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4화
해골 교장은 종이 뭉치를 내려다보며 중얼대는 제자의 모습에 든든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저번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이 워다나즈 가문의 마법사가 가진 가장 천재적인 재능은 마법 실력이 아닌 그 화술일지도 몰랐다·
이번에도 부디 제국의 관료들을 쏠어버려다오!
* * *
제국 재무부의 심사관으로 일하고 있는 실바스는 깜짝 놀랐다·
동부에서 진행 중인 <켄타우로스 마법 역참>이 과연 가능성이 있을지 없을지 심사하고 돌아왔더니 황궁 안의 분위기가 매우 흉흉했던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말도 말게· 고나달테스 님께서 재무부를 습격하셨네· 재무관 각하께서는 거꾸로 매달리셨지·
-아 아니! 그 말도 안 되는 연구와 실험 때문에?! 너무하신 거 아닌가?!
에인로가드 마법사들은 별 쓰레기 같은 연구에도 금화를 지원해달라고 관료들을 괴롭히는 일로 악명이 높았다·
그리고 그 신청서를 들고 방문하는 게 해골 교장이었다·
실바스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좀 다르네· 에인로가드에 침입한 사념체를 영구히 유폐시키겠다고 하시더군· 하지만 진실을 누가 알겠나?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이 또 이상한 핑계로 금화를 가져간 거라면?
-그래도 공께서 그런 얄팍한 거짓말을 하실··· 수 있긴하지·
-그래· 자네도 조심하게· 지금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져있네·
막대한 양의 금화를 반쯤은 강탈당하듯이 빌려줬는데 기뻐할 관료는 없었다·
지금 관료들의 신경은 식량 창고가 날아간 에인로가드 학생들만큼이나 날카로운 상태였다·
‘허어·’
실바스는 묵직한 자단나무 책상앞에앉은 뒤 생각에 잠겼다·
들은 이야기가 워낙 충격적이라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에인로가드의 영주인 고나달테스 공은 황제 폐하의 마령관으로서 막대한 신뢰를 받고 있었다·
실제로 이번 일처럼 황궁에 들어와서 재무관을 거꾸로 매달아버리고 강제로 금화를 빌려가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페하의 묵인이 없다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에인로가드 영지에 위험한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재무관 각하를 거꾸로 매달아버리시다니·’
지금 다른 관료들은 이를 갈고 있었다·
해골 교장이 빌려간 금화를 제 때 값지 않는다면 가차없이 에인로가드의 다른 지원금에서 금화를 뜯어가 벌충할 생각이었다·
“저· 계십니까?”
“아니·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아니십니까?”
실바스는 의외의 손님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 에인로가드의 학기가 벌써 끝났나?’
아직 며칠 더남은 것 같았는데?
“여기 선물입니다· 저번에 좋아하셨던 것 같아서·”
이한은 황궁 앞에 위치한 <바위 정령의 사과잼 카페>에서 사온 커피와 애플파이를 하나씩 꺼내놓았다·
황궁에 찾아오는 거만한 잡놈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따뜻한 배려심에 실바스의 마음도 애플파이만큼 뜨끈해졌다·
‘크흑· 다른 자들도 저걸 보고 배워야 하는데·’
다른 동료들에게도 간식을 나눠준 실바스는(관료들은 충격과 감격의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한 뒤 말했다·
“참· 마법사 님· <트롤이 먹이로 선호하는 종족에 대한 연구>는 벌써 효과를 발휘하고 있더군요·”
“예?”
이한은 뜬금없는 소리에 멈칫했다가 뒤늦게 알아차렸다·
제국 수도의 황궁에 방문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작년에 해골 교장과 같이 와서 말도 안 되는 선배들의 연구 주제를 통과시키기 위해 헛소리를 지껄였던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트롤이 먹이로 선호하는 종족에 대한 연구>였다·
‘내가 뭐라고 했었지? 트롤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먹이로 선호하는 종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었었나?’
새삼 돌이켜보니 헛소리처럼 들렸다· 이한은 이게 어떻게 통과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잠깐·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요? 벌써?”
