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02화
502. 루머와 루머 3
은아는 풀메이크업을 지우고 기초화장만 한 채 나타났다.
뒤로 단정하게 묶어 놓을 머리카락이 반쯤 헝클어져 있었고 곳곳에서 잔머리가 삐쭉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거기다가 볼은 상기되어 있고 이마에는 땀방울도 맺혀 있었다.
<시공의 발레리나> 씬 44에서 연습을 마친 한예림의 모습이다.
보통 여배우들이나 가수들 모두 카메라 앞에서는 예쁘게 보이려고 애를 쓴다.
특히 아이돌 출신일수록 이런 성향이 강하다.
하지만 은아는 체리블라썸 때의 여신다운 모습을 버리고 <시공의 발레리나>의 ‘한예림’이 되었다.
예쁘게 보일 생각이 1도 없는 은아의 모습에 스태프들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나형준 감독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은아를 쳐다보기 시작한다.
스케줄 때문에 풀메이크업을 하고 개인 오디션을 봤을 때와는 달리 현재의 은아는 배역에 집중한 연기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저거······ 정 팀장님이 시켰어?”
난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저 배역에 몰입해 보라고 가이드를 했을 뿐입니다.”
나형준 감독이 호의적인 표정을 짓는다.
“흠~ 뭐. 일단 자세는 된 거 같네. 그래도 한번 지켜보지. 예림이가 될지 은아로 남을지.”
나형준 감독은 오디션 때 은아의 소심한 성격을 알아챈 뒤 아직도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은아는 황룡영화제 최우수상을 수도 없이 탄 연기파 배우.
특히나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배역의 연기를 펼칠 땐 사람들을 오싹거리게 할 정도였다.
난 그런 은아의 본모습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걱정하진 않고 있었다.
나형준 감독이 조금은 기대가 어린 표정으로 스태프들에게 외친다.
“자자! 다들 조용! 배우가 집중하고 있는데 웬 말들이 많아?”
“죄송합니다 감독님!”
스태프들이 놀란 표정을 지우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형준 감독이 날 향해 씩 웃는다.
“이따 보지.”
“예. 감독님.”
난 나형준 감독에게 인사를 한 뒤 대기 의자로 향한 은아의 곁으로 향했다.
* * *
대기 의자에 앉은 은아는 마지막으로 대본을 훑어보며 ‘한예림’의 연기를 곱씹었다.
은아는 내가 데리고 있는 모든 배우처럼 재능이 있어도 결코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백희영 팀장은 내가 은아를 맡는 동안 은아에 대해 뒷담화를 하는 스태프들이 누군지 찾아내기 위해서 현장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백희영 팀장이 스태프들 사이로 스르륵 끼어들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최은선 조감독이 외친다.
“자 배우들은 다들 모여주세요!”
겉옷을 의자에 내려놓은 조윤정이 흰색 발레복을 입고 연습 무대로 향한다.
그리고 이어서 조금 전 대기 장소에서 싸웠던 이동주와 안희수도 무대로 올랐다.
그때였다.
은아가 깊게 심호흡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오빠. 저······ 그럼 다녀올게요.”
“그래. 유은아 파이팅!”
은아는 마치 이 구역의 미친 X은 나라는 걸 보여주듯 입꼬리를 씨익 하고 올리며 세트장의 연습 무대로 향하고 있었다.
* * *
<시공의 발레리나>는 재능만 넘치고 빽이라곤 쥐뿔도 없는 발레리나 이슬아가 재벌가들의 자식들만 소속된 ‘로열 발레단’에 특례로 들어가게 되면서 생기는 일을 다룬 영화다.
잠시 후 찍을 씬 44는 발레단 단장인 유명희가 이슬아를 백조의 호수 여주인공으로 내정하고 사라진 후 연습실에서 일어나는 다툼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여주인공 이슬아는 그녀를 시기하는 발레리나 우혜주와 박선정에게 집단 린치를 당할 위기에 놓이게 되는데 여주인공의 친구인 한예림이 나타나 여주인공을 구해주게 된다.
그 장면에 등장하는 우혜주 역은 이동주가 맡았고 박선정 역은 안희수가 맡았다.
