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1화
471. 진성그룹 1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전 진아람이라고 해요.”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에 흰색 정장에 연한 회색 코트를 입은 진아람 이사가 로비 소파에 앉아 있는 내게 방실방실 웃으며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하늘 높은 걸 모를 정도로 오만한 진성의 로열패밀리가 먼저 다른 이에게 웃으며 손을 내밀다니.
순간 진성 식품 연구소의 넓은 로비에 있는 직원들의 시선이 내게로 꽂히는 게 느껴진다.
진성그룹의 막내딸이라는 백그라운드에 하버드 MBA 출신에다 미스코리아를 뺨칠 정도의 외모 키 170cm 정도의 모델 체형이다 보니 내심 그녀를 마음에 둔 젊은 직원들이 많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내게 왜 이러나 싶어 생각에 잠긴 사이 진아람 이사가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뭐예요? 악수 안 해요?”
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가늘고 긴 손을 맞잡았다.
“아 안녕하십니까. 굴렁쇠 엔터의 정윤호라고 합니다.”
순간 다시 한번 수십 명이나 되는 직원들이 날 째려본다.
그 광경을 본 진아람 이사가 작게 속삭였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저 사람들은 정 팀장님이 얼마나 대단한 줄 모르는 멍청이들이니까.”
톡 쏘는 말투가 매력적이긴 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녀는 나와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로열패밀리였으니까.
“과찬이십니다.”
“과찬 아닌데요? 그리고 우리 오빠랑 계약하고 나면 로비에 있는 직원들 연봉 다 모아도 정 팀장님에게 못 미칠 텐데요. 뭘.”
친오빠인 진성준 전무와는 사이가 좋은 탓에 내 이야기를 들었나 보다.
“그나저나 궁금했어요. 우리 오빠가 이렇게 칭찬한 사람이 없었거든요.”
진아람 이사는 내 손을 잡은 채로 자신의 오빠가 해준 이야기를 거침없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손을 잡은 시간이 길어진다.
난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그녀의 손에서 내 손을 빼냈다.
진아람 이사가 피식하고 웃는다.
“그나저나 일 보러 오신 거 같은데 안 가십니까?”
진아람 이사가 곁에 있는 최희선 비서를 쳐다본다.
“최 비서. 나 급한 일 있어?”
진아람 이사와 동갑인 최희선 비서가 고개를 젓는다.
“식음료 사업 때문에 박 이사님 미팅 약속 잡혀 있는데······ 미룰 수 있습니다.”
“아 그래? 그러면 미뤄. 정 팀장님과 함께 오빠부터 만나 본 후에 볼 테니까 박 이사님은 기분 상하지 않게 잘 좀 다독여 줘.”
“예. 알겠습니다.”
최희선 비서가 잠깐 거리를 벌리며 폰을 집어 든다.
그 사이 진아람 이사는 내 옆에 털썩 주저앉은 뒤 로비에 멈춰 선 직원들에게 호통을 친다.
“뭐야? 다들 안 바빠요?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거예요?”
그제야 로비에 있던 직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후 진아람 이사는 태블릿을 켜고 콧노래 부르며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왜 이래. 이 여자?’
그녀가 원래 어떤 성격인지 알고 있었기에 이런 친한 척이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왜 친한 척하냐고 따지며 물을 수도 없었다.
별수 없이 콧노래 부르는 그녀를 옆에 둔 채 나 역시 연예 기사 면을 체크하며 연예계 동향을 살폈다.
[KBC <정희왕후>의 여주인공 소이영. 촬영 장면 공개!]
[KBC <정희왕후>. 신예 박은진. 도예훈 출격!]
[KBC의 승부수. <정희왕후>. 2021년 최고의 화제작.]
이선창 PD는 내게 한우혁을 뺏긴 이후 <정의왕후>를 홍보하는데 돈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곁에 앉은 진아람 이사의 태블릿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복잡한 재무제표였지만 탑 엔터테인먼트를 혼자서 운영하다시피 했던 나는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세진 리조트]
······
-영업 이익 연간 325억.
순간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세진 리조트라면 분명히 분식 회계를 한 곳인데?’
분식 회계란 쉽게 말해서 적자가 나는 기업을 장부를 조작해 흑자로 탈바꿈해 놓은 것을 말한다.
지금쯤 진성 호텔&리조트에서 세진 리조트를 인수하고 있을 시기였다.
그런데 진성은 세진을 인수하고 나서야 세진의 분식 회계 사실을 알게 된다.
그걸 어떻게 아냐면 당시 세진 리조트의 광고 모델이 배우 3실의 차태훈이었기 때문이다.
난 그 즉시 폰을 꺼내 내 기억이 맞는지를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2]
[날짜 : 2021년 1월 13일]
-PM 03:00 배우 팀 전체 회의. (회의 내용 : 세진 리조트 인수 시 분식 회계 발각. 차태훈 광고비 미입금.)
‘맞네.’
