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3화
473. 진성그룹 3
진명규 부회장이 다시 한번 외친다.
“왜 대답이 없어? 레시피를 준다는 놈이 너냐고 물었잖아!”
편을 정한 난 눈도 끔뻑하지 않고 대답했다.
“예. 제가 레시피를 제공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라도 됩니까?”
그 순간 진명규 부회장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린다.
“뭐? 이 새X······ 너 지금 뭐랬어?”
대부분의 사람은 진명규 부회장을 향해 고개부터 숙였을 거다.
진성그룹은 재계 25위의 거대한 재벌 집단인 데다 진명규 부회장은 차기 회장으로 가장 유력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난 눈도 끔뻑하지 않고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제가 진성의 사람은 아니지만 그게 뭐가 왜 문제가 되는 겁니까? 부회장님만 하더라도 일본이나 미국 쪽 라이센스를 받아서 위탁 생산한 과자나 음료수도 있지 않습니까? ‘스위트 봉봉’만 해도 그렇고요.”
진명규 부회장이 진성 식품의 대표일 때 일본에서 라이센스를 받아 만든 ‘스위트 봉봉’ 시리즈 상품이 있었다.
하지만 코코아 베이스의 탄산음료인 ‘스위트 봉봉’은 한국 사람들의 입맛에 맞지 않아 대실패를 맛봤었다.
그때의 일을 언급한 순간 진명규 부회장의 얼굴이 붉어진다.
“너 너 이 새X가 감히······”
화를 내는 그는 회귀 전 내게 악담하던 그때의 모습과도 똑같았다.
-딴따라 새X들을 뒤치다꺼리하는 놈이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어디서 그딴 말버릇이야?
-역시 배우 나부랭이들은 분위기 파악을 못 해요. 오냐오냐해주니까 광고주 무서운 걸 모르고. 야 매니저 니가 대신 좀 맞자.
제멋대로에 내 스타들을 아랫사람 취급하던 진명규 부회장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런데 그때였다.
내가 대차게 맞서자 보고만 있던 진성준 전무도 내 앞을 가로막고 나선다.
“부회장님. 여기 정 팀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도 부.회.장.님처럼 자사의 제품보다 더 나은 제품을 발견해서 라이센스 계약을 맺었을 뿐입니다!”
진성준 전무가 부회장님이란 말에 힘을 줘서 말한다.
그때 진명규 부회장 곁에 있던 비서가 귓속말로 뭔가를 속닥인다.
순간 진명규 부회장이 진성준 전무를 노려보며 외친다.
“야. 진성준! 그건 다르지! 난 일본과 미국의 대기업을 파트너로 삼은 거고······ 넌 인마. 일개 매니저 따위를 파트너로 받아들인 거잖아!”
“파트너의 덩치가 제품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뭐?”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자 지켜보는 임원과 연구원들이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한다.
그때 진아람 이사가 끼어들었다.
“부회장님. 사람들 보는 눈도 많은데 위층으로 올라가셔서 이야기하시죠.”
보는 눈이 많다며 진아람 이사가 상황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오히려 타는 불길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고 말았다.
아까부터 진아람 이사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던 진성 호텔&리조트의 진명희 대표가 나섰기 때문이다.
“어머~ 우리 아람이가 미국물을 먹어서 그런지 버릇이 없어졌네? 어디서 큰 오빠 말씀하시는데 끼어들어? 끼어들긴?”
날카로운 음성에는 독기가 어려 있어 듣는 것만 해도 짜증이 날 정도다.
순간 회귀 전 그녀는 내게 ‘매니저 새끼가 까라면 까지 어디서 말대꾸야?’라고 외치며 귀싸대기를 날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진명희 대표가 얼토당토않게 몰아세우자 진아람 이사가 크게 당황한다.
“아 아니 지금 끼어드는 게 아니라 수습을······”
진명희 대표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야! 진아람. 넌 내가 말했지. 계집애가 나대지 말고 빨리 시집이나 가라고!”
진아람 이사가 얼굴을 붉히며 답한다.
