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5화
365. 얽히는 감정들 1
명동 최은태 회장의 고택 앞.
차를 세우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린다.
동시에 최영호 은행장이 세 명의 건장한 남자들과 뛰어나왔다.
대호파의 수뇌부이자 대흥 저축은행의 이사들이었다.
엄마와 이연실을 부축해 차에서 내리자 최영호 은행장이 허리를 반으로 굽힌다.
“어서 오십시오. 미카엘라 수녀님. 그리고······ 연실 아가씨.”
동시에 나머지 셋도 고개를 숙인다.
“어서 오십시오!”
수녀복을 입고 있는 엄마가 공손히 고개를 숙인다.
“어르신의 편찮으셔서 못 나온 것이니 오해가 없으셨으면 합니다.”
강은기가 결국엔 최은태 회장을 만나지 않겠다고 하자 몸져누운 모양이다.
“그러시군요. 전 괜찮으니 심려하지 마세요.”
엄마는 선입견을 갖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있었다.
최영호 은행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알겠습니다. 바람이 차니 어서들 들어가시죠.”
그 순간 엄마가 고개를 돌린다.
“연실아. 넌 차에서 기다리고 있을래?”
이연실이 고개를 갸웃한다.
“왜? 나도 만나 뵙고 싶은데.”
“엄마 말 들어.”
이연실이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요. 그러면 영진 오빠랑 기다리고 있을게요.”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와 최은태 회장을 만나게 하고 싶지 않은 강은기의 마음을 엄마는 그 누구보다 잘 헤아리고 있었다.
이연실이 배를 잡고 조심스럽게 차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최영호 은행장이 실망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일단 엄마가 결정을 내린 이상 이연실을 데리고 고택으로 들어갈 방법은 없다.
엄마는 내 손을 잡으며 고택의 정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들어가자 윤호야.”
그제야 엄마는 내 손을 붙잡고 고택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고택의 안방.
창백한 얼굴을 한 최은태 회장이 우릴 맞이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수녀님. 그리고 어서 오게 정 팀장.”
엄마가 공손히 고개를 숙인다.
“반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어서 쾌차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엄마가 내 부축을 받고 방석에 앉았다.
하지만 그 이후.
엄마는 아무런 말도 없이 최은태 회장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옛날 기억하시나 보네.’
강은기는 처음 보육원에 맡겨졌을 때 한 달간은 친엄마를 찾아 보육원을 매일같이 탈출했다.
그리고 다음 한 달간은 어쩌면 어딘가 있을지 모르는 아빠가 자기를 찾으러 올 거라고 믿으며 식사를 거르길 반복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강은기를 품에 안고 달래기를 반복했다.
꼭 찾으러 오실 거라고.
강은기는 착하고 예쁜 아이니까 부모님이 꼭 찾으러 올 거라고 말이다.
엄마는 늘 그렇게 강은기를 달래며 강은기 보다 더 그의 부모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런데 막상 강은기의 아버지를 보게 되자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듯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말없이 지켜보는 시간이 길어지자 답답함을 참지 못한 최은태 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수녀님. 은기를 만날 수 있게 절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잠깐 고민하던 엄마가 조심스레 묻는다.
“회장님은 은기가 왜 감옥에 갔는지는 아시나요?”
최은태 회장이 고개를 젓는다.
“솔직히 잘은 모르겠습니다.”
경기권에서 손꼽히는 폭력 조직을 장악한 뒤 강은기는 곧장 자수를 선택했다.
그리고 최만식에게 죽을뻔하고서도 구치소에서 나올 생각이 없었다.
그러한 강은기의 선택은 성공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최은태 회장의 인생관과 정면으로 대치되고 있었다.
엄마가 강은기가 감옥에 간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은기는 곧 태어날 아기에게 부끄럽지 않은 떳떳한 아빠가 되기 위해서 자수를 한 겁니다. 죗값을 치르고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요.”
최은태 회장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우릴 쳐다본다.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최은태 회장이 이해할 수 없다며 언성을 살짝 높였지만 엄마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게 은기를 만나게 해달라고 하셨지요?”
“예.”
“그러면 외람되지만 한 가지만 확인했으면 합니다.”
엄마가 최은태 회장을 도와줄지 말지를 결정하려는 모양이다.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엄마가 최은태 회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질문한다.
“은기가 회장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인다면······ 회장님은 은기에게 가진 걸 물려줄 생각이십니까?”
최은태 회장이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친아들을 찾았으니 모든 걸 물려줘야겠지요.”
“모든 걸 말씀입니까?”
“이를 말씀입니까?”
엄마가 표정이 굳는다.
“제가 알기로 회장님은 사람들에게 고리로 돈을 빌려주고 돈을 받아내는 일을 하시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죄를 씻고자 스스로 감옥까지 간 은기에게 다시 또 죄를 짓길 권하시는 겁니까?”
