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2화
“다른 친구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설마 친구 이름을 구체적으로 대보라고 할 줄은 몰랐기에 이한은 당황했다·
역시 대마법사의 통찰력은 보통 날카로운 게 아니었다·
“···디레트 선배와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당황한 나머지 이한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선택을 했다·
자신의 이름을 친구 목록에 넣은 것이다·
옆에서 동행하던 죽음의 기사는 속으로 안타까워했다·
‘후계자 님· 자신의 이름을 다른 사람처럼 끼워서 넣어봤자 더 궁색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또··· 음··· 나고 가문의 스테달·”
-···
기사들은 차마 맨정신으로 후계자를 쳐다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려야 했다·
지금 대화는 육신을 잃어버린 언데드도 수치스럽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에린다르벨은 처음 듣는 이름에 의아함을 표했다·
“그런 사람도 있었습니까? 유크벨티레한테 물어봐야겠군요·”
“그 마법사가 비밀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거든요· 그래서 굳이 말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이상하군요· 유크벨티레가 상대의 성향을 존중해서 행동할 리가 없습니다만·”
‘아오·’
이한은 자리에 없는 선배를 욕했다·
평소에 얼마나 진상처럼 행동했으면 자리에 없어도 후배를 괴롭힌단 말인가?
“···선배님도 아주 조금 달라지셨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놀랍고 기쁜 일일 겁니다· 친구의 헌신 덕분일지도 모르겠군요·”
“제 생각에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이한은 냉큼 동의했다·
디레트 선배가 아니었다면 저 소 버두스는 지금쯤 아사하거나 에인로가드의 깊숙한 곳에서 실종되었을지도 몰랐다·
“뛰어난 마법사라면 친구한테 계속 폐를 끼쳐서는 안 될 텐데 말입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대답하고 나서 이한은 자신의 반응이 너무 격했나 싶어 걱정됐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크게 나온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마법사이자 어머니의 힘을 빌려서 소 버두스 선배를 혼낼 수 있는 기회라니?
그러나 에린다르벨은 이한의 반응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은빛 눈썹을 위로 올려 세우며 딸의 행동을 불만스러워했다·
“편지를 보냈는데도 변함이 없으니 실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유크벨티레는 학생의 마법 연구에 도움이 안 될 테니 버려두고 자신의 할 일을 하라고 편지를 보냈었군요·”
“?”
이한은 순간 위화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놀랍게도 이 대마법사는 유크벨티레가 아니라 디레트한테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아 아니· 유크벨티레 선배님한테 보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유크벨티레는 말을 해도 듣지 않으니 따로 편지를 보낼 이유도 없습니다·”
“···”
역시 대마법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이한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맞는 말이다· 유크벨티레 선배님을 설득하는 것보다 주변 사람들한테 피하라고 하는 게 훨씬 가능성이 높겠군·’
“잠깐· 그럼 디레트 선배는 편지를 받았는데 왜 그런 호ㄱ··· 아니 왜 그런 우정을 계속?”
에린다르벨은 안타깝다는 듯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친구는 자신이 알아서 선택하겠다고 답장이 왔습니다·”
“저런!”
이한도 똑같이 안타까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편지 내용이 너무 직접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장 이한도 누군가 ‘가이난도하고 친하게 지내지 마라’라고 편지를 보냈다면 ‘니가 뭔데’하면서 더 감싸고 돌았을 것 같았다·
그보다는 차라리 ‘가이난도가 한 달 치 간식을 확보하고 있는데 남몰래 혼자 먹는다더라’같은 편지가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워다나즈 님도 유크벨티레의 친구라고 밝히신 만큼···”
“제가 말입니까!? ···물론 그랬었죠·”
이한은 뒤늦게 수습했다· 그리고는 고통스러워했다·
‘젠장· 모라디를 대신 넣을 걸·’
너무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반응이 늦었다·
“···유크벨티레에게 휘말려서 자신의 연구에 방해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제국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마법사들이 온전히 마법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대승적으로 봤을 때 막대한 손실입니다·”
대마법사 에린다르벨은 뛰어난 마법사들이 대개 그렇듯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재능 있는 마법사들을 육성하고 이들이 각자 피어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가끔 그 재능 있는 마법사 중 한 명이 잡초나 독버섯처럼 다른 마법사들을 괴롭히려고 하면 엄격히 격리도 하고···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닌가?’