그리고 은아는 한예림의 역을 맡아 악역을 맡은 이동주와 안희수와 한바탕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 씬을 찍을 여배우들이 모이자 나형준 감독이 연기지도를 시작했다.
“네 사람 모두. 잘 들어. 이번 씬은 극 중 힘도 없고 빽도 없는 이슬아가 재벌가 딸들의 머리 위에 선 상황이야. 특히 동주랑 희수는 분하고 열받고 짜증 나 미쳐버릴 것 같은 상황이야. 뭔 말인지 알지?”
“예!”
“그러니까 동주 희수. 너희 둘은 여기 윤정이를 죽일 듯이 덤벼들어야 해. 사정 봐주지 마. 약하게 하면 될 때까지 계속할 거야.”
나형준 감독은 지킬 앤 하이드라는 별명답게 두 악역에게 임팩트 있는 연기를 뿜어내라 말한다.
“그리고 윤정이는 극 중 이슬아가 일주일간 다이어트로 몸에 힘이 없다는 설정이니까 휘둘리는 대로 휘둘려줘. 대신에 이슬아는 깡 좋은 성격이니까 독기만큼은 분명히 보여줘야 해. 알았어?”
조윤정이 고개를 끄덕인다.
“예.”
“오케이. 마지막으로 은아.”
“예 감독님.”
“넌 네 친구를 괴롭힌 두 사람을 인간쓰레기 대하듯 몰아쳐. 그리고 귀싸대기 날릴 땐 눈 딱 감고 힘차게 날려. 알았어? 어설프게 하면 서로 피곤해진다.”
은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요.”
“굿~. 표정 좋네. 그래 넌 오늘 친구를 괴롭힌 애들을 응징하는 미친X이 되어봐. 그럼 바로 가보자.”
“예 감독님.”
그렇게 세세한 지시를 내린 나형준 감독이 몸을 돌린다.
“1분 뒤에 바로 시작한다. 다들 준비해! 그리고 은아는 잠깐 앵글 밖으로 나가서 대기하다가 들어오고.”
은아는 촬영이 시작되면 잠깐 기다렸다가 앵글 안으로 들어갈 예정이다.
여주인공인 조윤정이 악역 이동주와 안희수에 맞서 싸우는 걸 보고 난입하는 것으로 대본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리하자 나형준 감독이 감독 자리에 앉아 확성기를 잡는다.
“자. 씬 44. 준비되었으면 바로 들어가자. 레디~~액션!”
그 순간 <시공의 발레리나> 씬 44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 * *
조윤정이 감격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쥔다.
『내가······ 오데트라니······』
백조의 호수 여주인공이 된 조윤정은 거울 앞 무대에 서서 기쁜 표정을 짓는다.
그때 이동주가 주인공 조윤정에게 다가가 어깨에 팔을 걸친다.
『야. 낙하산. 너 도대체 뭔 짓을 했길래 주연으로 낙점받은 거냐? 어?』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적의가 가득하다.
『뭘 하다니. 아무것도 안 했어.』
이동주가 비릿한 웃음을 짓는다.
그리곤 검지손가락을 쭉 뻗어 조윤정의 이마를 밀었다.
휘청!
가녀린 몸의 조유정이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 나간다.
쿵.
조유정이 연습 무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무것도 안 해? 안 했는데 너 같은 낙하산이 주연 자리를 꿰차? 너 진짜 개념 없다? 이번 백조의 호수 공연. 우리 아버지가 스폰서인 거 알아 몰라?』
조유정이 바닥에 앉은 채 분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알고 있어!』
『알면? 알면. 알아서 빠져야 할 거 아냐?』
그 순간 안희수가 아래로 내려다보며 폭소를 터트렸다.
『그래. 혜주 말이 맞아. 너 같은 건 그렇게 바닥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게 어울려. 그니까 더 기어오를 생각하지 말고 선생님에게 가서 오데트 역 못하겠다고 해! 이유는 네가 알아서 생각하고』
조윤정이 앉은 채로 바들바들 떨며 외친다.
『못 해! 아니 싫어!』
안희수가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간다.
『싫어? 뭐 그러면 어쩔 수 없네. 난 분명히 말로 하려고 했는데~ 네가 거절한 거다?』
그 순간 이동주는 조윤정의 머리를 움켜잡는다.
