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7화
467. 무희의 꿈 4
마치 리플레이 화면을 보는 착각마저 일으킬 만큼 유진이는 연화선 선생님이 춘 진혼무(鎭魂舞)를 그대로 재현해 내고 있었다.
연화선 선생님이 뻗은 손길 움직이는 보폭 그리고 시선 처리 마저 말이다.
그 탓에 연화선 선생님은 유진이의 춤을 보며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유진이 저 녀석. 타고난······ 춤꾼인데?”
그사이 춤 연기에 몰두한 유진이는 점점 더 다채로운 표정을 지으며 움직임을 이어갔다.
두 손을 가슴팍으로 모을 땐 마치 고향 땅으로 돌아오지 못한 병사들의 혼을 불러들이듯 눈물 가득한 얼굴을 짓는다.
그리고 두 손을 위로 뻗을 땐 마치 불귀의 객이 된 혼들을 귀천시키듯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잘하고 있어 유진아.’
감탄이 이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춤사위였다.
그런데 1분 정도 지났을 무렵.
갑자기 유진이의 움직임이 조금씩 달라지기가 시작했다.
시종일관 부드럽게 움직이던 연화선 선생님의 움직임과 달리 유진이의 동작이 점점 격해지기 시작했다.
‘왜 그래? 유진아!’
유진이가 손을 뻗을 때마다 명주 천이 힘차게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맨발로 돌 무대를 돌아다니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그로 인해 뒤를 받치는 두 여배우의 속도 또한 빨라진다.
유진이의 몸에서 열기가 뻗어 나와 모락모락 김을 뿜어내고 있었고 혼을 불태우는듯한 격렬한 춤에 땀방울이 허공으로 비산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유진이의 얼굴엔 안광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철천지원수를 바라보는 듯 말이다.
그렇게 격정적인 춤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유진이는 두 손을 모았다가 하늘로 힘차게 뻗어 올렸다.
투둥~
마지막 대고 소리가 울린 순간 유진이는 그대로 무대 위에 멈춰서 버렸다.
순간 유진이가 허공으로 뻗은 새하얀 명주 천이 일직선으로 솟아올랐다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온다.
털썩.
긴 명주 천이 바닥에 완전히 내려앉자 유진이는 그제야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헉헉헉······”
너무도 놀라운 춤을 보여줬지만 현장에 있는 모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연화선 선생님의 진혼무는 달래고 또 달래서 하늘로 이끌어주는 자애롭고 부드러운 춤.
하지만 유진이가 춘 진혼무는 초반부에선 선생님의 그것과 똑같았지만 후반부는 격정적인 감정을 쏟아 내며 한 명의 복수귀가 된 듯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연화선 선생님이 천천히 유진이에게 다가간다.
연화선 선생님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는데 화가 나서 붉어진 건지 흥분해서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정유진 너······”
연화선 선생님이 유진이를 노려본다.
유진이가 숨을 헐떡이며 대답한다.
“예. 선생님. 헉헉.”
“처음에는 잘하더니 왜 중간부터는 네 멋대로 춘 거니?”
날 선 목소리에 유진이가 짧게 숨을 몰아쉬고 대답한다.
“전 무희가 아니라 배우니까요. 이번 춤은 ‘화란전’ 씬에서 연화 공주의 마음을 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춤에다가 유화 공주의 마음을 한 푼 정도 올려놓았습니다. 실망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스태프들이 경악한 표정을 짓고 한상희와 민규리는 결국엔 사고를 쳤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진이가 인간문화재인 연화선 선생님을 상대로 ‘춤’을 따라만 춘 게 아니라 자신의 해석을 더한 진혼무를 췄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연화선 선생님이 표정을 풀고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세상에. 너 같은 애는 진짜 처음이야. 감히······ 내 춤을 재해석했다고? 호호호.”
예상치 못하게도 연화선 선생님은 세트장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트린다.
유진이가 자신의 춤을 변형했지만 전혀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연화선 선생님은 웃음을 뚝 하고 그치더니 유진이가 바닥에 벗어놓은 옷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조금 전 유진이가 자신에게 해준 것처럼 다가가 유진이에게 옷을 입혀준다.
“그래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주연이면 그런 깡도 있어야지! 거기다 ‘유화 공주’의 마음을 해석한 건 네가 나보다 나은 것 같네. 잘했어!”
연화선 선생님의 극찬이 이어진다.
그제야 유진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니에요 선생님. 선생님께서 보여주셨기 때문에 출 수 있었던 거예요.”
“겸손하기는. 내가 오히려 미안해. 따라 하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완전 잘못 봤어. 내 실수야. 잘했어. 인정! 완전 인정! 청출어람이야!”
