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7화
357. 주영인 3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의 주호연 대표는 소란을 일으킨 덩차오 부대표를 대신해 사과하며 주영인의 출연료를 30% 이상 인상해줬다.
<전장의 늑대>에서 주영인의 출연료는 50억이었지만 단번에 70억으로 상승했다.
“우리 덩 부대표가 실수했네. 용서하시게 정 팀장.”
덩차오 부대표가 시비를 건 덕에 주영인의 출연료뿐 아니라 굴렁쇠 엔터의 입지마저 공고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내 입지는 그보다 더욱 강력해졌고.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 일은 없던 일로 덮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계약을 마친 우린 축하 사진을 찍었다.
덩차오 부대표는 마지못해 사진만 찍고 사라져 버렸고 장태윤 감독은 남아서 주영인과 잘해보자며 180도 바뀐 모습을 취했다.
이젠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의 어떤 누구도 우릴 방해하지 않게 되었다.
* * *
상하이 페닌슐라 호텔.
주영인과 같은 층에 있는 스위트룸으로 방을 잡아준 왕룽은 푹 쉬고 내일 아침에 보자며 호텔을 나섰다.
처음 해외여행을 온 서연우는 어제 잠을 통 못 잔 터라 씻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이어서 샤워를 마친 난 100평짜리 초호화 스위트룸의 넓은 거실 소파에 누웠다.
현재 시각 밤 11시 40분.
여전히 내일 아침 주영인과의 스캔들이 터진다는 내용은 그대로였다.
[에브리데이 V11]
[날짜 : 2020년 10월 18일]
-AM 09:00 [NEW. 정유진] 컨디션 저하로 인한 스케줄 취소. (화상 회의 내용 : 주영인과 정윤호 팀장의 열애 스캔들 기사 후속 처리 대응.)
“대체 누가 이 기사를 쓰는 거지?”
계약을 맺은 이후부터 호텔에 들어올 때까지.
주영인과는 한 장의 사진에 담길 만큼 거리를 좁힌 적이 없었다.
“진짜 조작이라도 하는 건가?”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호텔 초인종이 울렸다.
“뭐지? 룸서비스는 시킨 적이 없는데······.”
난 젖은 머리를 털며 문 앞으로 나섰다.
“누구세요?”
“저예요. 영인이.”
순간 머리털이 쭈뼛거린다.
이러다가 사진이 찍힌다면?
단번에 열애설 확정이다.
난 문을 열어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이 늦은 시각에 웬일입니까?”
“할 말이 있어서요.”
“시간이 늦었습니다. 기자가 보고 있을지도 모르니 이만 돌아가시죠.”
“기자들 없는 거 확인하고 왔어요. 그리고······ 문 안 열어주시면 저 여기 계속 있을 거예요.”
주영인이 회귀 전과 바뀌지 않은 게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끈질김이었다.
“잠깐 문에서 비켜보세요.”
난 호텔 문에 붙은 유리 렌즈로 밖을 확인했다.
기자가 없었기에 그제야 문을 살짝 열었다.
주영인이 수수한 흰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문 앞에 서 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입니까?”
주영인이 놀란 토끼 눈을 한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 저 저······ 저기······.”
주영인이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하고 숙인다.
아무래도 샤워 가운을 입고 나와 오해한 모양이다.
“가운 안에도 제대로 입고 있거든요? 이상한 상상하지 마세요.”
주영인이 다시 고개를 들고 발끈한다.
“이 이상한 생각이라뇨! 제 제가 언제요?”
“뭐 안 했다 치고.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주영인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들어가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지나가는 사람들 눈도 있는데······.”
주영인의 말대로 이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진이 찍히기라도 하면 곤란할 구도였다.
난 샤워가운을 입은 채 문에 기대어 서 있고 주영인은 들여보내 달라고 애원하는 중이었으니까.
“그러면 일단 들어오세요.”
“네.”
내 곁을 지나가는 주영인에게서 짙은 장미 향이 났다.
회귀 전 내가 늘 맡았던 향은 예전의 그녀를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주영인을 호텔 방 안으로 들인 뒤 문을 닫고서 구멍으로 확인했다.
