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3화
“지옥에 말입니까???”
“뭐? 아니!”
후배의 질문에 이한은 크게 당황했다·
갑자기 왜 지옥이 나온단 말인가?
“지옥은 무슨 소리지?”
“선배님이 놓고 오셨다고 하셔서···”
알히들은 탑 수석에 걸맞은 논리력을 펼쳤다·
1· 워다나즈 선배는 매우 대단한 사람이다·
2· 친척 알시클도 제법 대단한 사람이다·
3· 그런데 워다나즈 선배가 두고 왔다고 놀랄 정도라면?
4· 지옥 차원 정도겠구나!
‘얘 수석 맞나?’
이한은 같은 탑 후배들의 실력에 살짝 의문이 들었다·
“지옥 차원이 아니면 냉기 정령이나 서리거인들의 차원입니까?”
“아니··· 페트로가드에 두고 왔다는 소리였어· 다른 마법학교·”
“···그게 그렇게 놀라실 일입니까?”
알히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시클이 무슨 다섯 살 먹은 꼬마도 아니고 지옥 차원도 아닌 다른 마법학교에 두고 왔다고 저렇게 놀랄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그건 그렇긴 하지· 그렇지만··· 서운하잖아·”
“괜찮습니다· 분명 이해해주실 겁니다·”
알히들은 같은 가문의 마법사를 믿었다·
분명 자신처럼 원대한 마법의 길에 사사로운 감정이나 원한은 두지 않으리라!
* * *
“볼라디 배그렉!!!”
진상을 깨달은 알시클은 포효했다·
그 귀여운 포효에 여러 페트로가드 학생들은 깊은 감명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동안 모델로 남아달라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였다·
“진짜 갔다고!?”
“죄 죄송합니다·”
페트로가드의 교수 아니 교수 역할을 하는 마법사 달세르가 사과했다·
사실 에인로가드 학생들이 우르르 떠나버린 건 달세르 잘못이 아니긴 했지만···
···그건 상관없을 만큼 알시클이 분해보였던 것이다·
“아닙니다· 크윽· 그쪽 잘못이 아니죠·”
알시클은 분해서 씩씩댔다·
솔직히 다른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이해가 갔다·
이한이나 가르시아 교수는 해골 교장의 옛 제자를 퇴치하는 일에 골몰했을 테니 잊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볼라디 교수는 이야기가 달랐다·
전투 마법사 성격상 그런 사소한 변화를 눈치 못 챌 리가 없는 것이다·
100% 알면서도 안 알려줬다!
‘이 치사하고 비열한···’
알시클은 정말로 억울했다·
제자를 위험한 차원 괴물 사냥에 데리고 간 게 그렇게 큰 죄란 말인가?
···생각해보면 큰 죄 같긴 했다·
알시클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화내봤자 나만 손해지· 이만 가보겠습니다·”
“벌써 가십니까?”
그 사이 친해진 페트로가드 학생들이 매우 아쉬워했다·
꼭 모델이 아니더라도 이 펭에린 가문의 마법사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선배 마법사였다·
특히 냉기나 서리 관련된 마법에 대한 지식은 페트로가드 내에서 따라올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가봐야지· 다들 즐거웠다·”
“혹 혹시···”
“왜? 마법에 대해 물을 게 있으면 빨리 물어봐라·”
“깃털 하나만 뽑아주시면 안 됩니까?”
“···다섯 걸음 뒤로 물러서지 않으면 모두 다 얼려버리겠다·”
* * *
“흠· 확실히 알시클 님이 은근히 관대하시긴 하지·”
알히들만큼은 아니었지만 이한도 곧 충격에서 벗어났다·
해골 교장도 아니고 페트로가드에 두고 왔다고 해서 알시클이 그렇게 화를 낼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참· 에안두르데는 어디 있지?”
이한이 후배를 찾는 건 단순히 방학 때문만이 아니었다·
조우린 관련 문제도 있었던 것이다·
-참! 혹시 마법사를 묶어놓는 방법에 대해 추천해줄 게 있나? 실은 누님께서 부탁을 하셨거든!
