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2화
쿤다라(5)
쿤다라의 장원에서 오백로를 두던 두 소년을 향해 레녹이 말을 건넨 직후·
이마에 핏대가 솟은 적의 소년이 쥐고 있던 흑돌을 장기판에 내리찍었다·
쾅!!
붉은 도포를 걸친 소년이 당장이라도 레녹을 찢어 죽일 것처럼 노려보면서 으르렁거렸다·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길래 감히 어르신들이 노는 곳에 끼어드려 하는 게냐·”
“····”
“그것도 대국 도중에 훈수를 두다니 요즘 것들은 제대로 된 예의범절도 배우지 못한 모양이군·”
“흠·”
“뭘 그렇게 쳐다봐 아앙? 당장이라도 네 입을 꿰매줄까?”
당장이라도 돌을 내려놓고 레녹에게 달려들 것처럼 몸을 들썩이는 적의 소년의 모습·
겉으로 보기에 단정한 용모를 하고 있는데도 상당한 다혈질이다·
맞은 편에 앉아 있던 검은 도포를 입은 소년이 외려 적의 소년을 만류하고 나설 정도·
“앙그론 진정하게· 너무 흥분했지 않은가·”
표표한 목소리로 앙그론이라 불린 적의 소년을 만류한 흑의 소년이 힐끗 레녹을 바라보았다·
적의 소년과는 달리 마냥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은 모습·
애초에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이 희미하기 그지없다·
“무슨 연유로 우리같은 노친네들을 괴롭히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서로 가던 길을 가는 것이 좋겠구려·”
흑의 소년이 옷소매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사지 멀쩡한 청년이 이런 장원에서 난동을 피워봤자 구경하던 이들의 눈쌀만 찌푸려질 뿐이라오·”
“죄송합니다·”
레녹이 웃으면서 사과했다·
“두 분께서 두고 계시는 대국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 저도 모르게 몰입하다 그만 참지 못했군요·”
“···흐음·”
입발린 칭찬 몇 마디를 듣자마자 길길이 날뛰던 앙그론의 기세가 살짝 수그러든다·
오히려 살짝 기분이 좋아진 듯 헛기침을 하면서 힐끗 장기판을 내려다보는 모습·
하지만 레녹의 말을 들은 흑의 소년은 반대로 표정을 굳혔다·
“단순히 지나가며 아무에게나 시비를 거는 미치광이는 아니셨군·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의 대국에 끼어든 것이오?”
레녹이 두 소년의 대국을 지켜보다 결정적인 순간에 끼어들어 도발을 갈겼음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흑의 소년은 앙그론과는 반대로 더욱 레녹을 경계하게 된 것 같았다·
“나와 앙그론은 보셨듯이 아주 중요한 대국을 이어가고 있었소· 몇 수만 더 두고 나면 결론이 날법한 중요한 상황이었지·”
“····”
“이 상황에 개입해 흐름을 깬 젊은이의 의도가 무척이나 악의적이라는 사실에는 여기 있는 앙그론도 동의할 것 같소만·”
“그 그렇지·”
흑의 청년의 말을 듣고 있던 앙그론이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이빨을 드러냈다·
“야 이 어린놈의 자식아· 네놈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어르신들은 아주 중요한 문제를 두고 오백로를 두고 있었단 말이다·”
“····”
“프리몬과 한참 고심하면서 이제 겨우 승부를 낼 생각이었는데 감히 이 몸을 방해해? 죽고 싶은 게냐?”
레녹이 진정시킨 앙그론을 말 한마디로 다시 화를 돋궈 버린 프리몬이라는 흑의 소년·
하지만 레녹은 능수능란한 흑의 소년의 화법을 듣고도 평정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았다면 두분의 대국이 의미가 없어졌을 겁니다·”
“뭐라고?”
