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8화· 꿈틀거리는 것들의 군주 ‘카알루트’ (3)
장밋빛으로 얼룩진 미래였다·
슈에뜨라는 위대한 영웅의 등장으로 인해 인류가 탑의 정상을 정복하는 일이 현실로 다가왔으니까·
90일이란 굴레에 갇혀 불안해 떨던 과거는 더 이상 없다·
그리 생각했건만·
“쿨럭····”
“마 말도 안 돼·”
공격대는 끔찍한 절망 속에 빠져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78번째 트라이가 실패로 돌아갔으니·
“크오오오!”
쩌렁쩌렁 울려퍼진 피어에 모든 이들이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고· 뒤이어 날아온 화염 브레스는 준비한 모든 성유물과 히든 카드들을 박살내버렸다·
-하울의 무빙 오지는 성: 도저히 못 보겠다· 하아 ㅠㅠ 꿈도 희망도 없는 듯· ㄹㅇ
-형궁성체다: 이젠 보스전 보는 사람 50000도 채 안 됨· 이 시간에 나가서 즐기는 게 훨씬 더 이득임·
-생갈치1호의 행방불명: 처음엔 10억이 넘었는데 진짜 미치겠네·
-나의 라임 개쩌는 오렌지나무: 너희들도 이제 그만 와라· 윗윗님 말처럼 마지막까지 이런 비극만 보다 가는 게 바보임·
-고인물감별소: 이게 맞다·
[방송이 종료됩니다·]
점멸하는 붉은 글자·
그 각진 낱말 하나하나에 목이 베어버릴 것만 같았다·
동원된 공격대만 해도 260개가 넘었고· 사망자는 30만에 육박했다·
엄청난 숫자의 정예들이 말 그대로 갈려나가버린 것이다·
물론 이 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아예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48층에 있는 대부분의 핵심 유적과 미궁들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고 최종 목적지인 드래곤의 레어로 가는 모든 관문을 돌파했다·
깔끔하게 닦인 도로·
마지막만 잘 넘어선다면 성공이다·
문제는·
그 마지막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난이도를 자랑한다는 점이었다·
조금 전 화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용·
고대룡 중 하나이며·
‘수호룡(守護龍)’이라는 이명을 지닌·
바로 ‘데스티아’다·
거점을 지키는 데 특화된 수문장은 48층을 넘어서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콰앙!
보스 전용 생방송을 지켜보던 길드의 간부들이 책상을 내리쳤다·
“빌어먹을!”
“제기랄· 이번에도 생채기 하나조차 낼 수 없단 말인가·”
“최악···이군요·”
라스베이거스에서 화려하게 회의를 하던 모습은 더 이상 없다·
크기만 할 뿐 텅 빈 사무실·
그 안을 채우고 있는 랭커의 숫자는 고작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렇다·
세계를 지탱하던 7개 길드는 사실상 무너졌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드레드 로어’ 길드의 마스터 그레이가 꺼져버린 화면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하 이젠 성유물까지 잃었군· 다음 레이드에선 내가 폭탄이라도 안고 드래곤 아가리로 들어가야겠어·”
3회차 레이드에서 한 팔을 잃은 그레이가 자조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걸 멀리서 지켜만 봐야한다는 가혹한 현실·
텅 빈 팔이 유독 쑤셔왔다·
“이번 일로 인해 전 세계가 크게 동요하고 있습니다·”
“범죄율도 10배가량 치솟았고· 경찰력도 제 기능을 잃어버렸어요·”
“누굴 탓하겠습니까? 당장 30시간 뒤엔 세상이 끝나는데·”
부정적인 보고가 이어졌다·
흔히 종말이 코앞에 다가오면 인간성이 어떤 식으로 무너질지 상상하곤 하는데·
현실은 상상 중에서 가장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도덕이나 법이 사라지자 본능만이 남은 이들의 광기가 펼쳐진 것이다·
“그보다· 내가 말한 자는 찾았나?”
그레이가 화제를 돌렸다·
“강진혁인가 뭔가 하는 인물 말씀입니까?”
