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4화
454. 정 커피 1
굴렁쇠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실.
강감찬 대표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진성준 전무와 그의 일행 여진수 비서가 그리고 오른쪽에는 이태풍이 앉아 있다.
그런데 인사를 할 틈새도 없이 진성준 전무가 놀라운 제안을 꺼낸다.
“정 팀장님. 정 커피의 레시피를 제게 5억에 파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대표이사실로 올라오면서 생각한 금전운은 이태풍의 연말 수상으로 인한 것에 더해 진성 식품 광고를 따낸 보상으로 넉넉한 보너스를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진성준 전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제안을 했다.
정 커피 레시피 값으로 5억.
더군다나 내 레시피를 이용해 RTD(Ready To Drink) 커피를 만들겠다는 제안을 하고 있었다.
“대표님이 정 커피라면서 주셔서 마셨는데 솔직히 제가 블렌딩한 제품보다 훨씬 나은 것 같더군요. 상품으로 만들고 싶은데 레시피를 제게 파십시오.”
회귀 전에도 정 커피로 사업을 하자고 제안한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 커피는 PD나 작가들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드는 내 무기이기도 했었기에 당시에는 그 제안을 뿌리쳤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내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고작 그 돈을 받을 바에야 지금처럼 ‘나만의 무기’를 갖고 있는 게 더 좋았으니 말이다.
“죄송합니다만 지인들을 위해 타 주던 커피로 돈을 벌다니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단숨에 거절하자 진성준 전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계약금으로 5억을 드린 데도 말씀이십니까?”
“예.”
일반 직장인으로서 5억은 엄청난 돈이겠지만 내게는 전혀 아니다.
그때 강감찬 대표가 곁에서 거든다.
“전무님. 우리 정 팀장이 인센티브가 좀 세다 보니 그 정도로는 눈도 깜짝 안 할 겁니다. 이 친구 올해 연봉과 인센티브를 합치면 7억이 넘고요.”
진성준 전무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다.
“예? 엔터 업계는 팀장이 그렇게 많이 받습니까?”
“정 팀장이 규격 외죠. 저 친구 능력과 수완이 워낙 좋다 보니 관리하는 연예인들이 자신의 수익을 나눠주고 있어서 말입니다. 하하하.”
“그렇······군요.”
그런데 그때였다.
회귀 전에도 피 튀기는 후계자 싸움을 벌이던 경영자답게 진성준 전무가 곧바로 승부수를 던져 왔다.
“그러면 라이센스 계약을 맺으시는 건 어떻습니까? 레시피를 받은 상품 총매출액의 0.5%를 드리겠습니다.”
RTD 시장 전체는 1조가 훌쩍 넘는다.
그중 1위인 LT 음료가 차지하는 음료 시장은 매출 5천억이 넘고 5위만 하더라도 1천억 원이 넘는 큰 시장이다.
그러니 라이센스 계약을 하게 되면 매년 수억 정도 내 손에 떨어질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
“죄송합니다. 주력 상품도 아닌 제품의 매출이 얼마나 나오겠습니까? 제안은 감사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그리 매력적인 제안이 아닙니다.”
딱 잘라 선을 긋자 진성준 전무가 급히 말한다.
“잠깐만요 정 팀장님. 오해하셨나 봅니다.”
“예?”
“제가 블렌딩 한 것보다 맛있다는 이야기 못 들으셨습니까? 전 기존 블렌딩한 레시피를 버리고 정 커피의 레시피에 올인할 생각입니다.”
식품과 음료 업계에선 3위인 진성 식품이 총력을 다해 ‘정 커피’를 생산하고 홍보하겠다는 초대형 제안을 해오고 있었다.
* * *
회귀 전 차태훈을 ‘THE 베스트’의 광고 모델로 삼을 무렵.
진성준 전무는 자신의 커피가 최고라며 기존의 한국 커피들은 격이 떨어지는 제품이라고 폄훼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180도로 입장을 바꿔 내 커피를 칭찬하고 있다.
심지어 ‘THE 베스트’의 블렌딩을 버리고 내 레시피로 ‘THE 베스트’를 만들겠다면서 말이다.
“제품을 런칭하고 5년 안에 3위 안에 들어가는 게 제 목표입니다. 대충 매출 2000억 정도. 거기에 0.5%면 매년 10억이 정 팀장님 손에 떨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라이센스 기간은 10년으로 해드리죠. 어떻습니까?”
그의 계산대로라면 대략 70억에서 80억 정도를 받을 수가 있을 거다.
아마도 오늘의 운세가 말하는 ‘금전운이 매우 좋다’는 건 바로 이 일을 가리키는 모양이었나 보다.
‘어떻게 한다?’
정 커피 레시피에 진성 식품의 홍보와 마케팅이 더해진다면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내 레시피가 공개된다는 것 때문에 조금은 고민스러웠다.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태풍 씨를 ‘THE 베스트’의 광고 모델로 삼는 건 어떻습니까? 정 팀장님이 아끼는 커피를 정 팀장님의 배우가 홍보하는 거. 그림 좋지 않습니까? 선점한 업체가 건 위약금이 얼마든 흔쾌히 지불하겠습니다.”
