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4화
384. 지리산 2
천왕 산장의 안에서 문을 살짝 열어 밖을 살폈다.
하지만 득구가 짓는 소리만 들려올 뿐 오태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컹- 왈왈왈!
문밖에서 들리는 득구의 짓는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마치 누군가를 유인이라도 하듯 말이다.
그 순간 난 고개를 돌려 뒤쪽에 있는 이대호에게 경고했다.
“당장 태풍이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가세요.”
“예. 팀장님.”
이태풍이 돕겠다며 말한다.
“형. 차라리 다 같이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네가 없어야 내가 마음 편히 움직여. 나 못 믿어?”
여전히 이태풍이 다친다는 일정은 그대로였기에 위험을 무릅쓸 순 없었다.
“알았어요. 조심하세요 형.”
어쩔 수 없다는 듯 이태풍은 이대호의 손에 이끌려 2층으로 향했다.
그제야 난 안도한 뒤 밖으로 나섰다.
“갑시다 재수 씨.”
“예.”
그런데 산장 밖으로 나온 순간.
득구가 짖는 소리가 이제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결국 난 조금 전 소리가 난 왼쪽 모퉁이 쪽으로 향했다.
“벽을 딱 달라붙어서 가시죠.”
“예. 팀장님.”
고재수와 난 천천히 산장의 벽면을 따라 모퉁이 쪽으로 향했다.
프스스스.
무릎까지 난 풀에 쓸려 마찰 소리가 난다.
그런데 모퉁이를 5m 정도 남겨 뒀을 때였다.
희미하게 정체불명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너 혼자야?”
“당연히······ 혼자지······ 이 험한 곳에 누가······ 온다고······.”
오태완이 힘겹게 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난 오른 주먹을 쥐며 발걸음을 멈췄다.
고재수도 소리를 들었는지 우뚝하고 멈춰 섰다.
모퉁이 너머에서 난 소리는 오태완이 누군가에게 잡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사람이었어?’
득구가 짖은 건 멧돼지나 곰이 아닌 사람을 향해서였다.
난 마른침을 삼킨 뒤 오른손에 든 60cm가량의 각목을 꼭 쥐었다.
순간 남자와 오태완의 목소리가 조금 더 선명히 들린다.
“밥 있어?”
“비축해 둔 건 다 먹었어. 배가 고프면······ 산 아래로 가······.”
“이게 어디서 구라야? 라면 하나라도 나오면 넌 죽어.”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해. 어차피 난······ 세상에 미련 없으니까······.”
오태완이 남자를 산장으로 들이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바람은 실패로 돌아갔다.
“세상에 미련이 없어? 웃기고 있네. 진짜 미련이 없는 사람은 알아서들 죽어.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일어나. 경찰들 피해 오느라고 온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까.”
그때였다.
오태완이 큰 소리를 내지른다.
“도망~ 컥.”
오태완의 말이 이어지지 못하고 끊겨 버린다.
당장이라도 달려나가고 싶었지만 모퉁이 너머의 상황을 알지 못했기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너 말고도 사람이 있다 이거지?”
더 이상 오태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낯선 남자의 목소리만 들려온다.
순간 난 고재수에게 신호를 줬다.
상대가 모퉁이를 돌아 나오면 덮치자고.
고재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때였다.
파스스스.
풀 마찰 소리가 점점 커지며 상대가 다가오는 게 들렸다.
“에이~ 씨~ 좀 풀이나 잘라두지.”
남자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풀로 인해 움직이기 어려운지 투덜거리고 있다.
덕분에 그와의 거리를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대략 3m.
2m.
1m.
‘지금이다.’
그 순간 남자가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40대 중반의 외모.
군복 바지.
긴 머리.
날카로운 눈빛.
남자는 왼손에 군용 칼을 들고 있고 오른손에는 오태완에게 뺏은 도끼를 들고 있다.
“뭐 뭐야? 이것들은?”
설마 사람이 매복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남자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난 그때를 놓치지 않고 상대의 손목을 향해 각목을 힘껏 휘둘렀다.
딱!
손목을 맞자 남자가 칼을 놓친다.
하지만 운동을 꽤 한 사람인지 고통을 참고 반사적으로 오른손에 든 도끼를 휘둘렀다.
재차 각목을 휘두를 시간이 없었기에 허리를 젖혀 도끼를 피했다.
부웅!
묵직한 쇳덩이가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그때.
빡!
둔탁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크윽.”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들고 있던 도끼를 떨어뜨렸다.
고재수가 뒤에서 남자를 공격한 것이다.
‘기회다!’
그와 동시에 내 주먹이 남자의 턱에 꽂혔다.
퍼억!
순간 남자는 그대로 기절해 앞으로 쓰러져버렸다.
털썩.