“대표······님. 말씀이 좀 심하신 것 같습니다.”
“심하긴 뭐가 심해! 아빠가 널 이쁘다 이쁘다 하니까 진짜 그런 줄 착각하는가 본데 꿈 깨! 네 앞으로 돌아갈 몫은 없으니까.”
한껏 이복 여동생에게 거친 폭언을 쏘아낸 진명희 대표는 이어서 날 노려본다.
“야 매니저 너도 괜히 까불지 말고 말로 할 때 그쪽이랑 손 털어. 앞으로 진성 쪽 광고 한 쪼가리라도 받고 싶으면!”
경박한 말투와 태도 탓에 더욱 가까이하기 싫은 사람이다.
“죄송하지만 제 배우들은 진성이 아니더라도 찾는 곳이 많습니다.”
“와~ 얘 골 때리는 애네? 야! 너 지금 누가 너한테 손을 내미는지 감이 안 와?”
그때 진명규 부회장이 손을 든다.
“명희야. 잠깐.”
“왜 오빠?”
“이 매니저 새X가 아무래도 개념이 없나 본데 이 기회에 빳빳한 대가리에 개념 좀 탑재해 줘야겠다.”
그와 동시에 진명규 부회장이 날 노려보며 웃는다.
“어이. 매니저. 후회 안 해?”
“무슨 후회 말입니까?”
“이딴 식으로 대가리 빳빳하게 들면 커피 계약은 없던 거로 하는 수가 있어?
“계약서에는 이미 도장을 찍었습니다만?”
“아~ 그래?”
진명규 부회장이 피식 웃더니 진성준 전무를 바라본다.
“야. 진 전무. 이 친구랑 맺은 계약 당장 파기해.”
진성준 전무가 깜짝 놀라 외친다.
“부회장님! 계약서에 이미 도장은 찍었습니다!”
“법무팀 붙여. 그까짓 계약이 뭐라고?”
“안 됩니다. 위약금이 큽니다.”
진명규 부회장이 혀를 차며 말한다.
“야. 그거야 몇 년 끌면서 깎으면 되잖아? 설마 그 정도도 못 해?”
어이없는 지시를 내린 진명규 부회장은 이어서 연구소장을 쳐다본다.
“정 소장.”
정대윤 연구소장이 고개를 숙인다.
“예.”
“이 친구가 받은 레시피에서 조금 변경해서 새 제품 만들 수 있지? 우리 연구소. 그 정도 실력은 되잖아?”
이렇게 대놓고 계약을 깨면서 레시피를 도둑질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것도 계약 당사자 앞에서.
당황한 연구소장이 내 눈치를 보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그 그러면 소송 걸립 겁니다.”
“그걸 왜 정 소장이 걱정해? 그런 일이라면 법무팀이 알아서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무리 그래도 그건······”
정대윤 소장이 온몸으로 싫다는 의사를 드러낸다.
순간 진명규 부회장이 싸늘한 표정을 짓는다.
“요즘 왜 이렇게 내 말에 토다는 새X 들이 많지? 야 정 소장! 소장 자리에 앉자마자 짐 싸고 싶어?”
“부 부회장님.”
“잘 생각해. 그쪽 혼자 짐 싸는 게 아니라 커피 담당하는 부서 직원들 모두 싸그리 갈아버릴 거니까. 아니다 아예 음료 담당하는 애들까지 싹 갈아치워야겠군. 고작 커피 하나 못 만들고 외부 레시피를 받아오는 무능한 놈들이니까.”
진명규 부회장의 비열한 지시에 정대윤 소장이 눈을 질끈 감는다.
따르지 않는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부하 직원들의 목까지 날아가기 때문이다.
진성준 전무가 나서려고 했지만 난 그를 말리며 대신 나섰다.
이런 개싸움은 내가 더 잘하기 때문이다.
난 짧게 심호흡을 하고 진명규 부회장을 노려봤다.
“부회장님. 제 레시피를 빼돌려서 커피를 만들면 제가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가만히 안 있으면 어쩔 건데? 우리 진성이랑 소송전이라도 하려고?”
