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6화
466. 무희의 꿈 3
“이거······ 나잖아?”
폰에 나온 다음번 영상에는 검은 머리카락을 한 연화선 선생님이 춤을 추고 있었다.
“예. 1998년 카자흐스탄에서 모셔온 독립군 유해를 대전 현충원에 모실 때의 영상입니다.”
작은 액정 화면 속에서 연화선 선생님이 진중한 동작으로 영혼을 달래는 춤 진혼무(鎭魂舞)를 추고 있다.
그리고 이 춤이 바로 드라마 <신의 이름으로>에서 유진이가 분장한 ‘만신 월아’가 추던 진혼무의 참고 영상이었다.
무속인들이 추는 진혼무보다 연화선 선생님의 진혼무가 월등히 표현력이 더 좋았기 때문에 교재로 삼았던 것이었다.
이후 연화선 선생님은 ‘만신 월아’의 진혼무 영상을 몇 번이고 되돌려보며 감탄했다.
“정말 혼자 연습한 건 맞아?”
“당시에는 ‘만신 월아’의 정체를 비밀로 하고 있었기에 혼자 연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수희 선생님이 보시고 몇 가지 수정했으면 하는 점을 짚어 주신 게 전부고요.”
김수희 선생님은 연화선 선생님과 친분이 있다.
드라마 자문 때 몇 번 만났기 때문이다.
“하긴 수희 언니는 춤 못 추니까 배울 수도 없었겠네.”
“예. 김수희 선생님도 춤은 자신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고개를 끄덕인 연화선 선생님이 눈을 반짝인다.
“그렇다면 가르쳐볼 맛 나겠네.”
연화선 선생님이 제대로 해 보겠다고 말하자 조금은 안심이 된다.
연화선 선생님이 날 쳐다본다.
“우리 정 팀장. 근데 진짜 27살 맞아?”
“예?”
“일 처리하는 거 보니까 관록이 너무 있어 보이는데?”
연화선 선생님은 원래 사람 보는 눈이 날카롭기로 유명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난 뻔뻔하게 미소를 지었다.
“27살 맞습니다.”
연화선 선생님이 피식 웃는다.
“오케이. 그러면 제대로 가르칠 테니까 이제 다들 나가 줄래? 유진이 실력이 이 정도라면 나도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으니까 한 20분 정도만 기다려 줘.”
오복희 PD가 환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 저희 안무 고문을 맡아주실 거예요?”
“일단은 테스트부터. 내가 만든 안무를 여배우들이 따라 출 수 있나 확인하는 게 우선이야.”
역시 방심할 수는 없다.
웃고는 있지만 춤을 평가할 때는 누구보다 진심이 되는 분이니까.
“예. 선생님. 그러면 저흰 나가 있을게요.”
연화선 선생님이 말없이 생각에 빠져든다.
오복희 PD와 난 조용히 대기 천막을 나왔다.
연화선 선생님의 대기 천막을 나오자 오복희 PD가 말한다.
“고마워요 정 팀장님. 전 곧바로 촬영 준비할게요. 유진 씨 좀 잘 부탁해요?”
오복희 PD는 이미 연화선 선생님이 <화란전>의 안무를 맡아줄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예. PD님.”
오복희 PD는 스태프들에게 뛰어갔고 난 유진이를 준비시키기 위해 대기 천막으로 향했다.
* * *
유진이의 대기 천막 안.
돌아가는 상황을 전해 들은 유진이는 곧바로 폰에 있는 영상들을 보며 기억을 되살리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20분이 지나자 유진이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든다.
“유진아. 할 수 있겠어?”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예. 선생님이 어떤 안무를 짜올지는 모르겠지만 영상 속 진혼무가 베이스라면 충분히 따라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유진이가 자신 있는 태도를 보이자 괜스레 나까지 어깨에 힘이 실리고 있었다.
“그럼 나갈까?”
“네~”
유진이를 데리고 대기 천막을 나섰다.
그런데 그때 한상희와 민규리가 함께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두 사람은 대기 천막 안에서 함께 연습이라도 했는지 얼굴이 붉게 상기 되어 있었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한상희가 유진이를 흘겨본다.
“정유진. 넌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고만 있니? 연습은?”
“아 생각할 게 많아서 연습은 못 했어요.”
태연한 유진이의 대답에 한상희가 살짝 노려본다.
“연습을 안 했다고? 너 제정신이니?”
유진이는 대답 대신 그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웃어? 지금 이게 웃기니?”
“선배. 걱정은 고마운데 지금 우리끼리 다툴 시간은 아니지 않아요?”
한상희가 유진이를 보며 부르르 떤다.
“그래? 알았어. 너 실수 하기만 해. 내가 가만 안 있을 거야.”
한상희가 두고 보자며 무대 위로 올라가 버린다.
그러자 민규리가 옆으로 다가와 비꼬듯 말을 걸어왔다.