“보아하니 같은 대국을 벌써 50번 이상 이어오신 듯한데 이번에도 결론이 나지 않으면 안타까운 일이겠지요·”
두 소년을 보며 레녹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말을 얹었습니다· 어르신들께서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
침묵이 흘렀다·
레녹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의 동시에 두 소년이 입을 다물었기 때문·
“···너·”
앙그램이 뜨거운 숨결을 훅 내쉬면서 물었다·
“우리가 같은 대국을 반복해서 두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안 거냐·”
“····”
“이 장원에서 대국을 시작한 지는 아직 다섯 번도 되지 않았는데· 뭘 본 거지?”
프리몬은 앙그론을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레녹의 대답을 기다렸을 뿐·
레녹은 그런 두 소년의 반응을 바라보면서 차분하게 호흡을 골랐다·
장원에서 대국을 두고 있는 두 소년은 틀림없이 높은 위계에 도달한 장생종이다·
두고 있는 대국의 수준만 보아도 여기 장원에서 펼쳐지는 대국 중에서 가장 높았던 바·
일단 두 소년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으니 여기서부터는 말을 잘 골라야 할 터·
그리고 레녹은 어떤 식으로 화두를 꺼내야 할지 두 사람이 두는 대국을 본 순간부터 정해둔 상태였다·
“그야 두 분께서 지금 두고 계시는 대국은····”
살짝 숨을 고르고 틈을 들인 뒤 느릿하게 강조하듯 말을 내뱉는다·
레녹이 뒷짐을 진 채 살짝 고개를 치켜들면서 말했다·
“정상적으로 승부가 진행이 되었다면 애초에 나올 수 없는 게임이기 때문이지요·”
“····”
“두 분께서 두신 대국을 복기하면 승패가 갈릴 만한 분수령이 족히 서른 번은 넘게 있었을겁니다·”
고요해진 두 소년을 두고 레녹이 말을 이었다·
“승부가 날 법한 국면이 여러 번 있었음에도 지금까지 대국이 이어져 왔다는 것은 두 분께서 의도적으로 그러한 국면을 무시해 왔다는 증거·”
“····”
“두 분께서 순수하게 서로의 실력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어 이 대국을 이어가고 있었다는 뜻이지요·”
레녹이 장기판을 힐끗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전의 대국을 직접 보지 못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지금처럼 565수 근처에서 같은 국면을 반복해 오시지 않았을까 싶군요·”
“···너 어떻게·”
“보아하니 특정한 국면을 만들어 놓고 앙그론 님께서 공세를 취하고 프리몬 님이 받아치는 국면을 반복하고 계시는 듯한데····”
장기판을 잠시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게임이 반복된 횟수와 서로 둔 돌의 횟수까지 알아맞히는 레녹의 말에 앙그론이 놀란 사이·
레녹이 턱을 매만지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정해진 구도를 반복적으로 연습하는 것을 보니 꼭 문제를 푸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군요· 무슨 시험이라도 준비하고 계신 겁니까?”
“····”
침묵이 흘렀다·
앙그론이 입을 살짝 벌리고 프리몬이 침묵했다·
마치 레녹의 입에서 그러한 말이 나올줄은 몰랐다는 듯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대에게 허를 찔린 듯한 반응·
“놀랍구려·”
흑의 소년 프리몬이 손에 쥐고 있던 백돌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레녹을 향해 몸을 돌린 소년이 묘한 표정으로 레녹을 응시했다·
“쿤다라의 오겁(五劫)에서 이 대국의 의미를 알아볼 수 있는 기사가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는데·”
“····”
“심지어 자세한 정황을 모르는 상태로 본질을 꿰뚫어본 것인가· 그렇기에 젊은이의 고견에 더욱 가치가 있을 듯하군·”
“감사합니다·”
“젊은이의 말에 틀린 점이 없소· 우리는 현재 똑같은 대국을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한 가지 내기를 하고 있지·”
빙긋 웃고 있는 레녹을 향해 몸을 돌린 흑의 소년이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장기판을 가리켰다·
“이 국면에서 앙그론이 내 수세를 뚫어낼 방법이 있는 것인지· 결과에 따라 앙그론은 내게 문제를 풀 ‘자격’을 양보해야 하오·”
“····”
“나는 그의 일에 협조하는 것을 대가로 내기를 받아들였지만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아 시간을 축내던 참이었지·”
레녹을 바라보는 프리몬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깃드는 듯했다·
“간만에 재능 있는 젊은이를 보았으니 오늘의 무례는 너그럽게 넘어가겠소· 그러니 이제 그만-”
“아 내기였다면 납득이 가는군요·”
프리몬의 말을 끊은 레녹이 물었다·
“그래서 앙그론 님의 돌을 속여 일부러 국면을 불리하게 만들고 계셨던 겁니까?”
