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0화
370. <화란전> 아역 오디션 2
<화란전>의 씬 22는 한우주 작가조차 지우고 다시 쓰고 고치기를 몇 번이나 했었다.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는 건 아역들에게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지연 작가와 김솔잎 작가는 그래선 안 된다고 조언했다.
아역이라고 해도 배우들의 잠재력을 절대 무시하지 말라고.
어차피 배우들이 도저히 연기를 못한다면 현장에서 감독들이 알아서 할 거라며 말이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배우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 <화란전> 대본이었다.
그런 대본을 드라마에 미친 오복희 PD가 손에 넣었기에 오디션의 기준도 자연스레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설령 그 대상이 아역들이라도 말이다.
이름이 불린 양이지와 진공주가 한복을 꼭 쥔 채 무대 위로 올라간다.
세 사람이 나란히 서자 오복희 PD가 지시를 내린다.
“일단 미소가 유화 공주를 맡아서 연기할 거고 첫째 정화 공주 셋째 도화 공주역은······ 이지랑 공주가 직접 결정하렴?”
순간 미소와 진공주보다 두 살이 더 많은 양이지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린다.
“이지야 왜 그래?”
“유화 역은 미소로 완전히 결정 난 건가요?”
미소의 유화 공주 오디션 중인데 양이지가 당차게 묻는다.
아역 경력 4년의 자신이 밀린 이유를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우리 이지의 연기도 뛰어났지만 씬 11에서 노래가 조금 부족한 거 알지?”
양이지가 당당히 대답한다.
어렸지만 연예인으로서의 자각은 분명한 아이다.
“더 연습하면 잘할 수 있어요!”
“그래?”
“네!”
“그러면 이따가 다 돌아가면서 유화 공주역을 한 번씩 해볼까?”
양이지의 눈이 반짝인다.
잘하면 배역이 바뀔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어린 눈빛이다.
예상한 대로.
오복희 PD는 드라마의 성공을 위해 아역들에게도 경쟁을 시키고 있었다.
양이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그러면 전 정화 공주부터 할게요.”
“그러렴.”
오복희 PD가 진공주를 쳐다본다.
“그러면 공주는 도화 공주부터 시작해 줄래?”
진공주가 눈치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해 보자.”
씬 22.
어린 자매들의 다툼.
미소가 가장 자신 없는 연기를 해야 할 순간이 드디어 다가왔다.
여전히 까톡 영상 통화가 켜져 있었기에 유진이에게 물었다.
“유진아. 괜찮을까?”
유진이도 불안한지 곁에 있는 도란희의 손을 꼭 붙든 채 답한다.
-모르겠어요······ 연습할 때도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해 대본만 외우고 넘어갔던 부분이거든요······.
그때였다.
오복희 PD가 연기 시작을 외친다.
“자. 그럼. 시작할까요? 레디~ 액션!”
그 순간 세 사람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 * *
<화란전>의 씬 21.
극 중 엄마는 달랐지만 친자매처럼 사이좋은 세 공주에게 대왕의 예언가 ‘무무’가 예언을 한다.
-계림의 가장 아름다운 꽃이 만개하면 남은 두 꽃은 영원히 빛을 잃어버린다.
풀이하자면 꽃이라 불리는 공주 한 명이 여왕이 될 때 나머지 공주들은 모두 죽는다는 소리였다.
그 예언 이후.
세 공주의 세력들은 서로를 향한 의심을 키우다가 결국 호위 무사들끼리 칼부림을 하게 되는 사태를 벌인다.
<화란전>의 씬 22는 칼부림의 결과로 피를 본 다음 날.
왕에게 불려 가다가 만난 세 공주가 처음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는 장면이었다.
가장 먼저.
첫째 정화 공주 역을 맡은 양이지가 눈을 부라리며 미소를 향해 외친다.
『유화. 계림의 일화(一花)인 내가 네깟 것의 칼에 죽어줄 줄 알았더냐?』
양이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적의가 잔뜩 묻어 나온다.
9살에 경력 4년.
양이지는 엄마 이태연의 연기를 보고 자라며 자기 인생의 절반을 연기자로 살아왔다.
그 경험을 살려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린 미소를 마치 죽일 듯 노려 보기 시작한다.
심지어 분을 참지 못해 몸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하면서.
마치 허락만 떨어지면 미소를 향해 덤벼들 기세였다.
그 순간 미소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양이지를 향해 답했다.
『정화 공주님. 어이하여 제가 하지도 않은 일을 하였다고 주장하시는지요. 전 그저 서라벌을 반으로 쪼개려는 간악한 자들의 칼에 맞설 뿐이옵니다.』
『뭐 뭐? 간······악?』
양이지가 발끈하자 대사를 읊는 미소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데 나쁜 연기는 아니지만 감정선이 틀렸다.