이한은 방금 자신이 한 생각에 살짝 놀랐다·
그래도 같은 선배라고 옹호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덴아르트는 어떻습니까?”
“예? 아···”
뒤늦게 눈앞의 마법사가 아덴아르트의 어머니기도 했다는 걸 떠올린 이한은 좋게 대답해줬다·
“황녀님은 아주 성실합니다·”
실제로 유 모 선배와 달리 아덴아르트는 푸른 용의 탑에서도 손꼽힐 만큼 성실했던 것이다·
“그렇습니까? 편지 내용을 보니 계속 워다나즈 님에게 요리를 강권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만···”
‘헉·’
날카로운 지적에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 대마법사를 상대하면서 몇 번이나 긴장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서로 일을 나눠서 맡거든요· 그래서 착각하셨나봅니다· 저는 연금술 학파라 요리를 자주 맡고 있습니다·”
‘채집 수리 제작 청소 등등도 같이 맡고 계시죠···’
죽음의 기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연금술 학파라서 요리를 맡고 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다른 학파들도 듣고 있어서 그렇지·
“그렇습니까· 아덴아르트는 워낙 입이 짧아서 편지 내용에 의아해했었는데 다른 학생들도 다 같이 먹는 거였다면 납득이 됩니다·”
“예··· 예???”
이한은 깜짝 놀랐다·
혹시 에인로가드에 아덴아르트가 두 명이라도 된단 말인가?
* * *
“다들 고생 많았다·”
뒤늦게 마법사들을 따돌리고 나온 해골 교장이 마차의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왔다·
“추적 마법 낙인 마법 기생형 마법생명체 아차원 생물 하여간 남들이 심어 놓은 거 있나 확인해봐라·”
해골 교장은 제국에게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마탑의 마법사들이라 하더라도 조금도 믿지 않았다·
아까 이야기하는 사이 제자의 옷깃이나 망토자락에 몰래 연락할 수단을 심어놨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아까 제자 님께서 확인하시고 마력으로 파괴하셨습니다·
“···그 그래·”
교장은 속으로 전율했다·
가르시아 교수도 이렇게 빨리 적응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무서운 녀석 같으니!
“그래도 마탑에 납치는 안 당할 것 같아서 다행이군· 어디 보자···”
해골 교장은 회중시계를 꺼내더니 시간과 날짜를 확인했다·
“난 다음 주까지 수도에 머무를 예정이다· 예상보다 훨씬 일찍 끝났으니 남은 기간 동안은 원하는 걸 해도 좋다·”
빚쟁이들을 설득하는 건 끝났지만 그렇다고 싱글벙글 웃으며 곧바로 에인로가드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황제를 비롯해 제국의 여러 인물들에게 있었던 일들을 직접 설명해야 했던 것이다·
주기적으로 대륙에 강림하는 사념체 중 하나가 영구히 승천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정보였다·
“앗· 그러면···”
“잠깐· 조우린 전하를 보러 가는 거라면 관둬라· 내 일정을 마친 뒤 같이 가는 게 좋겠다·”
“?”
해골 교장이 단호하게 말리자 이한은 의아해했다·
“제가 혼자 먼저 가면 전하께서 교장 선생님께 토라지실까봐 그러시는 겁니까?”
“···하하· 녀석· 영특하기가 아주 거인들 같구나· 맞다· 그러니까 나중에 같이 가자꾸나·”
마탑 마법사들 앞에서 마법을 시전할 때는 그렇게 높은 지능을 보여주던 제자가 한심한 추측만을 늘어놓자 해골 교장은 안타깝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원래 예언자가 자신의 앞일은 예언하지 못한다지만 어쩜 저럴 수가 있을까?
