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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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오오오!!!
구겁의 입구· 최외곽에 위치한 너른 복도를 홀로 걷는다·
깨진 유리 사이로 바람이 몰아치고 무너진 격벽 너머 체액이 흘러내렸다·
곳곳에 쓰러진 창립자들의 미라와 격렬했던 전투의 흔적·
말레온과 함께 지나왔던 처참한 길목을 홀로 걸음도 딛지 않고 지나친다·
파직 파직···!!
발을 내딛는 순간 검은 벼락이 피어오르고 레녹의 신형이 사라졌다·
공간을 지배하는 기예를 마력을 운용하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펼쳐낸다·
팟!
구겁의 시공을 검게 물들이며 엄청난 속도로 격벽을 주파하던 레녹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외벽에 금이 간 채로 깨진 부분·
반쯤 부서진 외벽 밖으로 암흑의 바다가 고스란히 보이고 있다·
사실상 맨몸으로 외해와 직접 맞닿아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
레녹은 말없이 저 멀리 펼쳐진 암흑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공허한 우주· 그 너머 흐릿하게 빛을 발하는 별빛·
바라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미치게 하고 심신을 격동시키는 어둠·
하지만 외해를 바라보는 레녹의 내면은 한없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 어두운 바다의 풍경이 레녹에게 있어서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진다·
마치 이제서야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돌아온 것처럼·
처음부터 진작 이렇게 되었어야 했다는 듯이·
그래 레녹은 비로소 이제야-
[···마스터·]
순간 레녹은 길고 긴 상념 끝에서 정신을 차렸다·
품 안에서 앞발로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여우정령·
다비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지 말아요·]
“····”
[어디로 가버리지 않을 거죠?]
내색하지 않았지만 다비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승급 의식이 끝난 이후 다비는 말레온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레녹에게 승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조차도 꺼내지 않았다·
그 말이 다비 자신에게 얼마나 가벼운 의미였는지 레녹에게 얼마나 무거운 의미였는지·
정령은 이제서야 그 사실을 이해하고 또 후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
레녹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비를 바라보다 정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필사적으로 손에 얼굴을 부비는 전뇌정령을 바라보며 레녹이 말했다·
“괜찮아·”
[하지만····]
“아직 괜찮아·”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손을 다비의 꼬리 부근으로 옮겼다·
파멸을 전제로 뒤틀린 초월성을 움켜쥔 지금 모든 것이 손에 잡힐듯 선명하게 느껴진다·
그동안 애를 먹었던 일조차 지금이라면 쉽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파직 파직···!!!
손끝에서 흘러나온 흑뢰가 회오리치며 이내 다비의 등 뒤로 솟구쳐 일렁였다·
정령의 영체를 타고 흐른 흑뢰가 다비의 일곱 번째 꼬리 뒤로 압축되며 흔들렸다·
빠지지직···!!!
어설프게나마 형태를 갖춰 나가는 검게 물든 여덟 번째 꼬리의 형상·
완성까지는 아니라도 다비를 위해 기틀을 마련해 주는 정도로는 충분하겠지·
“나중에는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니까·”
레녹이 공허한 미소를 지었다·
“할 수 있을 때 해두는 게 좋겠지·”
[마스터····]
다비가 복잡한 목소리로 레녹을 부른 순간 뒤에서 흉포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르르릉···!!]
격벽 너머에서 눈이 네 개 달린 흑표범의 미라가 넝마가 된 몸을 끌고 일어선다·
말레온의 술식에 머리가 터져나가 덜렁거리는 흉측하다 못해 처참한 몰골·
그 뒤에서 다가오는 양분된 운기린의 사체· 등가죽이 갈라진 쇄룡족의 미라·
말레온이 쓰러뜨린 창립자들의 미라들이 무리 지어 군세를 이루고 진군한다·
“말레온이 흡수한 사념을 다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군·”
레녹이 중얼거렸다·
미라를 죽이고 흡수한 사념으로 인해 말레온은 선종에게 몸을 빼앗겼다·
그때 흡수한 사념을 다시 미라에게 나누어주고 움직이게 하는 것인가·
몸이 찢어지고 뭉개져도 죽지 않는 불사자의 군세·
하지만 레녹은 사방을 잠식하는 침식영역을 보고도 망설이지 않았다·
“가자·”
찌유우우우웅!!!!
발을 내딛는 것과 동시에 등 뒤에서 검게 물든 헤일로가 거칠게 회전한다·
레녹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뇌전이 흑뢰로 변해 사방을 검게 비춘 순간·
창조계열 고유마법
성질변화 천저(天低)
[악극뢰(惡劇雷)]
검게 물든 뇌전의 파도가 사출되며 달려드는 미라들을 쓸어버렸다·
뻐어어어어엉!!!!
[그르르르륵!!!]
[안 돼···!! 죽···!!]
