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6화
9레벨(4)
다리 끝에 위치한 장엄한 관문이 낡은 문짝처럼 흔들린다·
콰아앙!!
몇 번 저항하듯 진동하다 이내 힘을 버티지 못하고 박살 나듯 열리는 관문·
그 너머로 펼쳐진 광대한 전당을 마주한 장생종들이 숨길 수 없는 감탄을 토해냈다·
“오 오오···!!”
“이곳이 바로 여덟 번째의··· 팔겁(八劫)의 안쪽인가···!!”
오랫동안 살아온 장생종들조차 생전 처음으로 마주하는 팔겁의 전당·
8레벨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감히 발을 들일 수도 없던 비처에 처음으로 들어선 이들이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믿을 수가 없군· 내 평생 살아서 이곳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저길 보게· 위대한 창립자들을 기리는 성소가 저렇게 많이···!!”
쿤다라를 세운 창립자들의 조각상이 전당 양옆에 전시되어 있고 천장의 유리를 통해 안개의 우주가 비춰진다·
거대한 위성처럼 완성된 이 도시를 휘감고 끊임없이 회전하는 장엄한 안개의 은하수·
이 도시를 바깥에서 살피고 굽어볼 수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장소·
넋을 놓고 전당을 둘러보던 장생종들이 마지막으로 전당에 들어선 일행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저번에 도착했을 때와 변한 것이 없군·”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는 레녹과 그 옆에 서 있는 올리비에라의 모습·
그중에서도 일행의 후미에 선 마법사의 존재를 모두가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
“····”
레녹이 장생종 사이를 스쳐 걷는 것과 동시에 주변이 조용하게 변했다·
누군가는 레녹의 시선을 피하고 누군가는 그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방관이나 의심에 가까웠던 장생종들의 반응은 상이했지만 유일하게 같은 부분이 하나 있다면·
레녹의 팔겁의 시련에 도전한 그 순간부터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는 점에 있었다·
[시선이 따갑다 못해 아플 지경이구나·]
옆에서 걷고 있던 올리비에라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웃음기 어린 전성으로 속삭였다·
[차마 말하지는 못해도 네놈이 한 일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 게다·]
“····”
팔겁의 시련을 통과하는 대신 겁의 시련 자체를 강제로 멈춰 세운 레녹의 선택·
하지만 관문이 열린 채 멈추면서 말레온의 수행원들 역시 팔겁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본래 8레벨에 오르지 못한 이에게는 허락되지 않던 전당에 들어올 수 있던 것 자체가 그 능력에 의구심을 품고 있던 단명종 덕분이었으니·
레녹을 대하는 장생종들의 태도가 서로 엇갈리고 어색해지는 것도 일견 당연한 일·
시련을 시작하기 전 엄포를 놓던 허령조차 동요한 기색을 감추지 못할 정도니 다른 이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진둔이 설계한 겁의 시련에 지겹도록 도전해 온 장생종일수록 믿을 수 없겠지·]
올리비에라가 차갑게 웃었다·
마치 그 사실 자체가 재밌어서 참기 어렵다는 듯한 묘한 어조·
[저 자존심 높은 늙은이들이 앞으로 너를 어떤 식으로 대할지 기대가 되는구나· 당분간 무료하지는 않겠군·]
“장생종들의 자존심을 부러뜨리겠다고 한 일은 아니니 상관없다·”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중요한 건 계획에 참가하는 보조인원을 늘려서 성공률을 높이는 일이니까· 애초에 그걸 위해서 한 일이기도 하고·”
팔겁의 시련을 잠시 마비시킨 것은 레녹 혼자 시련을 통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올리비에라 뿐만 아니라 여기 모여 있던 장생종들은 말레온을 돕기 위한 능력이나 술식을 지닌 이들·
팔겁의 전당에서 직접 그 작업을 행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승급 의식의 성공률이 조금이라도 더 높아지겠지·
[이번 계획에 대해서 저 늙은이들을 그만큼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올리비에라가 물었다·
[저들 중에서 누군가 보석룡을 배신하기라도 한다면 의식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텐데·]
“원래라면 말레온과 내가 자잘한 공정과 의식을 모조리 도맡아 처리해야 했겠지·”
레녹이 대답했다·
“그 준비과정을 분담하고 필요한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다면 감당할 수 있는 리스크다·”
[흐음····]
말레온의 계획은 팔겁의 성소 끝에 위치한 승급의 법진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승급의 법진은 진둔이 남겨둔 물건으로 9레벨에 도전하는 승급의식을 강제로 발생시킬 수 있는 바·
본래라면 팔겁에 드나들 수 있는 것은 8레벨의 대술사뿐이니 레녹과 말레온이 의식의 준비와 공정을 모두 분담해야 했겠지·
“말레온을 따르는 장생종 중에서 다른 마음을 품은 자가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런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하지만?]
