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3화
다른 마법사들의 말에 지논은 설득되어버렸다·
확실히 편지 내용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납득 못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면 감사히 호의를 받도록 하지요· 사실 에린다르벨 님께서 이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는데···”
“제국의 대마법사 중 몇 안 되는 존경스러운 분이시니 말입니다·”
마법사들은 옷깃을 단정히 바로잡으며 존경심을 드러냈다·
괴팍한 대마법사들만이 득시글거리는 제국에서 에린다르벨 같은 책임감 있는 마법사는 후학들에게 언제나 존경을 받았다·
“참· 그 괴물의 흔적을 쫓는 건 어떻게 됐습니까?”
녹휘석 마탑은 전투 마법사들의 숫자가 많은 만큼 탑 내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마법사보다 외부에서 활동하는 마법사들이 더 많았다·
당연히 지논도 그런 부류의 마법사였다·
현재 녹휘석 마탑 마법사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외부 차원에서 넘어온 괴물의 추적·
평범한 사람들에게 외부 차원에서 넘어온 괴물은 토벌해야 할 대상에 불과했지만 뜻 있는 마법사에게는 걸어 다니는 보물이기도 했다·
다른 차원의 규칙과 비밀을 가득 품고 있는 것이다·
“마법사들이 놈이 도망친 흔적을 쫓고 있으니 곧 결과가 나올 것이오· 부디 조심하시오·”
“예· 명심하겠습니다·”
지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실전을 겪은 마탑의 전투 마법사였지만 지논은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이런 위험천만한 일에 누가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가겠는가?
* * *
“···?”
수도 외곽의 버려진 창고 구역에 도착한 이한은 지하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질적인 기운에 의아해했다·
이건 에인로가드나 에인로가드 밖에서 몇 번 경험한 적 있는 다른 차원의 기운이었던 것이다·
‘뭐지? 차원문 열렸나?’
뛰어난 감각을 가진 마법사는 차원을 잇는 통로만 보고서도 그 너머의 풍경을 예상할 수 있었다·
지금 지하에서 뿜어져 나오는 타 차원의 기운은 상당히 이질적이고 흉악했다· 따뜻하고 친절한 차원은 아닌 게 분명했다·
‘···뭔가 이상한데·’
이한이 에인로가드에서 배운 교훈 중 하나는 바로 믿는 지팡이에 언제든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한의 지팡이가 뒤통수를 때리려고 한 적도 있었으니 더더욱 뼈저린 교훈이었다·
해골 교장이 에린다르벨의 인성을 보장해줬다지만 일단 유크벨티레의 어머니기도 한 것이다·
‘교장 선생님이 속았을 수도 있고 애초에 한패였을 수도 있다·’
“워다나즈?”
“!”
이한은 뒤에서 뒤뚱뒤뚱 걸어오는 펭귄 수인 마법사를 보고 매우 반가워했다·
“알시클 님!”
“너 왜 여기 있··· 아· 하긴· 별로 놀랄 것도 없군·”
다른 차원의 위험한 괴물을 추적하는 의뢰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이한 때문에 깜짝 놀랐지만 알시클은 곧바로 납득했다·
그렇게 따지면 저번에 악신숭배자들과 싸운 것도 충분히 말이 안 됐던 것이다·
“···??”
이한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알시클이 먼저 지팡이를 흔들었다·
“빨리 내려가자·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어··· 예· 그런데 알시클 님께서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알시클 님도 초대를 받으셨습니까?”
“응? 그런 셈이지·”
알시클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이한 덕분에 새 후원자를 구한 알시클은 수도로 올라와 필요한 마법들을 몇 개 구입하고 준비했다·
그러던 도중 다른 마법사들에게 부탁을 받은 것이다·
-이번에 나타난 괴물을 쫓는데 뛰어난 얼음 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하오·
-난 괴물 추적에는 별 관심이···
-미확인 차원에서 나타난 정체불명의 괴물이오· 확보할 경우 우선적으로 조사할 권한을 드리오·
-좋습니다· 같이 가겠습니다!
“???”
이한은 대화를 듣고도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대화의 어떤 부분에서 설득이 되신 겁니까?”
