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8화 왕관 쟁탈전 (3)
페르무트의 거점·
소멸과 동시에 관 속에 있는 또 다른 해골의 눈에 안광이 솟구쳤다·
진혁에게 죽임을 당한 직후 의식이 은신처에 보관되어 있던 곳으로 향한 것이다·
“마스터·”
“오셨습니까?”
그곳에는 페르무트의 친위대격인 데스나이트와 리치가 있었다·
고구마와 정령수들이 본거지를 박살내고 있는 와중에도 철저하게 힘을 숨기고 빠져 있던 이들이었다·
“····”
페르무트가 천천히 관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까지 영혼석이 파괴당했을 때의 충격이 전신에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육체적 통증과는 다른 종류의 격통·
과연 그분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인간답게 공격 한 방 한 방이 상식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이러니 그동안 수많은 강자들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직접 겪어보니 확실히 정면에서 싸울 만한 적이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청하도 잃었고 왕관도 빼앗겼다·”
어렵게 불러온 마신 탈하사도 허무하게 소모해버렸지·
얻은 건 단 하나도 없고· 모든 걸 잃어버린 전투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다·
전부·
원하던 그대로의 결과다·
“크크···크하하하!”
페르무트가 광소를 터뜨렸다·
청하의 납치에 이어 탈하사라는 언약을 발동한 것까지·
모든 게 강진혁에게 긴장감을 심어두고 의심하게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절망의 왕관·
가장 베일에 싸여 있는 성유물답게 여기에는 아주 특별한 효과가 덧붙여져 있다·
소유자의 마음을 오염시켜버리는 것·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서서히 인간성을 제거하고· 오롯이 내면 깊숙이 잠겨 있는 욕망과 본능만을 추구하게 되어버린다·
당연히 강진혁 역시 왕관을 소유하게 됨으로써 동료들을 이용하고 버리게 되겠지·
그뿐만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온갖 종류의 불행을 몰고 오는 저주가 가해질 터였다·
“성가신 적들을 제거하려면 많은 노력과 자본이 소모되는 법·”
진조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나 타락한 성녀 테레사 드 로렌시아·
서리혼령과 고대의 등반자들·
고대종 고구마를 비롯한 각종 환수와 신수들까지·
네임드에 해당하는 강자들이 줄줄이 있는 집단이다·
그들을 일일이 다 처리하려면 대체 얼마나 큰 희생이 필요할까?
허나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수장인 강진혁만 무너뜨릴 수 있다면 조직 전체를 붕괴시키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그걸 위해서 이 모든 걸 준비했다·
절망의 왕관과 전쟁에서의 승리를 맞교환한 셈이다·
“다음 단계로 움직이겠다·”
페르무트가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이제는 다음 골칫거리인 제천대성을 상대할 시간이다·
***
격전이 끝난 후·
엘리스와 테레사 그리고 서리혼령이 합류했다·
다들 일기당천을 해준 덕에 방해받지 않고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전 일단 테레사 님과 함께 주위의 마기를 정리하고 이 일대를 거점화할게요·”
“몇 시간 동안은 좀 바쁠 거야· 맛 좋은 것들이 많이 남아 있더라고·”
휴식할 시간도 없이 사후 정비를 하기로 한 서리혼령과 테레사가 곧바로 움직였다·
“저는 묘왕을 모시고 일단 일족이 있는 곳으로 가서 치료에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서아리가 의식을 잃고 있는 청하를 품에 안았다·
육체적으로 큰 상처는 없었지만 페르무트의 장난에 심신에 큰 타격을 받은 상태·
이걸 낫게 하려면 아무래도 묘족의 본거지로 돌아가는 편이 가장 효과가 좋았다·
“보잘 것 없는 저지만 일족을 대신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희 왕을 구해주신 은혜· 일족 전체가 잊지 않을 거예요·”
서아리가 공손이 고개를 숙였다·
십이지 중에서도 가장 약한 축에 속하는 묘족·
언제나 다른 일족에게 밀려 고통을 받아온 게 그들의 삶이자 운명이었다·
그런데 세상 그 누구보다 든든한 조력자가 나왔다·
그것도 다른 층계에서 온 인간이·
“청하나 잘 챙겨줘· 며칠 안에 우리가 그쪽으로 갈게·”
“예!”
