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3화
373. 진화 1
연예계의 유명한 연상 킬러 최종혁으로 인해 인생의 바닥을 찍었었던 왕년의 탑스타 최지영.
한번은 무너졌던 그녀지만 지금은 ‘알토란’ 기획에서 착실하게 커리어를 되찾고 있었다.
요즘은 경제력도 많이 좋아져서 최근에 논현동에 있는 60평짜리 고급빌라로 이사까지 했다.
띠리릭.
오크색의 전자식 도어가 열린다.
현관에 선 최지영이 환한 표정으로 우릴 반긴다.
“어서들 와요~”
거실로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윤호 오빠. 유진 언니. 오랜만이에요.”
BJ 도진의 여자친구였던 조수영이 그녀의 딸 유미를 안고 있다.
오늘 내게 상담할 게 있다고 한 터라 이왕이면 같이 보자 말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조수영의 품에 안긴 유미가 내게 두 손을 쭈욱 뻗으며 엄마 말을 따라 한다.
“으빠! 어스아오샤요!”
안 본 동안 말이 빠르게 늘고 있었다.
비록 아직은 엄마 말을 따라 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그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다.
“우리 유미. 삼촌 많이 보고 싶어쪄요?”
유미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는다.
“산쵸온?”
“그래. 유미야. 윤호 삼촌~ 해봐.”
그때였다.
유미가 고개를 갸우뚱하다 고개를 흔들어 댄다.
“시이러! 으빠!”
받침이 말하기 어려워서 그런지 유미는 한사코 싫다고 한다.
그리고는 두 손을 내게 뻗어 외친다.
“으빠빠~!!”
결국 호칭은 나중에 고치기로 하고 손을 뻗어 유미를 안았다.
품에 안긴 유미가 내 얼굴을 만지작거린다.
예전과 달리 잘 먹고 지낸 덕에 유미는 손가락 끝까지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다.
유미는 오랜만에 만난 내 얼굴이 신기한지 눈 코 입을 만지작거리며 웃고 있었다.
“으빠! 으빠!”
“유미야. 유진이 이모랑 미소 언니한테도 인사해야지.”
유미가 유진이와 미소에게 고개를 돌린다.
“어스아오샤요! 이모오. 어은니!”
내 품에 안긴 채 유미가 고개를 꾸벅 숙인다.
그 모습을 본 미소와 유진이의 눈에서는 하트가 뿅뿅 튀어나왔다.
“유미야! 나 미소 언니! 기억해?”
“응! 미쇼 어은니!”
유미가 알아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미소가 유미의 작은 손을 잡고 웃음을 터트린다.
그렇게 간단한 인사를 끝낸 뒤 거실에 앉았다.
조수영이 내 품에 안긴 유미를 받아 가려 한다.
“유미야. 삼촌 일 이야기 해야 하니까 이리 올래?”
조수영이 유미를 떼어 내려 하자 유미는 코알라처럼 내 가슴팍에 더 안겨 힘을 꼭 준다.
“으으음!”
“어머 얘 좀 봐?”
미소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든다.
조수영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한다.
“유미 너 그러면 삼촌 방해 안 하고 조용히 있어야 해. 알겠지?”
유미가 고개를 끄덕인다.
“음!”
말을 배우기 시작하니 의사 표현이 확실해졌다.
회귀 전에도 유미는 좋고 싫고가 분명한 데다 애교가 많아서 조수영이 BJ로 성공하는 데 큰 도움을 줬던 기억이 난다.
유미가 입을 다물자 최지영 배우가 웃으며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래. 미소 연기를 좀 봐달라고요?”
“예. 오복희 PD님이 꽤 까다롭게 나오셔서요.”
원래 최지영 배우는 짙은 감정 연기로 탑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부활한 후.
예전보다 감정선이 훨씬 풍부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원래부터 젊은 배우들에게 감정 연기 지도를 해주는 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래서 난 최지영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미소의 연기에 ‘분노와 증오’를 담을 방법이 없겠냐고.