“뭐? 워다나즈· 확인되지 않은 차원에서 나타난 확인되지 않은 괴물이잖아· 만약 그 괴물이 내가 원하는 마법의 비의를 갖고 있으면 어떡하려고? 너도 그래서 온 거 아니야?”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미확인 괴물이 세상의 고통을 없앨 비전을 알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최대한 높게 평가해줘도 에인로가드를 개선할 방법도 모를 것 같은데···
“그리고 전 에린다르벨 님의 초대장을 받고 여기 온 겁니다·”
“에린다르벨 님이?”
알시클은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에린다르벨 님이 초대하신 거라면 걱정할 필요는 없나··· 음· 역시 괜한 걱정이었군·”
아무리 워다나즈라 하더라도 너무 무모한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아주 조금 남아 있었는데 대마법사의 이름을 듣자 그런 고민도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냐· 아무것도· 워다나즈· 아직 발견되지 않은 차원의 괴물을 붙잡는 건 미발굴된 유적을 탐사하는 것만큼이나 기대되는 일이야· 분명 너한테도 도움이 될 거다·”
“으음· 알겠습니다·”
에린다르벨은 그렇다 치더라도 알시클까지 자신 있게 말하자 이한은 고집을 꺾고 수긍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착각인 모양이었다·
팟!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은 뒤 알시클은 지팡이 위에 빛을 발하는 얼음을 불러왔다·
“여긴 옛 지하 하수도 구역이야· 제국이 세워지고 새로 시설을 만들면서 버려졌지·”
제국뿐만이 아니라 제국 이전의 왕국들도 일정 규모 이상의 시설은 지형적으로 마력이 넘치는 곳에 설치했다·
사용되는 마법에 필요한 마력을 확보해야 했던 것이다·
당연히 이 버려진 지하 하수도 구역도 마력의 양은 다른 곳보다 충만했다·
다만···
“마력이 좀 탁하군요·”
“역시 알아보는군? 맞아· 오염도가 높지· 원래 빨리 정화를 시켰어야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왜 미룬 겁니까?”
이한은 가볍게 긴장했다·
마력은 그 자체로는 그저 순수한 힘에 불과했지만 성질이 변화하면 어떤 일을 일으킬지 예상이 불가능한 격랑이 됐다·
오염된 마력은 그에 걸맞은 다른 차원의 존재를 불러오거나 악신숭배자들을 불러올 수도 있···
“예산이 없어서?”
“아·”
이한은 즉시 납득했다·
사악한 관료나 마법사의 음모가 아니라 예산 부족이라면 납득할 수 있었다·
“아마 그 마력 때문에 괴물도 이 구역을 넘어올 통로로 사용한 거겠지·”
“알려진 괴물의 특징이 있습니까?”
“음· 아직은 별로 없어· 은밀하고 기민하고 탐식이 심한 정도겠다·”
은밀하고 기민한 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괴물이 눈을 부릅뜬 마법사들에게 잡히지 않고 도망쳤으니 은밀하고 기민할 수밖에·
하지만 탐식이 심하다니?
“음식이라도 훔쳐 먹었습니까? 에인로가드 학생처럼?”
“굳이 그런 비유를 왜··· 음식은 물론이고 무기물 유기물 가리지 않고 마구 삼키는 거 같더라· 놈이 지나간 곳이 초토화됐어·”
‘가이난도 같군·’
이한은 매우 무례한 비유를 속으로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퀴퀴한 하수도 통로를 따라 걸어가다 보니 저 멀리서 희끄무레한 빛이 보였다· 먼저 도착한 탐사대였다·
“오셨군· ···잠깐 이 마법사 분은 누구시지?”
탐사대원이 놀란 목소리로 이한을 가리켰다·
알시클이야 몇 번 만난 적 있는 마법사니 놀라지 않았지만 옆에 있는 처음 보는 마법사가 문제였다·
‘에인로가드 학생 아닌가?’
“여긴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에린다르벨 님이 추천하셨지·”
알시클의 소개에 다른 탐사대원들은 술렁거렸다·
“에린다르벨 님이? 분명 마법사 한 명을 소개해준다고 하시긴 했지만···”
“몇 학년이오? 5학년?”
