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4화
374. 진화 2
씬 22.
여왕이 즉위하면 나머지 두 공주가 죽는다는 예언 때문에 수하들끼리의 충돌이 일어난 다음 날의 이야기다.
세 공주가 처음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는 장면이기에 드라마 초반부를 견인하는 장면이기도 했다.
먼저 첫째 정화 역을 양이지가 맡아 연기했다.
3일간 엄마 이태연에게 특훈이라도 받았는지 미소를 향한 대사에 가시가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분명한 감정 전달과 깔끔한 딕션.
아역 배우라고 하기엔 넘칠 정도의 연기다.
하지만 그 순간.
연기를 받아주는 미소도 깜짝 놀랄 만한 모습을 보였다.
또박또박 대사를 읊는 미소의 얼굴에 서릿발처럼 차가운 냉기가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계림의 꽃이 만개하면 다른 두 꽃은 영원히 빛을 잃는다······ 그 예언에 흔들려 절 죽이려 하시는 겁니까?』
절제된 분노.
그러면서도 활화산 같은 감정이 녹아들어 있다.
3일 전과는 너무도 달라진 미소의 연기에 양이지가 말을 더듬거렸다.
『유화 공주······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순간 미소가 한 발을 앞으로 딛는다.
『어디 한번 내 사람을 건드려 보세요. 내 두 눈에 시퍼렇게 불을 켜고 지켜볼 테니!』
강렬한 미소의 연기에 휘말린 탓에 안정적이던 양이지의 연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똑바로 마주하기엔 너무도 강렬한 적개심이 미소의 연기에 묻어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소는 더욱 양이지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작은 체구에 어떻게 그런 힘이 숨어 있는지 미소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오디션장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목소리로.
순간 양이지가 저도 모르게 뒤로 두 발자국 물러났다.
뒤늦게 양이지가 정신 차리고 발걸음을 멈췄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린 순 없었다.
그렇게 양이지를 상대한 미소는 이제는 진공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치 어젯밤 죽을 뻔했던 ‘유화 공주’처럼 미소의 눈에는 적을 향한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때였다.
미소의 연기에 넋이 나간 진공주가 대사를 칠 타이밍을 놓쳤다.
심사위원석의 오복희 PD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오복희 PD가 안타까운 표정을 하자 진공주가 뒤늦게 아차 하고 정신을 차렸다.
진공주는 이내 지지 않겠다는 듯 마음을 다잡고 연기를 시작했다.
그간 엄청난 노력을 했는지 3일 전보다 훨씬 향상된 연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진공주의 그런 연기를 미소는 차가운 코웃음 한 번으로 지워 버렸다.
이어 미소는 싸늘한 표정으로 진공주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의 거리가 코끝이 닿을 정도까지 좁혀들었을 무렵.
미소가 진공주를 격렬하게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우리 궁의 복색을 한 자가 상처를 입고 네 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내 직접 보았다. 그리고 그자는 다시 나오지 않았지.』
『그 그건······.』
『정화 공주를 노린 자. 날 모함한 자. 모두 네가 한 짓이지?』
진공주를 마주 보는 미소의 표정은 마치 얼음처럼 차가웠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여왕의 위엄을 풍겨내며 말이다.
그때였다.
“컷! 수고했어요~ 다들.”
오복희 PD가 오디션 종료를 외쳤다.
더 오디션을 보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다.
그와 동시에 미소의 기세에 눌린 진공주와 양이지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끝났네.’
하지만 오디션이 끝났는데도 미소는 시선을 내리깔고 주저앉은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오복희 PD가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외친다.
-미소야. 그만! 끝났어!
쩌렁쩌렁한 오복희 PD의 목소리에 미소가 움찔하며 몸을 멈췄다.
동시에 미소의 두 눈에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배역에 깊게 몰입한 터라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 탓에 생긴 일이다.
상대를 향한 증오와 분노.
그 강렬한 감정으로 상대 연기자들을 굴복시켰지만 생각한 대로 후폭풍이 만만치가 않았다.
“유진아. 바로 들어가자.”
“예!”
이미 안 봐도 끝이다.
오복희 PD라면 다른 연기를 본다고 해도 마음이 바뀔 리가 없다.
지금의 미소가 보인 연기는 양이지와 진공주가 따라 할 수 없는 연기니까.
그렇다면 어서 미소를 달래줘야 했다.
그런데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 : 오복희 PD]
이심전심이다.
난 정상봉과 까톡 영상 통화를 끊고 오복희 PD와 통화를 시작했다.
-정 팀장님. 어디 있어요?
“지금 MBS 주차장입니다.”
-그래요? 그러면 당장 7층 오디션장으로 들어오세요.
“예. 유진이랑 같이 들어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난 유진이와 함께 곧장 MBS 7층 오디션장으로 향했다.
* * *
MBS의 7층 오디션장.
오디션장의 앞문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배역에서 겨우 빠져나온 미소는 무대 위에서 정상봉에게 안겨 훌쩍이고 있었다.
그때 유진이가 미소의 이름을 부른다.