순간 최은태 회장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평생 아이들을 돌보고 산 엄마도 최은태 회장이 무슨 일을 해서 거부가 되었는지는 안다.
명동 사채 시장의 큰 회장.
한국 지하 금융을 지배하는 거물.
그 자리는 돈에 영혼을 판 자가 차지하는 왕좌였다.
그리고 그 왕좌를 지키는 건 아무런 대가 없이 절대 이룰 수가 없었다.
엄마가 일부러 강은기의 생각까지 말해줬는데도 최은태 회장이 잘못된 답을 말한다.
그 순간 최은태 회장의 이마에 진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우리 엄마. 무섭네······’
여기 오기 전만 하더라도 엄마가 이 정도로 몰아세울 줄은 몰랐다.
하지만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강은기를 위해 엄마는 천하의 최은태 회장을 시험하고 있었다.
당황한 최은태 회장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묻는다.
“그렇다면 아들을 만나려면 저도 은기처럼 평생 저지른 죄를 털어놓고 자수라도 하란 말씀이십니까?”
엄마가 고개를 젓는다.
“사람들을 가리켜 ‘백인백색’이라고들 한다지요. 떳떳해지는 방법도 사람마다 다르다고 봅니다. 은기에게는 은기의 방식이 있고 회장님께는 회장님의 방식이 있겠지요.”
잠깐 고민하던 최은태 회장이 생각이 난 듯 말한다.
“그러면 이건 어떻습니까? 천사 보육원의 모든 아이를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돈만 있으면 부모가 없다는 놀림을 받지 않고 누구보다 좋은 환경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은기를 만나게 해주실 수 있습니까?”
최은태 회장이 돈으로 해답을 사려 든다.
그 순간 엄마는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 아이들은 제힘으로 키울 수 있습니다. 회장님.”
말을 마친 엄마가 날 쳐다본다.
“윤호야. 아무래도 안 되겠다.”
쉽게 돈으로만 답을 찾으려는 최은태 회장의 태도가 엄마를 크게 실망시킨 모양이다.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무릎을 짚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최은태 회장이 다급히 외친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엄마가 움직임을 멈추고 최은태 회장을 쳐다본다.
마치 기회를 주고 싶은 듯 말이다.
최은태 회장이 이번에는 진지하게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엄마는 말없이 최은태 회장의 생각이 끝나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 * *
오랜 생각에 잠겼던 최은태 회장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아까 전과는 달리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인백색이라 하셨지요? 수녀님.”
“예. 회장님.”
“제 대답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습니다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엄마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전 제가 가진 걸 내려놓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엄마가 이해가 안 된다는 고개를 갸웃한다.
그때 최은태 회장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대신 사업의 방식을 바꾸겠습니다.”
“사업의 방식이요?”
최은태 회장은 그때부터 자신이 어떻게 할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예. 제게 돈을 빌리는 놈 중에 떳떳하지 못한 놈들이 절반은 됩니다. 그러나 절반은 세상 어디에도 돈 빌려줄 사람이 없는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 힘없는 자들을 여력이 되는 한 돕도록 하겠습니다.”
최은태 회장이 낸 결론은 역시나 돈으로 푸는 방식이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진지함이 있었다.
“그리고 제가 이 사업에서 손을 뗀다면 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피가 흐를 겁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자는 저보단 더욱 사람들의 고혈을 빨아먹을 겁니다. 제가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겠습니다.”
최은태 회장의 말이 맞았다.
그가 사채업에서 손을 놓는다면 그의 자리를 노리고 온갖 인간들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이게 될 거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의 자리를 대신한 자가 힘없는 자의 고혈을 더욱 빨아먹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다.
최은태 회장은 명동 시장의 절반 정도에 직 간접적인 영향력을 미치다 보니 시장의 안정을 가장 우선시한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채꾼들과는 달리 지금도 금리가 다른 이들보다는 낮은 편이었다.
“신을 모시는 수녀님께는 제가 속한 곳이 오물통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 그러니······ 제가 사는 곳을 조금 더 좋게 바꾸는 선에서 타협을 봐주실 수는 없습니까?”
최은태 회장은 속한 곳에서 떳떳해질 방법을 찾아내었다.
신의 말씀을 따르고 더 많은 이들에게 죄를 짓지 말고 살라며 선(善)을 설파하는 게 엄마의 삶이었다.
그렇기에 최은태 회장이 낸 답은 분명 엄마의 가치관과는 사뭇 달랐다.
하지만 최은태 회장이 낸 답은 또 다른 선(善)의 형태를 띤 것도 사실이었다.
돈이 필요한 어려운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겠다는 뜻이었으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엄마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기도를 끝낸 엄마가 눈을 뜬다.
엄마는 긴 한숨을 내쉰 뒤 조금은 따뜻해진 눈빛으로 최은태 회장을 바라본다.
“회장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부디 그 뜻을 잘 이루신 다음 다시 뵐 수 있었으면 합니다.”
