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9화
379. 트라우마 치료
주영인에게서 전화가 온 순간 고민에 빠졌다.
‘무슨 일이지?’
중국에서의 일 이후.
그녀와 통화를 한 적도 연락을 주고받은 적도 없다.
하지만 중국 현지에서 업무적인 일일 수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순간 전화 너머로 밝은 주영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빠. 뭐 해요?
“저야 늘 일이죠.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혹시 중국에서의 일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역시 윤호 오빠. AS는 철저한데요?
“영인 씨가 버는 돈이 저희 회사로 들어오니까 당연히 신경을 써야죠.”
주영인과의 에이전트 계약은 그녀가 <전장의 늑대>로 얻는 수입의 5%를 받도록 되어 있다.
-근데 계속 높임말 할 거예요? 앞으로는 말 편하게 한다면서요?
주영인의 고백 이후.
그녀가 폭주하는 걸 막기 위해 한 가지는 들어줘야 했던 게 기억이 난다.
말을 편히 하는 것.
사실 그동안은 그녀와의 거리가 가까워질 것 같아 일부러 높임말을 했었다.
그녀와 거리가 가까워지면 그녀와의 회귀 전 기억들이 선명해질까 봐 신경이 쓰이기도 했었고.
하지만 약속까지 한 마당에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래······.”
그 순간 주영인이 두 톤 정도 올라간 목소리로 말한다.
-어? 반말했다! 그쵸? 그렇죠?
“됐고. 무슨 일인지나 말해봐. 나 지금 미소 챙기러 가야 해.”
-우와~ 우리 미소 참~ 부럽다. 우리 오빠가 이렇게 매일매일 챙겨주고. 나도 좀 그렇게 챙겨주면 안 되나?
“계속 딴 이야기만 하면 나 전화 끊는다?”
한번 시작한 반말은 점점 편해지고 있었다.
-쳇. 알았어요. 까칠하기는. 뭐 그게 오빠 매력이긴 하지만······.
“끊······.”
그때였다.
-중국에서 ‘전장의 늑대’를 유우쿠 말고 극장에 건대요. 중국 내 전국 개봉이 확정될 거 같대서 연락드렸어요.
회귀 전 장태윤 감독의 <전장의 늑대>는 한한령으로 인해 극장에 걸 수가 없었다.
그 결과 한국 호주 미국 일본은 극장 상영이 되었지만 중국에서는 스트리밍 사이트인 유우쿠로만 개봉했었다.
그런데 극장에도 걸 수 있게 되었단다.
“어떻게······?”
-어? 오빠가 힘쓴 거 아니에요? 왕룽 본부장님은 오빠 덕으로 알라고 하시던데.
그 순간 왕룽의 아버지 왕민 부서기가 내게 준 권한이 떠올랐다.
왕민 부서기는 한 개의 작품을 한한령과 상관없이 극장에 걸게 해주겠다고 했었다.
올해는 작품을 말한 적도 없었는데 <전장의 늑대> 에이전트를 맡았다는 걸 듣고 통과시켜준 모양이다.
어차피 올해는 내가 관여한 영화가 중국에 걸릴 일도 없을 테니 이 기회에 인심이나 써야겠다 싶었다.
“잘됐네.”
-안 기뻐요? 뭐가 이렇게 퉁명스러워요?
“아니. 나도 지금 막 들어서. 알아보고 처리할게. 그럼 전화 끊는······.”
-아 좀. 끊는다고 좀 하지 마요. 정 없게! 그리고 이게 진짜 본론인데······ 오빠한테 선물 보내놨어요.
“선물?”
-말했잖아요. 오빠한테 선물 주겠다고 했었던 거. 기억 안 나요?
중국에서 일을 처리해주고 스캔들을 막아준 대가로 선물을 해주겠다고 했던 게 이제야 떠오른다.
“난 분명 그거 필요 없다고 했었는데?”
-아 몰라요. 난 보냈으니까! 아 지금쯤 도착했겠다. 도착하면 풀어보고 연락해 줘요. 저 촬영 들어가니까 전화 끊을게요!
달칵.
“대체 무슨 선물을 보냈길래······.”