[아아아아악!!!]
운기린의 전신에 날카로운 흑선이 새겨졌다 폭발해서 살점째로 쪼개진다·
쇄룡족의 머리 위로 떨어진 벼락이 단단한 비늘을 종잇장처럼 꿰뚫었다·
격벽 사이를 잠식하는 침식영역이 검은 번개가 떨어질 때마다 지워져 소멸한다·
미라들이 체액을 흩뿌리면서 울부짖고 그 위로 검은빛이 쉴 새 없이 번뜩였다·
콰과과과과!!!
[뿌우우 우우-!!!]
[꺄아아악!!]
[꺽 꺼어억 인간···!!!]
검은 뇌전으로 이뤄진 손이 코끼리의 머리를 쥐고 터트렸다·
깃털처럼 흩날리는 뇌전이 비행하는 뇌조의 날개를 찢어발겼다·
메기의 지느러미를 뜯어내고 인어의 꼬리를 불태워 뽑아냈다·
가볍게 손짓할 때마다 허공에 검은 실선이 새겨졌다 폭발하고 검은 벼락이 공간을 찢어발기며 구겁을 불태웠다·
쾅!!
우드드드득!!!
사방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미라들 사이를 가속해 지나친다·
장생종과 진혈종 미라들이 날뛰는 마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너뛰어 가속했다·
말레온과 함께 애를 먹어가며 구겁을 뚫어냈던 그때의 기억이 거짓말처럼·
지난번의 여정을 덧칠해 지워버리듯이 구겁의 시공을 남김없이 어둠의 마력으로 뒤덮은 그 순간·
[침식률 101%]
화악!!
레녹은 열개의 대롱이 매달린 거대한 공동 앞에 다시 한번 서 있었다·
대롱 아래 놓인 대야와 미라의 사체를 쌓아 만든 거대한 옥좌·
공허의 저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승천자 말레온 그노시스·
“···마법사·”
고오오오!!!!
말없이 시선을 들어올린 레녹과 은룡의 시선이 맞닿은 순간·
선종이 믿기 어렵다는 듯이 물었다·
“대체··· 무엇이 되어버린 거지?”
“····”
레녹은 대답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후욱!!
선종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를 지나쳐 부서진 격벽 뒤켠에 내려앉았다·
창에 어깨를 관통당한 채 격벽 아래 주저앉은 올리비에라의 모습·
검은 안광을 흘리면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레녹이 입을 열었다·
“올리비에라·”
[····]
아직 의식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한없이 그에 가까울만큼 마모된 상태·
레녹이 그녀의 어깨 부근에 꽃힌 창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격벽 사이에 꿰어 관통당한 처참하기 그지없는 모습· 어깨 사이로 피가 흘러내려 도포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
무표정한 얼굴로 마력을 회전시킨 레녹이 창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빠직!!
레녹의 손이 창을 움켜쥔 순간 날카로운 흑뢰가 창대를 휘감고 번뜩이며·
올리비에라를 꿰뚫은 창대가 그 자리에서 해체되어 소멸했다·
동시에 창대에 꿰여있던 그녀의 신형이 균형을 잃고 앞으로 기울어졌다·
탁!!
레녹이 한 팔로 그녀를 부축한 순간 올리비에라가 힘겹게 시선을 돌렸다·
[견 뢰····]
올리비에라의 전성이 희미하게 울려퍼졌다·
레녹이 고개를 낮춰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듣고 있어·”
[어리석은 같으니····]
베일 너머로 흘리는 말이 힘없이 끊어졌다·
의지를 전달하는 전성조차 불분명하게 늘어지는 속삭임·
[누가 그딴 방법을··· 게냐·]
“····”
니백스의 독성권역에서 함께 했으니 그녀 역시 레녹이 어떤 수단을 사용한 건지 바로 이해한 것이겠지·
올리비에라가 힘겹게 들썩이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속삭였다·
[마무리는 충분··· 무의미한····]
“그렇지·”
하지만 레녹은 당연하다는 듯 올리비에라의 말을 이해하고 대답했다·
“프로젝트에 마무리를 지어주는 건 당신 하나면 충분했을지도 몰라· 당신이 그걸 바래서 여기 남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말하지 않은 사실을 전해 듣고 전하지 않은 감정을 이해하고 응답한다·
인과의 순서를 무시하고 시간선을 넘어 앞서나가는 레녹의 대답·
[···너·]
그런 레녹의 대답에서 초월성의 편린을 느낀 올리비에라가 흠칫 시선을 들어 올렸다·
지금 그녀의 눈 앞에 서 있는 마법사는 말 그대로-
“지금 이 상황은 당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올리비에라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렇다 해도 나는 우리가 한 일을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않겠다·”
빠지직···!!!