다행히 기자는 없었지만 여전히 일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기 온 것 때문에 생긴 건 아닌가?’
조금은 안심한 나는 문에서 떨어져 거실로 향했다.
거실에 가자 주영인은 조금 전 내가 앉아 있던 소파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주영인은 테이블에 놓은 태블릿과 켜져 있는 중국 TV를 보고는 혀를 내두른다.
“이 시간까지 일하고 계셨어요?”
“그냥 현지 조사차 켜놓은 겁니다.”
“하여간 일~ 일~ 오빠도 가만 보면 워커 홀릭인 거 알죠?”
“그것보다 왜 여기 혼자 온 겁니까?”
주영인이 입술을 삐죽인다.
“이 실장님은 체해서 잠깐 쉬고 계세요. 아픈 분이랑 같이 올 순 없잖아요.”
대답을 마친 주영인이 주위를 둘러본다.
“그런데 이 방이 왠지 제 방보다 더 큰 거 같은데요? 하여간 왕룽 본부장이 내 팬이라는 건 순 거짓말인 거 같아요. 왕룽 본부장님이 사실은 오빠 팬 아니에요?”
“말 돌리지 마시고 본론부터 이야기하시죠.”
주영인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 고마웠다고 인사나 할까 해서 왔어요.”
“에이전트로서 좋은 조건의 계약을 성사시키는 건 당연한 건데요 뭘. 그리고 약속한 걸 지켰을 뿐입니다.”
주영인이 고개를 젓는다.
“오빠 저 싫어하잖아요. 솔직히 중국에 왔을 때 오빠가 이렇게까지 해줄지 몰랐어요. 그래서 아까는 좀 감동이었어요.”
회귀 전 그녀와의 일은 이미 잊은 지 오래다.
이랬든 저랬든 과거의 그녀와 현재의 그녀는 다른 사람이니까.
다만 이번 생에서 유진이를 보자마자 괴롭혔던 것 때문에 거리를 뒀을 뿐 유진이가 용서한 이상 나도 그녀에게 불편한 감정은 없었다.
“유진이한테 사과하고 서로 화해했잖습니까? 이제 저나 유진이를 괴롭히는 것도 아닌데 제가 영인 씨를 미워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주영인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진다.
“그럼 저 싫어하는 거 아녜요?”
“그렇다니까요?”
그때였다.
주영인이 웃으며 내 앞으로 몸을 숙였다.
장미 향이 찡하고 머리를 울릴 정도로 거리가 가깝게 좁혀 들었다.
이상한 짓을 할까 봐 몸을 뒤로 피하려는 순간 딱 30cm의 거리에서 주영인이 몸을 멈췄다.
“싫어하지 않는다니까 하나만 물어볼게요.”
대체 뭘 물으려는지 모르겠지만 주영인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다.
“뭘 말입니까?”
주영인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지금 유진이와 사귀어요?”
“쿨럭. 뭐 뭐라고요?”
“들으셨잖아요. 유진이랑 사귀느냐고요.”
“저기······ 이런 이야기는 좀 불편합니다만?”
“대답해주세요.”
끈질긴 그녀의 태도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사귈 마음은 있고요?”
매니저는 관리 대상인 연예인과 연애를 하는 순간 매니저로서의 자격 상실이나 마찬가지다.
연예인을 꼬드기는 놈이라며 회사 내에서도 기피 대상이 되고 어지간해서는 다른 회사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방송국에서의 술렁거림은 또 어떻고.
가끔 엔터 회사의 대표와 유명 연예인의 염문설이 터지는 경우가 있지만 끝까지 부인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러니 아무리 내가 유진이를 아낀다고 한들 매니저로 지내는 동안은 어떤 일도 생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대답이 늦어진 탓일까 주영인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진다.
“대답을······ 못 하시네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대답을 못 한 겁니다!”
“그래요?”
주영인의 얼굴이 다시 한번 환하게 변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녀의 얼굴은 마치 변검을 하는 듯했다.
“좋아요. 저 싫어하는 거 아니고 유진이와 썸 타는 것도 아니라면 우리 한 달만 만나 봐요. 저 입 무거우니까. 다른 회사 매니저랑 연애하는 건 문제 없잖아요? 그쵸?”
