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7화
487. 말을 갈아타다 1
[실시간 검색어]
1. 정유진 멧돼지
2. 화란전 멧돼지
3. 정유진 낙마
실시간 검색어 1위.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유진이의 이름이 올라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멧돼지란 관련어가 함께 붙어 있었다.
그걸 보고 웃었더니 유진이가 툴툴거린다.
“웃지 마요 오빠!”
“미안.”
다급히 입을 가렸으나 내 웃음소리를 듣곤 스태프들이 고개를 돌린다.
“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뭐가 그리 재미있는데?”
유진이가 화들짝 놀라서 손사래를 친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유진이의 계획은 이내 실패로 돌아갔다.
통영에서 막 올라와 식사 자리에 낀 미소가 실시간 검색어가 왜 이렇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유노 삼촌. 왜 우리 엄마가 멧돼지예요?”
“아 그게······.”
그제야 스태프들이 저마다 폰을 꺼내 확인한다.
한 손에는 멧돼지 고기.
다른 한 손에는 폰을 들고서 다들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린다.
“푸훕.”
“에이 그래도 검색을 이렇게 하는 건 좀 심했다.”
“멧돼지가 왜? 맛만 좋은데!”
“크훕.”
유진이는 모든 걸 포기한 표정으로 테이블에 머리를 콩하고 처박았다.
“난······ 끝났어.”
그러자 미소가 황급히 엄마를 달래기 시작한다.
“아잉~ 엄마. 미안. 내가 잘못했어. 힘내. 응?”
‘그나저나 최 기자님이랑 장 기자님은 왜 기사 타이틀을 이렇게 해서는······.’
실시간 검색어가 이렇게 뜬 건 내가 제보한 기사가 연예면 1위와 2위에 올라와 있기 때문이었다.
[<화란전> 촬영 현장에 나타난 멧돼지. (작성자 : 스타 특종 최소혜 기자)]
– 경주 <화란전> 세트장에서 갑자기 초대형 멧돼지가 나타나 배우들을 습격했다.
-정유진은 말에서 낙마했지만 매니저의 도움 덕에 다친 곳은 없었으며······.
(댓글 : 1232개)
최소혜 기자의 기사는 그나마 정상적이다.
하지만 장문기 기자는 기사에 호그질라(hogzilla)의 사진을 첨부해 놓았다.
호그질라(hogzilla)라는 건 멧돼지와 고질라를 합친 합성어인데 장문기 기자 기사에 첨부된 사진은 트럭만큼이나 커다란 놈이었다.
덕분에 기사의 댓글이 폭발하고 있었다.
[정유진! 집채만 한 초거대 멧돼지와 조우! (작성자 : 주간 스타 장문기 기자)]
-정유진. <화란전>의 촬영장에서 만난 초거대 멧돼지로 인해 아찔한 순간! (참고 사진) (댓글 : 7732개)
-삼겹살매니아 : 미친 이런 괴물이 한국에 있다고?
-USS 스타쉽 : 우리집 황소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데?
-먹방BJ 임꺽정 : 오늘 먹방 라이브 방송은 멧돼지 구이입니다. (링크) ······.
‘하여간 이 양반. 사기꾼 기질이 농후하단 말이야.’
참고 사진에는 깨알 같은 폰트로 [미국에서 잡힌 호그질라]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기사를 대충 훑어보는 대중들은 <화란전> 현장에서 잡힌 놈으로 오인하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그녀를 달래주기 위해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유진아.”
유진이가 힘없이 대답한다.
“네······.”
“조금 있으면 실검 순위 바뀔 거야. 그러니까 기운 내고. 자 고기 좀 먹자.”
젓가락을 내밀었지만 유진이는 힘이 없다며 받으려고 하질 않았다.
“순위에 계속 있을 거 같은데요······.”
유진이가 풀죽은 목소리를 낸다.
결국 난 말로 회유하는 걸 포기했다.
대신 유진이의 입에 쌈을 넣어주기로 마음먹었다.
난 우선 상추를 펴고 깻잎을 얹었다.