조우린의 동생 우만은 이한에게 마법사를 꽁꽁 묶어놓을 방법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그 때는 해골 교장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다·
‘생각해보니 그게 에안두르데를 노리는 걸 수도 있겠어·’
해골 교장을 무력으로 붙잡아놓는 건 아무리 조우린이라 하더라도 조금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다·
그에 비해 에안두르데라면 말이 됐다·
조우린의 친구기도 했고 꽁꽁 묶을 만한 상대이기도 했으니···
만약 그렇다면 먼저 찾아서 경고를 해둬야 했다· 방심하고 들어간 에안두르데가 방학 내내 조우린의 동굴 안에 머무르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에안두르데 말씀이십니까? 에안두르데는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마차에서 내렸습니다만·”
“아· 그랬겠군·”
협박해서 같이 왔는데 한가롭게 경매장 구경을 하러 따라올 리 없었다·
“그 전에 몇 가지 물어보긴 했습니다· 친구 선물을 찾는 것 같았습니다만·”
“역시! 알히들 널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총명하단 걸 알고 있었다·”
선배의 아첨에 알히들은 쑥스러워했다·
에안두르데는 친구의 초대장을 받은 만큼 찾아가기 전에 선물을 준비해 갈 계획인 것 같았다·
그리고 선물을 사기 위해서는 금화가 필요하니 지하 투기장에 가겠다고···
“에안두르데!!!”
이한은 자리에 없는 후배의 이름을 처음으로 소리 내어 외쳤다· 알히들이 의아해했다·
“에안두르데는 여기 없는데요?”
“잊어버려· 하여간 지하 투기장에 가겠다고 했다고? 배그렉 교수님 만나러 가야겠군·”
학파 선배로서 학파 후배를 학파 교수와 같이 찾으러 가야 했다· 이한은 두 교수가 기다리고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알히들· 너도 따라와· 만난 김에 선물 가져가라·”
같은 탑 후배인 만큼 이한은 선물보따리에서 쓸만한 걸 몇 개 챙겨주고 싶었다·
“하지만 저는 사야 할 게 있습니다만·”
“어떤 거지?”
“바그니의 붉은 다이아몬드라고 안에 깃든 마법을 배워보고 싶어ㅅ···”
“···그거 아까 웬 졸부가 사버렸다· 가자! 따라와!”
* * *
선물보따리를 와르르 쏟아낸 뒤 이한은 볼라디 교수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볼라디 교수는 산처럼 쌓인 선물더미에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즉답했다·
“따라와라·”
“교수님은요?”
이한이 가르시아 교수는 동행 안 하냐고 묻자 볼라디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위험하다·”
마법 전투를 훈련 받지 않은 마법사에게 좁고 구불구불한 기습 받기 좋은 수도 빈민가 뒷골목은 별로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막혀 있다고 생각한 벽 뒤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적에게 기습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확실히 교수님이 다치실 수···”
“주변이 파괴될 수 있으니·”
‘아· 반대였군·’
이한은 자신이 반대로 이해했다는 걸 깨달았다· 적에게 기습받는 것까지는 맞게 판단했지만 그 이후가 달랐다·
가르시아 교수 정도의 마법사라면 기습을 받아도 마법은 쓸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마법 위력의 통제였다·
수도 외곽의 빈민가를 통째로 날려버릴 게 아니라면 가르시아 교수는 두고 가는 게 맞았다·
“···어? 그럼 저는···”
“?”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한은 ‘저는 그럼 안 위험합니까?’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포기했다·
볼라디 교수의 생각에 학파 최고참 마법사 학생은 충분히 따라올 만한 수준일 테니까!
‘그리고 작년에 왔던 수준이면 해볼 만할지도 모르겠어·’
이한은 주문을 외워서 강화 마법을 걸고 남은 마법은 축장한 뒤 시약 주머니에서 필요한 시약을 꺼내 따로 옮겼다·
전투가 벌어질 경우 대여섯 개의 마법을 동시에 쏟아내기 위한 작업이었다·
작년 이한은 해골 교장과 함께 에안두르데를 에인로가드에 스카웃하기 위해 여기 수도 외곽 빈민가에 온 적이 있었다·
사람 하나 죽어나가도 모를 법한 음침한 골목에서는 몇 걸음만 걸어가도 단검과 몽둥이를 든 용병들이 튀어나오곤 했다·
‘분명 그 때는 교장 선생님 얼굴 알아보고 물러선 놈들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빈민가의 더러운 길에 발을 디딘 이한은 볼라디 교수의 뒷모습을 보며 궁금해했다·
과연 여기 용병들이나 범죄 조직 길드원들이 볼라디 교수의 얼굴도 해골 교장처럼 알아볼까?