“헉헉헉······.”
그제야 숨이 가빠왔다.
아무런 보호대 없이 흉기를 든 상대와 맞닥뜨린 건 오랜만.
그러나 내 상태보다 고재수가 걱정이 되었다.
고개를 돌리자 생각한 대로 고재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무리 연기자로서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연기를 해야 한다지만 서슴없이 흉기를 휘두르는 괴한과 만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러나 이대로 놀라고 있을 시간은 없다.
“재수 씨. 어서 오태완 씨 상태부터 확인하세요.”
“예.”
쓰러진 남자를 제압한 채 말하자 고재수는 오태완의 상태를 확인하러 다가간다.
풀을 헤치고 다가간 고재수는 쓰러진 오태완을 이리저리 보고 괜찮다는 손짓을 한다.
“어서 모시고 오세요.”
“예.”
잠시 후 고재수가 정신을 잃은 오태완을 메고 다가왔다.
나도 기절해 있는 이 정체불명의 남자를 둘러메었다.
‘보통은 아닌데······ 누구지?’
사람을 향해 서슴없이 도끼를 휘두르는 건 보통 사람이 할 수가 없는 행동이다.
적어도 여러 번을 해본 경험이 있지 않고서야.
뭐 하는 인간인지 모르겠지만 범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경찰을 피해 올라왔다느니 하던 말도 그렇고.
‘이래서 태풍이가 위험했던 건가?’
나는 폰을 꺼내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현재 시각 12시.
여전히 다이어리의 일정에는 변화가 없다.
[에브리데이 V11]
[날짜 : 2020년 10월 25일]
-PM 12:50 [NEW. 이태풍] 부상으로 인한 일정 긴급 연기. (회사 보고 : 119 헬기 이륙 시각 12시 45분. 진주 경상병원으로 긴급 이송.)
그 순간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득구가 아까 멀리 떨어졌었지?’
마치 누군가를 유인하듯 사라진 득구.
그렇다면 이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일행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순간 소름이 오싹 끼쳤다.
“재수 씨. 이놈에게 일행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예.”
고재수가 오태완을 질질 끌며 산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 역시 의식을 잃은 남자를 끌고 급하게 산장으로 향했다.
쿵.
산장의 문을 닫은 뒤 잠그려고 걸쇠를 찾았다.
그런데 걸쇠가 낡아 떨어진 터라 잠글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이 앞을 지키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순간 고재수가 다급하게 묻는다.
“정 팀장님. 이제 어떻게 하죠?”
“일단 오태완 씨를 안전한 곳으로 모시도록 하세요. 그리고 혹시 케이블 타이 같은 거 있으면 좀 찾아다 주세요.”
“아. 예.”
고재수가 오태완을 끌고 101호로 이동했다.
그사이 난 기절한 남자의 점퍼를 뒤로 반만 벗겼다.
이어서 스웨터 역시도 반만 벗겨 머리에 씌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지를 반만 내렸다.
이제 상의 점퍼만 잡고 있으면 저항은 거의 불가능하다.
앞은 보이지 않고 팔은 뒤로 꺾인 데다 다리도 제대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시각 12시 5분.
아직도 이태풍이 다친다는 일정은 그대로였다.
이 험하고 외진 곳에서 범죄자들과 마주칠 줄이야.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생각에 잠겨 있을 틈은 없었다.
그때였다.
고재수가 101호에서 나온다.
“태완 아재는 침대에 눕혔습니다. 그리고 케이블 타이는 아마 2층 창고 방에 있을 겁니다.”
때마침 잘됐다.
“2층으로 가시면 태풍이한테 상황을 알려주고 조심하라고 하세요.”
고재수는 알겠다며 급히 2층으로 달렸다.
현재 시각 12시 6분.
정신을 잃은 남자의 상태를 확인했지만 그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덜컹.
101호의 문이 열리더니 오태완이 파리한 안색으로 말한다.
“으······ 으······ 도 도망······.”
“괜찮으세요?”
날 알아본 오태완이 힘겹게 말을 꺼낸다.
“으으······ 두······ 두 명······.”
“다행이네요. 그리고 한 명은 여기 잡았습니다.”
일단 인원이 몇 명인지 안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다.
하지만 오태완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젓는다.
“2층에 비상······계단······ 있는······.”
“비상계단이요?”
그때였다.
밖에서 득구의 짓는 소리가 다시금 들리기 시작한다.
컹컹!
왈왈왈!
멀어졌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난 급히 오태완에게 물었다.
“비상계단은 어딥니까?”
“돌아서 왼쪽······ 201호에 연결······.”
오태완도 점점 정신을 들고 있었다.
‘미치겠네.’
이태풍을 다치게 하는 사람은 이놈이 아니라 다른 놈이었나 보다.