“····”
“뭐?”
프리몬이 입을 다물고 앙그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뭔 개소리냐 이놈아· 프리몬이 이 장기판에서 어떻게 날 속이고 있다는-”
“프리몬 님께서 두신 돌의 배치를 보면 생문과 사문이 어지러이 뒤섞여 혼재되고 있습니다·”
앙그론의 말을 끊은 레녹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는 술식의 원형과 형태를 고의적으로 흐트려 망가뜨리는 환술계열의 특징으로 프리몬 님께서 굉장히 뛰어난 환술사라는 증거지요·”
“····”
“그를 통해서 장기를 두는 도중 이렇게-”
레녹이 장기판에 놓인 백돌을 하나 집어드는 순간 그것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장기판에서 들어 올리는 순간 흑돌로 변한 돌을 내민 레녹이 모른 척 반문했다·
“환술을 사용해 돌의 색을 하나씩 바꾸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만· 제가 착각한 걸까요?”
“···어·”
앙그론이 멍하니 레녹의 손에 들린 흑돌과 돌이 놓여 있던 자리를 바라보다 무언가 깨달은 듯 소리쳤다·
“아니 잠깐!! 그거 560수에 내가 두었던 돌이잖아!! 날 속였구나?”
“····”
오백로는 흑돌과 백돌이 서로를 잡아먹는 와중에 서로 색을 바꾸기까지 하는 복잡한 게임·
당연하지만 대국에서 흑돌과 백돌의 숫자가 같은 수로 유지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대국이 오래 이어질수록 변화가 격해지기에 뛰어난 기사조차 색의 변화를 모두 인지하고 있기란 어려운 일·
프리몬은 그 사실을 이용해 장기판에 환술을 걸고 앙그론의 흑돌을 백돌로 바꾸고 있던 것이다·
“이 자식 왜 갑자기 어린놈에게 말을 걸면서 쓸데없이 시간을 끄나 했더니····”
앙그론이 쫓아내려던 레녹을 잡고 말을 걸어 시간을 끌던 것 자체가 돌에 환술을 걸기 위해서였나·
그 사실을 깨달은 앙그론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프리몬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재수 없는 까마귀 놈이 내가 이놈을 혼내는 사이에 사기를 쳐?!!”
“···쯧 젊은이·”
프리몬이 미미하게 표정을 찌푸린 채 힐끗 시선을 돌렸다·
“가만히 있었으면 화를 피하도록 도와주었을 텐데 아까부터 쓸데없는 말을 하나씩 얹는구려·”
“그렇습니까?”
레녹이 웃는 표정으로 일관하자 흑의 소년이 짜증스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환술로 속인 것은 미안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앙그론이 답을 찾는 일은 없었을 거요·”
흐트러진 장기판을 내려다보던 프리몬이 천천히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나는 앙그론이 불가능한 일에 오래 매달리지 않도록 도와주려 한 것뿐이라오·”
“뭐라고? 이 새끼가····”
“그래서 오늘 내기를 망친 것을 젊은이는 어떻게 책임지실 생각이신가?”
역정을 내는 앙그론을 무시한 프리몬이 레녹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우리 같은 늙은이들의 유희를 망쳐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도망칠 생각은 아니겠지?”