“예· 트롤로 인한 피해 추세가 확연히 감소하고 있습니다· 서부의 <황무지 별잡이>들은 감사패까지 보내주더군요·”
“···”
이한은 자신이 선배를 믿지 못했다는 사실에 반성했다·
이렇게 좋은 연구였을 줄이야···!
“에인로가드 마법사들의 연구는 언제나 제국을 위한 것들밖에 없지요· 발드ㄹ··· 흠흠· 몇몇 외부 마법사들이 음해를 하지만 실바스 님이라도 진실을 알아주시니 다행입니다·”
‘그런가?’
실바스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작년에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갖고 온 연구들은 겉모습과 달리 뛰어난 연구들이 맞았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에인로가드 마법사들이 음해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조금 아리송했다·
딱히 음해를 당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실은 오늘 이렇게 방문한 건 에인로가드에서 있었던 사념체 사건 때문입니다·”
“그게 정말 일어난 일이 맞았군요!'”
“예?”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바스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에인로가드의 학생 앞에서 해골 교장이 한말의 진위를 의심했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이번에 교장 선생님께서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크게 무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로 인해 관료분들에게 페를 끼쳤다고···”
“아 아닙니다· 저는 고나달테스 님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원래 냉철하신 분이신데 학생들의 일만 관련되면 이성을 잃으십니다·”
‘그런가?’
실바스는 다시 한 번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것치고는 에인로가드에서 흘러나오는 소문들이 꽤나 흉흉했던 것 같은데···
“제국의 금고에서 빌려간 황금은 당장이라도 갖아야 하겠지만 혹시 조금만 더 미룰 수 없겠습니까? 에인로가드 마법사들의 연구를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으음···”
실바스는 고민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실바스도 해주겠다고 하고 싶었지만 다른 관료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만 장담은 해드릴 수 없습니다· 물론 저야 이번 <트롤이 먹이로 선호하는 종족에 대한 연구>도 그렇고 에인로가드 마법사들을 지원해주는 게 제국
을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다른 관료들은 상당히 화가 나있어서···”
“그럴 필요 없다!”
“!?”
호화로운 황궁 객실의 문을 열고 처음 보는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쿵!
남자는 덩치가 어찌나 컸는지 들어오다가 문틀에 이마를 박았다· 고통 때문에 인상을 잠깐 찌푸리더니 고개를 숙이고 안에 들어왔다·
이한은 저렇게 커다란 인간 종족은 처음 보았다· 팔크리우스 선배를 능가하는 덩치였다·
“자네가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인가?”
분명 가볍게 말하는 것 같은데도 넓은 객실 안이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눈빛은 타오르는 듯이 일렁거렸고 단련된 육신에서는 강렬한 기세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옛 신화 속 전사 같은 모습이었다·
이한은 혹시 재무관이 복수를 위해 북방에서 호위를 고용해왔나 의심했다·
“맞습니다만 누구신지···”
“폐하의 넷째 아들 우만일세· 누님으로부터 자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먼저 감사를 표하지!”
“????”
이한은 누님이 누굴 말하나 싶어 순간 뇌가 정지했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조우린의 동생이라고!?’
생각해보니 조우린은 셋째였다· 눈앞의 사내가 넷째라면 분명 누님이 되는 게 맞았다·
···도저히 겉모습으로는 상상도 가지 않았지만··
“어··· 그게···”
“무슨 일인가?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도 좋네! 자네는 용의 계약자니 말일세!”
“조우린 전하는··· 아직··· 그··· 어리신 것 같은데····?”
“아! 우만의 누님께서는 영혼의 그릇이 그만큼 커다라신 것이지·”
우만은 쩌렁쩌링한 목소리로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작은 그릇은 빨리 완성되지만 큰 그릇은 그 완성에 오래 걸리는 법·
우만은 작은 그릇이기에 빨리 자랐지만 조우린은 큰 그릇이기에 느리게 자라는 것이었다·
‘···근거가 있나?’