“그래·”
“미국에서 출국한 뒤로는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같은 어울리던 성녀 테레사와 천유성도 마찬가지고요·”
“이제 와서 찾아봤자 의미가 있을까요? 나름 쓸만한 이들인 건 맞습니다만 드래곤 앞에서는 어차피 한 방에 끝날 텐데요·”
“···아니 그 놈이라면····”
말을 하던 그레이가 말꼬리를 흐렸다·
이제와서 진혁이 얼마나 강한지를 구구절절 알려줘봤자 아무 의미는 없겠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유령이 얼마나 강한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모르긴 몰라도 탑의 어느 층계를 공략하다 목숨을 잃은 게 틀림없었다·
아니라면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
“내일 움직인다·”
그레이가 결정을 내렸다·
부상을 입어 병신이 된 자든· 실력이 떨어지든 애송이든·
어차피 모든 게 끝난다면 최후의 공략을 시도해야만 한다·
“···예·”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돈이나 펑펑 써둘걸· 아끼지 말고 말이야 하하·”
“오늘 밤은 퇴근 좀 해도 되는 겁니까? 그래도 마지막인데 가족하고 하루는 보내야죠·”
“맘대로 해라· 빌어먹을·”
툴툴대면서도 도망가려는 이는 없었다·
이게 운명이라면·
마지막까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바로 그때·
삐빅!
회의실 문이 열렸다·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건 최소한 S급 이상이어야만 할 터·
하지만 남은 인원은 여기 있는 이들이 전부였다·
적어도 미국에 남은 이들 중에서는·
그렇게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나타난 이는 너무도 반갑고 간절한 인물이었다·
“다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첫 번째 레이드에서 중상을 입은 슈에뜨가 복귀했다·
“맙소사·”
“다 다시는 의식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 했는데·”
“괜찮아지신 겁니까?”
“후후· 기적이라도 일어난 거겠죠· 정확히 이 타이밍에 깨어난 걸 보면요·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당장 닥친 종말부터 해결해보도록 하죠·”
마지막 79번째 시도·
이번에야말로 남은 것을 모두 쏟아부어야 한다·
“A급 이상에 해당하는 모든 이들을 모아주세요· 제게 데스티아의 심장을 꿰뚫을 방법이 있습니다·”
시련의 탑을 등반할 만한 가능성이 있는 실력자 전원·
그 마지막을 쥐어짜내 최후의 79번째 레이드를 시도할 시간이다·
그렇게·
슈에뜨가 악마의 제안을 건넸다·
***
사라락·
···시간이 없다·
진혁이 떨어지는 모래 알갱이를 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까지 위험한 상황이 여럿 있었지만 이건 그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게임 체인저’·
규칙을 이용해 판 자체를 흔들어버릴 수 있는 종류였으니까·
백도어 채널을 통해 만들어둔 통신망·
[···타케시가 응답하지 않습니다·]
[김희웅과 이유리 민정우가 침묵합니다·]
한국 미국 지부에 뿌려둔 이들과 소식이 닿지 않는다·
설마 그쪽까지 손을 써둔 건가·
···제발· 별 탈이 없어야 할 텐데·
머릿속이 온통 혼란으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태고의 존재들이 움직일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빠르고 완벽하게 함정을 팔 줄은 몰랐다·
‘안일했어·’
왕관과 드래곤 로드를 확보하는 게 중요하긴 했으나 저쪽도 신경을 좀 더 써뒀어야 했는데·
막판에 와서 운명을 건 도박을 하게 생겼다·
“킥···킥! 왜 이렇게··· 되니 겁···이 나는 건가? 너희들 편일··· 줄 알던 시간이··· 아니어서?”
“확실히 그 부분은 좀 아프긴 하네· 하지만 네가 그 사실을 자랑 삼아 떠벌려준 덕에 아직 역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건 알게 됐어·”
카알루트의 뒤에 떠 있는 모래 시계·
그 테두리에 적혀 있는 고대 룬어에 대한 해석이 방금 막 끝났다·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야·’
여기서의 1시간이 밖에서의 12시간이다·
다시 말해·
1시간 안에 모든 싸움을 마무리지어야만 48층으로 갈 수 있다는 뜻이리라·
“하하···· 일부러 알려··· 준 거다· 한 줌의 시간 안에··· 무얼 해보고자··· 희망을 찾으며 발악하는 꼴을 보는 건··· 몇 안 되는 유희 중 하나···거든·”
스슥·
슥·
어느새 주위에 벌레들이 기어오기 시작했다·
“악취미네·”
“무한을 살아···가게 된다면··· 너도 이해할 수 있을···거다· 지루함과 권태로움이 얼마나··· 끔찍한 저주인지·”
쩌저적!