“두 분께서 하고 계시던 내기는 오백로의 특정한 국면에서 돌을 살리고 죽이는 사활 문제였지요·”
레녹이 태연하게 답했다·
“그렇다면 제가 두 분께서 풀고 계시던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문제를 푼다라·”
순간 레녹을 바라보는 프리몬의 입가에 비웃는 듯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 말을 듣고서야 외려 안심했다는 듯 느긋하게 몸을 뒤로 젖히면서 흑의 소년이 입을 열었다·
“젊은이가 대국을 잠깐 보고 우리의 술식과 내력을 알아맞힐 수 있을 만큼 뛰어난 기사라는 사실은 이해했소·”
“····”
“실제로 앙그론은 화예종(火鯢種)으로 태어나 염열술식을 익혔고 나는 환술을 익힌 현오(玄烏)이니· 그 안목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터·”
프리몬이 무심한 눈길로 레녹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쿤다라 어디에서도 젊은이 같은 재주를 가진 기사가 있다는 사실을 들어보지 못했소· 알고 있겠지?”
“····”
“좋소· 젊은이가 판에 끼어드는 것을 허락하지·”
흑의 소년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원하는 대로 한번 앙그론에게 훈수를 해보시오· 하지만 그 무례가 고작 대국을 방해하는 수준에 그친다면····”
프리몬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섬뜩하게 번뜩였다·
“그때는 귀인의 얼마 되지 않는 수명을 모조리 내놓아야 할 테요·”
“····”
“프리몬 미친 거냐? 내가 왜 이놈의 훈수를 옆에서 듣고 있어야 하는데?”
화난 표정의 앙그론이 레녹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삿대질했다·
“난 훈수 따위 필요없-”
“훈수를 드리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레녹이 웃으면서 말했다·
“앙그론 님의 불과 같이 격렬하고 화끈한 기풍이 아니었다면 제가 이 대국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었을 리가 없지요·”
“····”
느닷없이 칭찬을 듣게 된 적의 소년이 눈을 끔벅였다·
레녹이 그 틈을 노리지 않고 재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모든 국면에서 공세를 취하면서도 매 순간의 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격렬합니다· 염열계 술식에 극도로 뛰어난 소양을 보아하니 화룡의 화신과도 같군요·”
“그 그런가?”
“대국의 깊이를 보아하니 80년 이상 염열술식을 익히고 수련을 쌓아오신 듯한데 그 시간의 깊이를 저 같은 범부는 감히 가늠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흐 흐흠··· 사실 염열술식을 익힌 지는 70년밖에 안 되긴 했는데·”
앙그론이 헛기침을 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레녹이 던진 오백로 실력에 대한 칭찬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자못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 하지만 소년의 입꼬리가 마구 씰룩이고 있었다·
“네가 보기에도 내 술식내력이 원래보다 훨씬 깊어 보이는 모양이군· 그만큼 내 수양의 깊이가 깊다는 증거겠지·”
“이를 말이겠습니까·”
“····”
엣헴 콧대를 세우는 앙그론과 옆에서 능숙하게 맞장구를 치는 레녹의 모습·
프리몬의 감정이 옅은 얼굴이 보기 드물게 한심한 기색을 담고 있었다·
레녹이 앙그론이 술식을 익힌 시간을 알고도 억지로 그의 기분을 띄워주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앙그론은 그런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채 한껏 기분이 좋아진 표정으로 장기판을 탁탁 두들겼다·
“좋다· 네놈 정도 되는 안목을 가진 기사라면 감히 나의 대국에 조언을 두는 것을 허락하지· 한번 해 봐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웃고 있던 레녹의 표정이 순간 차갑게 변했다·
“해당 국면에 도달하기 전까지 처음부터 다시 대국을 둬 주시겠습니까?”
“···뭐?”
“어디까지나 문제를 푸는 것은 앙그론 님의 몫이고 저는 옆에서 도와드릴 뿐이지요·”
레녹이 말했다·
“제가 아니라 앙그론 님께 적합한 방식대로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는 대국을 처음부터 지켜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그러지··· 이봐 프리몬· 자네도 빨리 협조해·”
떨떠름한 표정으로 흑돌을 들어 올린 앙그론이 맞은 편에 앉은 프리몬을 째려보았다·
“내가 내기를 포기하기 전까지는 약속대로 문제를 푸는 일을 도와줘야겠어· 알고 있겠지?”