“유진 선배는 잘 모르겠지만 연화선 선생님. 무용계에서 엄청 대단한 사람이에요. 만약 저분이 화란전을 깠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욕먹는 건 우리라고요!”
민규리의 말에 유진이가 코웃음을 친다.
민규리가 해주는 건 걱정이 아니라 비전공자인 유진이에게 발목을 잡지 말라는 핀잔이니까.
“규리 씨. 내 걱정도 다 해주고 많이 변했네?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안 그래요?”
“뭐라고요?”
“본인 걱정이나 하세요. 나야 비전공자지만 규리 씨는 무용까지 배웠다면서요? 그런데 실수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민규리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그러다 마땅히 할 말이 없어지자 몸을 홱 하고 돌려버렸다.
“어디 두고 봐요!”
두 사람이 사라지자 유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오빠. 저 두 사람은 왜 절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요?”
“네가 더 잘나서?”
유진이가 농담하지 말라며 피식 웃는다.
하지만 난 진담이라며 파이팅을 외쳤다.
“아 그리고 이따가 네가 춤추는 영상은 녹화해서 미소한테 보여줄 거야. 그니까 긴장해?”
“우리 미소한테 자랑하려면 제대로 해야겠는데요?”
“그래. 그리고 언제나 ‘유화 공주’의 마음으로 연기하면 돼. 절박하고 또 절박한 마음을 담아서. 춤도 연기의 일종이니까.”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오빠. 그럼. 다녀올게요.”
“수고.”
나와의 대화를 마친 유진이는 마치 ‘유화 공주’가 된 듯 일순간 표정을 바꾼다.
그리고 천천히 무대 위로 향한다.
난 그 즉시 이영진에게 무대 반대편 쪽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연화선 선생님이 보여주는 안무 시범을 반대편에서 녹화하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대기 천막에서 연화선 선생님이 서윤지 매니저와 함께 나온다.
그런데 진혼무를 출 때 손끝에 쥐는 명주 천이 보이지 않았다.
‘뭐 하려고 저러시는 거지?’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연화선 선생님이 무대 위로 올라갔다.
무대 위.
연화선 선생님이 세 여배우를 한 명씩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세 사람. 내가 추는 진혼무를 손끝부터 발끝까지 놓치지 않고 자세히 봐줘. 알았지?”
유진이를 비롯해 한상희와 민규리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네. 선생님.”
그때 오복희 PD가 묻는다.
“음악 틀어 드릴까요?”
연화선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인다.
“준비하고 있다가 우리 매니저가 오케이 하면 틀어줘.”
“예. 선생님.”
오복희 PD가 음악 감독에게 지시를 내리자 스피커가 바로 준비된다.
준비가 되는 동안 연화선 선생님은 무대를 한번 슬쩍 훑어본다.
현재 월궁의 대전 앞에 놓인 무대 위엔 사방이 뻥 뚫려 있어 칼바람이 불고 있다.
그 탓에 연화선 선생님이 숨을 내쉴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그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선생님. 30초 뒤에 음악 틀겠습니다.”
서윤지 매니저의 말에 연화선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그때였다.
일순간 연화선 선생님의 눈빛이 번뜩이더니 이제까지와는 다른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입고 있던 털옷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한다.
입고 있던 털 겉옷이 바닥으로 스르륵 흘러내렸다.
눈 깜짝할 사이 연화선 선생님은 속적삼만 입은 상태가 되었다.
반투명할 정도로 얇은 속적삼 탓에 연화선 선생님의 가녀린 팔과 다리가 훤히 보인다.
현재 기온은 영하 5도.
두툼한 털 옷을 입어도 틈 사이로 불어 드는 차가운 바람 때문에 절로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날씨다.
그런데도 연화선 선생님은 눈도 끔뻑하지 않고 있었다.
당황한 오복희 PD가 말리려고 하자 서윤지 매니저가 고개를 젓는다.
“선생님께서 제대로 보여주시겠다고 한 거니까 이대로 가세요. 단 시간을 지체하면 더 힘들어지실 뿐이에요.”
“아 알았어요.”
오복희 PD가 한숨을 쉬고 놀란 스태프들에게 정숙을 요구한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현장은 쥐죽은 듯 고요해진다.
이어서 연화선 선생님은 신고 있던 신발을 옆에 벗어 두고 그 위에 버선마저 곱게 접어둔다.
맨손과 맨발 그리고 팔다리가 훤히 보이게 된 상황.
이제야 진혼무에 사용되는 흰색 명주 천을 갖고 오지 않은 게 이해가 간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진짜로 다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장난 아니시네.’
난 그 즉시 폰을 꺼내 녹화를 준비했다.
이 추운 날씨라면 두 번 보여주기는 힘든 시연이 될 테니까 말이다.
연화선 선생님이 준비를 끝내자 서윤지 매니저가 오복희 PD에게 사인을 준다.