최지영이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정 팀장님. 가능은 한데 꼭 하셔야겠어요?”
최지영은 부정적인 감정을 담는 법을 알게 되면 어린 미소가 감정에 휘둘릴 걸 걱정했다.
나 역시 그 점을 걱정했었다.
그래서 굳이 그 연기에 선생님을 붙여 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미소가 간절히 원하고 있기에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너무 끼고만 돌면 과잉보호나 마찬가지니까.
“미소에게 억지로 시킬 마음은 없지만 지금처럼 하고자 하는 걸 말릴 생각도 없습니다.”
“후우~ 쉽지는 않겠네요.”
혼잣말한 최지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쳐다본다.
“미소야. 진짜 꼭 이 배역 하고 싶어?”
미소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전 꼭 엄마랑 같이 연기하고 싶어요. 그래서 유노 삼촌한테 졸랐어요.”
“미소가 정 팀장님한테 부탁했다고?”
“네!”
최지영 배우가 미소를 쳐다본다.
“미소는 연기가 안 무서워?”
“네! 하나도요. 재미있어요.”
“대단하네. 난 아직도 연기가 무서운데······.”
미소가 고개를 갸웃한다.
“왜요?”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가는 거니까. 그리고 그 길이 맞는지도 모르고.”
알쏭달쏭한 최지영의 대답을 미소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
미소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한다.
“힘들어도 지쳐도 무서워도 절대로 포기하면 안 돼요. 포기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니까!”
최지영이 멈칫하며 미소를 빤히 쳐다본다.
“어머머. 얘 말하는 것 좀 봐?”
고작 7살에 주관을 말하는 게 신기한 눈치다.
그러나 미소가 말한 건.
최애 애니메이션 파워터프걸에서 리더 블로우가 팀원들의 기운을 북돋을 때 하는 대사였다.
사정을 알지 못한 최지영은 연신 터져 나오는 감탄을 멈추지 못한 채 말한다.
“우리 미소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한번 해보자. 그럼 잠깐만······.”
최지영 배우가 곰곰이 생각에 잠기자 거실은 적막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 * *
잠시 후.
생각을 마친 최지영 배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소야. 그러면 연습실로 갈까?”
알토란 기획의 박우민 이사는 최지영 배우가 최대한 빨리 회복할 수 있게 집에다 방음실을 만들어 놓았다.
미소가 따라 일어나 최지영의 손을 잡는다.
나도 따라가려고 하는 순간 최지영이 고개를 젓는다.
“정 팀장님은 안 오는 게 좋아요.”
“예?”
게다가 최지영은 유진이마저 못 들어오게 한다.
“유진이 너도 거실에서 수영이랑 유미랑 같이 있어.”
“저도요?”
“응. 특히 정 팀장님이랑 넌 들어와선 안 돼.”
“왜요?”
“나중에 보면 알아.”
최지영은 그렇게만 설명한 뒤 미소를 데리고 방 안으로 향했다.
* * *
“대체 어떤 수업을 하려는 걸까요?”
유진이의 표정엔 걱정이 가득했다.
“걱정하지 마. 매를 들거나 할 분은 아니니까.”
늘 연기자들과 붙어 있다 보니까 나 역시 레슨에 관해서 약간은 안다.
다만 왜 유진이와 내가 보면 안 된다고 하는지 그게 마음에 걸릴 뿐이다.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으니까 일단 수영이 문제부터 해결할까?”
“네.”
조수영의 문제는 생각보다 구독자가 늘지 않는다는 것.
조수영은 알토란 기획에 폐를 끼치는 것 같다며 미안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해결책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아직 유미 출연은 잘 안 시키지?”
“예. 사람들이 채팅창에 늘 이상한 이야기를 해서요.”
BJ는 늘 시청자들과 소통을 해야 한다.
다만 소통에는 온갖 종류의 괴롭힘이 따른다.
그래서인지 조수영은 카메라 앞에 유미를 세우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잠깐 고민하던 난 강하나와의 합방을 추진했다.