“소용없는 일이라고 분명 말했을 터인데····”
프리몬이 어깨를 으쓱이면서도 얌전히 앙그론의 말에 따라 돌을 놓기 시작했다·
장생종끼리 내기를 하고 있던 만큼 흑의 소년 역시 멋대로 발을 뺄 수는 없기 때문이겠지·
톡 톡·
수십 번이고 반복해서 둔 대국이기 때문일까 두 소년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장기판에 돌을 채워 나간다·
장기판 위에서 빠른 속도로 뒤집히면서 색을 휙휙 바꿔나가는 흑돌과 백돌의 형상·
판 위에 놓인 돌이 어느새 500수를 넘어간 찰나 레녹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역시 단순한 내기바둑이나 사활문제 따위는 아니었군·’
전체적인 국면 자체가 철저하게 앙그론의 흑돌이 뚫어내고 풀어낼 수 있는지를 시험하고 있다·
마치 앙그론의 역량을 시험하기 위해 국면을 의도하고 깎아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듯한 형태·
애초에 두 사람의 장생종이 특정한 국면을 두고 문제를 풀고 있다면 그 문제는 누가 출제한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프리몬은 앙그론을 속여가면서까지 문제를 풀 ‘자격’을 손에 넣으려 하는 것일까·
두 장생종이 두고 있는 대국의 국면도 상황도 태도도 어느 것 하나 수상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린놈아· 네 말대로 대국을 처음부터 다시 두어 여기까지 왔다·”
생각에 잠긴 사이 어느새 앙그론이 돌을 두는 것을 멈추고 레녹을 바라보고 있었다·
“565수· 여기서부터 국면이 막혀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구나·”
“····”
“양옆으로는 장문· 뒤로는 궁락· 사선으로는 호마· 정면에는 공박으로 이어지는 형태이니· 어디로 돌을 두든 잡아먹힐 뿐이다·”
앙그론이 표정을 찡그린 채 말했다·
“결정적인 벽 앞에 가로막혀 길을 잃은 기분이구나· 아주 작은 단초라도 얻는다면 생각이 트일 법도 한데····”
“벽에 막혀 길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판을 바라보던 레녹이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앙그론 님께서 아직 염열계 술식의 본질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으신 것뿐이지요·”
“뭐라?”
“제가 처음부터 지켜본 결과 이 대국이 565수까지 이어져 온 것은 앙그론 님 본인의 의지였습니다·”
레녹이 앙그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순간의 계산에 집착하지 않고 앙그론 님께서 익히신 염열계 술식의 소양을 오백로로 표현해낸 결과였지요·”
“····”
수신용왕 알로건이 그러했듯 쿤다라의 장생종이 오백로를 두는 방식은 수의 계산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다·
스스로가 익힌 술식과 술법진 작성 요령을 기준으로 삼아서 수싸움을 넘어선 기풍을 판에 펼쳐낼 뿐·
그렇다면 레녹이 앙그론에게 조언해 주어야 하는 것은 세세한 돌의 위치가 아니라 방향성에 있었다·
“어디로든 상관없습니다· 계속해서 이어두시지요·”
“말하지 않았느냐· 어디로 두든 돌이 먹혀서 백돌로 변하든 먹혀 집이 될 뿐이라고-”
“염열계 술식의 핵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앙그론의 말을 끊은 레녹이 힐끗 소년을 돌아보았다·
“스스로를 장작으로 삼아 태워가며 예열하고 끊임없이 불씨를 갈구하는 지속성이 이 안에 있지요·”
“····”
“앙그론 님께서 오백로를 통해 그러한 술식의 본질을 나타내고자 하셨다면 마지막까지 그것을 유지하셔야 합니다·”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돌이 비어 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멍하니 레녹의 말을 듣고 있던 앙그론이 홀린 듯이 흑돌을 빈자리에 내려놓기 시작했다·
맞은 편에 앉아 있던 프리몬이 즉시 백돌을 두고 앙그론이 둔 흑돌을 잡아먹고 백돌로 바꾸어간다·
하지만 레녹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앙그론에게 자신의 돌이 잡아먹히는 것을 권유하고 있었다·
“불태우고 잡아먹히고 다시 불태워서 또 잡아먹습니다·”
“····”
“염열계 술식의 본질은 자기 자신마저 불태우는 파멸성에 있으니· 만약 앙그론 님께서 그러한 기조를 마지막까지 관철하실 수 있다면-”