“내가 승급 의식에 참여하는 이상 배신자를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레녹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설령 무언가 수작을 부린다고 해도 내가 의식을 직접 주관하는 한 무조건 이상을 알아차릴 수 있다·”
[배신자를 반드시 색출할 수 있기 때문에 리스크를 무시하고 시간을 줄이겠다?]
올리비에라가 고개를 저었다·
[실로 네놈다운 사고방식이구나· 아니면 너 자신의 도전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을 편하게 먹은 것뿐인가?]
“···말레온과 사전에 합의를 마쳤다· 그도 이번 일에서 어떤 변수가 있을지는 감안하고 있겠지·”
“둘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고 계시는가?”
순간 레녹의 뒤에서 불쑥 나타난 용의 머리가 말을 걸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뒤에 서 있던 말레온이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레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레온·”
“완벽하군· 지금까지는 오히려 기대 이상의 성과라고 해야겠지·”
말레온이 씩 웃으면서 멀리서 웅성이는 장생종들을 눈짓했다·
“자네가 일전에 말한 대로 팔겁 내부에서 ‘조정’을 마칠수록 최고의 상태에 가까워질걸세· 이대로라면 일이 더욱 편해지겠군·”
“····”
“그리고 여기 계신 분께서는 반의 친우라고 했던가?”
올리비에라를 향해 돌아선 말레온이 가슴에 손을 얹고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말레온 그노시스라고 하네· 팔대용왕을 이끄는 군주이자 원로성의 최고위원 중 한 명이지·”
[····]
“물론 그대가 긴히 알고 지내는 니백스의 원로성 동료이기도 하고·”
[나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군·]
“칠채보의 마안보유자에 대해 모를 리가 있을까·”
올리비에라의 냉소에 고개를 들어 올린 말레온이 웃었다·
“그대가 오랫동안 여러 마탑과 도시를 여행했음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네· 나도 어르신들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
[····]
“변치 않는 결말을 꿈꾸며 자신의 기원마저 바꿔버린 실패자라· 원래라면 우리는 이런 자리에서 만나서는 안 될 운명이었겠지·”
베일 너머 마안을 마주한 말레온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깊게 가라앉았다·
“하나 비틀린 인과가 이 순간으로 나를 이끌었다면 나는 그조차도 도전의 일부로서 받아들일 생각이네·”
[너는 이 계획에서 자신이 실패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군·]
올리비에라가 싸늘한 전성으로 답했다·
[그러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도전에 있어 유의미하다 생각하는 것이냐·]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끝냈으니 더 이상 사소한 것에 집착하지 않으려 하는 것뿐이지·”
날카로운 올리비에라의 말에 말레온이 담담하게 답했다·
“계획의 성패가 고작 한두 가지 변수에 구애받는다면 나는 처음부터 성공해서는 안 되는 도전자였다는 의미일 테니·”
[아니· 너는 성공해야 할 거다·]
팔짱을 낀 올리비에라가 고개를 젖히면서 대꾸했다·
[나와 견뢰가 네 도전에 협력하는 이상 너는 이 자리에서 반드시 구겁으로 향하는 다리가 되어주어야 할 테니·]
“····”
[스스로 부담을 느끼고 책임을 짊어져라· 위에 선 자로서 책무를 외면하고 도전에 임한다면 죽어서라도 성과를 내야 함을 자각하도록·]
“그건····”
설마 올리비에라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을까 순간적으로 눈을 크게 뜬 말레온이 웃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지론이로군· 혹시 황성에서 오신 분이셨던가?”