강하나는 6년이라는 연습생 생활로 다져진 튼튼한 멘탈로 이제 실시간 채팅의 말을 역공할 정도니까.
“하나 언니랑요?”
“어. 하나한테 배워보는 게 큰 도움이 될 거야.”
“알겠어요.”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유미를 방송에 출연시키는 게 더 좋을 거야.”
BJ 도진의 폭행 사건 이후.
대중들은 유미를 향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조수영은 딸을 보호하려는 마음으로 유미를 카메라 앞에 세우는 걸 두려워했다.
자신의 어린 딸이 방청객에게 욕이라도 먹으면 어떻게 될까 겁을 낸 까닭이다.
“정말 유미를 세워도 될까요?”
“어.”
회귀 전에도 그랬지만 조수영의 방송에 유미가 등장한 이후로는 시청자들은 오히려 입조심을 시작하게 된다.
그래서 난 자신 있게 답했다.
“유미가 건강히 크고 있는 걸 보여주는 것만 생각해. 채팅창은 보지 말고.”
“근데 그 정도로 구독자가 늘까요? 아니 엄마랑 아기가 노는 게 뭐가 재미있다고요······.”
난 씨익 웃으며 내 품에 안은 유미를 들어 올렸다.
유미가 간지러운지 꺄르르 웃는다.
“꺄하하하! 으빠빠!”
미소의 웃음이 거실에 퍼지자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간다.
바닥에 내려놓는 순간 유미는 재미가 들려 다시금 올려달라 외친다.
“또! 또!”
똑같은 행위의 반복이었지만 모두 유미에게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유미가 지칠 때까지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 뒤 유미를 품에 다시 안았다.
“봐봐. 눈을 못 떼겠지?”
그제야 멍하니 있던 조수영이 정신을 차렸다.
“네······.”
“그러니까 겁내지 말고 일단 한번 해봐. 그리고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쓰지 말고 네가 유미와 함께 행복하다는 걸 보여줘. 그것만 해도 구독자가 늘 거야.”
“행복······이요?”
“그래. 네가 행복해져야 보는 사람도 행복해질 테니까.”
난 조수영이 가진 후회를 알고 있다.
허무하게 날아가 버린 어린 시절이 가슴 한편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 과거를 딛고 일어나 행복을 찾아 나가야 했다.
그녀를 위해서도.
유미를 위해서도 말이다.
조수영이 고개를 숙였다.
순간 곁에 있던 유진이가 어깨를 감싸 안았다.
토닥토닥.
유진이가 조수영의 등을 두드리자 조수영이 조금씩 눈물을 똑똑 떨어뜨렸다.
그때였다.
내 품에 안긴 유미가 엄마를 향해 두 손을 내뻗는다.
“어음마! 우지 마!!”
유미의 말에 조수영이 급히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안······ 울었어 엄마.”
“지짜야?”
“응. 진짜야. 그리고 우리 유미가 엄마한텐 행복이야.”
“핸뽀옥?”
“응. 행복.”
“나~ 핸뽀옥!”
유미가 행복하게 웃자 조수영은 다시 한번 각오를 다졌다.
엄마로서.
하나뿐인 딸과 함께 세상과 맞서 싸워나가겠다고.
“오빠. 그러면 부탁드릴게요. 하나 언니랑 합방. 그리고 거기에 유미를 데리고 나갈게요.”
“잘 생각했어. 유미 조기교육 한다고 생각해. 혹시 아니? 나중에는 유미가 진짜 스타가 될지.”
“에이~ 설마요.”
얘가 못 믿네.
아역 스타로 유미가 뜨고 나면 꼭 찾아와서 다시 물어봐야지.
그렇게 조수영의 고민이 해결되어 버렸다.
* * *
20분이 지났을 무렵.
달칵.
방음실의 문이 열리며 땀투성이가 된 최지영과 미소가 나왔다.
안에서 어떤 연기를 했는지 미소의 눈은 충혈되어 있고 눈가에는 눈물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때였다.
우릴 본 미소의 어깨가 들썩거린다.