손끝에서 피어오른 흑뢰가 깎여나가며 그 안에서 새하얗고 정순한 기운을 드러냈다·
명이 레녹에게 보여주며 가르쳤던 탈각(脫却)의 공능·
변질된 마력을 극한까지 깎아내어 완전히 반대되는 정순한 힘만을 남긴다·
레녹이 그것을 직접 손대지 않고 올리비에라의 어깨에 흘려넣은 순간·
파앗···!!
어깨를 관통한 올리비에라의 상처가 실시간으로 조금씩 아물기 시작했다·
[····]
동시에 올리비에라의 몸에서 서서히 기력이 차오르며 그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한계를 넘어 붙들고 있던 의식이 육체의 회복과 동시에 긴장이 풀려 희미해진 것·
말없이 올리비에라를 제 자리에 눕힌 레녹이 말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하지·”
촤라라락!!
의식을 잃은 올리비에라의 몸이 대롱 끝에서 떨어지는 핏물에 휘감겼다·
그녀를 중심으로 혈법진이 펼쳐지며 올리비에라의 몸을 강제로 전이시켰다·
파앗!!!
순식간에 구겁의 시공 위에서 사라진 올리비에라 론 메이즈의 기척·
그녀가 떠난 자리를 보며 레녹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세운 그 순간·
“놀랍군·”
레녹의 등 뒤에서 굵직한 용인의 저음이 울려 퍼졌다·
“그 여자를 구겁에서 먼저 돌려보낸 건가·”
“올리비에라의 체내에 흐르는 진혈의 작용을 잠시 멈춰두었다·”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돌아섰다·
“혈액처럼 복잡한 촉매는 원래 간섭하기 어렵지만 지금이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니·”
눈부신 은빛의 비늘을 두른 용머리 거인이 팔짱을 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육질의 상반신을 꿈틀대며 맥동하는 기척은 비할 바 없이 패도적인 기세를 품었다·
하지만 레녹은 말레온을 마주하고도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피의 계약은 진혈을 보유하지 않은 존재를 추방하니 지금쯤이면 쿤다라로 무사히 복귀했겠지·”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만·”
말레온의 육체에 깃든 초월자가 웃었다·
“굉장히 유능한 술사였다· 그녀의 도움을 받아 싸우는 게 낫지 않겠나?”
“아니· 처음부터 이렇게 해야 했어·”
레녹이 눈을 감았다·
“처음부터 나 혼자 했어야 하는 일이었지· 그러니 지금이라도····”
파직!!
레녹의 손안에서 검은 뇌전이 압축되며 흑선(黑線)으로 화했다·
흑선을 움켜쥐며 시선을 내린 레녹이 조용히 말했다·
“여기서 전부 끝내야겠다·”
하지만 말레온의 육체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미소와 함께 천천히 걷기 시작했을 뿐·
“쿤다라는 약속된 멸망을 피하기 위해 장생종의 수명을 동력으로 삼아 만들어진 도시였다·”
레녹의 옆으로 스쳐 지나가듯 걸으면서 선종이 말했다·
“반대로 구겁은 장생종의 죽음을 묻은 묘지이자 외해 바깥에 만들어진 전초기지였지·”
“····”
“삶과 죽음이 언젠가 하나의 시간선에서 만나듯 쿤다라와 구겁 사이에는 강력한 이끌림이 존재하니·”
탁·
격벽 끝에서 걸음을 멈춰선 말레온이 고개를 돌렸다·
“두 시공이 서로 이끌리며 세계를 벗어나 외해를 유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쿤다라가 추구한 외겁(外劫)의 정체다·”
쿤다라의 삶과 구겁의 죽음·
삶과 죽음이 서로를 향해 이끌리는 개념 자체가 쿤다라가 추구하던 외겁·
말 그대로 멸망의 바깥에 서기 위한 장생종들의 대답이었던 것이다·
말레온과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 레녹이 말했다·
“쿤다라가 구겁에 이끌리며 상승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군·”
생명이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삶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하지만 죽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쿤다라와 구겁 사이에 압도적인 질량차가 존재함에도 훨씬 작은 구겁에게 쿤다라가 이끌리고 있던 것·
“실현 가능한 계획이라고 믿나?”