화악.
이어서 안희수는 씨익 웃으며 앞이 뾰족하고 단단한 토슈즈로 조윤정의 발목을 밟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은아가 한쪽에서 빠르게 달려 들어오며 외친다.
『야! 니들 지금 뭐 하는 거야~~아!』
은아의 찢어지는 고음이 세트장을 울린다.
박력있게 소리친 은아의 모습은 수줍던 체리블라썸의 은아와는 180도로 다른 모습이었다.
빠르게 달려온 은아가 안희수를 두 손으로 팍하고 밀었다.
우당탕.
안희수는 옆으로 자빠져 데굴데굴 연습 무대 바닥을 뒹군다.
그 순간 은아는 대본대로 힘차게 이동주의 귀싸대기를 날려버렸다.
철썩!
뺨을 정통으로 맞은 이동주가 휘청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은아는 씩씩 숨을 몰아쉬며 쉬지 않고 이동주를 향해 외친다.
『야! 우혜주! 죽고 싶어? 내가 경고했지. 내 친구 건드리지 말라고!』
이동주의 얼굴에 손자국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하지만 지금은 연기 중
이동주는 고통을 참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날 쳐? 한예림 감히 네가?』
『그래. 쳤다. 어쩔래?』
『XX! 아무리 한예림 너라도 오늘은 나도 못 참아!』
잔뜩 화가 난 이동주는 격한 모습으로 은아의 머리채를 잡으려 손을 뻗는다.
하지만 그때였다.
은아가 이동주의 손길을 피한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왼손을 강하게 휘둘렀다.
짝!
은아의 키는 173cm.
이동주보다 무려 10cm나 더 크기에 이동주의 손이 닿기 전 은아가 먼저 뺨을 때릴 수 있었다.
좌 우에 따귀를 맞은 이동주의 양 볼이 빨갛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잔뜩 화가 난 이동주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으아아악! 이 미친X이 날 또 때려?』
그때였다.
안희수가 어느새 일어나 은아의 뒤를 덮친다.
덥석.
안희수가 은아를 뒤에서 잡자 은아도 조금 전처럼 움직이진 못했다.
결국 은아도 이동주와 안희수의 손에 머리카락이 붙잡혔다.
『꺄아아악!』
『이거 안 놔? 놔!』
은아 역시 지지 않고 두 사람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이동주와 안희수의 머리채를 흔들어 대기 시작한다.
덕분에 두 사람은 머리카락이 뽑히는 듯한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힘에 부친 은아가 안희수를 물어버린다.
순간 은아에게 물린 안희수가 비명을 지른다.
『이 미친X이 물어! 꺄아악!』
『뭐야? 얘 지금! 야! 아아악!』
안희수 역시도 은아에게 물려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은아는 나형준 감독이 시킨 대로 한예림 그 자체가 되어서 열연을 펼치고 있었다.
내가 바랐던 그 모습보다 훨씬 격렬하게 말이다.
덕분에 스태프들과 다른 매니저들은 넋이 나가버렸다.
그러나 나형준 감독의 얼굴에는 희열이 차오르고 있었다.
* * *
“커~엇!”
나형준 감독이 컷을 외친다.
그의 얼굴에는 흥분한 티가 역력했다.
은아가 여주인공의 존재를 잠깐이나마 잊게 할 정도로 강렬한 존재감을 보이며 연기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은아가 안희수의 팔에서 입을 뗀다.
안희수가 오른팔을 붙잡고 인상을 찌푸린다.
“야! 너 미쳤어? 사람을 진짜 물어?”
이어서 이동주가 외친다.
“난 머리카락 다 빠졌어! 썅!”
연기가 끝난 순간 은아는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선배님들! 연기에 몰두해서 그랬어요.”
감독의 지시대로 한 은아가 미안하단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동주와 안희수는 스태프들이 보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은아를 몰아세웠다.
“죄송? 너 일부러 이런 거지!”
“이거 흉 지면 니가 책임져! 고소할 거야!”
그런데 그때였다.
나형준 감독이 두 여배우의 말을 씹어 버리며 은아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이야~ 유은아. 소심해서 이런 연기는 아예 못할 줄 알았는데 제법이네. 앞으로도 잘 부탁하자?”