탓·
가벼운 도약과 함께· 서아리와 청하가 사라졌다·
“흐음· 그나저나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났구나·”
혼자 남은 엘리스가 페르무트의 사체에 다가갔다·
몸의 대부분은 먼지로 변했지만 해골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툭툭·
발로 차면서 가지고 노는 모습·
아무리 그래도 저건 너무 능욕 아닌가?
세삼 엘리스의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해지려 한다·
“놈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거든·”
“뭐?”
“일부러 져주려고 하더라고· 탈하사의 능력도 반도 채 안 쓰고 말이야·”
“이해가 안 되는구나· 일부러 봐주다니· 도대체 뭐 하러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그거야····
빙글·
손가락 사이에 낀 왕관을 한 바퀴 돌렸다·
“이걸 나한테 주기 위해서겠지·”
꽤나 공을 들여서 연기를 한 건 인정하겠는데·
그걸로 나를 속이려고 했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띠링!
‘탐식의 눈’으로 읽어낸 왕관의 효과가 눈앞에 떠올랐다·
[절망의 왕관]
입수난이도: 측정 불가·
내용: 탑의 50층에 입장할 수 있는 엔드 피스 중 하나로 모든 생명체의 가장 근원적인 본능을 관장할 수 있습니다· 흔히 네크로맨시와 흑마법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일정 기간 이상 소유할 경우 암속성 몬스터들을 지배할 수 있게 됩니다·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눈으로도 이 왕관에 담겨 있는 부작용에 대해서 파악하지 못 했다·
오직 왕관을 직접 소유하고 경험한 자들만이 알 수 있는 히든 효과가 부여되어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탑의 정상을 오르면서 진혁은 절망의 왕관에 관한 부작용을 몇 번인가 접할 기회가 있었다·
‘나도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꼼짝없이 당했을 거야·’
페르무트가 준비할 수 있는 카드로서는 정말로 강력한 걸 꺼내온 셈·
과거의 기억을 곱씹었다·
50층을 정복하기 위해서 모은 병력을 스스로의 손으로 모두 궤멸시켰던·
‘안됐지만····’
저주를 중화시킬 방법이 있다·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지·
“흐음· 그 표정을 보니 뭔가 계획이 있는 모양이구나·”
“응· 대충 어떻게 하면 되는지는 생각해뒀어·”
문제는·
페르무트가 아니라 큰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은 노스 이디크 쪽이다·
마찬가지로 저 쪽도 패를 꽁꽁 숨겨두고 있는 이상 당장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경우의 수를 상정해서 대응하는 식으로 해야겠지·’
우선은 나머지 멤버들과 모두 합류해야 한다·
근방에서 이태민과 유연화의 마력이 느껴졌다·
“알겠다· 짐이 이쪽으로 오라고 전해주도록 하마·”
칙칙!
엘리스의 손가락 끝에서 까만 박쥐가 나타났다·
작고 앙증맞은 체구로 피로 쓴 편지를 든 채 허공을 향해 날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헤어졌던 멤버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형!”
“오빠!”
“드디어 다시 만나네요!”
이태민과 유연화 그리고 페시스가 한 걸음에 달려왔다·
조금 전까지 치열하게 십이지의 장로들과 격전을 치르느라 몸 여기저기가 그을음과 상처로 가득했다·
“고생했어· 아까 보니까· 적의 지원을 너희들이 막아준 것 같던데·”
“뭐 당연히 해야 할 일은 했을 뿐이죠·”
“조금이라도 오빠한테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야·”
시련의 탑을 처음 했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
든든한 동료들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근두운은 확보한 거야?”
“그게 말인데····”
유연화가 머리를 긁적였다·
“뭐야 성공한 줄 알았더니· 실패한 거였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곤란한 듯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뭔가 문제가 생긴 듯싶다·
바로 그때·
“그건 소승이 설명하겠다!”
이태민과 유연화 사이로 작은 체구의 소녀가 나타났다·
삼장법사(三藏法師)·
통상적인 서유기와는 다르게 이 빌어먹을 탑의 세계관에서는 49층의 등장인물들이 기존과는 꽤나 왜곡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 소녀다·
머리가 반질반질한 스님과 다르게 초등학교 앞에서 군것질이나 하는 게 딱 어울리는 외모였으나·
실제로는 49층 공략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호오·’
진혁이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우웅!