프리몬의 백돌에 계속해서 잡아먹히던 흑돌이 어느샌가 장기판 위를 다시 채우기 시작한다·
백돌의 무리 속에서 살아남은 흑돌이 주변을 불태우며 새카맣게 물들이듯 장기판 위를 빠르게 뒤덮는다·
돌을 둘때마다 장기판 위로 수십번이 넘는 생과 사가 오가고 색이 변화하면서 어지럽게 회전한다·
수를 일일이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술식의 묘리에 맞춰서 계산을 뛰어넘는 소양을 장기판에 펼쳐냈다·
“계산해서 완성하는 것 이상의 결과를 판 위에 펼쳐낼 수도 있는 법이지요·”
진둔이 오백로를 창시하면서 추구했던 게임의 본질·
천번의 신분으로 이미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해본 레녹만이 전해줄 수 있는 염열마법의 핵심·
그에 맞춰 앙그론이 홀린듯이 돌을 옮기고 자신의 돌을 죽이면서 불사르던 그 순간·
“이 이건····”
두 소년이 마주 앉은 장기판이 어느새 흑돌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한 번에 800여 개의 돌을 놓을 수 있는 판 위에 올라온 모든 돌이 새카만 흑빛으로 물든 기이한 모습·
“이건 꽤 재미있는 일이군요·”
앙그론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뒤에서 지켜보던 레녹이 신기한 것을 본 것처럼 턱을 짚었다·
“아무리 완벽한 대국을 둔다 해도 한쪽의 돌이 장기판 전체를 모두 채우는 경우는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만·”
“····”
“제가 의도한 결과는 아니었으니 애초에 두 분께서 두고 있던 대국 자체가 이러한 결과를 유도하도록 설계된 국면이 아닐까 싶은데·”
“이 이럴 수가····”
“대체 어디서 출제된 문제를 풀고 계셨길래-”
앙그론이 레녹의 말을 귀담아듣지도 않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파 팔겁(八劫)의 시련을 이렇게 쉽게····”
“···팔겁의 시련?”
레녹의 표정이 덩달아 떨떠름하게 변했다·
“그럼 두 분께서 두고 있던 대국이 팔겁의 시련을 통과하기 위한 연습이었던 겁니까?”
그 한마디로 어째서 이 소년들이 지금 이 대국에 집착하고 있는지 레녹도 깨달았기 때문·
설마 쿤다라의 장생종들이 오백로라는 게임에 몰두하고 집착하던 이유는 단순히 유희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 선생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앙그론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털썩 꿇었다·
맞은 편에서 썩은 표정으로 앉아있던 프리몬이 뒤늦게 앙그론을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주변에서 오백로를 두던 다른 이들까지도 놀라서 덩달아 이쪽을 돌아볼 정도·
하지만 앙그론은 그런 주변의 시선 따위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선생님!!”
“····”
“팔겁의 시련을 통과하려면 선생님의 조언이 필요합니다· 제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흠··· 제가 감히 누군가를 가르칠 실력이 될지····”
고심하는 척하는 레녹의 반응에 애가 탄 것인지 적의 소년이 그 자리에서 양손으로 땅을 짚었다·
양손으로 땅을 짚고 고개를 푹 숙인 앙그론이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면서 소리쳤다·
“이 화예종의 앙그론·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팔겁의 시련을 통과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제발 가르침을···!!”
고개를 푹 숙인 앙그론의 모습과 고함소리가 지나치게 크다·
주변의 행인을 무시하고 대국에 집중하던 장원의 다른 장생종들도 어느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군요·”
작게 한숨을 내쉰 레녹이 천천히 앙그론을 향해 돌아섰다·
고개를 푹 숙인 앙그론을 내려다보는 레녹이 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럼 쿤다라에선 스승에게 어떤 성의를 보일 수 있는지부터 확인해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