그 위에다 노릇노릇 잘 구워진 멧돼지 삼겹살을 올리고서 밥까지 한술 얹어 쌈을 쌌다.
그리고는 주먹의 반 정도 크기로 예쁘게 싼 쌈을 유진이의 입에다 내밀었다.
“유진아. 자. 아~ 해. 우리 유앤미 팬클럽 애들이 실검 순위 내린다니까 걱정하지 말고. 자. 아~”
여전히 테이블에 머리를 대고 있는 유진이가 입 앞에 놓인 쌈을 향해 마지 못해 입을 쩍하고 벌린다.
그 틈에 난 유진이의 입안으로 쌈을 밀어 넣었다.
우물우물.
“맛있지?”
유진이가 야무지게 쌈을 씹으며 대답한다.
“으음······ 눼에~”
목소리에 약간의 기운이 실리는 것 같다.
난 곧바로 다시 한번 쌈을 싸서 유진이의 입 앞에 내밀었다.
이번에는 콩가루와 특제 소스를 묻혀서.
“자 하나 더 먹어. 이건 콩가루 묻힌 거야.”
“눼에~”
우물우물.
입 앞에 가져다 대는 족족 유진이가 쌈을 씹어 먹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쌈무······.”
“어 그래.”
“이번에는 생마늘도요······.”
“어.”
“파채는 없어요?”
“없긴.”
“참깨 소스도······.”
“오케이.”
그런데 주문대로 쌈을 싸주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이 정도면 고개를 들고 밥을 먹어야 하는데 유진이는 여전히 고개를 푹 처박고서 얻어먹기만 한다.
더군다나 내가 싸주는 쌈 말고도 미소가 싸주는 쌈도 먹고 있는데 말이다.
“엄마. 자~ 아~ 해. 이거 먹고 힘내 엄마!”
미소가 싸준 쌈은 내가 싼 쌈의 2배 크기였다.
유진이가 입을 크게 벌리더니 한입에 받아들인다.
“아~”
일순간이지만 유진이의 얼굴이 밝아진다.
하지만 입안의 고기가 사라지면 다시금 세상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
그 순간 알아차렸다.
‘어디서 잔머리를!’
처음엔 몰라도 중간부터는 더 많은 고기를 먹고 싶어서 일부러 이러는 게 틀림없다.
그래서 난 이번 쌈에다가는 와사비 쌈무를 다섯 개를 겹친 뒤 파채 양파 그리고 익힌 마늘만을 담아 유진이의 입에 넣었다.
“자. 아 해~”
이번에도 유진이가 아무런 의심 없이 쌈을 받아먹었다.
오물오물.
그때였다.
유진이가 테이블에서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두리번거린다.
“오 오······오빠! 무무무물! 아니 우유! 우유!”
난 테이블 위에 있는 작은 딸기 우유팩을 내밀었다.
유진이가 떨리는 손으로 우유팩을 깐다.
“아아아아······.”
유진이가 비명을 지르며 떨리는 손으로 몇 번 만에 겨우 우유팩을 까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유진이는 그대로 우유를 원샷 해버렸다.
“하아~ 죽는 줄 알았네.”
“그러길래 왜 잔머리를 굴려?”
유진이가 씨익 웃는다.
‘이미 배부르게 먹었지롱~’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하여튼 쓸데없는 데 연기력을 낭비하는 거로는 대한민국 최고인 것 같다.
* * *
어제 멧돼지가 나타나서 미뤄졌던 촬영은 충분한 휴식 후 컨디션을 회복한 배우들의 열연 속에 무사히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유진이는 어제의 돌쇠가 아니라 쌍둥이 말인 쉐도우를 타고 촬영을 하고 있다.
앞으로 세 씬 정도만 더 찍으면 오늘 촬영이 끝나기에 먼저 카트를 타고 내려와 대기 천막에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화란전>은 오늘 촬영이 끝나면 모래 저녁때나 촬영을 하기에 서울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진성준 전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정 팀장님이 주신 정보가 틀리지 않았습니다. 진명규 부회장이 방금 을왕리에서 여배우 안유현 씨를 만났습니다. 지금 추적팀이 계속 따라다니는 중이고요.