“미소야.”
우릴 발견한 미소가 무대 위를 가르며 뛰어온다.
“엄마~! 삼촌~!”
달려오는 미소의 눈에 눈물이 그윽하다.
한복을 입고 있었기에 끝단이라도 밟아 넘어질까 걱정되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달려오던 미소가 한복의 끝단을 밟아 버렸다.
미소가 휘청이는 순간 난 빠르게 무대 위로 올라가 미소를 품에 안았다.
덥석.
정상봉도 빠르게 반응해 바로 뒤에 있었지만 내가 조금 더 빨랐다.
내 품에 안긴 미소는 그대로 눈물보를 터트려 버렸다.
“삼촌! 으아앙!”
뒤이어 무대 위로 올라온 유진이가 눈물을 흘리며 묻는다.
“미소야. 왜 그래? 왜 울어?”
내게 안긴 미소는 이번엔 엄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엄마아아~!”
유진이는 미소를 안고 토닥여 안정시키기 시작했다.
그사이 오복희 PD는 결과를 기다리던 양이지와 진공주에게 배역이 정해졌음을 알렸다.
“이지는 정화 공주. 공주는 도화 공주로 확정. 그러면 제작발표회 때 보자?”
양이지는 아무런 반발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에 견주기엔 자신의 실력이 부족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객석에 앉은 이태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태연은 유진이와 나 그리고 미소를 무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딸이 떨어진 분노를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김 팀장. 이지 데리고 와.”
“아. 예.”
TK 엔터의 김준 매니저가 양이지를 데리고 내려온다.
딸이 내려오자 이태연은 그 손을 잡고 몸을 홱 돌려 오디션장을 나가버렸다.
진공주도 자신을 데려온 보모와 함께 오디션장을 나갔다.
그제야 오복희 PD가 내게 다가왔다.
“정 팀장님······ 대체 미소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최지영 배우님이 원 포인트 레슨을 해주셨습니다.”
“아니. 아무리 원 포인트 레슨이라도 그렇지······.”
“이걸 바라신 거 아니었습니까?”
오복희 PD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맞는데······ 도대체 이해가 안 가서.”
미소가 여전히 울고 있었기에 물어볼 수도 없다.
결국 궁금증을 풀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실은 저도 자세한 걸 못 들었습니다. 최 배우님께 직접 물어보시죠?”
“그러면······ 전화 한 번만 걸어주실래요?”
전화를 걸자 최지영이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는다.
-정 팀장님~?
“최 배우님. 저 오복희 PD예요. 이거 스피커폰이고요.”
-아~ 네. PD님. 오래간만이네요.
“방금 미소 오디션 막 끝났는데 뭐 좀 물어보려고요.”
-결과는요?
“뻔히 아시면서······.”
-합격이군요.
“예. 그런데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어서요.”
오복희 PD는 미소가 보인 연기가 우연이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방금의 연기를 또다시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며.
최지영 배우가 웃음을 터트린다.
-안심하셔도 돼요. 그곳에서 보인 연기가 이미 세 번째니까.
최지영이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사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 * *
최지영은 미소에게 딱 한 가지 상황만을 주지시켰다고 한다.
잠시 눈을 감고 엄마와 유노 삼촌이 사라졌다는 상상을 해보라고.
이 세상에는 미소만이 홀로 남았다고.
그리고 눈을 떠라 지시했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엄마와 삼촌을 죽였다고.
최지영은 그때의 느낌을 가감 없이 표현하라는 가르침을 줬다고 한다.
다만 신분이 ‘공주’라는 것만큼은 잊지 않게 주지를 시킨 채로.
나와 유진이가 오디션 현장에 나타나지 않게 한 건 미소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한우주 작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스피커폰에 묻는다.
“성인도 아닌 아역한테······ 그런 상황 연기를 시키셨다고요?”
최지영이 조용히 답한다.
-미소는 그냥 아역이 아니잖아요. 걔 천재예요.
“그래도 어떻게 그런······.”
-작가님. 배우의 한계를 미리 그을 필요가 있을까요? 연출자에게는 연출자의 영역이 있고 배우에게는 배우의 영역이 있는데?
이지연 작가가 한 말을 최지영이 그대로 반복하고 있었다.
그 말에 오복희 PD의 눈이 반짝인다.
“최 배우님.”
-예. 오 PD님.
“화란전에서 유화 공주의 엄마인 둘째 황후 역이 비었는데 혹시 출연하실 마음이 있으세요?”
최지영이 가만히 있다 되묻는다.
-제가 캐스팅될 때마다 언론이랑 대중이 시끄럽게 구는 거 아시죠?
한때 정상급 여배우였던 최지영은 자신의 과거를 숨김없이 털어놓은 기자회견을 통해 부활했다.
그러나 그녀가 캐스팅되면 드라마 게시판은 온갖 악플에 휘말리곤 했다.
하지만 오복희 PD는 눈도 끔뻑하지 않았다.
“저 오복희에요. 연기만 좋으면 나머지는 제가 다 책임질게요.”