그런데 그 순간.
주영인이 선물한 걸 유진이가 뜯어보는 장면이 눈앞을 스쳤다.
유진이가 내 물건에 손을 대는 일은 없었지만 주영인의 선물이라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가 없었다.
등골이 싸해진다.
집으로 빨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자동차의 액셀을 꾹 하고 밟았다.
* * *
지이잉.
천호동의 집에 도착한 순간 전동 주차장 문이 천천히 올라간다.
오늘따라 느릿느릿 올라가는 문 탓에 애가 타기 시작했다.
‘빨리 좀······.’
혹시라도 주영인의 선물을 유진이가 봤을까 봐 심장이 미친 듯 두근거린다.
‘주영인 걔는 또 왜 선물을 보내서······.’
차를 주차한 난 엔진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그때 유진이와 미소가 달려 나왔다.
두 사람은 최지영의 집으로 갈 준비를 다 마친 상태였다.
미소가 사과 머리를 찰랑이며 뛰어오더니 내 품에 덥석 안겼다.
“삼촌.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또 바빴어요?”
“응. 조금.”
유진이가 웃으며 다가왔다.
“지금 바로 갈 거예요?”
“어 뭐 좀 확인······하고.”
그때 유진이가 말한다.
“아 오빠. 조금 전에 퀵 하나 와서 제가 대신 받았어요.”
“대신?”
순간 나도 모르게 말이 살짝 떨렸다.
“봤니?”
“뭘요?”
“아니 뭐. 퀵 물품이 뭔지 봤냐고······.”
“에이~ 오빠 물건을 어떻게 봐요. 그냥 3층 거실에다가 올려뒀어요.”
“무겁진 않았고?”
“꽤 묵직해요. 미소 몸무게 정도?”
순간 내 품에 안긴 미소가 입술을 삐쭉 내민다.
“엄마! 나 안 무거워!”
유진이가 미소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랭? 엄마는 몰랐네. 우리 미소가 요즘 너~무 많이 먹어서 이제 들지도 못하겠던데.”
“엄마 미워!”
미소가 입술을 삐죽이며 내 품에 고개를 파묻자 유진이가 농담이라며 미소를 달랜다.
어쨌건 선물을 안 봤다면 됐다.
최지영과의 약속 시간이 아슬아슬했기에 주영인의 선물은 나중에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출발하자. 약속 시간 다 됐어.”
유진이가 고개를 갸웃한다.
“물건 확인 안 하고요?”
난 애써 태연한 척 고개를 저었다.
“급한 것도 아닌데 뭐. 미소 일이 더 급하니까 최 배우님한테 가야지.”
“알았어요.”
그사이 화가 풀린 미소가 차를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레츠 고우~!”
유진이가 미소를 따라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래. 레츠 고우~!”
우린 그렇게 최지영의 집으로 향했다.
* * *
최지영의 논현동 집.
초인종을 누르자 최지영의 목소리가 아닌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유노~ 문 열었어. 들어와~
이지연 작가의 목소리다.
문을 열자 이지연 작가가 최지영 배우 곁에 함께 서 있다.
“작가님이 여긴 어쩐 일로······.”
“유노. 하이~”
이지연 작가가 인사하자 유진이와 미소가 고개를 숙인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그 순간 이지연 작가가 눈높이를 낮춰 미소에게 축하의 말을 건넨다.
“우리 미소. 축하해. 화란전 여주인공의 아역에 합격했다면서?”
미소가 신발을 벗고 거실에 올라가 이지연 작가의 곁으로 달려갔다.
이지연 작가의 앞에 선 미소가 씨익 웃으며 답한다.
“네! 작가 선생님! 저 진짜 열심히 했어요.”
“그래. 선생님이 다 들었어. 우리 미소가 거기 있는 애들 다~ 물리치고 일등 했다고.”
“힛. 근데 이번에는 좀 힘들었어요. 이지 언니랑 공주가 엄~청 잘했거든요.”
“양이지 걔가 연기를 요즘 제일 잘한다고 소문난 애야. 근데 미소가 이지를 이겼으니까 이제 미소가 최고네?”
“진짜요?”
