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0화
400. <화란전> 크랭크인 2
20m쯤 떨어진 출연자 대기 장소로 만든 천막에는 배우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들이 줄을 지어 놓여 있다.
의자의 등판에는 배우들의 배역과 이름이 적혀 있었기에 다들 그걸 확인하고 찾아간다.
단 주연의 의자는 등판을 보지 않아도 한눈에 알 수가 있었다.
천막 안에서도 가장 선선한 바람이 부는 자리에다 곁에는 생수와 음료수가 들어간 커다란 아이스박스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특권이라면 특권이지만 주연을 대우하는 차원에서 어느 현장에서나 저 정도 대우는 해 준다.
가장 많은 분량을 소화하고 극을 이끌어가는 주연의 부담감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우 대기 장소로 온 민규리가 대뜸 가장 좋아 보이는 주연 의자에 앉아 버렸다.
조금 전 촬영 순서 때문에 현장에 한바탕 소란이 있었던 탓에 오복희 PD가 민규리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자리 때문에 충돌이 생길 위기였기 때문이다.
“저게······ 어디서 감히······.”
신경이 곤두선 오복희 PD가 붉은색 확성기를 붙잡았다.
그런데 그때 금은동 AD와 대화를 마친 유진이가 우리 곁으로 다가오며 말한다.
“PD님. 괜찮아요. 저.”
오복희 PD가 고개를 젓는다.
“아뇨. 유진 씨가 저기 안 앉으면 더 골치 아파져요.”
나 역시 유진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아. 네가 저 자리에 안 앉으면 다음부터는 주연 자리에 앉겠다고 배우들끼리 전쟁을 벌일 거야. 저기 지금 이태연 선배랑 윤주연 선배 눈빛 봐봐.”
선배들의 시선을 목격한 유진이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요. 대신 우리가 가서 조용히 타일러요. 어쨌건 쟤. 신인이잖아요.”
유진이는 말로 해서 안 되면 그때 다른 방법을 생각하자 말한다.
성격이 좋은 유진이라 다행이지 지랄 맞은 성격의 여배우였다면 뺨부터 날려 버릴 수도 있었다.
오복희 PD에게 인사를 마친 뒤 유진이와 미소를 데리고 서둘러 출연자 대기 장소로 향했다.
* * *
출연자 대기 장소.
긴 천막을 세 개 붙여 놓아 생긴 그늘에 등판에 이름표가 붙은 의자들이 띄엄띄엄 늘어서 있다.
그중 유진이가 앉아야 하는 자리를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이제껏 보이지 않던 장삼덕 실장이 급히 달려온다.
주변의 싸늘한 시선을 알아챈 장삼덕 실장은 깜짝 놀라 민규리를 향해 외친다.
“야. 민규리. 어서 일어나! 왜 거기 앉아 있어?”
“응? 자리에도 주인이 있어요? 의자에 이름표가 붙은 것도 아닌데.”
“붙어 있어! 여기!”
장삼덕 실장이 의자 뒤의 이름표를 가리킨다.
민규리가 그건 몰랐다며 감탄사를 내뱉는다.
“오~ 자리에도 주인이 있네요?”
“그러니까 모르면 멋대로 좀 하지 마! 뭐든 내가 일단 물어보랬잖아.”
민규리가 투덜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뭐 그런 줄 알았나?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답답해서 그런다! 답답해서!”
민규리가 입술을 삐죽대며 부러운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근데 주연 의자가 제일 좋은 데 있네요.”
“당연하지. 주연이니까.”
“쳇. 주연은 좋겠다~”
“그러면 너도 이번에 제대로 해서 다음 배역에 주연 따.”
“알았어요.”
한바탕 싸움을 벌여야 하나 싶었지만 장삼덕 실장이 나선 덕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때 우릴 발견한 민규리가 고개를 숙인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예. 규리 씨도 잘 지내셨어요?”
민규리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답한다.
“선배님 자리인 줄 모르고 앉았어요. 죄송해요.”