“못할 것도 없죠.”
진명규 부회장이 키득거리며 웃는다.
“왜? 여론의 도움이라도 받아보려고? 꿈 깨. 언론이 너 같은 놈의 기사를 써 줄 거 같아? 우리 진성이 일 년에 뿌리는 광고비가 얼만 줄이나 알아?”
“누가 언론의 도움을 받는답니까?”
“그러면?”
“LT 그룹 법무팀의 도움을 받을 생각입니다.”
진명규 부회장이 고개를 갸웃한다.
“LT 그룹 법무팀?”
“예. 오늘 계약이 깨지면 전 바로 LT 음료를 찾아가 레시피를 넘길 겁니다. 진성 연구원들의 입맛도 사로잡았는데 뭐 LT 음료라고 다르겠습니까?”
LT 음료는 RTD 커피 시장에서 1위인 업체.
더군다나 그룹 순위로도 LT는 5위로 진성그룹보다 20계단이나 높다.
그리고 진성그룹의 법무팀은 LT 그룹의 법무팀에 비하면 3배 이상의 차이가 나고.
그제야 진명규 부회장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설마 LT 그룹이 여기서 튀어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까닭이다.
“이 이 새X가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
“못 믿으시면 직접 보여드리는 수밖에 없겠네요.”
난 황룡영화제 때 신종기 대표에게 LT 음료 신종민 대표의 전화번호를 받았었다.
언제든 정 커피를 사업화할 생각이 있다면 자신의 동생에게 연락해보라고 말이다.
그리고 만약 신종민과의 전화가 불편하면 자신에게 연락하라고도 했다.
난 안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손에 쥐었다.
그 순간 진성준 전무가 다급히 진명규 부회장을 말린다.
“부회장님! 여기 정 팀장은 LT 엔터 신종기 대표님과 막역한 사이입니다.”
진명규 부회장이 씩씩거리며 말한다.
“구라까지마 새X야! 일개 매니저 새X가 그 깐깐한 신 대표와 막역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지!”
“진짜입니다. 부 회장님!”
“시끄러워!”
진명규 부회장이 씩씩거리며 날 노려본다.
“전화해봐! 빨리!”
난 태연한 표정으로 신종기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 폰으로 전화를 걸자 신종기 대표가 전화를 받는다.
-여어~ 정 팀장. 무슨 일인가?
“대표님. 정 커피 사업화하려면 연락하라고 하셨던 거 기억하십니까?”
-당연하지. 내가 말했는데 잊을 리가 있나. 왜? 설마 그거 상업화하려고?
“예. 실은 진성이랑 먼저 계약했는데 이쪽에서 오늘 계약 파기를 할 것 같아서요.”
-하하하. 그래? 그거 잘 됐군. 아 혹시 위약금 같은 거 있으면 말해. 내가 내줄게.
“대표님. 이거 스피커폰입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근데 정 커피를 내치는 걸 보니 이제 진성도 한물갔나 보군. 돈이 될 게 뻔한 걸 내쳐?
진명규 부회장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진짜로 내가 LT 엔터의 대표와 이렇게 친할 거라고는 믿지 못한 까닭이다.
“씨X······”
그때 진명규 부회장이 당황해 혼잣말을 내뱉었다.
신종기 대표가 그 소리를 듣고 묻는다.
-옆에서 누가 욕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누구야?
“진명규 부회장님입니다.”
순간 생각지도 못하게 신종기 대표가 버럭하고 소리를 지른다.
-이 새X가! 어디서 어른이 말하는데 욕질이야? 야. 진명규. 너희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쳤어?
다른 그룹이라곤 해도 신종기 대표 역시 로열패밀리.
서로 왕래가 잦은 터라 신종기 대표는 마치 삼촌이 조카를 탓하듯 언성을 높였다.
“말씀이······ 좀 심하십니다. 신 대표님.”
-심한 소리 안 들으려면 네가 먼저 겸손해야지! 안 그래?