언제나 당당하고 오만한 마법사인 알시클이었지만 그 질문에는 살짝 머뭇거렸다·
아직 양심이 조금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보다 조금 낮아·”
“4학년인가보군· 아니 에인로가드 마법사들이 뛰어난 건 알고 있지만 좀 위험하지 않겠소? 5학년도 아니라 4학년이라니·”
“그래도 에린다르벨 님이 추천하셨다지 않습니까·”
“으음· 그건 그렇지만···”
탐사대원들은 자기들끼리 의견을 나누었다·
대마법사가 추천한다길래 믿고 맡겼는데 아직 졸업도 하지 않은 에인로가드 4학년 학생이라니·
지금 준비하고 있는 탐사는 꽤 위험한 탐사 아닌가·
에인로가드 출신 마법사들의 마법 실력이 뛰어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험난한 탐사에도 같이 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분명 볼라디 경도 실력을 보장한 마법사라고 들었는데···”
“맞아! 여기 워다나즈는 배그렉 교수의 수제자거든·”
수군거리던 탐사대원들의 대화를 듣던 알시클이 냉큼 대답했다·
그 말에 탐사대원들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납득이··· 잠깐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이요? 그러면 2학년 아닙니까??”
납득하려던 탐사대원 한 명이 예전에 들었던 소문을 뒤늦게 떠올리고 외쳤다·
알시클은 살짝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은 억울했다·
‘이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 * *
아까보다 더한 혼란과 충격이 있었지만 결국 탐사대원들은 납득했다·
에린다르벨과 볼라디 교수의 추천이 있는데 아무리 에인로가드 2학년 학생이라 하더라도 믿지 않기는 힘들었다·
“다들 준비됐다면 드러내겠소·”
“드러내겠다니요?”
이한의 질문에 먼저 온 마법사들은 씩 웃었다·
마치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마 워다나즈 님은 우리가 차원문을 열고 도망친 놈을 쫓아서 넘어갈 줄 알았을 거요·”
“그게 아니었나?”
알시클도 놀라워했다·
기본적으로 차원을 경유하는 능력을 가진 괴물들을 쫓는 건 일종의 술래잡기에 가까웠다·
여러 차원을 건너뛰며 추적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번 괴물도 그런 추적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 혹시 놈이 차원 너머로 도망친 게 아니라 여기 아래 지하에 차원 침식을 일으키고 숨어 있던 겁니까? 잠깐· 그러면 더 빨리 발각됐을 텐데··· 그렇다면 위장 능력까지 있는 거군요· 그 위장을 벗기기 위해 이렇게 마법을 준비한 거고 말입니다·”
이한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추측했다·
가끔 다른 차원에서 건너온 존재들은 침식 현상을 일으키곤 했다·
서리거인 왕이 에인로가드에 왔을 때 혹한의 계절이 찾아왔던 것처럼 자신의 차원을 대륙에 퍼뜨리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한이 위에서 느꼈던 다른 차원의 기운은 차원문에서 나오는 기운이라고 하기에는 그 힘이 상당히 강력했다· 차원문이 아니라 차원 침식이 일어난 공간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렇다면 괴물은 다른 차원으로 도망친 게 아니라 지하에서 숨어 있다는 뜻이 됐다·
이제까지 발견이 안 됐으니 겉에서 봤을 때는 멀쩡하게 보이는 위장 능력까지 갖고 있을 것이고···
“···맞소···”
설명하려던 마법사들은 살짝 시무룩해졌다·
나름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준비했던 만큼 상대가 즉시 알아차리자 김이 샐 수밖에 없었다·
“나··· 난 놀랐다!”
“고맙다· 펭에린· ···잠깐· 네가 설명해준 게 아니었다고?”
“난 몰랐는데···”
말하면서 펭에린은 살짝 수치심으로 얼굴이 뜨거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냉정하게 판단했다면 아래에서 느껴지는 차원의 기운량과 여기 탐사대 마법사들이 준비한 마법의 구조를 보고 알아차렸을 텐데!
“저는 에린다르벨 님이 따로 초대장을 보내주셨잖습니까·”
이한은 알시클을 위로하듯 말했다·
“아· 에린다르벨 님이 말해주신 거야?”
“그건 아닌데요·”
“···너 입 다물고 있어라·”
알시클은 이한의 부리 아니 입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마법사로 살면서 다른 마법사들한테 질투는 많이 받아봤지만 자기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하자 깊이 반성하게 됐다·
‘좀 덜 얄밉게 굴걸·’
알시클은 이번 탐사가 끝나면 옛 친구들에게 안부 편지나 보내봐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