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9화· 대거점, ‘화과산(花果山)’ (1)
“끄으으으····”
“쿨럭! 켁! 케엑····”
“사 살려줘!”
“부상자들은 이쪽으로 옮겨라!”
“물 깨끗한 물을 당장 가져와!”
비명과 고함 소리가 어우러진 전장·
수많은 원숭이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나뒹굴었다·
5시간이 넘게 계속된 접전으로 인해 엄청난 수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아름다운 화과산이 붉은빛으로 물들어 버린 것이다·
“왕이시여! 물러나야 합니다·”
장로 중 하나인 성순이 고함을 질렀다·
워낙에 머릿수에서 차이가 나는 상황·
그런 와중에 계속해서 소모전을 펼치는 건 미친 짓이었다·
“····”
제천대성이 어금니를 부러져라 깨물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눌러 부족한 숫자를 극복하려 했지만 자신을 막아서는 태고의 존재들은 쉽사리 길을 터주지 않았다·
협공을 통해 천천히 힘을 깎아내려는 작전이다·
“굉장하긴 하군·”
“그러게 말이야· 원숭이 사냥이 이 정도로 힘들 줄은 몰랐어·”
“크하하하! 하기야 이 정도는 되어야 그 오만한 칭호를 가질 만하지·”
바르어비스를 비롯한 틴달로스의 사냥개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늘어놨다·
십이지의 장로급에 해당하는 이들이 셋이나 죽었고· 데리고 온 쇼거스들도 수백 마리가 넘게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렸다·
명불허전·
고작 한 개체가 한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강하더라도 개인이라는 한계는 정해져 있는 법·
제천대성 혼자서 모든 전장을 아우를 순 없었다·
“···안쪽으로 물러난다·”
제천대성이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모든 영토의 입구라 할 수 있는 관문을 내어주는 건 뼈아픈 일이지만 여기서 더 무리하다가는 화과산 전체를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곧바로 대군이 일사분란하게 산 안쪽으로 패주를 시작했다·
지형지물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는 원숭이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쫓지 마라!”
틴달로스의 사냥개 중 하나가 소리쳤다·
괜히 저 험지로 따라갔다간 병력의 손실만 커질뿐더러 이곳을 확보한 것만으로도 이미 소기의 목적을 전부 달성했다·
승리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럴 순 없소!”
“지금 저놈들을 잡지 않으면 큰 후환이 될 거외다!”
“동감이에요·”
장로를 잃은 십이지들 쪽에서는 강력한 반발이 터져나왔다·
많은 동족들을 잃었기에 등을 보이고 도망가는 원숭이들이라도 갈가리 찢어놔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주제 파악도 못하고 감히 누구 말에 토를····”
“됐다· 내버려 둬라·”
지켜보던 바르어비스가 손을 휘저었다·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재밌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복수심이란 좋은 동기·
대승을 거둔 마당에 타오르는 불길에 장작을 빼버릴 필요는 없겠지·
피해를 입더라도 자기들이 입는 거니까·
주력이 멀쩡하다면 저런 놈들이야 몇 마리가 죽든 상관없었다· 무엇보다 아직 기분이 좋아질 만큼의 피가 흐르지 않았다·
*
쿵! 쿵! 쿵!
곧바로 추격대가 편성되었다·
분노에 미쳐버린 십이지의 전사들이 각기 다른 방향에서 화과산 안쪽으로 접근했다·
“전부 죽여라!”
“단 한 마리도 남겨선 안 된다!”
특히나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족의 전사들이 약이 바짝 올라있는 상태·
독을 잔뜩 주입한 뒤 한 입에 산채로 삼켜야 조금은 체증이 가실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산을 올랐을까?