이런 것도 자리 주인이 있냐며 살짝 비꼬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딴 기 싸움을 받아주지도 않겠다는 듯 유진이는 웃음으로 흘려 버렸다.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실수할 수도 있죠.”
“이해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런데 그때였다.
미소가 민규리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근데 이모는 왜 기분이 나빠요?”
웃고 있던 민규리의 얼굴이 살짝 떨린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미소야?”
“어디 아파요? 아니면 혹시 누구한테 혼났어요?”
미소는 눈이 좋다.
그러다 보니 민규리의 현재 감정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다만 미소는 ‘왜’ 민규리가 기분이 나쁜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감정을 읽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유진이한테 자리를 비켜준 게 못마땅한가 보군.’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속내를 들키자 민규리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아 아냐. 내가 왜 기분이 나빠? 전혀 아냐!”
민규리가 큰 소리로 어색하게 변명하자 배우들이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린다.
순간 장삼덕 실장이 미소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나섰다.
“미 미소야. 안녕?”
미소가 장삼덕 실장을 향해 꾸벅하고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응. 우 우리 규리가 촬영이라 긴장을 해서 그래. 그러니까 경험 많은 우리 미소가 잘 좀 챙겨줄래? 미소가 선배잖니······.”
어찌나 당황했는지 장삼덕 실장은 아역 배우인 미소에게 부탁을 해버렸다.
그 순간 미소가 배를 내밀며 말한다.
“네! 제가 선배니까 이모한테 잘 알려드릴게요!”
미소의 순수한 대답에 배우들이 빵하고 터져버렸다.
“하긴 미소가 선배지. 호호.”
일 왕후 역의 이태연은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렸고 삼 왕후 역의 윤주연은 민규리를 향해 놀려댔다.
“어이~ 거기 후배님. 미소 선배님한테 잘 좀 배워. 응?”
S급 여배우들이 한마디씩 하자 민규리의 얼굴은 더욱 붉어진다.
당장이라도 현장을 뛰쳐나가고 싶은 표정이지만 지난번 일 때문인지 꾹 참는 모양이었다.
그때 유진이가 웃으며 미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소야. 어른한테는 선배고 후배고를 떠나서 그렇게 말하는 거 아냐.”
“왜?”
“무례한 행동이니까. 그러니 미소는 손윗사람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알았지?”
미소의 눈이 큼지막해진다.
“진짜? 엄마. 그러면 안 돼?”
“응. 그러니까 어서 사과드려.”
미소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민규리를 향해 90도로 인사를 한다.
“죄송해요!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이모.”
미소가 두 손을 배에 대고 허리를 굽힌다.
미소가 사과의 정석을 보여줬지만 민규리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몸을 홱 하고 돌렸다.
미소가 걱정 가득한 눈빛을 짓는다.
“엄마. 나 어떻게 해? 저 이모. 화난 거 같아! 미소가 미운가 봐.”
“아냐. 이모가 당황해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일단 다른 선배님들에게 인사부터 하자.”
미소가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인다.
“응. 알았어. 그럼 나중에 사과할게.”
미소 덕에 날 선 현장의 긴장이 자연스레 풀려버렸다.
이어서 유진이가 곁에 있는 날 쳐다본다.
어디부터 인사를 하러 가야 하느냐는 눈치였다.
‘이쪽부터.’
난 유진이와 미소를 이끌고 현재 이곳에서 가장 선배인 이태연에게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첫날이라 의상에 힘을 팍 주고 나온 이태연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아는 척을 했다.
“그래. 오 PD가 오늘 5화부터 촬영한다던데 연습 많이 했니?”
“최선을 다했는데 어떨지 모르겠어요. 일단 디렉팅하시는 걸 따라만 가자 생각 중이에요.”
오늘 크랭크인 첫날 촬영은 세트장의 공사가 아직 완료되지 않아 성인 배우들이 나오는 5화만 찍을 예정이다.