[····]
올리비에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비웃는 듯한 차가운 한숨과 함께 그대로 고개를 돌려 말레온을 스쳐 지나갔을 뿐·
말없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말레온이 이내 레녹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니백스의 지인답군·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시가 아니라 독이 담겨 있는 것 같은데·”
“니백스 오로시아가 어떻게 되었는지 너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레녹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걸 알면서도 굳이 이름을 꺼내 자극하니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도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하는건가?”
말레온 그노시스는 팔대용왕의 수장이면서도 원로성의 최고위원 자리를 역임하고 있는 권력가·
그런 그가 니백스의 독성권역에서 그녀가 무슨 꼴이 되었는지 모를 리가 없다·
그걸 알면서도 올리비에라에게 니백스를 언급하면서 아는 체를 했으니 그녀의 대답이 곱게 나가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
“음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군·”
말레온이 멋쩍은 기색으로 뺨을 긁적였다·
“그녀가 지닌 마안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반대로 그렇기에 변화하지 않는 힘일세· 이는 나의 도전에 있어서는 완전히 반대되는 역상성에 가깝지·”
“····”
“당연하지만 이 의식에 협조하는 건 그녀 자신에게도 좋은 일은 아니야·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자네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을 뿐이네·”
힐끗 시선을 돌린 말레온이 물었다·
“그만큼 그녀가 자네의 부탁을 들어주려 한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는가?”
“···이번 일을 위해 서로 거래를 하기는 했지·”
레녹이 그렇게 대꾸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승급의 법진은 어디에 있는 거지? 일단 법진의 상태를 파악해야 의식이 언제쯤 가능할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레온이 레녹에게 부탁한 일은 승급의 법진을 조정해 의식 과정을 보조하는 것·
사실상 말레온이 승급에 도전하기 위한 개시의 첫 단계를 레녹에게 맡기는 셈이다·
레녹이 법진을 조정해 승급의식을 발동시킬 수 있느냐에 따라 계획의 성공확률이 달라질 터·
말레온 역시 레녹이 하는 말을 이해했는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돌렸다·
“승급의 법진은 말했던 대로 팔겁의 성소 끝에 위치해 있지· 자네도 보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을걸세·”
“보는 순간 바로 알 수 있다고?”
“팔겁의 성소 끝에 무엇이 있을 것 같은가?”
“····”
뜬금없는 말레온의 질문에 표정을 찌푸렸던 레녹이 살짝 입을 벌렸다·
말레온이 그를 보며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그다음으로 향하는 문이 있지·”
“···그건·”
“승급의 법진은 구겁(九劫)의 시련 앞에 숨겨져 있네· 지금부터 자네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려주지·”
* * *
“후우 후우····”
“하아아····”
신비로운 장생종들의 조각상이 전시된 거대한 전당·
복도 안쪽 깊숙하게 들어갈수록 주변에서 들려오는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창백한 안색으로 땀을 줄줄 흘리는 고위 장생종들·
개중에서는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본체로 돌아와 움직이는 이들도 상당하다·
마치 팔겁의 안쪽으로 깊숙하게 들어갈수록 오래 버티기가 어려운 듯한 모습·
“8레벨에 도달하지 않은 채로 팔겁에 들어왔으니 심신이 압박에서 버티지 못하는 걸세·”
말레온이 설명했다·
창백해진 다른 장생종들에게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어 기력을 보충해 주면서 그가 말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바닷속에서 수압에 눌려 폐가 찌그러지는 고통에 가깝지· 알로건의 심해권역을 지나온 자네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나?”