오복희 PD는 즉시 음악 감독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내 진혼무에 쓰이는 배경음악이 세트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투우웅~
대고의 저음이 둔중하게 울려 퍼진 순간 연화선 선생님이 구음(口音)을 시작했다.
『허어이~~야아~~』
세트장 가득 울려 퍼지는 연화선 선생님의 구음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마치 혼을 부르는 듯한 떨림소리가 그녀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다.
순간 나뿐만 아니라 스태프들이 모두 그녀에게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구음(口音)이 끝나는 순간 연화선 선생님이 천천히 손끝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그녀의 어깨에서 시작된 움직임은 천천히 팔을 타고 손끝까지 향한다.
반투명한 속적삼을 입고 있었기에 현장 모두는 섬세한 그녀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스르륵.
이어서 그녀가 맨발로 무대 이곳저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몸을 웅크리고 손끝을 펼치고 한이 어린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돌바닥으로 냉기가 가득한 무대를 하염없이 걸어 다녔다.
단지 서 있기만 해도 차가움이 골수까지 미칠 텐데 연화선 선생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게다가 혼신을 다해 춤 춘 까닭에 그녀의 몸에서는 마치 안개 같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연화선 선생님은 여배우들에게 진짜 춤이 무엇인지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었다.
* * *
2분 동안의 진혼무가 끝이 난다.
연화선 선생님은 서글픈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본 채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그제야 숨을 몰아쉬기 시작한다.
“헉헉······ 나 나이가 들었는지 요즘은 조금만 뛰어도 힘에 부치는 감이 있네. 이해들 해.”
본인은 나이 탓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은 뇌종양 때문에 생긴 문제였다.
숨을 몰아쉰 연화선 선생님은 신발도 신지 않고 여배우들을 불러 모았다.
“할 수······ 있겠어? 다들?”
한상희와 민규리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대답한다.
“예. 선생님.”
연화선 선생님이 이어서 대답하지 않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진이를 쳐다본다.
“정유진······ 넌······ 어때?”
유진이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다.
“아 예. 선생님.”
“뭔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아 죄송합니다. 선생님의 춤 세상에 잠시 빠져들어 있었어요.”
연화선 선생님은 유진이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씨익 웃는다.
“그러면 그 춤에 네가 화답할 차례야. 알지?”
“예. 선생님.”
그런데 그때였다.
작게 미소를 지은 유진이가 연화선 선생님께 천천히 다가간다.
유진이가 바닥에 떨어진 털 겉옷을 선생님께 다시 입혀준다.
그리고 이어서 벗어놓은 신발과 버선마저 연화선 선생님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따뜻하게 옷을 입고서 찬찬히 지켜봐 주세요 선생님.”
연화선 선생님이 유진이를 빤히 쳐다본다.
“내가 이걸 신는 순간. 시연은 없어. 그래도 괜찮겠어?”
유진이는 눈도 끔뻑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예. 선생님.”
망설임 없는 단호한 답변에 연화선 선생님이 외투를 여미고 신발을 신었다.
“기대할게.”
자리로 돌아온 유진이가 한상희와 민규리를 보며 도발했다.
“저보다 못하면 망신이라는 거. 아시죠?”
한상희와 민규리가 발끈한다.
하지만 난 유진이가 하는 행동을 이해했다.
유진이는 두 사람을 자극해 연화선 선생님을 만족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유진이의 말에 한상희와 민규리의 얼굴이 흥분으로 더욱 빨갛게 달아오른다.
무용 전공자도 아닌 유진이가 이렇게 대차게 나온 이상 못한다고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웃기지 말고 너나 잘해.”
“선배는 우리 발목만 잡지 마세요.”
유진이가 어깨를 으쓱거린다.
“됐네요 그럼.”
돌아선 유진이는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선 조금 전 선생님이 한 것처럼 겉에 입고 있던 솜 털옷을 벗어 던져 버렸다.
털썩.
선생님과는 달리 유진이가 안에 입은 옷은 속적삼이 아닌 두툼한 흰색 소복.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겨울의 칼바람을 막아내기엔 너무도 얇은 두께였다.
이어서 유진이는 신발마저 벗어 던지고 맨발이 되었다.
시린 겨울바람으로 손끝과 발끝이 삽시간에 빨개진다.
그런데도 유진이는 눈도 끔뻑하지 않고 바닥에 놓인 명주 천을 손에 쥐어 들었다.
그러자 두 여배우도 이를 빠드득 갈며 옷을 벗고 맨발이 된다.
여배우들 셋이 눈빛을 번뜩이며 춤을 추려고 자세를 잡는다.
순간 오복희 PD가 다시 한번 음악을 틀어준다.
투우웅~
대고 소리가 둔중하게 세트장을 울린 순간 명주 천을 손에 쥔 유진이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연화선 선생님이 놀란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