그때 이태연이 옆에 앉은 정화 공주 역의 한상희를 가리킨다.
“여기 우리 상희도 죽도록 연습했으니까 합을 맞추면 제법 재미는 있을 거야.”
한상희가 유진이를 쳐다보며 대꾸한다.
“유진아. 이따가 제대로 한번 해보자?”
“예. 선배님!”
한상희는 대본 리딩 때와 다르다며 자신감을 내뿜었다.
이태연은 미소를 향해서도 조언을 한다.
“미소도 열심히 하렴. 그동안 우리 딸도 연습을 많이 했는데 실수하면 안 되잖니?”
이태연의 딸 양이지가 미소와 눈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미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네! 열심히 할게요!”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윤주연에게 가려던 찰나 이태연이 한마디를 더한다.
“유진이 너도 조심해. 이번 작품을 기회로 너처럼 떠보겠다고 작심한 사람들 많으니까.”
<화란전>에 주연을 잡아먹으려는 조연들이 넘친다는 소리였다.
순간 유진이가 발걸음을 멈추며 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그게 그렇게 쉽게 될까요?”
유진이의 얼굴에 당당한 자신감이 흘러나온다.
도발에는 도발로 받는 유진이의 태도가 새삼 놀라웠다.
덕분에 오히려 이태연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장하다 정유진.’
유진이는 태연하게 웃으며 자신이 드라마의 주연이라는 걸 다시 한번 주지시켰다.
어설픈 기 싸움에 말려들지 않고 말이다.
* * *
오복희 PD가 붉은 확성기를 들고 외친다.
“자. 다 같이 모여 사진 찍을 겁니다. 곧 기자분들도 모실 거니까 5분 뒤에 세트장 대전 앞에 모여주세요.”
그 순간 연예인들의 매니저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연 씨! 헤어! 헤어!”
“주연 언니. 의상 구겨졌어요. 얼른 일어나봐요. 선 채로 바로 다릴게요.”
“얘 규리야! 입가에 묻은 거 닦고 얼른 화장 고쳐!”
출연자 대기 장소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도 이미리 대리와 양소리 대리가 나서서 유진이와 미소의 화장과 스타일을 만졌다.
그사이 정상봉은 따뜻한 핫팩을 2개씩 뜯어 두 사람에게 들려준다.
“이거 주머니에 넣어두고 틈틈이 손을 녹이세요.”
“올. 상봉 오빠 세심하신 것 좀 봐.”
유진이의 칭찬에 정상봉은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팀장님이 미리 알려주신 건데요 뭘.”
벌써 11월.
차가운 바람이 세트장을 휘몰기 시작하고 있었기에 미리 준비를 해왔다.
현장의 기온과 습도에 따라 얼마든지 배우들의 컨디션이 망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이상.
연기 외적인 걸로 영향을 받게 할 일은 생기게 둘 수 없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우린 다섯 번째 정도로 대궐 앞 계단으로 향했다.
금은동 AD가 계단 아래서 배우들이 설 위치를 알려준다.
“맨 앞 열에는 미소가 제일 중앙에 서고 나머지는 양쪽으로 늘어서 주세요.”
신라 시대 고증 한복을 입은 배우들이 미소와 유진이를 중심으로 대전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줄을 서기 시작한다.
미소가 제1열 중앙.
그리고 바로 뒤 전체의 중앙 에 유진이가 섰다.
그 뒤로는 이 왕후역의 최지영과 음갈문왕 역의 송지환이 서 있고.
이어서 오복희 PD가 주차장 쪽을 쳐다본다.
“기자분들 들어오라고 해.”
스태프들이 고개를 끄덕인 뒤 막고 있던 바리케이드를 치운다.
그 순간 기자들이 우르르 달려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마치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하이에나 무리처럼.
* * *
기자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며 사진을 찍는다.
그러자 줄을 맞춰 선 배우들이 마치 게걸음을 하듯 가운데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왜 이렇게 가운데로 몰렸지? 간격 좀 벌려 주세요.”