그 순간 눈치를 보던 스태프들도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유은아. 연기 잘하네!”
“대박이다! 유은아!”
“이야~ 완전 한예림인데?”
스태프들까지 나서 나형준 감독의 말에 맞장구를 치자 이동주와 안희수는 더 이상 따질 수가 없었다.
은아도 이동주와 안희수에게서 고개를 돌린 뒤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고개를 돌려 인사한다.
“감사합니다!”
은아가 주목을 받게 되자 이동주와 안희수는 마땅히 더 말도 못 한 채 그대로 몸을 홱 하고 돌려 버렸다.
최한종 실장이 날 향해 항의를 해왔지만 난 모른 척 어깨를 으쓱였다.
나형준 감독이 바란 대로 은아는 그저 제대로 눈이 돌아간 연기를 보여줬을 뿐이니까.
잠시 후.
연기를 마치고 돌아온 은아가 날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린다.
마치 이 구역의 진정한 미친 X이 된 것처럼 말이다.
난 그런 은아에게 스태프들과 똑같이 환호를 보냈다.
“최고였어 은아야.”
코앞에서 내게 환호를 받은 은아는 겸손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고마워요 오빠 덕분이에요.”
“내 덕이라니. 네가 잘한 거지.”
“아니에요. 오빠가 아까 미리 연습시켜주지 않았으면 저 절대로 못 했을 것 같아요.”
“그래 알았어. 그러니까 다음 씬도 잘해보자?”
“예!”
난 은아에게 시원한 생수를 건네며 곧장 다음 씬 연기를 준비시켰다.
미래의 황룡영화제 단골 최우수상 수상자의 성공적인 첫발을 축하하며 말이다.
* * *
나형준 감독은 은아 연기에 대한 믿음이 생기자 곧장 다음 씬 촬영을 시켰다.
다만 이동주와 안희수는 은아와 싸우면서 뺨이 붉어지고 머리가 다 헝클어진 터라 두 사람에겐 휴식을 취하라고 하고 은아는 조윤정과 단둘이서 연기하는 씬을 촬영했다.
그런데 은아가 조윤정에게 뒤지지 않는 연기력을 보이자 스태프들 대부분이 호감 어린 시선을 보이고 있다.
‘이런데도 은아에 대해서 악성 루머를 퍼트린다고?’
아무리 이 업계에서 루머가 심하게 돌지만 이 정도 호의적인 분위기에서는 ‘눈치’라는 걸 살핀다.
그렇다면 이건.
악성 루머를 흘리는 스태프가 에이스 엔터 쪽 사람에게 돈을 받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때였다.
세트장 입구 쪽에서 최은선 조감독이 외친다.
“정 팀장님. 밥차 왔대요~”
현재 시각 오후 12시 20분.
체리블라썸의 팬클럽 회장단인 횡성 4인방이 밥차를 끌고 왔다는 소식이다.
이어서 세트장 안으로 성지연과 한꽃님이 먼저 들어온다.
박한별과 양지우는 밥차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다들 식사하고 하세요~”
잠깐 촬영을 멈추고 콘티를 보던 나형준 감독이 웃으며 말한다.
“얘들아! 밥들 먹고 하자!”
“예~~”
스태프들은 장비를 그 자리에 내려다 놓고 날 지나치며 저마다 감사를 해온다.
“정 팀장. 잘 먹을게.”
“제작비에 밥차에 아주 케어가 끝내 주는데?”
“연기도 잘하지~ 이런 든든한 기획사도 있지. 은아가 우리 영화의 보배네 보네.”
“감사합니다.”
난 식사 차로 향하는 스태프들에게 연신 인사를 하며 그들의 안색을 살폈다.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려봤지만 내 눈앞을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악성 루머를 퍼트릴 사람은 없었다.
‘여긴 없는 것 같은데······.’
그때 백희영 팀장으로부터 까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백희영 팀장 : 팀장님. 빨리 제2 분장실로 좀 와주세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은아에 대해서 루머를 퍼트리려는 거 같아요.]
범인을 찾은 모양이다.
난 그 즉시 범인이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조금 전 은아가 메이크업하던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누군지 몰라도 절대 가만 안 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