“어차피 선물도 사야 하긴 했습니다만··· 아· 에린다르벨 님에게 이런 걸 받았습니다·”
이한은 둘둘 말린 두루마리를 꺼냈다· 아직 밀랍 봉인을 풀지 않은 두루마리였다·
“혹시 이게 뭔지 아십니까?”
“안다· 에린다르벨이 널 높게 평가했나보군· 하긴 높게 평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그 말에 이한은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본인의 마법 연구에 참가시키려는 거겠군요·”
“뭐? 아니야!”
해골 교장은 어처구니없는 오해에 어이없어했다·
“에린다르벨은 그런 녀석이··· 아· 설마 유크벨티레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거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거짓말하지 마라·”
“사실 맞습니다·”
“···에린다르벨은 재능 있는 마법사들에게 선물하는 걸 좋아한다· 아마 네게 도움이 될 무언가겠지·”
“본인의 마법 연구 참가 같은?”
“···”
해골 교장은 제자의 불신에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가끔 자식의 죄는 부모도 같이 짊어져야 하는 법이었다·
“열지 않는 것도 네 자유겠지만 궁금하면 열어봐라· 손해 볼 건 없을 거다·”
그렇게까지 말하자 이한은 의심을 거두고 두루마리를 묶은 봉인을 풀었다·
안에는 수도의 지도와 가야 할 장소 설명이 적혀 있었다·
친애하는 마법사이자 차기 후계자에게 편지 보냅니다·
다음 장소에서 귀하와 이야기를 나눴던 마법이 진행 중입니다·
미리 말을 남겨놨으니 참가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귀하의 참가와 성취를 기대하겠습니다·
에린다르벨
“???”
이한은 두루마리 내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골 교장이 그 모습을 보더니 물었다·
“연회인가? 아니면 아티팩트 가게? 운이 좋으면 파산한 귀족의 가문 창고일 수도 있겠군·”
에린다르벨은 보통 저런 자리에 마법사들을 불러 원하는 아티팩트를 갖고 가게 해줬다·
해골 교장도 참가하고 싶을 만큼 인심 좋은 자리였다·
“셋 다 아닌데요? 수도 외곽 지하 같습니다만·”
“숨겨진 지하 창고라도 발견했나보군· 가능하다면 뭐라도 좀 훔쳐오도록 해라·”
“저하고 이야기를 나눴던 마법이 진행 중이라는데 전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없습···”
“그래· 그래· 그렇겠지· 가서 이야기 나누면 기억이 떠오를 거다·”
해골 교장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미 제자의 전적이 너무 화려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자신은 마법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저보고 후계자라고 하는데 뭔가 잘못된 것 아닙니까?”
“아마 요 기사 놈들이 기사도란 걸 잊어버리고 방정맞게 입을 놀려서 아니겠느냐·”
해골 교장의 말에 데스 나이트들은 다시 한 번 시선을 피했다·
“마지막으로 말하지만 에린다르벨은 유크벨티레처럼 남을 억지로 연구에 참가시키는 마법사가 아니다· 내키지 않는다면 가지 않아도 좋지만 나중에 제국 신문을 보고 후회하지나 마라·”
“바로 가겠습니다·”
이한은 즉시 결정을 내렸다·
나중에 제국 신문으로 <수도 외곽 지하에서 숨겨진 고대 창고 발견> 같은 기사를 본다면 괴로워서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 * *
녹휘석 마탑의 차기 후계자로 손꼽히고 있는 지논은 대마법사로부터 온 편지를 받고 이해가 가지 않아 고민에 빠졌다·
“왜 그러시오?”
“아· 에린다르벨 님에게 편지를 받았는데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입니다·”
친애하는 마법사이자 차기 후계자에게 편지 보냅니다·
다음 장소에서 에인로가드 학생에게 걸맞은 아티팩트들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유크벨티레가 끼친 폐에 대해 조금이라도 보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에린다르벨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에인로가드 학생에게 걸맞은 아티팩트라니·”
“아마 그만큼 좋은 아티팩트란 뜻 아니겠소?”
“유크벨티레 황녀가 끼친 폐는요?”
“저번 녹휘석 마탑이 먼저 구입한 시약을 강탈해간 일을 말하는 걸 테지요·”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