-그렇다면야······ 해야죠. 천하의 정 팀장님이 픽한 작품에 오 PD님이 연출하신다는데 이걸 어떻게 마다해요?
유화 공주의 엄마 역인 이 황후는 인간 냄새가 풍기는 배역이다.
허술하고 눈물 많고 사고를 쳐서 딸을 곤란하게 만들기도 하고.
하지만 이런 역할이야말로 연기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소화하기 힘든 배역이다.
오복희 PD의 뜻에 한우주 작가도 동의한다.
그 순간 최지영은 이 황후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오복희 PD와의 통화를 마친 최지영이 날 찾았다.
-정 팀장님.
“예. 최지영 배우님.”
-미소가 많이 힘들어할 거예요. 정 팀장님이 잘 달래주세요.
배역에 몰입했었던 미소의 멘탈 케어를 부탁한다는 소리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안 그래도 유진이가 달래고 있습니다.”
-유진 씨한테만 맡기지 마시고 팀장님도 애를 쓰셔야 할 거예요. 미소는 팀장님이 사라진다는 걸 엄마가 사라지는 것만큼이나 무서워했어요.
“알겠습니다. 그럴게요.”
-네. 그러면 오늘은 충분히 쉬게 하고 내일이나 모레쯤 미소를 데리고 다시 와주세요.
최지영은 미소에게 남은 감정을 털어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오복희 PD는 미소의 연기가 단발성이 아니란 걸 안 순간 미소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미소야. 수고했어. 연기 너무 좋아졌더라.”
유진이의 품에 안긴 미소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눈가에 눈물이 가득한 모습을 보니 아직은 깊은 감정의 늪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게 아니었다.
이럴 때 배우 기분을 풀어주는 것도 매니저의 일.
난 얼굴에 웃음을 한가득 머금고 미소를 안아 들었다.
“미소야. 오늘 삼촌이랑 감자탕 먹으러 갈까?”
회귀하고 미소를 구한 첫날.
바로 그날 먹었던 감자탕집에 가자고 했다.
순간 미소의 얼굴에 웃음꽃이 어린다.
“사리······는요?”
“당연히 모둠 사리지.”
미소가 코를 훌쩍이며 손가락을 2개 핀다.
“두······ 개!”
쟁쟁한 경쟁상대를 모두 물리치고 여주인공 유화 공주의 아역을 쟁취한 미소는 성공의 포상으로 감자탕을 원했다.
그렇다면 감자탕 할아버지라도 갖다 바쳐야지.
“오케이! 오늘은 우리 미소 먹고 싶은 거 다 먹는 날!”
미소의 얼굴에 웃음이 배시시 깃들기 시작한다.
* * *
미소의 최종 오디션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한 난 정 팀을 모아 미소가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정 팀 멤버들은 당연히 될 줄 알았다며 걱정하지도 않았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사이 문제가 있었다.
주말 동안 워낙에 바빴던 터라 체리블라썸의 컴백 무대에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애들 많이 삐졌어?”
도란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특히 세리는 좀 심하게 삐졌어요.”
어제 체리블라썸의 컴백 곡 는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차도희랑 충돌은 없었고?”
“가수 2실 전체가 달라붙어서 따라다니다 보니 그런 일은 없었어요. 세리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와 계셔서 그런 것도 있고요.”
“그건 다행이네.”
데뷔와 동시에 3위를 한 걸프렌즈7.
그 멤버인 차도희와의 충돌이 없다는 말에 안심이 들었다.
다만 이렇게 아무 일이 없다는 듯 넘어갈 순 없었다.
“다음 주 세리 생일 파티나 제대로 기획해줘야겠다. 다들 이벤트 준비해 줘.”
세리의 생일은 10월 30일.
그때 세리에게 선물을 주며 정식으로 사과해야겠다.
그렇게 회의 정리를 하고 있을 때 즈음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 : 조민성]
왔구나.
“누구 전화예요?”
“조민성 씨.”
“팀장님. 혹시 우리 팀에 오려고 전화한 거 아닐까요?”
모든 팀원의 눈이 기대에 휩싸인다.
“글쎄. 만나보면 알겠지.”
조민성은 내가 조언한 대로 이태준 부회장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눴고 그 결과 재계약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연간 15억.
그리고 전용 튜닝카 제공에 해외 모터쇼 관람 티켓까지.
이태준 부회장은 새로 발령 난 홍보 이사가 멋대로 저지른 일을 사과하며 5년이나 계약 연장을 해줬다.
전화를 받자 조민성이 웃으며 말한다.
-정 팀장님. 이제 우리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된 것 같은데요.
순간 입꼬리가 씰룩였다.
조민성이 할 이야기라면 관리팀을 변경하는 일밖에 없으니까.
“물론입니다.”
-지금 시간 되시죠? 저 지금 회사인데 7층 회의실에서 볼까요?
“예. 배우님.”
7층 회의실은 임원진들이 사용하는 회의실.
난 굴렁쇠 엔터의 간판스타 조민성을 영입하기 위해 7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