분노라기보다는 슬픔에 가까운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오복희 PD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이제껏 모두를 놀라게 했던 미소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진공주의 연기가 펼쳐졌다.
『정화 공주님. 유화 공주가 천것들과 어울리며 착한 척할 때부터 수상하다 했습니다.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천것과 어울리며 이제껏 대왕님과 저희 모두를 다 속인 것입니다. 자신의 손은 더럽히지 않고 저희를 몰살시키려고 말입니다!』
진공주 역시 양이지에 지지 않는 안정된 연기를 선보였다.
미소를 향한 독설에는 적개심이 뚝뚝 묻어 나왔고 쏘아보는 눈빛은 불신이 가득했다.
어른 연기자에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감정선이 또렷한 연기였다.
‘큰일인데······.’
양이지와 진공주가 놀라운 연기를 보인 까닭에 상대적으로 미소의 연기는 더 떨어져 보였다.
클라이맥스 씬에서 이 정도가 한계라면 미소가 유화 공주 역을 따낼 거라 장담할 수 없다.
그 이후에도 미소는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연기를 이어갔다.
다만 아쉽게도 한계가 분명했다.
지금의 미소는.
분노라는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연기하고 있었다.
결국 오복희 PD가 외친다.
“컷~!”
세 사람이 숨을 몰아쉬며 헉헉거린다.
짧은 시간 동안 감정을 쏟아낸 터라 다들 힘에 부쳐 한다.
잠깐의 휴식 후.
오복희 PD는 역할 바꾸기를 선언했다.
“세 사람. 이번에는 역을 바꿔 연기해 볼까요?”
그때부터 세 사람은 정화 공주 유화 공주 도화 공주 역을 돌아가며 맡아 연기를 시작했다.
양이지가 맡은 ‘유화 공주’는 씬 22에서 보여줘야 하는 감정을 제대로 표현했다.
다정하고 사랑스럽기만 하던 유화 공주가 처음으로 ‘공주’의 위엄을 드러내고 분노했으니까.
이어 진공주는 더 격정적인 ‘유화 공주’의 모습을 연기했다.
적어도 씬 22에 한해서만큼은 미소가 가장 떨어졌다.
결국 오복희 PD가 오디션 종료를 외쳤다.
지친 아이들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복희 PD는 잠시 쉬고 있으라고 한 뒤 심사위원들과 상의를 시작했다.
잠시 후.
회의를 끝낸 오복희 PD가 굳은 표정으로 말한다.
“지금 결정 내리기에는 셋 다 아쉬움이 있네요. 앞으로 3일 뒤. 세 사람의 최종 배역은 한 번 더 최종 오디션을 거치고 정하겠습니다.”
크랭크인 전에도 배역을 바꾸는 건 흔한 일이다.
그렇기에 오복희 PD의 이 결정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오복희 PD는 3일 뒤 오디션을 볼 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며 세 사람의 장단점을 말해준다.
“이지 넌 공주로서의 기품과 무게감은 일품이야. 하지만 초반부의 발랄한 느낌을 더 살려야 해.”
“공주 넌 감정 라인이 선명해서 좋아. 하지만 부드러워야 할 부분에서 날이 서 있는 경우가 많아. 다음엔 그걸 조금 죽여오면 좋겠어.”
“미소는 다 훌륭했는데 클라이맥스만 집중적으로 팠으면 좋겠어. 앞으로 연기자가 되고 싶다면 말이야.”
역시나 오복희 PD가 미소의 약점을 분명히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허투루 넘어갈 수는 없는 문제였다.
오복희 PD는 다음번엔 그 점만 파고들어 확인할 테니까.
아무래도 선생님을 구해야겠다.
미소에게 호된 지도를 아끼지 않을 선생님으로.
엄마인 유진이가 해줄 수 없는 독한 연기 지도가 필요한 시점이 찾아왔다.
그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난봉꾼 최종혁과 얽혀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부활한 여배우 최지영.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본 그녀라면 미소에게 부족한 감정을 채워 줄 수 있을 거라 확신이 들었다.
* * *
오디션을 마친 미소가 입술을 뿌루퉁하게 부풀린 채 자리로 돌아왔다.
어지간히 분했는지 치마를 꼭 붙들고 있다.
“미소야. 걱정하지 마. 최종 오디션 때 더 잘하면 되잖아.”
인생 처음으로 ‘배역’을 확정 짓지 못한 미소였기에 기가 죽었을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내 걱정은 기우였다.
미소가 고개를 들고 날 빤히 쳐다본다.
“삼촌 어떻게 하면 돼요?”