“예전에는 그랬었지·”
선종이 레녹과 나란히 걸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보다 본질에 가까운 해답이 있음을 나는 깨달았다· 삶과 죽음을 나누는 그 이치를 나 자신의 구도에 접목할 가능성을 느꼈지·”
“····”
“그래서 ‘나’는 죽음이라는 격변을 넘어 자격을 얻고 승천자가 될 수 있던 것이다·”
천천히 돌아선 말레온의 두 머리가 동시에 말했다·
“그리고 그건 너 역시 마찬가지겠지·”
“····”
“자신의 파멸을 약속하여 승천에 준하는 위상을 손에 넣었는가· 허무맹랑한 협박처럼 내게 고했던 그 말을 너는 진정으로 실현시켰구나·”
전신에서 검은 마력을 흩뿌리는 레녹을 선종이 눈이 부시다는 듯 바라보았다·
“한낱 인간이 나와 같은 방식으로 도달했음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그것만으로도 나는 네 안에 자리한 재능의 위대함을 실감하고 있다·”
승천의 비약을 마시고 죽음을 전제하는 부작용의 의미를·
그를 통해 승천자의 감각을 깨우친 레녹을 선종은 진정한 의미로 경외하고 있었다·
승천자의 술식이나 성취를 손에 넣지 않고도 스스로의 몸에 내려앉은 파멸만으로 비슷한 의미를 깨우쳤음을·
그 사실 자체가 레녹의 재능과 초월성을 증거하는 기적임을 그는 알아보았던 것이다·
“카이세 바쥬르가 그러했듯 네 존재 역시 멸망이라는 인과 앞에 태어난 기적이나 다름없으니·”
말레온이 눈을 감고 주먹을 들어올리자 손안에서 강렬한 은빛의 열원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용의 손안에서 휘황찬란하게 번뜩이는 별빛·
말레온 본인의 영혼과 의지가 아니라면 제대로 다루는 것이 불가능한 성련팔극식의 요체·
“이 선택의 기회조차 나를 위해 안배된 운명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겠지·”
별빛을 쥔 채 천천히 레녹을 향해 돌아선 말레온이 말했다·
“한 줌의 먼지로 돌아갈 쿤다라가 남길 의미란 그것이면 족할 것이다·”
“카이세와 내 몸을 두고 어느쪽을 빼앗을지 고민하고 있다는 말을 거창하게도 돌려서 말하는군·”
레녹이 어두운 미소를 지었다·
“선택할 기회라는 건 하늘에서 내려주는 운명같은 게 아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이끌어낸 결과에 불과하지·”
“그렇군·”
선종은 그 말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천천히 양 팔을 벌리고 서 느릿하게 마력을 고조시켰을 뿐·
레녹의 얼굴을 기억해두겠다는 듯 뚫어져라 바라보던 은룡이 미소지었다·
“그럼 지금부터는 네 존재를 남김없이 음미하면서 확인해 볼까·”
쿠구구구구!!!!
거리를 두고 원을 그리면서 걷던 두 사람의 걸음이 동시에 멈춰선다·
차갑고도 빠르게 고조되어 가는 공기·
결전을 앞둔 초월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칼끝에 서 있는 듯한 싸늘함·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날카롭게 일어선 분위기 속에서 말레온이 움직이려던 순간·
“조금 기다리지·”
레녹이 손을 들어세웠다·
“아직 시간이 안 됐다·”
“···뭐라?”
“4초 3초 2초·”
손가락을 접으며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군·”
콰아아아앙!!!
두 사람이 서 있는 지축이 거칠게 흔들리면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구겁의 시공 전체가 뒤틀리면서 부서질 것처럼 위아래로 진동했다·
“이건····”
쿠구구구구!!!!
시선을 돌리자 외해 바깥에서 별들이 솟구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부신 빛의 선처럼 늘어진 별빛이 위로 가속하는 듯한 풍경·
하지만 선종은 오래지 않아 바깥의 풍경이 상승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렇게 느껴질 만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구겁이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선종이 섬뜩한 기척을 흩뿌리며 레녹을 돌아보았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이곳 구겁이 외해 바깥에 머무를 수 있는 건 위성처럼 공전하며 별의 중력을 원심력으로 상쇄하고 있기 때문이지·”
레녹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내 마력을 구겁 전역에 덮어 구겁에 걸려있던 원심력을 ‘해체’했다·”
“····”
“두 번은 못 할 일이지만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쿤다라는 외해 바깥으로 완전히 이탈해 버리겠지·”
콰아아아아!!!
외해 바깥에 떠올라 있던 우주정거장이 발아래 펼쳐진 행성을 향해 떨어져 내린다·
외겁도시가 숨겨져 있던 별의 그늘을 뚫고 대륙 중심부에 위치한 중앙전선 인근으로·
대기권에 진입하면서 속도가 붙고 구겁의 외벽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올랐다·
“대륙 한복판에 떨어지면서 속도를 높이는 운석 위에 올라탄 셈인가·”
엄청난 속도로 추락하면서 열기를 높여가는 지옥도 속에서 레녹이 웃었다·
“외겁도시의 결말을 정하는 전장으로는 딱 좋은 무대가 되겠군· 시작해 볼까?”
후욱-
대답은 없었다·
마력을 끌어올린 선종이 섬뜩한 표정으로 별빛을 회전시키고 격동하는 전장에서 가속한 찰나·
레녹의 손안에서 불타오른 검은 뇌전이 엄청난 속도로 용의 거체를 관통하고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