찌 됐든 이걸로….”
카니스는 아린을 끌어당겼다.
“빚은 없는 거다.”
“하하.”
그때 막대 사탕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 떴다.”
전부는 아니지만 한 덩어리의 문단이 3차원 문자로 동시에 바뀌었다.
“띄워 봐.”
“잠시만요. 편집을 해서… 이렇게.”
밀실 벽면의 대형 화면에 아우터 리포트로 추정되는 문서가 출력되었다.프로그램 야훼.
지적 문명에 흔히 발생하는 이벤트로, 프로그램이 적용된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는 우리의 접속 시스템이 한정된 자원으로 갈등을 조장시켜 문명을 종료하고, 모든 사용자를 자연스럽게 바깥 세계로 유도하기 때문이다.
주요 기능은 인류의 인격 한계치를 신성 레벨로 끌어올리는 것이며, 야훼가 적용된 문명은 여타 우주에 비해 문명 유지 기간이 4배에서 무한대까지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특이점 돌파).
따라서 상호 역전의 시간을 가진 우리 쪽 시스템에 위협을 가한다고 판단(오류로 분류).
야훼를 제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