드디어 진명규 부회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 밤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관망만 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정 팀장님 오면 그때 같이 대처를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전화를 끊은 난 곧장 오늘 자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2]
[날짜 : 2020년 12월 11일]
-PM 10:00 <주간 스타> “을왕리 음주 교통사고. 진성그룹 후계자 A 씨 B 양과 단둘이 밀회? 단독 취재!”
역시나 잠시 후 진명규 부회장이 사고를 일으킨다는 내용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하지만 이 기사는 진성의 법무팀과 경찰 그리고 ‘주간 스타’가 합세하여 덮어버리게 된다.
진명규 부회장의 비서실 소속인 박희준 팀장과 안유현의 매니저 이규한이 죄를 대신 뒤집어쓰면서 말이다.
그래서 진성준 전무는 그 일을 기사로 터트리려고 사람을 붙여 놓은 상황이다.
하지만 난 거기다 한 가지 폭탄을 더할 생각이다.
대신 죄를 뒤집어쓰는 박희준 비서 팀장을 설득해서 말을 갈아타게 만들고 그가 비서실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걸 제보하도록 말이다.
‘내일쯤 만나 봐야겠군······.’
내일이면 이미 원치 않게 진명규 부회장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있을 때.
박희준 팀장을 설득하기엔 그때가 딱이었다.
마저 짐을 챙기려고 폰을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발신자 : 발신자 표시 제한]
‘누구지?’
난 보통은 발신자 제한을 건 전화는 받지 않는 편이다.
찌라시 기자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진성준 전무와의 통화를 마친 직후.
혹시 진성준 전무 쪽 사람들이 연락했나 싶어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런데 전화기 너머에서는 전혀 생각지 못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진성그룹 부회장실에서 일하는 박희준 팀장이라고 합니다.
조금 이따가 진명규 부회장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는 박희준 팀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갑작스러운 전화에 놀랍긴 했지만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다.
“왜 전화하셨습니까?”
-잠시 뵙고 말씀드릴 수 있을까요? 여기 지금 <화란전> 촬영장입니다.
“촬영장이라고요?”
-예. 세트장 주차장에 흰색 미니버스 옆에 차를 대놨습니다.
박희준 팀장은 간곡한 어조로 꼭 좀 봤으면 좋겠다고 거듭 부탁을 해 왔다.
‘이것 봐라?’
안 그래도 서울에 가면 내가 회유를 할까 싶었는데 이참에 미리 운을 떼어 놓자 싶었다.
물고기를 낚으려면 떡밥을 미리 뿌려놔야 했으니까 말이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나가겠습니다.”
* * *
난 회귀 전 박희준 팀장과 직접 만나 본 적이 있다.
진명규 부회장이 굴렁쇠 엔터 배우 1실의 조민성 배우를 직접 지목해 광고를 제안했었는데 그때 제안서를 들고 온 사람이 비서실의 박희준 팀장이었다.
홍보실을 통해서 들어온 광고 제안이 아니었지만 진성그룹 부회장의 제안이었기에 조민성 배우나 굴렁쇠 엔터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광고를 찍고 입금 날이 되었는데도 10억이 입금되지 않았다.
그 순간 회사는 난리가 났고 난 김동수와 함께 항의차 즉각 박희준 팀장을 찾아갔었다.
당시 박희준 팀장은 별것 아니라며 우리를 달랬다.
-죄송합니다. 절차상 문제로 송금이 늦어졌습니다. 일주일 정도면 처리되니 안심하십시오.
어차피 진성그룹과 하루 이틀만 거래할 게 아니었기에 우린 일주일 뒤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하면서 물러섰다.
그런데 며칠 뒤.
대형 사건이 터졌다.
박희준 팀장이 중간에서 조민성의 광고비를 횡령한 죄로 구속됐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당황스러운 기록은 여전히 내 다이어리에 남아있다.