역시 연화선 선생님은 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까탈스럽지만 후배들의 열정을 인정할 줄 아는 참된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무튼 덕분에 나도 뭔가 또 깨달은 거 같아. 고맙다 정유진.”
연화선 선생님은 그렇게 유진이를 칭찬한 뒤 뒤에 있는 한상희와 민규리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도 잘했어. 역시 전공자들답더라. 내가 요즘 배우들 재능을 너무 우습게 봤나 봐. 사과할게.”
유진이가 칭찬을 받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한상희와 민규리였지만 연화선 선생님이 두 사람을 칭찬하자 빠르게 감정을 감추고 고개를 숙인다.
“아니에요. 선생님. 선생님께서 손끝과 발끝 하나까지 다 세세히 보여주신 덕이에요.”
“그리 말해주니 이 추운 겨울에 반쯤 벗고 고생한 보람이 있네. 앞으로 우리 잘해보자?”
“예. 선생님.”
그렇게 대화를 나눈 연화선 선생님은 칭찬을 끝내고 고개를 돌렸다.
“오 PD. 이번 작품 안무는 내가 맡을게. 아니 맡겨 줘. 얘들은 꼭 내가 가르치고 싶은데?”
고전 무용 최고의 거장이 도와주겠다는 뜻을 밝히자 오복희 PD가 신이 나서 외친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 순간 서윤지 매니저가 급히 무대 위로 뛰어 올라와 연화선 선생님을 부축한다.
연화선 선생님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괜찮아 얘. 왜 이리 호들갑이야?”
“선생님 건강이 걱정되어서 그만······.”
찬 겨울의 날씨에 속적삼만 입고 무대를 펼쳤기에 서윤지 매니저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빨리 내려가셔서 좀 쉬세요. 감기 걸리시겠어요.”
“알았어 얘.”
연화선 선생님은 서윤지 매니저의 부축을 받으며 무대를 내려왔다.
그 순간 스태프들이 일제히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선생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최고셨습니다 선생님!”
연화선 선생님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손을 흔든다.
“다들 앞으로 잘 부탁할게~”
나 역시 연화선 선생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손뼉을 쳤다.
조금 전 유진이가 춘 카리스마 있는 진혼무가 방송에 나간다면 시청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반향이 있을 테니까.
내 배우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께 이제는 내가 답례를 할 차례가 왔다.
* * *
연화선 선생님의 대기 천막.
난 정 커피가 든 보온병을 들고서 대기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연화선 선생님은 두꺼운 외투를 몇 겹으로 껴입고 난로에 몸을 녹이고 있다.
그때 곁에서 수발을 들던 서윤지 매니저가 날 발견하고 묻는다.
“정 팀장님?”
“아. 선생님이 드실 커피를 조금 더 타왔습니다. 따듯한 걸 드시면 몸이 좀 빨리 풀릴 겁니다.”
보온병을 열자 달콤한 커피 향이 대기 천막 안을 가득 채운다.
이번에는 우유를 타 조금 더 부드러운 커피였다.
“고마워 정 팀장.”
연화선 선생님이 보온병의 컵에 따른 커피를 받아들고 빠르게 들이켠다.
그러자 창백하던 안색에 금세 붉은 핏기가 돌았다.
“하아~ 나 이제 이 커피 없으면 못살 거 같은데 어쩌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선생님께서 드시고 싶다고 하시면 언제든지 타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진짜지?”
“예. 약속드립니다.”
분위기가 훈훈해진 순간 난 서윤지 매니저를 향해 말했다.
“저 매니저님. 잠깐만 선생님과 단둘이 좀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서윤지 매니저는 단칼에 내 요구를 거절했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선생님 컨디션이 좀 별로라서 곤란합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오늘은 이만 나가 주셨으면 합니다.”
연화선 선생님 역시도 서윤지 매니저에게 나가란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현재 연화선 선생님은 뇌종양 초기 증상인 걸 본인도 알지 못하는 상태.
워낙 건강 체질인데다가 그녀를 찾는 곳이 많아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니 오랫동안 건강검진을 계속 미뤘기 때문이다.
‘지금 건강검진을 받으라고 해도 어차피 후계자를 못 찾으면 수술을 안 하실 테니까······ 방법은 하나뿐이군.’
현재 연화선 선생님의 꿈은 뛰어난 후계자를 찾아 무희(舞姬)의 맥이 이어지게 하는 것.
그리고 연화선 선생님이 제일 원하는 후계자는 바로 그녀의 딸 서희주였다.
하지만 딸 서희주의 꿈은 아이돌로 성공하는 것.
어렵겠지만 난 두 사람 모두의 꿈을 이뤄줄 방법이 있었다.
그 방법이 성공하게 되면 아마 연화선 선생님도 수술을 받겠다고 할 게 확실했다.