카알루트의 손에서 기괴하게 생긴 침이 튀어나왔다·
침 끝으로 뚝뚝 떨어지는 반투명한 액체·
단순한 독이 아니라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카알루트 고유의 체액이었다·
한 방울만이라도 저게 몸에 들어가면 그대로 끝장이다·
‘벌레들로 시선을 끌고 틈을 노리겠다는 거군·’
난전 속에서 사각을 노려오면 여러 의미에서 골치 아프다·
그렇다면·
‘이쪽도 같은 종류로 대응하는 수밖에·’
진혁이 세계의 기억에서 저장된 능력을 불러왔다·
수많은 책들 사이에 꽂힌 지 얼마 안 된 책 한 권이 펼쳐졌다·
[고유성창 ‘백귀야행(百鬼夜行) – 서’가 발동됩니다!]
순간 진혁의 그림자가 크게 늘어났다·
내부를 가득 채운 검은 융단 속에선 탑에서 본 적 없는 이매망량들이 서서히 솟구쳐오르기 시작했다·
“크르르····”
“푸히히! 푸흡! 꺄하하하!”
“먹어··· 먹어··· 찢어서 먹어····”
각종 귀신과 요괴들이 군침을 뚝뚝 흘렸다·
흉흉한 기세가 태고의 벌레들에게 맞섰다·
“전부 먹어치워·”
배가 고픈 아귀들이 득실거리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그것도 강자고 나발이고 가리지 않는 제대로 미친 놈들로만 구성된·
여담이지만 괜히 아델 그 녀석이 또라이가 된 게 아니다·
“호 호오· 재···밌겠군·”
카알루트 역시 손을 살짝 들어올리는 것으로 부리는 벌레들에게 돌격을 명령했다·
곧바로 수천이 넘는 병력의 전면전이 벌어졌다·
콰콰콰쾅!
콰직! 우두둑!
각종 벌레들이 요괴들의 살점을 파먹기 위해 달려들었고· 마찬가지로 요괴와 귀신들 역시
전설이나 문헌에서만 존재하던 능력들을 사용했다·
아비규환·
서로가 서로를 먹어치우려는 지옥도를 표현하는 데 이보다 적절한 말은 없으리라·
짜악!
진혁이 장갑을 낀 양손을 마주쳤다·
[‘이면의 술’ – ‘호화(號火)’가 발동됩니다!]
불로 만들어진 호랑이 세 마리가 돌진했다·
가볍게 빠르게 쇄도한 호랑이들이 각기 다른 방향에서 카알루트를 노렸다·
불타는 이빨과 발톱이 급소를 향했다·
“고작 이··· 정도라니· 실망···이군·”
카알루트가 무심한 얼굴로 침을 꽂아넣었다·
쭈욱!
체액이 불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크르르·”
“커엉!”
호랑이들의 동공이 흐릿해졌다·
피아를 식별하는 기관이 완전히 녹아버린 탓이다·
“이매···망량 따위를 믿고 기세등등한 거였다면··· 크게 실수한···응?”
말을 하던 카알루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진혁이 등을 보인 채 도망치고 있던 것이다·
밖이 아니라·
자신의 몸 속 더 깊은 곳으로·
“하하···하하하! 설마 내 심장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냐?”
그런 멍청한 짓을 할 줄이야·
이 몸 안이 얼마나 거대하고 복잡한지 모르니 저런 방법을 택한 거겠지· 심지어 니알라토텝마저도 이 안에선 올바른 길을 찾지 못했다·
카알루트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감정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뭐··· 시간이 없는··· 쪽에선 훌륭한 승부수···일 수도 있겠구나·”
만에 하나 심장을 정확히 찾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단기간에 승부를 낼 수만 있다면·
도박치곤 그리 나쁘지 않다·
어차피 90일이란 카운트가 종료됨에 따라 사라지게 될 운명이었으니까·
만약·
헤매지 않는다는 대전제만 지켜진다면 말이지·
카알루트가 자신의 몸 속에 들어온 작은 날파리를 사냥하기 위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