“그러~엄. 하여간 나도 오디션 녹화 영상을 봤는데 너무 잘해서 칭찬해 주려고 온 거야.”
“헤헤.”
그런데 뭔가 조금 이상하다.
평소에도 이지연 작가가 미소를 이뻐하는 건 알고 있지만 오늘따라 유독 둥둥 띄워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이지연 작가가 내게 윙크한다.
순간 이지연 작가가 왜 이러는지 알았다.
‘일부러 저러시는 거구나.’
최지영 배우가 아마도 이지연 작가를 불러 부정적인 감정을 덜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한 모양이다.
그사이 미소는 이지연 작가의 손을 잡고 거실 테이블로 향했다.
유진이와 난 그 뒤를 따라 거실로 향했다.
선물로 사 온 멜론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우린 잠시 동안 소소한 이야기들로 시간을 보냈다.
10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최지영 배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 미소는 지금부터 연기 연습할까? 대신 오늘은 저번처럼 말고 다른 연기 할 거야.”
미소가 기쁜 표정으로 답한다.
“네! 좋아요!”
미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이번엔 최지영이 유진이에게 함께 연습실로 들어가자고 제안했다.
“유진아. 이번엔 네가 필요해.”
“제가요?”
“응. 네가 좀 도와줄 역할이 있거든.”
유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두 사람을 따라 연습실로 들어간다.
방음 처리가 된 연습실의 문이 닫히자 나는 이지연 작가의 앞으로 앉은 자리를 옮겼다.
“작가님은 오늘 어떻게 오셨어요?”
“최 배우가 와서 좀 도와달라 하더라고.”
역시나 생각대로다.
“그런데 뭘 하길래 유진이가 필요하다는 걸까요?”
“잘은 모르는데 아까 이야기하기로는 연기 연습을 하면서 심리 치료를 한다는데?”
“심리 치료요?”
“그래. 지영 씨가 바닥에 떨어졌을 때 정신과에서 알바를 한 적이 있나 보더라고. 연기 치료 알지? 심리 치료할 땐 역할극을 한다고 하더라고.”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었다.
정신과에서 심리 불안 환자들을 다룰 때 역할극 같은 걸 시켜 묵힌 감정을 털어내게 한다고.
그와 동시에 난 미소가 들어간 방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소가 늘 놀라운 연기를 보여준 탓에 나도 모르게 이번에도 잘 해낼 거란 믿음이 있었나 보다.
고작 일곱 살 나이.
아무리 미소가 원한다고 하더라도 말렸어야 했다는 후회가 머리를 스친다.
그때였다.
이지연 작가가 내 어깨를 토닥인다.
“유노~ 자책하지 마. 미소의 재능이면 어차피 곧 겪을 일이야. 그리고 이건 여러 감정을 받아들이는 건강한 과정이기도 하고.”
“작가님. 아무리 그래도······.”
“놉! 그냥 남들보다 조금 일찍 성장통을 겪는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유노는 그냥 곁에서 든든하게 지켜주기만 하면 돼. 미소는 잘 해낼 거야.”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이지연 작가의 말이 맞았다.
제대로 된 배우가 되려면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을 이해하는 건 필수였다.
걱정하는 내 얼굴을 보자 이지연 작가가 웃으며 말한다.
“하여간 미소 저 녀석.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다니까? 안 그래?”
감정 연기의 후폭풍을 겪는다는 건 그만큼 몰입이 대단하다는 뜻.
미소가 엄마를 닮아 천상 배우라며 이지연 작가는 기특하다는 듯 말한다.
“예. 그래서 저도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회귀 후 미소에게 이런 재능이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다.
그러나 미소는 유진이만큼이나 놀라운 재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고작 일곱 살의 나이로 주변을 들었다 놨다 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 * *
한 시간 정도가 지났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미소의 작은 머리가 쏙하고 튀어나왔다.
미소는 날 보며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눈가에는 눈물 자국이 있긴 했지만 지난번 봤을 때보단 훨씬 밝은 얼굴이다.
난 얼굴에 웃음을 가득하고 두 팔을 벌려 미소를 반겼다.
그 순간 미소가 빠르게 달려와 내 품에 덥석 안겨들었다.