다만 그 전에 두 사람을 화해시키는 게 우선이다.
난 짧게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선생님. 우연치 않게 선생님의 따님이 아이돌 오디션을 봤다는 걸 들었습니다.”
연화선 선생님이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날 쳐다본다.
의절했다는 딸의 이야기를 꺼내자 미간을 찌푸린다.
“걔가 어디에 있든 내 알 바 아니야.”
“선생님. 다시 한번 생각해주십시오. 희주가 오디션을 본 회사가 좀 저질입니다. 이대로 놓아두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릅니다.”
연예인이 되는 것이 꿈인 서희주는 엄마의 뒤를 잇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의절한 다음 가출하자마자 오디션을 본 상황이다.
오디션을 본 회사는 앙상블 엔터테인먼트.
앙상블 엔터는 20년 정도 경력을 가진 조연 배우인 백재호가 대표로 있는 회사였다.
그런데 올해 53살인 백재호 대표는 TV나 영화를 통해 인자한 중년 배우의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실상은 폭력적인 성격에다 사기 전과도 있어 소속 연예인들의 돈을 갈취하는 것도 꺼리지 않는 사람이다.
다만 방송계에서 워낙 인맥이 좋은 편이다 보니 다들 그와 부딪히는 걸 피했다.
방송국 국장들과 술친구라서 그의 몇 마디로 프로그램에서 퇴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래에 <무희의 꿈>을 영화화해서 돈을 벌게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엄마를 잃은 슬픔에 잠긴 서희주의 도장을 위조해서 말이다.
난 그런 백재호를 그냥 두고만 볼 생각이 없었다.
대표가 사기꾼이라고 말하자 그제야 연화선 선생님도 움찔한다.
“사기······ 꾼이라고?”
“예.”
살짝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능성을 발견했다.
진짜로 딸에 대한 감정이 없다면 무슨 일을 당하든 무감각할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난 더욱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선생님. 현재 희주는 생일이 지나지 않아서 선생님만이 계약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미성년자의 계약은 부모가 취소할 수 있는 거 아시죠?”
연화선 선생님이 날 빤히 쳐다본다.
“근데 대체 정 팀장은 왜 그렇게 내 딸을 신경 쓰지?”
“안타까워서요.”
“안타까워? 뭐가?”
그 순간 회귀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서희주는 어렵게 데뷔하지만 회사의 사기 그리고 팀원들이 친 사고로 인해 제대로 망해버린다.
그나마 서희주는 미모가 꽤 뛰어나고 춤을 잘 추는 편이었기에 완전히 퇴출당하지는 않고 B급 비주얼 연예인으로 MC와 리포터 생활을 하며 살아가게 된다.
자신의 꿈은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로 말이다.
하지만 제일 안타까운 건 하와이로 출장 리포터를 나갔다가 엄마와 화해도 못 하고 영원히 헤어진다는 거다.
그러나 내가 아는 미래의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이건 나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래서 난 서희주의 재능을 언급하며 설득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다큐에서 본 따님은 12살 때부터 선생님의 춤을 따라 추더군요. 제가 볼 때 그 정도 재능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습니다.”
연화선 선생님이 손을 내젓는다.
“됐어. 재능이 있으면 뭐 해? 본인이 싫다는데.”
“아직 세상을 모를 나이가 아닙니까? 제가 잘 설득해 보겠습니다.”
간절한 부탁이 연거푸 이어지자 연화선 선생님이 깊은 고민에 잠긴다.
대를 이어온 춤의 맥이 끊기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딸과 의절까지 했지만 속으로는 걱정을 안 할 리가 없다.
내가 아는 연화선 선생님은 그런 사람이니까.
* * *
결국 연화선 선생님이 약간은 누그러진 태도로 말한다.
“정 팀장한테는 그 고집 센 기지배를 꺾을 자신이 있다는 거야?”
“물론입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연습생들을 겪어온 접니다. 희주 정도야 충분히 설득할 수 있습니다.”
연화선 선생님이 날 뚫어지게 쳐다본다.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듯한 눈치였다.
“하긴······ 때론 부모보다 다른 이가 나을 때도 있지······”
그때였다.
짧은 한숨을 쉰 그녀가 날 빤히 쳐다본다.
“우리 희주. 그 소속사에서 빼낸 다음. 내게 데려와 줄 수 있어?”
“예. 화해도 시켜드리고 희주가 선생님의 뒤도 잇게 해드리겠습니다.”
순간 연화선 선생님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지 진짜야? 내 뒤를 잇게 해준다고?”
“예.”
그때였다.
연화선 선생님이 벌떡 일어나 내게로 다가온다.
그리고는 내 손을 덥석 붙잡더니 말도 안 되는 보상을 언급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