-손님이 왔군·
-멍청한 놈! 저 분이 누구신지 알고!
덜 마른 회반죽 건물 사이의 골목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오려다가 다른 자한테 다시 끌려들어갔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보는군·’
-작년에 마령관과 같이 온 놈이잖아! 우리 모두를 죽일 셈이냐?!
“···”
이한은 경악했다·
볼라디 교수가 아니라 자신을 알아보다니?
“말도 안 돼!”
“?”
앞장서서 걸어가던 볼라디 교수가 의아하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여기 놈들이 교수님을 알아볼까요?”
“모르겠군·”
이쪽 빈민가는 인원 순환이 빨랐다· 말이야 길드였지만 사실 제국의 정식 인허장을 받은 길드와 달리 도망친 용병들이나 범죄자들이 모인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 만큼 볼라디 교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과연· 내가 운이 없었던 거군·’
이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방금 알아본 놈은 1년도 안 된 일이었기에···
-으아아아악! 미친 사냥꾼이다!!!
-도살자 왔다! 도살자가 나타났다고! 머저리들아! 움직여!
-현상금 걸린 놈들 다 튀어나가!
골목 곳곳에서 메아리치듯 고함이 터져 나오더니 요란하게 발 구르는 소리가 났다·
길 왼쪽에 위치해있던 기우뚱한 목재 건물이 갑자기 폭삭 무너져 내렸다·
현상금 걸린 범죄자들이 모이는 은밀한 선술집이었는데 소문을 듣고 다 같이 뒷문으로 도망치려다가 낡은 건물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한은 염동력으로 잔해를 막아내고 출구를 유지해줬다· 밖으로 허겁지겁 튀어나온 범죄자 용병들은 감사를 표했다·
“고 고맙···”
퍽!
감사의 인사를 끝내기도 전에 이들은 쓰러졌다· 볼라디 교수가 손을 쓴 것이다·
교수는 종이조각을 꺼내 현상금은 에인로가드로 보내라고 적은 뒤 쓰러진 이들 위에 던졌다·
그러자 종이조각이 둘로 갈라지더니 하나는 종이새로 변해 수도 경비대원들을 향해 날아갔다·
“잘 유인했군·”
교수는 제자를 칭찬했다· 이한은 살짝 억울했다·
의도하고 유인한 게 아니었는데!
잡혀간 용병들이 ‘크윽 그 마법사 역시 배그렉 교수와 한패였군’이러며 떠들 걸 생각하니 조금 억울했다·
‘정말 구해주려고 한 거였는데···’
속으로 투덜대던 이한은 옆 비린내 나는 골목 쪽에서 생선 채우는 둥근 나무통 뒤에 숨어 이쪽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저번에 마령관과 같이 온 마법사 아닌가?
-맞군! 심지어 이번에는 사냥꾼하고 같이 왔어!
“···”
“이쪽이다·”
이한이 소문이 얼마나 갈지 고민하는 사이 볼라디 교수는 지하 투기장의 입구를 찾았다·
제국의 어느 도시든 이런 그늘진 곳이 있기 마련이었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특정한 조건이 필요했다·
입구를 알거나 길드의 소개를 받거나 등등·
지금 볼라디 교수가 들어가려고 하는 지하 투기장 입구는 겉으로 보면 허름한 피혁상의 가게였다·
그러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마법으로 숨겨진 지하 투기장 통로가 나타났다·
“아악!”
볼라디 교수가 들어오자 정체불명의 몬스터 가죽을 무두질하고 있던 상인은 비명을 질렀다·
“왜!! 왜 왔어!! 왜 왔어 또!!”
“통로 때문에·”
“뭐? 통로? 아 투기장? ···이 미친 마법사야! 네놈이 저번에 와서 그 지랄을 떨어댔는데 아직 돌아가고 있겠냐! 예전에 망했다!”
피혁상은 뭔 소린가 싶다가 뒤늦게 깨닫고 분노의 일갈을 토해냈다·
볼라디 교수는 이한에게 돌아서더니 말했다·
“다음 투기장으로 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