“아니 무슨 뜻인지는 이해했다·”
레녹이 대답했다·
“내가 지금 이대로 구겁에 들어간다면 저들과 비슷한 고통을 겪게 될 거라는 뜻이겠지·”
“유감이지만 아마 이것보다 수십 배는 더할걸세·”
말레온이 쓰러진 허령을 스스럼없이 둘러업으며 웃었다·
“물론 나도 구겁에 직접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그곳에 다녀온 승천자의 말에 의하면 틀림없을 테지·”
“···그곳에 다녀온 승천자라·”
포혈공은 카이세의 시신을 구겁까지 운반하는데 한 승천자의 도움을 빌렸다고 말했다·
흡혈귀가 말한 승천자와 지금 말레온이 언급한 승천자는 과연 동일한 존재인 걸까·
레녹이 그 사실에 대해 묻기도 전에 말레온이 자연스럽게 설명했다·
“비색은 승천자 중에서도 이질적인 기원을 지닌 존재인지라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면 그의 힘을 빌릴 수 있지·”
“····”
“성격이 특이하고 대륙 바깥을 배회하는 것을 즐겨 교류하기는 어려우나 절차를 맞추면 그래도 소통이 가능한 초월자이기도 하네·”
승천자 비색·
그 이름을 아나테마의 기억에서 들어본 적이 있다·
권한을 대행하고 존재를 증거하여 아나테마의 추방을 가능케 힘을 빌려주었던 초월자·
그가 언젠가 쿤다라에 방문하여 구겁의 시공을 한번 들렀던 것인가·
“구겁 내부의 환경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하고 생명이 아닌 것들이 살아 배회하고 있다고 들었네·”
“····”
“원로성에서 구겁을 비워둔 것도 쿤다라를 설계할 당시 구겁의 환경이 이렇게 변질될 것을 창립자들이 감안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하더군·”
“구겁의 환경이 기존과는 다르게 변질되었다는 말인가?”
“글쎄 비색의 말에 의하면 그곳은 이미····”
말레온이 잠시 말을 고르다가 이내 고개를 털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일어나지 않은 일을 두고 고민할 이유는 없겠지· 벌써부터 최악의 경우를 상정할 필요는 없을 테니·”
“구겁에 대해 발설하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불안정해질 수 있다고 느끼는군·”
“걱정하지 말게· 구겁에 들어간 뒤에도 내가 자네를 도우리란 사실을 약속하고 싶었던 것뿐이니까·”
말레온이 씩 웃었다·
“내가 승천자가 되는 것으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지· 약속대로 자네를 구겁 최심부까지 데려다주어야 하지 않겠나?”
“····”
“그 부분에 대해 약조하려 한 것이었으니 안심하도록· 승천자가 된다고 해서 입을 싹 닫고 모른척하지는 않겠네·”
껄껄 웃으면서 턱을 쓰다듬는 말레온을 레녹이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카이세의 시신이 안치된 장소는 구겁의 십관·
구겁을 통과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십관이라는 장소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말레온이 설명한 것처럼 생명이 아닌 것들이 살아서 그곳을 배회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말레온 그노시스는 레녹이 보기에도 상당한 호인이지만 그럼에도 아직 그에게는 미심쩍은 부분이 남아 있다·
승급 의식에 앞서 마지막까지 그 부분을 의심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의식을 성공시킨 다음에 진실을 파헤쳐야 할까·
레녹이 생각에 잠긴 사이 말레온이 둘러업은 허령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들겼다·
“허령· 정신이 좀 드나?”
“···말레온 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데·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어떻겠나?”