난 오태완에게 내가 깔고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뒤로 젖혀진 점퍼와 스웨터를 잡아달라 부탁하면서.
“여길 꼭 잡고 계세요. 그러면 절대로 못 풉니다.”
오태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남자의 점퍼와 스웨터를 붙들었다.
이어서 난 화로 옆에 쌓아둔 땔감용 각목을 오태완에게 건넸다.
“깨어날 기미가 보이면 머리를 후려치세요.”
“알겠소.”
이대로 2층으로 뛰어 올라갈까 싶었지만 생각을 바꿔 먹었다.
공범이 정문이 아닌 비상계단으로 올라간다면 뒤를 치는 게 더 나을 테니까.
결국 난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삥 돌아가서 뒤를 친다.’
난 떨리는 심장을 누른 채 산장 정문을 향해 밖으로 뛰어나갔다.
현재 시각 12시 8분이다.
* * *
2층.
창고로 쓰이는 204호에서 케이블 타이를 찾은 고재수는 이태풍에게 지금 상황을 경고하려 했다.
‘몇 호에 있지?’
사용 가능한 2층 객실은 201호부터 203호까지다.
소리를 쳐서 부르다 혹시나 외부에 있을 괴한의 눈길을 끌까 소리를 죽여 노크했다.
203호.
똑똑.
202호.
똑똑.
두 방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201호의 차례.
그런데 그때였다.
덜컹- 덜컹.
오래된 쇠를 밟은 소리가 고재수의 귓가를 스쳤다.
그 순간 고재수는 어린 시절에 이곳에서 놀던 기억이 떠올랐다.
‘맞다. 여기 비상계단이 있었지?’
천왕 산장 201호는 쇠로 된 비상계단이 외부와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비상계단과 연결된 문은 방 안에서 봐서는 잘 알지 못하게 되어 있다.
비상계단이라는 팻말도 없고 평범한 나무 벽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공범이 밖에서 오고 있어.’
이태풍이 위험했다.
다급해진 고재수는 급히 201호의 문을 열었다.
벌컥.
순간 깜짝 놀란 이태풍과 이대호가 자신을 바라보고 각목을 겨눈다.
“접니다!”
이태풍과 이대호가 안도하며 각목을 내린다.
고재수는 다급히 두 사람을 향해 외쳤다.
“빨리 나오세요!”
“예?”
“갑자기 왜요?”
두 사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그때였다.
쾅!
거칠게 발로 걷어차는 소리와 함께 비상계단과 연결된 201호의 비상문이 열렸다.
목재로 된 벽문이 열린 순간 싸늘한 산바람이 불어 닥쳤다.
그리고 그곳에는 군복을 입고 날카로운 인상을 한 남자가 군용 단검을 들고 서 있었다.
“내 친구 어디 갔어?”
피하긴 늦었다.
고재수가 남자를 향해 달려가며 각목을 휘둘렀다.
“으아아!”
괴성을 지르며 각목을 휘둘렀지만 남자는 너무도 가볍게 피해 버렸다.
쾅.
고재수가 내려찍은 각목이 벽에 맞고 튕겨 나온다.
남자는 튕겨 나온 각목을 빼앗아 버렸다.
“이게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이태풍과 이대호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고재수와 괴한이 대치하고 있어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렇다고 고재수를 내버려 두고 달아날 수도 없었다.
그때 이태풍을 확인한 괴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영화배우 이태풍 맞지?”
남자가 이태풍에게 관심을 보인다.
순간 고재수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태풍아! 내가 막을 테니 도망가!”
고재수는 남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자신이 이곳으로 모두를 데려왔는데 누군가 다친다는 걸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각오가 무색하게 남자는 가볍게 고재수의 돌진을 막고 칼을 들어 올렸다.
“새꺄. 객기도 상대를 봐 가며 부려야지. 그러다 뒤지는 거야. 알겠냐?”
짧은 찰나의 시간.
어제 병원에서 봤던 부모님의 웃는 얼굴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곧이어 닥칠 고통을 떠올리며 고재수는 이를 꽉 깨물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두려움에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병신 새X.”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듣는 소리가 이처럼 뼈아픈 소리라니.
이제야 주요한 배역을 겨우 얻었는데 배역을 확정 짓기도 전에 죽는 게 너무도 억울했다.
재수가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자신이 딱 그런 케이스였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어져야 하는 고통이 도통 느껴지지 않았다.
덕분에 터무니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뭐지? 설마······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죽었나?’
고재수가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그런 고재수의 눈에
숨을 헐떡이는 정윤호가 한 손으로는 남자의 목을 다른 한 손으로는 남자의 팔을 붙들고 외치는 모습이 보였다.
“내 소중한 배우한테 뭐가 어쩌고 어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