진명규 부회장이 잔소리를 듣게 되자 곁에 있는 진명희 대표와 임원들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개 매니저를 밟으려다가 진성그룹 부회장의 체면이 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진명규 부회장은 이를 빠드득 갈며 고개를 숙였다.
진성그룹의 회장이 아닌 이상에야 자신보다 띠동갑 차이가 나는 신종기 대표를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신 대표님.”
진명규 부회장이 억지 사과를 하자 그제야 신종기 대표도 언성을 낮춘다.
-뭐······ 나도 말이 좀 심한 것 같군. 조만간에 우리 호텔 쪽에서 밥 먹으면서 진성이랑 합작 프로젝트 하나 하던 거 이야기나 하자고.
“예. 신 대표님.”
신종기 대표가 이어서 내게 말한다.
-거기 상황 안 봐도 뻔히 그려지니까 여차하면 전화해. 동민이한테 연락해서 진성 식품이랑 최대한 비슷한 조건에 맞춰줄게.
“알겠습니다. 계약 파기되면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한번 들어와. 다음 영화는 나 준다고 했잖아. 기억나지?
하루를 주연으로 할 <해피 & 해피>의 영화화는 LT 엔터에서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지리산>이 개봉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날 쪼고 있었다.
“조만간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수고!
“예. 대표님.”
달칵.
전화를 끊은 난 천천히 진명규 부회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황과 분노가 한데 섞인 얼굴이 날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일개 매니저라고 부르는 내게 망신을 당한 탓이다.
순간 진명규 부회장이 몸을 부르르 떨다 곁에 있는 비서에게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야 최 비서! 회장님이랑 몇 시에 미팅 잡혀 있지?”
당황한 비서가 말을 버벅거리다가 진명규의 눈을 보고 다급히 외친다.
“아 그게 저······ 지금 바로 가셔야 합니다.”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없는 약속도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럼 뭐 하고 있어! 당장 앞서지 않고!”
“예. 예. 이쪽으로······”
할 말이 없어지자 괜한 곳에 화풀이하는 진명규 부회장이었다.
비서가 엘리베이터 하강 버튼을 연달아 톡톡 두드린다.
8층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내려온다.
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안에서 있던 직원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인다.
“안녕하십니까 부회장님.”
진명규 부회장이 미간을 찌푸린 순간 진명규 부회장의 비서가 내리라고 다급히 손짓한다.
“내려!”
직원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린다.
그제야 진명규 부회장이 씩씩거리며 텅 빈 엘리베이터로 오른다.
그 뒤를 이어 임원들과 진명희 대표가 엘리베이터로 들어간다.
띵.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힌 순간 진성준 전무와 연구원들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한다.
“이야! 우리 정 팀장님. 대단하신 분이셨네!”
“하아······ 덕분에 살았습니다.”
“죽는 줄 알았네.”
연구원 중 일부는 다리가 후들거린다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사람마저 나오고 있었다.
상황 종료였다.
하지만 진성그룹의 후계 전쟁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 * *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난 7층 시음실 앞 복도.
진성준 전무가 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예. 예. 회장님.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진성준 전무의 표정이 밝았다.
“정 팀장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LT 음료에 레시피를 뺏길 뻔했다고 하니 회장님께서 노발대발하셨습니다. 계약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겁니다.”
그건 다행이었지만 진명규 부회장과 그의 동생 진명희의 성격상 앙심을 품었을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아마도 내게 보복을 생각하고 있을 거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하나.
진성그룹의 후계 다툼에서 진성준에게 힘을 더욱 실어주는 일이다.
어차피 서로에게 앙심을 품었으니 남은 건 힘 싸움뿐.
난 각오를 다진 뒤 진성준 전무를 보며 말했다.
“전무님. 잠깐 따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진성준 전무가 고개를 끄덕인다.
“예. 제 방으로 올라가시죠.”
진성준 전무가 앞서고 진아람 이사가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그리고 난 그 뒤를 따라가며 폰을 만지작거렸다.
내 다이어리에는 진명규 부회장에 관한 일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진명규 부회장. 당신 사람 잘못 건드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