이한은 마법사로서 논리와 이론을 들고 싶었지만 팔크리우스 선배나 가르시아 교수님을 능가하는 덩치의 상대 앞에서 감히 이견을 제시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만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누님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것 말고도 자네의 이야기는 따로 들었네·”
“헉· 무슨 이야기를?”
이한은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워낙 저지르고 다닌 일들이 많았던 것이다·
작년에는 구울이나 서리거인의 왕 마법범죄자나 반마법주의자 바실리스크나 씨 서펜트 같은 강적들을 쓰러뜨렸고 올해에는 고대의 대마법사 사념체나 사악한 햄스터 대륙을 정복하려는 반신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그랑덴 시에서 강도짓도 조금 했었는데···
‘그 중 뭘 말하는 거지?’
“아주 정의롭다고!”
“···구체적으로 어떤?”
“???”
실바스는 이한의 질문에 당황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인지 물을 만큼 여러 이야기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우만은 고개를 저었다·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네 자네도 자네의 일이 있으니 말일세 우만도 우만의 일이 있고! 여하튼 실바스· 자네가 고생할 필요 없다!”
“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실바스는 의아해했다·
아무리 우만이 황제의 넷째 자제분이라지만 분노한 관료들을 억누를 수는 없을···
“우만이 제국 금고에 필요한 황금을 대신 지불하지! 에인로가드로 들어가를 지원금을 건드리지 말란 말이다·”
“···정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
실바스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감격해서 우만을 꽉 껴안았다·
제국에는 백 명도 넘는 황족을 무시하는 귀족 파벌이 있었지만 오늘 이 일을 본다면 감히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고귀한 핏줄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우만을 꽉 껴안던 실바스는 옆에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새 워다나즈 가문의 마법사도 우만을 꽉 껴안고 있었던 것이다·
“둘 다 좀 떨어지게!”
“예! 전하!”
* * *
황제의 넷째 자식은 황궁을 나서는 이한을 직접 배웅해줬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전하·”
“아니! 감사할 필요 없네· 자네는 마땅히 이런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고 에인로가드 또한 그 자격이 충분한 학교니까·”
“?”
우만의 말을 듣던 이한은 위화감을 느꼈다·
말하는 것만 보면 이 용족은 에인로가드의 충실한 후원자이자 투자자가 되어도 이상할 것 없어보였다·
용족이고 에인로가드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그런데 왜 해골 교장한테서 이 사람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단 말인가?
‘최근까지 가난하셨나?’
“전하· 그런데 황금의 양이 만만치 않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우만을 걱정할 필요는 없네· 매 해 마법사 카드를 판돈을 금고에 쌓아놓으니까·”
“···마법사 카드를 파신다고요?!”
“그래!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명예로운 역할이지·”
이한은 자신이 신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감각에 빠져들었다·
현 시대의 마법사 카드 제작자를 이렇게 대면하다니 아무도 정체를 모르는 신비스러운 그 제작자를·
“영광입니다· 제 친구도 정말 좋아합니다·”
“친구가 어린가보군?”
“어 마법사 카드는 나이 많은 사람들도 자주 즐기지 않습니까?”
그 말에 우만은 인상을 찌푸렸다· 매우 못마땅하다는 기색이었다·
“그건 그릇된 일일세! 어린아이들을 위해 만든 물건을 어른들이 뺏어가서 즐기다니?”
“···”
이한은 가이난도한테 오늘 만난 사람은 비밀로 숨겨야겠다고 다짐했다·
“여하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가장 어려운 관료들을 설득했으니 남은 귀족들이나 마법사들은 휠씬 설득하기 쉽겠군요·”
“자네가 설득하나?”
“예? 예·
우만은 중얼거렸다·
“고나달테스 공의 또다른 악행이로군·”
“아무것도 아닐세· 참! 부탁이 있네· 혹시 고나달테스 공에게는 이 우만과의 만남을 비밀로 해줄 수 있겠나? 물론 어려운 부탁이라는 건 알고 있네· 자네는 고나달테스 공의 제자니까· 하지만 이건 정말로 대의와 정의를 위한···”
“안 어렵습니다· 해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