허령이 힘겹게 고개를 들자 말레온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이런 곳에서 자네를 잃고 싶지는 않아· 원래라면 나 혼자서 할 도전이었으니 자네가 돌아가도 문제는 없을걸세·”
“말레온 님께서 목숨을 걸고 계시는데 제가 몸을 아껴서야 되겠습니까···”
허령이 힘겹게 말했다·
“제 술식이··· 도움이 될 겁니다···· 의식에 앞서 해 행운을··· 높여드릴 수 있다면····”
“····”
칠겁의 관리자치고는 무력이 높아 보이지 않다 했더니 행운과 관련된 술식을 사용하는 장생종이었나·
말레온 역시 허령의 술식이 도움이 될 거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숨을 헐떡이는 허령을 묵묵히 바라보던 말레온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쩔 수 없군·”
노쇠한 노인을 한 손으로 둘러업은 말레온이 비어 있는 다른 손으로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허공을 두들기듯 움직일 때마다 수인이 엄청난 속도로 바뀌면서 전환된다·
파아아아아앗!!!!
그 순간 말레온의 발아래서 무채색의 파문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팔겁의 전당을 뒤덮고 말레온을 따르는 장생종들을 보호하듯 펼쳐진 파문·
그 수인의 의미를 깨달은 레녹이 시선을 돌리고 말레온이 망설임 없이 영창을 마무리한다·
“자성영역 전-”
콰직!!
그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굵직한 발굽이 말레온의 손을 짓밟아버렸다·
강한 압력에 짓눌린 말레온의 손등이 우둑 부러지며 뒤틀리고 바닥과 충돌하며 충격파를 내뿜었다·
파아아앙!!!
“···!!!”
새파란 불꽃에 휩싸인 발굽의 형상·
말레온의 손을 밟은 채 그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거대한 순록의 모습·
순록의 머리 위로 솟구친 거대한 뿔 위로 푸른 불길이 쉴 새 없이 타오르면서 주변을 은은하게 밝힌다·
레녹이 표정을 찌푸리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래 그냥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지·”
순간적으로 말레온이 반응조차 할 틈을 주지 않고 그의 손을 짓밟아 뭉개버릴 정도로 빠른 속도와 각력·
팔겁의 공간 안에서 멀쩡하게 움직이며 말레온의 자성영역 전개를 멈춰세울 정도로 기민한 반응·
발굽과 뿔 양쪽에서 타오르는 기묘한 푸른 불꽃의 존재까지·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결코 평범한 장생종 따위는 아니다·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한발 앞으로 나서려던 그 순간 말레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자리까지 배웅을 나오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만·”
자신의 손을 짓뭉갠 상대에게 건네는 것치고는 굉장히 점잖은 말·
하지만 순록은 외려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까칠하게 대꾸했다·
“배웅이 아니라 감시를 하러 온 것뿐이다·”
“····”
“네가 어리석은 짓을 하려는 것을 막아주었으니 오히려 배려에 감사해야 할 것 같다만·”
말레온을 내려다보는 순록의 눈빛이 고요하게 빛났다·
“니백스가 그런 꼴이 되어 영락했음에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구나·”
“레 레그누스 님···!!”
말레온의 뒤에서 숨을 헐떡이던 허령이 순록을 알아본 듯 경악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원로성의 최고위원께서 아직 이곳에···!!”
그제서야 레녹은 말레온을 막아선 순록이 누구인지 깨닫고 표정을 찌푸렸다·
팔겁에 출입하며 기거하는 것 허락된 쿤다라의 최고의결기관·
외겁도시에서도 다섯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원로성 최고위원이 일행의 앞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팔겁의 관리자로서 내가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텐데·”
레그누스라 불린 장생종이 차갑게 말했다·
“오히려 정당한 방식으로 시련을 통과하지 않은 존재들이 전당에 들어온 것이 더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
“하나 그것보다도 더 중한 일이 아니었다면 내가 직접 움직이지도 않았을 테지·”
“중요한 일 말씀이십니까?”
“구겁의 시간이 다시 움직이고 진둔의 유지가 성소에서 맥동하고 있으니·”
거대한 순록의 푸른 안광이 레녹을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너희들 중에서 승천자의 은총을 받은 존재가 있는 듯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