순간 숨이 턱하고 막힌다.
내가 잘못 들었나?
갑자기 만나보자고?
그것도 한 달만?
어처구니가 없다 보니 나오는 말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혹시 술 마셨습니까?”
주영인이 입바람을 후 하고 분다.
알코올은 없이 상큼한 박하 향과 옅은 복숭아 향 립스틱 냄새가 났다.
“술 안 마셨고 정신도 말짱해요. 전장의 늑대가 크랭크인 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 한 달! 그동안만 저랑 만나 봐요. 그때까지 오빠가 안 넘어오면 그때는 깔끔히 포기할게요. 어때요?”
주영인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몸이 자르르 떨렸다.
회귀 전 그녀의 첫 데이트 신청도 이런 식이었기 때문이다.
‘똑같아······’
딱 한 달만 만나보자고.
비록 장소는 달랐지만 그녀에게서 풍기는 장미 향이 과거의 기억을 선명히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불안감이 온몸을 감싸기 시작한다.
데스티네이션.
회귀한 이후 수많은 노력 끝에 많은 변화를 만들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일정들이 있다.
죽을 고생을 하며 미래를 변화시켜 왔지만 에브리데이 V11로 업데이트될 때 이제까지의 일정 변화는 고작 30%.
즉 아직도 70%나 되는 일정은 변함이 없다는 소리였다.
‘운명······이라는 건가?’
김동수를 정직까지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백 대령이란 존재가 튀어나온 것도 그렇고 김동수가 장웨이 회장을 만나고 있는 것도 그렇고.
굴렁쇠 해체를 막고 탑 엔터테인먼트 설립을 막으면 다 끝날 거라고 생각한 게 안이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운명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미소를 구한 첫날 배웠던 교훈을 주영인 덕에 다시 한번 떠올릴 수 있었다.
‘정신 바짝 차리자. 정윤호.’
난 속으로 열을 센 뒤 여전히 날 빤히 쳐다보고 있는 주영인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잊고 있었던 일을 되살려준 것에 대한 약간의 고마움을 담아서.
“전 영인 씨처럼 스타일리쉬한 사람이 아니라서 한 달간 만나고 말고 이런 건 못 합니다. 죄송합니다.”
주영인이 그럴 줄 알았다며 되묻는다.
“한 달이 싫으면······ 쭉? 어때요?”
그래.
이것까지도 똑같다.
솔직히 당시에는 탑스타였던 주영인이 좋아해 주는 게 그저 좋았기에 그러자고 대답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선택지를 골랐다.
감정에 허우적대며 정신없는 인생을 보낸 건 한 번이면 족하다.
그리고 이번엔 반드시 내 운명과 굴렁쇠 엔터의 운명을 바꾸고 싶었다.
머릿속이 맑아지자 압박감도 사라졌다.
난 길게 한숨을 내쉰 뒤 주영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덤덤히 대답했다.
“죄송합니다만 매니저로 일하는 한 전 연애할 생각 없습니다.”
주영인이 날 쏘아본다.
“그러면 오빠는 진짜 연애도 결혼도 안 할 거예요?”
“이런 이야기 좀 불편한데. 사생활 이야기는 그만하죠. 우리.”
“대답해주세요!”
대답하지 않는다면 끝도 없이 물어볼 기세다.
“죄송합니다만 몸 사리고 사는 처지라서요. 왜 영인 씨도 아시잖아요. 저 서예종 라인이랑 척지고 사는 거. 전 지금 연애에 한눈팔 정신이 없습니다.”
탑 엔터테인먼트의 설립을 막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은 이상 감정에 휩싸일 생각 따위는 없다.
주영인이 입술을 살짝 깨물며 다시금 묻는다.
“그 생각······ 바뀔 가능성. 정말 없어요?”
“없습니다.”
그제야 주영인이 내게서 몸을 떨어뜨리며 한숨을 내쉰다.
“오빠······ 진짜 어렵다.”
뭐 이런 사람이 있냐는 표정으로 주영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난 그녀가 감정을 갈무리할 때까지 잠시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한숨을 폭폭 내쉬던 주영인이 이내 감정을 털어 내었다.