금은동 AD가 다시 줄을 정리하고 간격도 벌리게 했지만 잠시 눈을 돌리자 다시 간격이 좁혀진다.
늘 주연만 하던 배우들이 태반이다 보니 모두가 ‘센터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사진을 찍고 나자 기자들은 이번엔 인터뷰를 요구했다.
그러나 오복희 PD가 단호하게 기자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인터뷰는 촬영 후에 따로 시간 드릴게요. 자자. 이만들 나가세요.”
“뭐야? 그냥 나가라고? 촬영이 언제 끝날 줄 알고?”
“하여간 배우들 촬영 방해될 수 있으니까 멀리서 망원렌즈로 당겨서 찍으세요.”
기자들이 가까이서 찍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오복희 PD는 인정사정없었다.
사실 사진을 찍게 해 준 것도 경쟁작에 밀릴까 걱정한 고위 선의 지시를 따른 거니까.
“자자. 밖으로 나가주세요~”
오복희 PD의 지시를 받은 스태프들이 기자들을 몰아내며 <화란전>의 촬영 준비를 마쳤다.
* * *
첫 촬영은 대전 안에서 세 공주가 ‘길쌈 대결’을 펼치겠노라 말하는 장면.
국왕인 음갈문왕이 가을의 추수 때까지 더 많은 길쌈을 만든 승자에게 큰 선물을 줄 거라 약속한다.
그리고 그 선물을 놓고 공주들끼리 신경전을 벌이는 씬이었다.
그리고 주차장으로 쫓겨난 기자들은 아이돌 팬이라도 된 것처럼 망원렌즈를 카메라 바디에 연결하고 있었다.
졸지에 스태프들까지 포함해 수백 명 앞에서 연기를 하게 된 상황.
많은 기자들이 지켜본다는 것을 알게 된 유진이도 조금은 긴장이 되는 듯했다.
난 마시는 액상 우황청심환과 입씻을 생수를 건넸다.
“넌 네 연기만 신경 써. 앞으로 전 국민이 네 연기를 지켜볼 건데 기자들 백 명 따위는 없는 거나 다름없잖아?”
유진이의 얼굴이 환하게 빛난다.
“전 국민이라. 그 말 듣기 좋은데요?”
유진이가 눈웃음을 지으며 답하자 곁에 있는 미소도 외친다.
“그러면 이제 엄마 국민 배우예요? 삼촌?”
“미소는 국민 배우가 뭔지는 아니?”
“사람들이 다 아는 배우!”
유진이가 많이 유명해졌다지만 아직 그 급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드라마를 끝내고 그 호칭 정도는 들을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난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 드라마 끝나면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미소가 반달 눈을 하며 환호했다.
“우와~ 잘됐다.”
미소의 소란 덕분에 유진이는 자신감 찬 표정으로 대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다녀올게요.”
“그래.”
짧게 심호흡을 한 유진이가 세트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우황청심환은 먹을 필요가 없었는지 유진이의 빈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유진. 파이팅!”
유진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먹을 쥐어 올렸다.
* * *
100명은 너끈히 들어갈 대전의 세트장.
배우들이 준비를 끝내고 난 뒤 반사판과 붐 대 지미집 카메라까지 세팅이 완료되었다.
스태프들이 북적이며 세트장 안에 들어차자 오복희 PD가 긴장된 표정으로 확성기를 붙잡았다.
“자. 그러면 화란전의 닻을 올려 봅시다. 다들 준비됐습니까?”
“예! 감독님.”
이곳저곳에서 <화란전>의 크랭크인 스탠바이를 확인해준다.
오복희 PD가 긴 호흡을 마시며 외친다.
“알았습니다. 그러면 ‘화란전’ 촬영 시작합니다. 5화 첫 번째 씬. 레디~~ 액션!”
회귀 전 시청률 25%를 넘었던 <화란전>이 완전히 새로운 배우들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데.
촬영은 내가 예상도 못 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