‘세계의 기억’에 저장되어 있는 ‘만다라’가 반응한다·
지고지순한 법력에 이끌려 더욱더 고차원을 향해 다가가려고 꿈틀대는 것이다·
“당신이 근두운을 가져간 거야?”
“그렇다· 그 구름은 내 제자의 것· 잘 보관하고 있다가 직접 전해줄 것이다·”
“보다시피 고집불통이어서 어쩔 수 없었어· 어린 애를 상대로 빼앗을 수도 없고·”
“소 소승은 애가 아니다!”
“그래그래·”
유연화가 삼장법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가 봐도 어린애 취급이다·
삼장법사가 길길이 날뛰었지만 위협이라곤 손톱만큼도 되지 않았다·
진혁이 삼장법사 바로 앞에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화르륵·
탈하사와의 격전이 마무리된 지 얼마 안 된 탓일까·
여전히 몸 주위에선 흑염의 잔불이 남아 있었다·
움찔하고·
삼장법사가 자신도 모르게 거부반응을 보였다·
잔혹하고 탁한 기운에 위협을 느낀 탓이다·
“날 죽이고··· 빼앗으려는 것이냐?”
“글쎄·”
진혁이 싱긋 웃었다·
“설령 악한 마음을 먹었다고 해도 이걸 넘겨줄 생각은 없다· 고통받고 있는 제자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것밖에 없으니까·”
“이야 꽤나 좋은 스승인가 보네· 제자 사랑이 아주 각별한가 봐?”
“위업을 함께 한 소중한 동료이자 제자다·”
삼장법사가 작은 손으로 법구를 움켜쥐었다·
“진정해· 억지로 뭘 하려는 생각은 없으니까· 오히려 안전하게 근두운을 전달하는 걸 도와주도록 할게· 대신 어떤 상황이 닥칠 경우 내가 하는 부탁 한 가지만 들어줘·”
“겨우 그것만 해주면···· 근두운을 포기하겠다는 말이냐?”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는 걸 보는 걸 싫어하진 않거든·”
강제로 빼앗으면 제천대성과 전면전을 선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터· 어차피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다·
허나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
의외라는 듯 눈까지 반짝이고 있는 삼장법사를 계속해서 그런 착각 속에 빠져 있게 하는 게 유리하다·
“알겠다· 약속하마·”
삼장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간이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구속하는 언령이 맺어졌다·
***
같은 시각·
시련의 탑 밖에서는 이질적인 마력 파장이 일어났다·
파츠측!
[게이트가 만들어집니다·]
대규모가 아닌 단 1명만을 위한 간이 게이트가 개방되었다·
서초구에 위치한 작은 오피스텔·
오랫동안 주인이 자리를 비운 장소에 침입자가 접근했다·
“흐음· 묘한 느낌이네· 막상 여기에 오니까·”
남자가 문앞에 서서 중얼거렸다·
플레이어 ‘티모 대령’·
탑의 정상을 정복했던 위대한 고인물의 역사가 시작된 장소다·
[황도십이궁 ‘뱀자리의 주인’이 이 일대를 수호하고 있습니다·]
일반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 반투명한 뱀이 천천히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해둔 일종의 보호장치·
누구든지 이 안에 들어가려고 한다면 가차없이 물어 뜯어버리겠다는 경고였다·
피식·
남자가 부드럽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쉬잇·”
살기 등등하던 뱀이 남자의 손등에 머리를 비볐다·
눈까지 지그시 감고 쓰다듬는 걸 즐기는 모습·
펼쳐진 결계는 그야말로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덜컹!
굳건히 닫혀 있던 문이 열리자 내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몇 년 전에 쓰다 버려진 vr기기와 각종 물건들 위로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남자가 천천히 vr 기기를 집어들었다·
“페르무트를 상대하느라 이쪽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나보군·”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이곳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 리가 없다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하려나?”
경험해 본 적이 없을 테니까·
수도없이 도전하던 과거와는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예상과 대비를 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이리라·
철컥·
vr기기가 머리 위에 씌여졌다·
[시스템 가동·]
[‘시련의 탑’의 과거 데이터가 재생됩니다!]
오래 전에 서버가 종료되어버린·
그렇기에 아무리 다시 시도해도 접속되지 않던 게임에 불빛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