놀란 유진이가 달려가 미소를 껴안았다.
“미소야. 왜~?”
미소가 입을 꾹 닫은 채 대답하지 않는다.
“힘들었어?”
미소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래. 수고했어.”
미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진이를 꼭 안는다.
최지영이 땀을 닦으며 날 구석으로 이끌었다.
미소가 들리지 않을 곳까지 날 데려간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묻는다.
“정 팀장님. 미소 쟤 뭐예요? 진짜 천재 아니에요?”
“네?”
“가르치는 대로 쏙쏙 받아먹더라니까요? 나 너무 놀라서 기절할 뻔했잖아요.”
미소가 연기 연습을 하겠다고 방음실에 들어간 시간은 고작 20분 정도.
그 짧은 시간에 배울 걸 다 배웠다니.
어처구니가 없었기에 최지영에게 되물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설명은 좀 해 주셔야죠.”
최지영이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미안하지만 내일 오디션 때까지 미소가 말하지 말래요. 아 그리고 정 팀장님이랑 유진이한테도 부탁할 게 있어요.”
“무슨 부탁이요?”
“내일 오디션 현장에 유진이와 정 팀장님은 들어가지 마세요.”
오늘처럼 미소의 눈에 띄지 말라는 게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전문가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는 없었다.
* * *
<화란전>의 아역 최종 오디션 날.
정상봉이 미소를 데리고 MBS의 7층 오디션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난.
유진이와 함께 MBS 방송국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정상봉이 현장 중계해주는 영상을 볼 계획이다.
“그나저나 넌 미소한테 뭐 들은 거 없어?”
“전혀요. 연기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꾹 다물더라고요. 밤에 최지영 배우님이랑 통화를 하는 것 같던데 저보고도 나가 있으라고 했고요.”
유진이에게도 비밀로 하다니.
대체 무슨 레슨을 받은 거지?
그때 정상봉이 영상 통화를 켰다.
-팀장님. 지금부터 중계하겠습니다.
“오케이.”
양이지와 진공주도 칼을 갈고 나왔는지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런데.
첫날엔 보이지 않던 양이지의 엄마가 무대 아래에 나타나 있었다.
40대 연기자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탑 여배우 이태연이 팔짱을 꼬고 무대를 응시 중이다.
“오빠. 이태연 씨가 왔는데요?”
“어. 보여.”
“혹시 이 오디션 압박하려고 온 거 아닐까요?”
“당연히 그렇겠지.”
유진이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 저희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냐. 저래 봐야 역효과만 날걸?”
오복희 PD를 꼭 <화란전>의 PD로 요청한 건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드라마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친분이 있는 미소도 쉽게 캐스팅하지 않을 정도로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다.
다시 말해.
이태연 배우든 누가 온다고 해도 절대 그 외압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라는 거다.
그때였다.
오복희 PD가 객석에 있는 이태연에게 아는 척을 한다.
-태연 씨. 바쁘지 않으세요? 아역 오디션장에를 다 오시고?
-마침 촬영이 있어서 MBS에 왔다가 우리 딸 오디션 보러 왔어요. 저 신경 쓰지 말고 하세요.
당연히 신경 쓰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오복희 PD는 내 생각대로 반응한다.
-그러면 없다고 생각할게요.
그 순간 이태연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오복희 PD는 눈치를 보기는커녕 진짜로 이태연을 무시하고서 미소부터 유화 공주 연기를 시켜버린 까닭이었다.
오복희 PD가 아역 세 명을 향해 묻는다.
-자. 그러면 얼마나 보완해 왔는지 볼까?
-네~! PD님!
-자 그럼 씬 22 시작하자. 미소야 준비됐어?
-네.
순간 미소가 서서히 눈을 감는다.
배역에 몰입하려는 행위인 걸 알고 오복희 PD가 잠시 기다렸다.
잠시 후.
오복희 PD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레디~ 액션!
그 순간.
눈을 번쩍 뜬 미소는 이제껏 보지 못한 연기를 펼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뭐 뭐야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