엄청난 수의 희생이 있었지만 꽤나 규모가 있는 원숭이 무리를 추격하는 데 성공했다·
“크윽·”
장로 중 하나인 성순·
부상자들을 무사히 대피시키기 위해 가장 위험하고 꼬리가 잡히기 쉬운 길을 고른 결과였다·
“장로····”
“이 앞은 절벽입니다·”
“여기···까지인가 보군요·”
함께 했던 전사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이곳이 자신들의 무덤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주력을 놓친 건 아쉽긴 하지만 성순· 네놈을 잡았으니 마냥 기분이 나쁘진 않구나· 어차피 도망친 놈들이야 차차 찾아내 죽여버리면 그뿐이니까·”
“그런 말을 하면서 창피하지도 않는 것이냐? 평소에는 화과산이 있는 방향으로 눈도 못 마주치던 놈들이 기가 산 꼬라지 하고는·”
카악 퉤·
성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새로운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이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인간 놈이 이곳까지 와준 덕에 그분들이 움직이기로 하신 거지·”
그러니·
불평하지 말고 그 대세를 거역한 것을 후회하다 죽어라·
철컹!
각종 병장기들이 예기를 뿜어냈다·
그런데· 일방적인 학살이 이루어지려는 바로 그 순간·
콰콰콰콰콰!
형형색색의 폭풍이 몰아쳤다·
“크아아악!”
“쉬이익!”
상식을 초월하는 고밀도의 마력·
각자의 특성을 살린 능력들이 한 곳으로 집중되자 끔찍한 참사가 벌어졌다·
“저 적이다!”
“왼쪽 측면· 오른 쪽에도 있습니다· 전부··· 강자들입니다!”
한 발 늦게 이변을 감지한 전사들이 진열을 재정비했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은 뒤였다·
수백이 넘는 사상자가 나뒹굴고 있었으니까·
“흐음· 여기가 화과산인가 보구나·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광경이로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나 봐요·”
“저는 부상자들을 보호하는데 집중하겠습니다·”
엘리스와 테레사 그리고 서리혼령을 필두로·
[기계 군단이 ‘섬멸 모드’로 전환됩니다·]
[aye aye sir·]
엄청난 수의 드론들이 허공에서 비가시 모드를 해제했다·
주포에 모이는 푸른 빛·
“모기이이이!”
“미요오오!”
하늘 위로 두 마리의 고대종이 포효했다·
“장로나 간부급들은 부탁드려요· 일반 전사들은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이태민이 전장을 지배했다·
폭격 드론들이 퇴로를 포함한 모든 길목을 차단시켰다·
콰앙!
정면에 선 격투 소녀가 양 손에 낀 건틀렛을 맞부딪쳤다·
“저녁은 뱀술에 뱀고긴가?”
유연화가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도우러 왔습니다·”
진혁을 포함한 고인물 코퍼레이션이 제천대성의 편에 가세했다·
***
전장에 생긴 새로운 바람·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의 개입으로 인해 일방적으로 진행되던 추격전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사족의 정예들이 1시간도 안 되어 모조리 전멸해버렸으니····
···당연히 무리한 다음 수를 이어 나가지 못할 수밖에·
모든 것을 멸시하던 바르어비스와 틴달로스의 사냥개들 역시 강진혁이라는 이름 앞에 극도의 경계심을 드러냈다·
태고의 존재들마저 사냥하는 괴물·
그 앞에서는 아무리 강한 자라고 하더라도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덕분에 소중한 이들을 잃지 않았다· 일족을 대신해 감사를 표하마·”
제천대성이 진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뜨겁게 전해지는 기운·
진심으로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별말씀을· 동맹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진혁이 특별히 ‘동맹’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이래야 빼도박도 못하고 함께하는 관계가 형성되거든·
이걸 인정하는 즉시 화과산이라는 노른자 위 거점을 철저하게 이용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
그리고 당연히·
분위기상 제천대성 역시 그 흐름에 편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좋아·
이걸로 첫 번째 관문은 넘었고·
다음은····
“해서 말인데 ‘동맹’을 지키기 위해서 이곳에 무리해서 오느라 제 동료들의 몸이 많이 상했습니다·”
크흠! 큼!