“응?”
“어떻게 하면 연기를 더 잘할 수 있어요?”
혹시라도 미소가 포기할까 봐 걱정한 게 미안할 정도였다.
어린 미소는 당당히 자신의 벽을 마주하고 부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가슴이 뭉클할 정도였다.
“삼촌이 우리 미소한테 딱 어울리는 선생님을 찾아줄게.”
미소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러면 저 진짜 열심히 할 거예요!”
“그래. 그럼 삼촌은 바로 선생님한테 연락해 볼게.”
“네!”
각오를 다진 미소를 보며 난 곧장 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최지영은 지금 제주도에 있다며 내일 오후에나 집에 도착한다고 한다.
-내일 저녁 6시 이후에는 시간 괜찮아요. 그때 볼까요?
“예. 배우님.”
내일 오후 최지영 배우의 집에서 보기로 약속을 잡은 뒤 오디션장을 나섰다.
선생님이 생겼다고 전하자 미소는 금세 밝아진 표정을 지었다.
“삼촌! 어서 엄마한테 가요!”
“응. 그래.”
유진이와 도란희가 여전히 PD실에 있었기에 두 사람을 데려가려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그때.
복도 끝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강시아! 아까 씬 17에서 왜 그렇게 우물거렸어? 내가 딕션 똑바로 하라고 했지! 그리고 2년이나 트레이닝 했는데 감정 표현은 왜 그렇게 서툴러?”
“죄송······해요. 원장님.”
“죄송? 이번이 몇 번째야? 너 이번에는 꼭 배역 따내야 한다고 내가 했어~ 안 했어~?”
다른 아이들은 다 사라진 복도 끝.
최이선 원장이 강시아를 향해 화풀이하고 있다.
정작 문제는 연기 지도를 하는 자신인데 말이다.
그때 최이선 원장이 강시아를 향해 뜬금없는 말을 내뱉는다.
“시아 네 밑으로 들어가는 돈이 얼마인 줄이나 알아? 레슨비 의상비 유류비······.”
이제 10살인 아이가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할 각종 비용들이 다 튀어나온다.
‘여전하네 최 원장.’
최원장의 행동은 늘 네 밑으로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걸 평상시에 각인시켜놓기 위한 밑밥이었다.
혹시 나중에 다른 매니지먼트로 이적할 때나 수익을 정산할 때 경비가 많이 들어갔다면서 돈을 빼돌리기 위해서.
미소의 연기 문제를 해결해야 했지만 최지영과 만나는 건 내일 오후.
아무래도 오늘은 강시아의 일부터 먼저 해결해야겠다.
“상봉아. PD실에 가서 유진이랑 같이 미소를 데리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 란희한테는 한 작가님 태워서 집으로 모셔드리라고 전하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미소는 엄마랑 연기 연습 열심히 하고 있어. 삼촌 이따 밤에 집에 갈게?”
“네! 삼촌도 이따가 내 연기하는 거 다시 봐줘요!”
“그래. 알았어.”
미소는 고개를 끄덕인 뒤 정상봉의 손을 잡고 PD실로 향했다.
미소를 보낸 난 여전히 혼나는 강시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최 원장님?”
강시아를 질책하던 최이선 원장이 고개를 돌린다.
“아 정 팀장님! 안녕하세요?”
난 간단한 인사 뒤 단도직입적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 아이. 얼마면 저희 굴렁쇠에 이적시켜주시겠습니까?”
그 순간 최이선 원장이 잠깐 멍한 표정을 짓는다.
갑작스러운 이적 제안이 당황스러운 것 같다.
하지만 이내 얼굴을 밝게 물들였다.
“우 우리 시아가 마음에 드셨어요?”
“예. 아까 보니까 단점은 있긴 해도 애 목소리랑 인상이 좋네요. 한번 써 볼까 하는데 이적료만 맞으면 협상 한번 해보고 싶은데요?”
미끼를 슬쩍 던진 순간 욕심 많은 최이선 원장이 덥석 그 미끼를 물었다.
달콤한 미끼 속에는 날카로운 낚싯바늘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고서 말이다.
그 순간 언제 혼을 냈냐는 듯 최이선 원장이 강시아를 껴안았다.
“호호호. 역시 보는 눈이 있으시네 우리 시아 정도면 충분히 탐낼 만한 인재죠.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저희 회사로 가서 잠깐 이야기를 따로 나눌까요?”
최이선 원장은 콧소리까지 섞으며 기분 좋은 티를 낸다.
“그렇게 하시죠.”
난 강시아를 구하면서 이참에 ES 연기 학원도 무너뜨릴 마음을 먹었다.
잡초를 뽑을 땐 뿌리까지 뽑아야 하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