[에브리데이 V12]
[날짜 : 2021년 2월 13일]
-PM 10:00 <연예계 방방곡곡> 진성그룹 비서실 P 씨 수억대 광고비를 횡령. (회의 내용 : 조민성 배우 10억 미입금. 소송 검토)
그제야 굴렁쇠 엔터는 부랴부랴 소송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난 정확한 사정을 알기 위해 구치소로 향했다.
당시 구치소에서 만난 박희준 팀장은 초췌해진 몰골로 억울하다고 항변했다.
진명규 부회장이 굴렁쇠에게 줄 돈 10억을 도박과 유흥에 탕진한 뒤 자신에게 뒤집어씌웠다면서 말이다.
당시의 난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었다.
하지만 그의 허름한 연립 빌라에 찾아가 가족들을 본 순간 박희준 팀장의 말이 맞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고 아내와 함께 태어난 지 200일 정도 된 쌍둥이들을 키우느라 허리가 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횡령범은 떵떵거리면서 흥청망청 쓰는데 말이다.
하지만 법원은 진명규 부회장의 비서실 직원들이 내민 증언과 증거로 판결을 내려버린다.
징역 4년 형.
그리고 그 징역으로 인해 박희준 팀장의 삶은 무너져 내린다.
아들이 감옥에 가자 노모는 충격으로 쓰러져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고 쌍둥이를 낳은 아내도 남편 옥바라지까지 하다가 스트레스로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난 반드시 박희준 팀장을 포섭해 그 일만은 막아낼 생각이다.
하여튼 그렇게 폰을 보며 과거를 회상하다 보니 어느덧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 한쪽 편.
깔끔한 검은색 정장에 회색 코트를 입은 박희준 팀장이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다.
“안녕하십니까. 진성그룹 비서실 4팀장 박희준이라고 합니다.”
올해 38살인 박희준 팀장이 날 보자마자 명함을 내밀며 인사를 한다.
잠시 후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모르고서 해맑게 웃으면서.
나 역시 내 명함을 내밀며 인사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직접 오셨습니까?”
주저주저하던 박희준 팀장이 말한다.
“실은 저희 부회장님께서 전하라 하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말씀하세요.”
박희준 팀장이 슬쩍 주변을 둘러본다.
“저기······ 여기선 곤란하고 근처 카페에서라도 가서 이야기하면 안 되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여기서 촬영이 끝나면 바로 서울로 가봐야 해서요. 그냥 바로 이야기해 주십시오.”
박희준 팀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진성준 전무님과의 관계를 끊어주셨으면 합니다.”
“관계를 끊으라뇨?”
“그날 보셨다시피 진명규 부회장님과 진성준 전무님의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괜히 로열 패밀리의 싸움에 끼지 마시고 물러나시는 게 어떻습니까? 대가는 충분히 지급하겠습니다.”
생각보다 일이 재미나게 돌아간다.
박희준 팀장이 내게 말을 갈아타라고 권유할 줄이야.
“그 제안. 부회장님이 직접 하신 겁니까?”
“예. 초면에 좀 무례했던 것 같다면서 제게 잘 사과하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가 아는 진명규 부회장이라면 회유는 해도 절대 사과할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건 진명규 부회장의 오른팔인 최형운 비서실장의 지시가 확실했다.
어차피 응하지는 않겠지만 상대가 생각하는 내 가치(?)가 궁금했다.
“대가는 뭡니까?”
내가 조건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했는지 박희준 팀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런데 박희준 팀장의 입에서 나온 조건은 너무도 터무니없었다.
“현금 3억을 현찰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기존 계약도 다 지켜 드리고 앞으로 진성그룹의 부회장님이 주는 특혜를 다 누리게 해드리겠습니다.”
웃기는 소리였다.
3억을 받는다면 자연스레 진성준 전무와의 계약도 파기된다.
그리고 부회장이 준다는 특혜는 그저 허울 좋은 말뿐이다.
즉 진명규 부회장 측은 고작 3억이라는 가치를 내게 매겼다.
능구렁이에다 쫌생이라니.
더는 들을 필요가 없었다.
‘자 그러면 이제 떡밥을 던져볼까?’
난 박희준 팀장을 보며 흔들릴 수밖에 없는 제안을 꺼냈다.
‘묻고 더블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