이태풍 역시도 진성준 전무를 거들기 시작한다.
“윤호 형. 저도 찬성이요. 전 윤호 형이 만든 커피라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제품의 광고 모델이 되면 제품의 흥행에 영향을 받는다.
회귀 전 ‘THE 베스트’의 모델 차태훈처럼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 수가 있었고.
이제 막 황룡영화제의 남우 주연상을 받은 이태풍인데도 자신의 이미지가 망가질 위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제껏 내가 자신을 도와줬으니 자신이 보답할 차례라며 말이다.
회귀한 이후.
미래를 알고 있는 내가 누군가를 돕고만 살 거라고 생각했지 이렇게 받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태풍이 날 돕겠다고 나서자 괜히 가슴이 찡해온다.
거액의 라이센스보다 이태풍의 이러한 태도가 내게는 더 큰 보상이었다.
그때 강감찬 대표도 끼어들었다.
“자신감을 가지고 한 번 도전해 보지 그러나? 내 생각에도 우리 정 팀장 커피라면 사람들을 사로잡고도 남을 것 같은데?”
강감찬 대표의 말대로 제품이 성공한다면 이태풍의 인기와 몸값을 띄울 수가 있는 게 사실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난 결단을 내렸다.
내가 가진 무기는 정 커피 하나만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하자. 태풍이를 위해서라도.’
난 잠시 심호흡을 하고 협상을 시작했다.
“매출의 1%. 그리고 라이센스 기간은 20년으로 해주시면 받아들이겠습니다. 대신에 세 종류의 레시피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최종 결과물은 제가 컨펌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레시피가 하나가 아닙니까?”
“예. 그동안 여러 배우들과 업계 관계자에게 세 가지 스타일의 정 커피를 제공했었습니다. 스모키하고 진한 에스프레소 달콤하고 부드러운 카페라떼 가볍고 약간의 산미가 있는 아메리카노를 제공해 왔는데 전부 다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 셋 다 드리겠습니다.”
역제안을 받아든 진성준 전무가 잠깐 고민에 빠진다.
받아들일지 말지 계산을 하던 그가 이내 곁에 있는 여진수 비서에게 묻는다.
“여 비서. 가능해? 매출 1%까지?”
“계약금만 없다면 빡빡해도 회장님 재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제품의 성공이니까요.”
진성준 전무에게 필요한 건 ‘성공 신화’.
그래야 그룹의 후계를 이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진수 비서의 말에 진성준 전무가 고개를 끄덕인다.
진성준 전무는 다시금 내 쪽을 바라보며 손을 내민다.
“알겠습니다. 정 팀장님. 그 조건은 다 받아들이되 계약금은 없습니다. 그리고 브랜드명은 ‘THE 베스트’ 그대로 갈 생각입니다. 생수 브랜드인 ‘THE 순수’와 짝을 이뤄야 하니까요.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난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진성준 전무 역시도 진심인지 내 까탈스러운 조건을 받아들였다.
악수를 하던 진성준 전무가 농담처럼 말한다.
“그런데 정 팀장님이 이제껏 제가 상대한 어떤 비즈니스 맨보다 거래하기가 까다로우시군요.”
“곤란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계약을 어긴 것도 아니고 협상에서 밀당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곁에 있던 강감찬 대표와 이태풍이 기분 좋은 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이제 이태풍의 광고비를 책정할 시간이다.
난 진성준 전무의 손을 꼭 잡은 채 물었다.
“그건 그거고. 전무님. 우리 태풍이 광고비는 얼마로 책정하셨습니까?”
진성준 전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그 얼굴을 보고 강감찬 대표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우리 정 팀장이 이렇습니다. 자기보다 연예인 걱정이 우선인 친구라서요. 하하하.”
진성준 전무가 날 쳐다보는 눈이 짙은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순간 등골이 싸해졌다.
회귀 후 날 욕심 내는 사람들을 워낙 많이 보다 보니 이젠 눈빛만 봐도 알 것 같기 때문이다.
뭐에 꽂힌 건지는 모르겠지만 진성준 전무가 날 욕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난 애써 그 눈길을 무시하고 이태풍의 광고비를 책정하기 시작했다.
설령 지금 당장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위문 공연 출연료 협상을 해야 하는 게 매니저의 인생.
내 배우의 몸값을 정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 * *
잠시의 실랑이 끝에 이태풍의 광고비는 7억으로 정해졌다.
그리고 이어서 유진이의 ‘THE 순수’ 생수 광고비도 책정했다.
현재 생수 시장도 국내만 1조가 넘고 300개가 넘는 제품이 경쟁하는 피 튀기는 전쟁터다.
생수 즉 물은 제품의 차별화가 어렵기에 좋은 모델을 확보하는 데 사활을 걸곤 한다.
난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유진이가 광고 모델로서 왜 경쟁력이 있는지 브리핑을 시작했다.
유진이가 TV 프로에 나왔을 때의 시청률.