목소리를 가다듬어 본다·
아아· 아니 이거 말고 2톤 정도 낮춰서·
감정이 북받쳐서 목이 잠긴 기미가 보여야 한다·
“마력이 폭주하는 증상이라고· 아마 들어보셨을 텐데 그걸로 고생하는 애들이 나와서요· 그런 와중에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없고· 너무 가슴이··· 찢어지게 아픕니다·”
손수건을 꺼낸 진혁이 눈가를 닦았다·
당연하지만 건조하다 못해 뽀송뽀송한 손수건에는 아무것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
“마력····”
“폭주?”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마력의 폭주는커녕 극적인 상황을 연출한다고 일부러 가만히 지켜만 보라던 진혁이었다·
충분히 휴식을 취하며 화과산의 단풍구경까지 한 건 덤이었다·
바로 그때·
뽀각!
“끼아아아아!”
운디네가 정강이를 움켜잡은 채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보십쇼· 마력이 폭주하면서 나타나는 부작용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보시면 바로 알 거라 믿습니다· 아마 방치한다면 나머지 애들에게도 같은 비극이 일어나겠죠·”
진혁이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나머지 정령수들을 바라봤다·
알아서 기어라·
모조리 같은 꼴이 되기 싫으면·
굳이 말로 내뱉지 않아도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나머지 소환수들이 하나같이 팔다리를 움켜잡고 쓰러졌다·
“나 죽네· 나 죽어!”
“모기기이이!”
“주 주인 살려줘· 몸이 몸이 타들어 갈 것만 같아!”
“미요오오!”
눈치 빼면 시체라고·
혹독한 회사생활에 완전히 적응한 사원들의 연기 솜씨는 절정에 달해 있었다·
“우리 때문에 무리를 한 건가·”
제천대성의 표정이 한 층 더 어두워졌다·
부하와 백성들을 희생시킨다는 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그 누구보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도움이 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말해라·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라면 전폭적인 지원을 하겠다·”
“진심···으로 하는 말씀입니까?”
“물론이다· 그대들은 일족의 은인이나 다름 없을 터· 왕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호오·
걸려 들었네·
진혁이 손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마침 이곳에는 마력 폭주에 아주 탁월한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맛도 좋고· 성능도 좋은 탐스러운 과실이·”
“설마····”
그래· 그 설마다·
천도복숭아·
흔히 1개만 먹어도 3000년의 수명이 늘어난다고 알려진 천상의 열매다·
중층부의 넥타르나 암브로시아 혹은 성수 같은 효과· 허나 활용도적인 측면이나 입수난이도에서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공정만 거치면 49층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달달한 보상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그건····”
제천대성이 곤란한 듯 말끝을 흐렸다·
“안 됩니다!”
“그건 오롯이 우리 일족만을 위해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반대의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이 쏟아졌다·
이해는 한다·
쉽게 말하면 근두운이나 여의봉을 내놓으라는 것과 같은 의미였으니까·
하지만 이미 제천대성이 자신의 이름까지 걸은 마당에 물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괜히 명분까지 쌓은 줄 아나?
“예· 뭐· 그럼 그냥 저희 애들은 죽어야죠· 얘들아· 너희 목숨은 목숨도 아니니까 그냥 하늘을 원망하다가 흙으로 돌아가렴·”
“모기이이····”
“미요오오····”
“응···· 먼저 갈게 주인·”
모두가 힘없이 고개를 늘어뜨렸다·
전 세계 동물 보호단체에서 당장이라도 들고 일어났을 것만 같은 광경이다·
“잠깐 알겠다· 알겠어·”
결국 제천대성이 자신이 내뱉은 약속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천도복숭아가 몇 개나 필요하나?”
“으음· 그게 말이죠·”
진혁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아마 기억상으로 천도복숭아가 1256개쯤 있는 걸로 아는데·
나도 양심이 있지·
전부 다 달라고 할 생각은 없다·
“1200개·”
그 정도면 육체적 정신적 위자료와 보상으로서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특별히 56개 정도는 간식으로 먹으라고 남겨줬으니 불평은 없을 것이다·
떠억·
턱이 빠져버린 제천대성과 장로들을 뒤로한 채· 진혁이 천도복숭아로 할 일들을 차분하게 그려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