회계사와 변호사가 짜고 완벽히 이 일을 숨긴 탓에 진성은 세진 리조트를 인수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된다.
그로 인해 진성 호텔&리조트의 대표이던 진명희 이사는 무능한 경영자란 소리를 들게 된다.
그리고 세진 리조트의 광고 모델인 차태훈은 1년이 지난 이후에야 광고비의 30%만 간신히 받아내게 되고.
‘이걸 어떻게 한다?’
현재 진아람 이사의 소속이 바로 ‘진성 호텔&리조트’.
내가 아는 사실을 말한다면 이 사태를 막을 수가 있을 거다.
하지만 그걸 언급하는 순간 진성그룹의 후계 싸움에 끼어들 수도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때였다.
진아람 이사가 태블릿에서 눈을 떼고 날 빤히 쳐다보고 있다.
방긋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그녀의 오빠 진성준 전무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순간 진아람 이사가 내게 다정하게 군 이유를 알아차렸다.
진성준처럼 그녀도 역시 내 능력이 필요한 거였다.
그래서 태블릿 화면을 내가 볼 수 있게 슬쩍 기울인 모양이다.
아무래도 오빠에게서 나에 관해 미리 들은 모양인데 남매가 참 대단들 하다.
그러나 의도를 안 이상 장단에 맞춰줄 생각은 없다.
“왜 그렇게 절 보십니까?”
“정 팀장님 보시기에 여기 이 회사 어떨 거 같아요? 지금 우리 회사가 인수하려는 곳이거든요.”
“글쎄요. 전 재무제표 같은 건 전혀 몰라서요.”
“에이~ 거짓말. 오빠 말로는 광고 금액 산정할 때 보니 회사 마케팅팀 전체보다 정 팀장님 혼자가 낫다던데요? 그런 분이 이런 기본적인 재무제표를 못 본다고요?”
이해가 안 간다는 그녀의 말에 뻔뻔하게 대답했다.
“광고에 관해서만 데이터를 읽을 줄 알 뿐입니다. 뭐 한글로 영업 이익. 325억 적힌 건 이해가 가네요.”
“칫 알았어요. 그러면 다시 물어볼게요. 이 회사. 저희 회사가 인수하려는 곳인데 인수하는 게 좋을까요 발 빼는 게 좋을까요?”
난 초롱초롱거리는 눈을 한 그녀에게 말했다.
“글쎄요?”
“에이~ 책임 같은 건 안 물을 테니까요. 말씀 좀 해주세요. 네~에?”
진아람 이사답지 않게 애교까지 피우다니.
그 순간 전화를 끝낸 최희선 비서가 헛기침했다.
“크흠!”
진아람 이사가 고개를 돌린다.
“왜? 정 팀장님이랑 이야기하고 있는데!”
“전무님께서 회의 끝났으니 함께 올라오라고 하십니다.”
“아 뭐야~ 정 팀장님이랑 이야기 잘하고 있는데 이 타이밍에 그걸 말해?”
“보는 눈이 많습니다. 적당히 하시죠?”
진아람 이사가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로비에서 지나가던 직원들이 급히 고개를 돌린다.
“상관없어. 저이들은.”
“안 됩니다. 구설에 오르시면 앞으로 문제가 생기실 겁니다. 그리고 잠깐 저랑 이야기 좀 하시죠.”
“나중에 하면 안 돼?”
최희선 비서가 입을 꾹 다물자 진아람 이사가 투덜거리며 일어난다.
“알았어. 지금 해.”
자리에서 일어난 진아람 이사가 아쉬운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저 곧 따라갈게요. 이따 위에서 봬요.”
“알겠습니다.”
난 짧게 대답한 뒤 보온병이 담긴 무거운 더플백 2개를 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 * *
정윤호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순간 진아람은 방실방실 웃던 표정을 지웠다.
그리고는 무표정하게 묻는다.
“세진 리조트 인수 팀에 우리 사람들 보내서 재무제표 다시 한번 검토해 보라고 그래.”
진아람이 감정 없는 딱딱한 말투로 지시를 내렸지만 최희선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게 원래 진아람 다웠으니까.
“이미 재무제표에 문제가 없다고 검토가 끝난 상황 아닙니까?”
“아니. 정 팀장 표정을 보니 뭔가 있어. 감사팀 꾸려서 서류만 보지 말고 현장에도 나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라고 해.”
최희선이 고개를 갸웃한다.
“조금 지나치신 게 아닐까요? 이미 몇 번을 검토한 일인데요?”
하지만 진아람은 오빠에게서 정윤호가 뛰어난 박수무당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은 상태.
보통 남매라면 이런 이야기를 서로 하지 않았겠지만 진아름과 진성준의 관계는 남들과 달랐다.
어릴 때부터 두 사람을 괴롭히는 배다른 형제들과 싸워야 했기에 둘 사이는 매우 좋은 편이었다.