유진이가 TV 광고에 나왔을 때 실시간 검색어 순위.
유진이의 광고 대비 수익 매출 효과표.
마지막으로 생수 시장의 규모와 모델별 판매 수치 시장 분석표까지 들이대며 말이다.
그리고 난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유진이의 광고료로 업계 최고인 7억을 불렀다.
“어떻습니까 전무님?”
태블릿 화면에 정리된 프리젠테이션 도표를 본 진성준 전무가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이야~ 대단하십니다. 정 팀장님이 우리 진성의 마케팅 이사보다 나은 것 같은데요?”
“과찬이십니다.”
“아니요. 정말입니다. 제가 만났던 어떤 기획사에서도 이렇게 광고 모델의 비용에 대한 근거를 명확히 산출한 자료는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회귀 전 내가 업계 탑으로 올라갈 수 있었던 건 정 커피 말고도 이런 철저한 준비가 있었기 덕분이었다.
“이렇게까지 분석을 자세히 해왔는데 제가 더 할 말이 없군요. 알겠습니다. 유진 씨도 7억에 하시죠.”
진성준 전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광고 계약을 마치고 나자 진성준 전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레시피는 며칠 뒤 연구소에서 블라인드 테스트부터 한 후에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미리 샘플을 30종 정도 준비해 가겠습니다.”
“종류가 대단히 많군요?”
“블렌딩은 제가 하기 나름이니까요.”
“든든하군요. 그나저나 식사라도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서······ 정 팀장님. 주차장까지 배웅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눈치를 보니 따로 이야기할 게 있나 보다.
난 진성준 전무를 따라 일어나며 강감찬 대표에게 말했다.
“대표님. 전 전무님을 모셔다드리고 오겠습니다.”
“그래. 다녀와.”
난 강감찬 대표와 이태풍을 두고 진성준 전무와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소소한 이야기를 하던 진성준 전무는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내게 묻는다.
“그런데 예전에 ‘THE 베스트’와는 달리 ‘THE 순수’의 광고를 받는 데는 일절 거부감이 없더군요. 혹 ‘THE 순수’는 성공할 것 같습니까?”
“예.”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이렇게 물어볼 줄 알고 미리 답을 준비했었다.
“음료 비즈니스를 하는 진성 식품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물이라고 들었습니다. 좋은 수원을 많이 확보하고 계시다는 정보도 들었고요.”
그때였다.
날 빤히 쳐다본 진성준 전무가 빙긋이 웃더니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 미래가 보여서 그런 건 아니고요?”
그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 * *
‘어떻게 된 거지?’
회귀한 이후 신기가 있다거나 용하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었다.
하지만 미래가 보이냐고 이토록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사람은 진성준 전무가 처음이다.
그 순간 지난번 만남이 떠올랐다.
‘THE 베스트’란 커피 브랜드명을 실수로 말했을 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었다.
하지만 지금 이 말로 그때는 자기 속내를 숨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포커페이스라 이거군.’
내가 알던 진성준 전무는 야망이 넘치는 기업가.
이복형제들과 피 튀기는 게임을 벌이는 재벌가의 일원이기도 했었고.
그런 만큼 진성준 전무는 자신의 속내를 숨기는 것까지도 익숙했다.
어지간한 사람들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날 완전히 속여 넘길 정도로.
아무래도 앞으로 그의 앞에서는 조금 더 입조심을 해야겠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룹 내 왕권 다툼을 치열하게 한 것과는 달리 외부 협력사와는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라는 거다.
그렇다면 그와의 관계는 약간의 거리감이 있는 게 딱 좋을 것 같다.
난 짧게 심호흡을 하고 미래를 보냐는 그의 질문에 덤덤하게 대답했다.
“미래를 보다니. 그게 무슨 황당한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진성준 전무가 의심을 거두지 않고 말한다.
“박수무당이라고 불린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그런 별명이 있긴 한데 그건 제 촉이 좋아서 몇 번 성공한 걸 지인들이 장난삼아 붙인 것뿐입니다.”
어차피 회귀했다는 걸 절대 알 수 없을 테니 뻔뻔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진성준 전무는 생각보다 끈질겼다.
“대답하기 싫어하시는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니 말 돌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정 팀장님이 가진 그 촉. 제게 빌려주십시오. 그러면 저도 정 팀장님께 제 힘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미래를 알려주면 크게 보답하겠다는 말을 제법 고상하게 한다.
그러나 미래를 알려준다는 건 진성 그룹의 후계자 싸움에 끼어들라는 뜻.
미안하지만 그건 노 생큐다.
진성 그룹의 첫째인 장남 진명규와 둘째인 장녀 진명희가 얼마나 독한 인간들인데.
회귀 전 그 치열한 싸움을 본 나로서는 결코 얽힐 생각이 없었다.
“죄송합니다만 전 연예계 일밖에는 잘 모릅니다. 나머지 분야는 자신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좋은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진중히 거절했다.
그런데 그 순간.
진성준 전무가 잠깐 한숨을 내쉬더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