“오늘 제 제안. 못 들은 걸로 해줘요. 아~ 쪽팔려.”
“벌써 다 잊었습니다.”
고백을 거절당한 탓인지 주영인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그럼 나 깐 대신 앞으로 우리 말이라도 좀 편하게 해요. 내가 뭐 오빨 잡아먹나? 오빠가 거리를 두니 너무 삭막해서 좀 별로란 말이에요!”
“천천히 하죠. 천천히······.”
“알았어요. 대신 올해가 가기 전에는 꼭 편하게 불러줘요!”
주영인이 몸을 일으키고는 손부채질을 한다.
“쳇. 도대체 내가 한 남자한테 몇 번을 까이는 거야?”
혼잣말로 투덜대던 주영인이 자신의 각오를 밝혔다.
“어쨌건 나 이번 작품에 진짜 최선을 다할 거예요. 이번 기회에 정유진보다 내가 한 수 위라는 걸 꼭 증명할 테니까 각오하세요.”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평소의 모습대로 도도한 태도로 돌아왔다.
그래.
이래야 주영인이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에이스에서 온 매니저들이 맡겠지만 혹 문제가 생기면 바로 전화 주세요.”
“당연히 그래야죠. 중국에 있는 동안은 오빠가 내 에이전트잖아요.”
주영인이 평소보다 조금 더 과한 웃음을 지으며 문으로 향했다.
그녀의 몸이 가볍게 흔들린다.
하지만 난 아무 말도 건네지 않고 부축도 하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하든 어떤 도움을 주든 지금 그녀에게는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을 테니까.
그때였다.
문을 나서려는 주영인을 붙잡았다.
“잠시만요.”
현재 시각 11시 55분.
내 다이어리의 일정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 있는지 확인부터 하고 나가세요.”
난 호텔 문에 달린 유리 렌즈로 밖을 확인했다.
그때 호텔 복도에 후드 티에 모자를 쓴 남자 한 명이 보였다.
마스크까지 착용한 터라 누군지 알 수가 없다.
‘기자인가?’
난 렌즈에서 눈을 떼고 말했다.
“밖에 사람이 있으니까 잠시만 있다가 가시죠.”
“알았어요.”
장미 향이 밸 듯 가까운 거리에서 주영인과 난 말 없이 문밖의 남자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심장이 뛰는 속도가 조금 빨라지는 것 같다.
하지만 착각이라 생각하고 무시해 버렸다.
잠시 후.
다시 한번 유리 렌즈를 통해 밖을 쳐다봤다.
‘갔군.’
난 이어서 다이어리까지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1]
[날짜 : 2020년 10월 18일]
-AM 09:00 <일정 삭제>
([NEW. 정유진] 컨디션 저하로 인한 스케줄 취소. (화상 회의 내용 : 주영인과 정윤호 팀장의 열애 스캔들 기사 후속 처리 대응.))
‘기자가 맞았나 보군.’
일정이 사라지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휴우~”
“갔어요?”
“예. 갔습니다. 그럼 이제 가보세요.”
“네······.”
힘없이 대답한 주영인은 문을 열자마자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밖으로 나섰다.
달칵.
문을 닫고 나자 힘이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데 그때였다.
다시 한번 새로운 일정이 떠올랐다.
[알림: 2020년 10월 18일 ‘정유진’의 새로운 일정이 추가되었습니다.]
“이번엔 또 뭔데?”
급히 일정을 확인한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에브리데이 V11]
[날짜 : 2020년 10월 18일]
-AM 10:00 [NEW. 정유진] 컨디션 저하로 인한 스케줄 취소. (화상 회의 내용 : 연예올타임즈 구지암 기자. 주영인과 정윤호 팀장 열애 사진 기사! 후속 대응 회의.)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왔던 연예올타임즈의 구지암 기자.
그가 주영인과 내 열애 스캔들을 터트리는 범인이었다.
“구 기자. 당신이었어?”
구지암 기자는 구린 데가 많다.
그리고 여기는 중국이고.
그렇다면 깔끔하게 처리할 방법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