그 일례로 진아람이 다섯 살 때 이복 남매들이 일부러 사냥개의 목줄을 풀어 놔서 물려 죽을 뻔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오빠인 진성준이 나서서 사냥개에게 물려가면서도 진아람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지켜 냈었다.
이후로도 진성준이 보호해 준 덕에 진아람은 성인이 될 때까지 큰 피해 없이 자랄 수가 있었고.
그러다 보니 진아람은 언제나 자신의 오빠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그래서 현재 진아람은 자기 오빠가 모든 이복 형제자매를 물리치고 진성그룹의 회장이 될 수 있도록 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세진 리조트 인수건의 승패를 알 수 있다면 오빠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이번 리조트 인수 건은 둘째인 진명희 대표가 주도하고 첫째인 진명규 부회장이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 팀장 표정을 보니까 대번에 알겠더라고. 이번 인수에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어.”
물론 정윤호는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지만 진아람의 예리한 눈은 이상함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최희선 역시도 정윤호가 박수무당이란 걸 들었지만 이성적인 그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모시는 진아람을 믿을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저희 쪽 감사팀 전원을 투입하겠습니다.”
“보안 철저히 하고 이상하다 싶으면 우리 쪽 자본과 사람들은 세진 리조트 인수팀에서 뺄 준비해.”
“그러면 인수 취소 쪽으로 잡으실 겁니까?”
진아람이 씨익 웃는다.
“아니.”
“분식 회계가 맞다면 엄청난 손해를 볼 텐데요?”
“피해를 입겠지. 나랑 오빠가 아니라 우리 진성 호텔&리조트의 대표이사이신 진명희 대표님이?”
최희선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설마······ 오판을 저지르는 걸 조장하시겠다는 겁니까?”
“조장이 아니라 방치지. 그리고 어차피 이 정도 인수 건으로 진성그룹은 안 흔들려. 물론 진명희 대표와 큰오빠는 돈을 잔뜩 태웠으니까 타격을 입겠지만.”
어차피 세진 리조트 인수 건은 진성그룹의 둘째 진명희가 주도하는 건이다.
그리고 진명희는 큰오빠인 진명규 부회장을 차기 회장으로 밀고 있다.
그러니 이 인수에 흠이 생기면 경쟁자들을 도태시킬 절호의 기회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작전을 잘 짜서 진명희 대표를 실각시키는 방향으로 플랜을 짜보겠습니다.”
“그래.”
최희선은 인사를 한 뒤 다시 한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 사이 진아람은 올라간 엘리베이터를 쳐다봤다.
“오빠 말대로 참 재미있는 남자라니까?”
재벌가의 후계 하버드 출신의 재원 화려한 외모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진아람을 이렇게 무시한 남자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진아람의 뒤에 있는 진성의 힘을 빌리려고 안달 난 남자들과 달리 일절 바라는 게 없어 보이기도 했고.
잠시 후.
전화를 마친 최희선이 돌아왔다.
진아람이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한다.
“자 그러면 우리도 올라가 볼까? 정 팀장이 뭘 하는지 봐야지.”
“예. 이사님.”
두 사람 역시 정윤호를 따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 * *
진성준 전무를 만나기로 한 7층 시음실 입구에 도착했다.
진성준 전무와 여진수 비서 말고도 30명 정도 되는 연구원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연구원들 맨 앞에는 그다지 곱지 않은 표정의 연구소장 정대윤이 서 있다.
“인사들 하시죠. 이쪽은 식품 연구소 정대윤 소장 그리고 이쪽은 굴렁쇠 엔터 정윤호 팀장님.”
“아. 예.”
“이번에 새로 진성 식품 연구소를 책임지게 된 정대윤이라고 합니다.”
회귀 전에는 나이가 지긋한 박형진이 연구소장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지금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모두와 인사를 마친 난 준비해 온 더플백 2개를 내려놓았다.
쿵.
각각 보온병 15개씩 들어 있다 보니 하나의 더플백 당 30kg 정도의 무게라 둔탁한 소리가 난다.
정대윤 소장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게 전부 커피입니까?”
“예. 에스프레소 10종류 카페라떼 10종류 아메리카노 10종류입니다.”
정대윤 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에 있던 직원들을 부른다.
“최 팀장 박 팀장. 두 사람씩 이거 들고 가서 시음용 컵에 따라놔 줘. 한 종류당 10개씩 따라놓고.
“예.”
연구원 네 명이 30kg 되는 더플백을 손에 든 순간 난 시음에 필요한 조건을 말했다.
“커피들은 각각 55도 22도 6도에 맞춰서 다시 한번 분류해 주십시오.”
정 커피 라이센스 계약을 맺을 때 최종 상품화는 내가 컨펌하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최고의 상품을 만들기 위해 난 처음부터 제품 제작에 관여할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내 부탁을 듣는 순간 정대윤 소장이 놀란 표정으로 날 쳐다보기 시작했다.
내가 말한 온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