“삼촌~!”
내 품에 안긴 미소가 해맑게 웃으며 조잘조잘 댄다.
“나 진짜 안에서 신기한 거 했어요.”
부정적인 감정을 한껏 털어낸 듯 미소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 그래? 그랬어? 진짜?”
“응! 그래서요 지영 선생님이랑요······”
난 이지연 작가가 말한 대로 미소의 말에 격한 공감을 표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낼 수 있게 말이다.
* * *
최지영 배우의 집.
연기 치료를 끝낸 우리는 거실 테이블에 둘러앉아 배달시킨 대게를 기다리는 중이다.
최지영이 가장 좋아하던 음식이 대게였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켰다.
최지영이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미소 레슨을 봐줄게요. 정 팀장님.”
난 품에 미소를 꼭 안은 채 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레슨비는 회사랑 상의해서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순간 곁에 있던 유진이가 대신 답한다.
“오빠. 미소 레슨비는 제가 낼게요.”
“아냐. 회사에서 비용 처리하면 돼.”
최지영이 장난스레 투덜거린다.
“우리 사이에 돈 가지고 이러기예요?”
최지영은 자신을 부활시켜준 건 돈으로도 갚지 못할 은혜라며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한다.
하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공짜로 레슨 해주시면 절대 안 됩니다. 오히려 팍팍 올려 받아서 최지영 몸값이 이 정도라는 걸 알리셔야죠.”
최지영이 원포인트 레슨을 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이곳저곳에서 요청이 들어올 거다.
그녀는 원래 선 굵은 연기로도 유명했고 현장에서도 후배들 연기를 잘 봐주는 성격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업계에선 돈으로 평가받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빠르게 급을 올리는 방법이다.
그렇기에 난 최지영 배우의 레슨비를 동네방네 떠벌릴 생각이다.
탑스타 최지영이 완전히 살아났다는 소식과 함께 말이다.
최지영도 단번에 내 말뜻을 알아차렸다.
“아 진짜······ 이런 게 어디 있어요?”
최지영이 감격한 표정을 짓는다.
자신을 부활시켜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이렇게 몸값 관리까지 해줄지는 몰랐다면서.
잠깐 고민하던 최지영이 말한다.
“그러면 앞으로 레슨은 다른 회사 쪽을 쳐다도 안 보고 굴렁쇠 배우들에게만 해드릴게요.”
정 팀만 최지영의 레슨을 받을 수 있다는 건 내게 특별한 메리트를 안겨준다.
특히 지금은 회사 내부의 배우들을 끌어오려는 시점이니까.
잠깐 고민했지만 거절하기에는 너무 좋은 조건이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지영이 웃음을 지으며 장난스레 투덜거렸다.
“정 팀장님이 배우 자존심을 이렇게 배려해 주시는데 내가 어떻게 딴 사람이랑 일해요? 책임져요!”
순간 나도 장난기가 돌았다.
“책임은 박우민 이사님께 지라고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최지영이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우민 오빠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와요?”
최지영은 요즘 박우민 이사와 꽤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최근 업무를 빙자해 데이트도 한다던데 아직 두 사람의 관계에 큰 진척은 없다고 들었다.
그때 유진이가 장난에 끼어들었다.
“선생님. 박 이사님이랑 이제 사귀는 거예요?”
“선생님이라니 징그러워 얘. 그냥 선배라고 부르래도?”
“알았어요. 선배님. 근데 두 사람 사귀는 거 맞아요?”
최지영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간다.
조금 전 카리스마를 잔뜩 뿜어내던 여배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첫사랑에게 고백받은 소녀 같은 얼굴이다.
“그게 말야······ 우민 오빠가 조심성이 좀 많아.”
“그게 무슨 소리예요?”
최지영이 퉁명스레 말한다.
“그러니까 도통 진도가 안 나간다고. 매니저랑 연예인이 사귀는 게 소문나면 안 좋다나?”
순간 유진이가 최지영보다 더 불만인 듯한 표정으로 묻는다.
“아니 좋아하면 그냥 좋아한다고 하고 사귀면 되지. 거기서 왜 매니저랑 연예인이 나온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