엄마의 말에서 희망을 발견한 순간 최은태 회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한다.
“감사······합니다 수녀님.”
엄마가 고개를 젓는다.
“아닙니다. 이렇게 대뜸 찾아와 무례한 말씀을 드렸는데 내치지 않고 들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서 공손히 고개를 숙인다.
최은태 회장 역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엄마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였다.
평생 서로 다른 길을 걷던 두 사람이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 * *
고택의 정문.
최은태 회장이 직접 정문까지 나와 배웅한다.
“안녕히 가십시오.”
최영호 은행장과 동생들 역시 허리를 굽혀 우리에게 인사를 보냈다.
엄마가 다정한 눈길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실례 많았습니다.”
엄마를 부축해 차에 타려는 순간 엄마가 조용히 말한다.
“다음번에는 은기랑 만나게 해드려도 되겠다.”
“정말요?”
“이미 회개하고 계시잖니. 회개의 방식은 내 생각과 다르지만 사람에게는 각자의 방법이 있는 거니까.”
비록 최은태 회장이 입 밖으로 회개라는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엄마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제 우리 윤호가 어떻게 사는지 집 구경이나 가볼까?”
엄마는 어깨에 올려진 짐을 한결 내려놓은 듯 행복한 얼굴로 말한다.
난 최은태 회장을 상대로도 일절 물러서지 않은 자랑스러운 엄마를 향해 웃으며 답했다.
“예. 엄마!”
* * *
천호동 집에 도착했다.
엄마는 정인지 주인아주머니를 만나자마자 선물이라며 직접 담은 김치들을 온갖 종류별로 내어놓았다.
“우리 윤호. 늘 돌봐주셔서 감사드려요.”
“제가 돌보는 게 아니라 우리 정 팀장님이 절 돌보는 거예요.”
두 사람은 서로 손을 잡고서 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때 유진이가 미소를 데리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곁에 앉은 이연실이 들뜬 표정을 짓는다.
두 사람은 영상통화를 몇 번 하긴 했지만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벌컥 하고 1층 현관문이 열리더니 유진이와 미소가 뛰어 들어왔다.
“오빠! 우리 왔어요! 어? 연실 언니. 일찍 왔네?”
“이모다!”
미소도 영상통화로 이연실과 인사를 했기에 서로가 익숙한 얼굴로 반긴다.
미소가 신발을 벗고 조르르 달려와 배꼽 인사를 한다.
“삼촌! 유치원 다녀왔습니다~아!”
“잘 다녀왔어?”
미소는 이어서 미카엘라 수녀님과 이연실에게도 배꼽 인사를 한다.
“할머니! 이모! 오셨어요?”
내가 늘 엄마라고 말한 덕분인지 미소는 미카엘라 수녀님도 할머니라 부른다.
그리고 이연실에게는 이모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연실이 감격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우리 미소. 잘 있었어?”
“네~!”
현관문에서 신발 정리를 한 유진이도 이연실을 한껏 반겼다.
“연실 언니. 오는데 힘들었겠다.”
“힘들긴. 아직 괜찮아.”
그렇게 인사를 마친 뒤 다들 거실에 앉았다.
“연실 언니. 몇 주야?”
“이제 20주.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어.”
순간 미소가 눈을 끔뻑이며 이연실의 아랫배를 쳐다본다.
“왜? 미소야.”
“이모. 아기는 언제 나와요?”
“20주는 더 있어야 해.”
“20주면······ 으음······.”
미소가 손가락으로 계산을 시작한다.
미소는 연기에 관해서라면 동년배 최고의 능력자지만 산수는 어려워했다.
“많이 남은 것 같다!”
“풉. 그렇게까지는 아니야.”
“그러면 아기 낳으면 우리 집에 또 올 거예요?”
초롱초롱한 미소의 눈빛에 이연실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엄. 이모는 미소를 만나러 올 테니 미소도 이모 만나러 와.”
미소가 엄마를 쳐다본다.
“엄마! 그래도 돼?”
“물론 그래도 되지.”
이연실의 집이란 내가 자라난 경기도 광주의 천사 보육원을 말함이다.
나 또한 조카가 태어난다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갈 생각이었다.
회귀 전에 만나지 못했던 또 한 사람의 가족을 만나는 일이니까.
아이 이야기가 끝나자 그 뒤로는 ‘시시콜콜한 나에 관한 이야기’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내가 뭘 잘 먹고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회사에서 대우를 받는지 등등에 관한 것들을 말이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 잘 시간이 되었다.
“자 이제 자러 올라가요 엄마. 연실아.”
하루와 하루의 엄마가 수원으로 집을 보러 내려갔기에 오늘은 3층 손님방이 비어 있다.
그런데 이연실이 유진이의 손을 붙잡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윤호 오빠. 우리는 오늘 2층에서 잘게.”
“유진이랑? 왜?”
“응. 우리끼리 따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응?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