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2화
352. 단서 3
명동 태성 반점.
10개 정도 테이블이 있는 허름하고 작은 가게는 텅 비어있었다.
그리고 김동수가 앉아 있는 8번 테이블에는 고량주 한 병과 조금 먹어 치운 탕수육 대자가 한 접시 놓여 있었다.
김동수의 맞은편에는 채워지지 않은 술잔이 한 잔 더 놓여 있었는데 조금 전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는 증거였다.
술잔 곁에는 수저가 한 세트 놓여 있는 것도 그 사실을 분명하게 해준다.
‘백 대령은 이미 나갔군.’
난 도청하는 최영호 은행장이 알아들을 수 있게 내부의 상황을 설명했다.
“누구랑 조금 전까지 같이 계셨나 봅니다? 먹다 남은 탕수육에다 술도 안 드시고 급히 나가셨나 보네요.”
김동수의 맞은편에 털썩 앉자 김동수가 혀를 내두른다.
“진짜로 혼자 오다니. 하여튼 겁대가리 없는 놈이라니까?”
“혼자 오라면서요? 그나저나 이런 음습한 곳에서 뭐 하고 앉았습니까? 정직을 당했으면 집에서 반성이나 하고 계시지.”
“내가 반성을 왜 해? 박 의원한테 돈 먹인 건 강 팀장 그 인간과 이기철 이사가 친 사고인 거 몰라? 난 피해자라고!”
“회사에 그 말을 믿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 거 같습니까?”
“회사 직원들이 뭐라고 하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내가 돌아가기만 하면 다들 입을 다물 놈들인데.”
“글쎄요. 회사의 서예종 쪽 식구들은 이미 방 이사님한테 붙은 것 같던데요? 최만식 대표님이 시켜서요?”
김동수가 피식 웃는다.
“최만식 대표고 방상영 이사고 간에 내가 서예종 일진이야. 두고 봐. 정직만 풀리면 내 밑으로 일렬로 설 테니까!”
김동수의 자신감이 넘치는 태도는 백 대령과 손을 잡은 게 확실하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근데 김 실장님은 이런 허름한 가게는 안 좋아하셨잖습니까?”
“헛소리 말고 왜 보자고 한 거야?”
밖은 최영호 은행장에게 모두 맡긴 터라 김동수에게 그동안 묻고 싶은 걸 말했다.
“한 가지 진짜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잠시 침묵을 지키던 김동수의 입이 열린다.
“말해 봐. 대답할 만한 질문이면 답해줄 테니까.”
“당신······ 대체 왜 이렇게까지 아득바득 사는 겁니까?”
김동수는 국회의원에게 뒷돈을 주고 연예인들을 상납하면서 위로 올라가려 하고 있었다.
정직까지 당하면 조금은 바뀔 줄 알았건만 그는 오히려 이 기회에 장웨이 회장과도 손을 잡았다.
그리고 X-FILE을 만드는 데 필요한 백 대령의 손까지 잡았다.
많은 것이 바뀌었는데도 운명대로 움직이는 그의 행보를 보면 흔히 말하는 사주팔자라는 게 진짜 있나 싶을 정도다.
김동수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날 노려본다.
“진짜 몰라서 물어?”
“예. 모르니까 묻는 겁니다.”
순간 김동수는 테이블에 놓인 고량주를 단숨에 들이마시고 외쳤다.
“성공하고 싶어서! 위로 올라가고 싶어서! 가진 것 쥐뿔 없는 놈이 성공하려면 그 수밖에 더 있어? 힘 가진 놈들의 눈에 들어야 올라갈 기회라도 잡지! 그걸 아직도 몰라?”
그 순간.
회귀 전 내가 왜 그토록 김동수를 싫어하면서도 어울렸는지가 와닿았다.
‘똑같아.’
김동수는 바로 회귀 전의 내 모습이다.
같은 부류.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했었던 내 과거의 모습이 마치 거울처럼 김동수에게 비추고 있었다.
그렇다면.
폭주 기관차가 되어 버린 김동수에게 남은 건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끝없는 부족함을 느끼며 채워지지 않는 독에 물을 넣듯 가지려고 할 거다.
아마도 김동수는 자신이 이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본인 스스로도 모를 거다.
과거의 내가 그랬으니까.
흥분한 김동수는 날 쳐다보며 이를 갈고 있었다.
내가 회귀하기 전만 하더라도 그의 인생은 막힘없는 고속도로가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나의 회귀 후.
그는 모든 일이 가로막혀 버렸다.
나 역시 주영인이 그랬듯 회귀 전과는 달라진 김동수를 다른 인물로 보려 했었다.
그러나 김동수는 회귀 전보다 더욱 질 나쁜 인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날 빤히 쳐다보던 김동수가 묻는다.
“그러면 나도 하나 묻자.”
“뭐를 말입니까?”
김동수가 날 째려보며 묻는다.
“그러는 넌 왜 그렇게 굴렁쇠에 집착하는 건데? 정유진 때문에? 미소 때문에? 걔들은 데리고 나가면 되잖아! 너 따르는 놈들이랑!”
난 김동수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테이블에 놓인 고량주를 빈 잔에 따랐다.
한 잔 가득 고량주를 채운 뒤 단숨에 들이켰다.
고량주가 입안과 목구멍을 태우는 듯한 느낌이 식도를 타고 내렸다.
뒤이어 짙은 과일 향이 찡하고 코끝을 찔렀다.
난 입가에 묻은 고량주를 닦으며 김동수에게 외쳤다.
“당신이 이 업계에 있는 한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니까요.”
김동수가 눈을 끔뻑거린다.
“뭐?”
“김동수. 당신은 내가 어디에 있든 나나 유진이는 치워버리려고 할 겁니다. 방해되는 건 모조리 다 치우는 게 당신 같은 인간들 본성이니까. 그러니 밖에서 그 꼴을 당할 바에야 굴렁쇠에서 당신 힘을 꺾는 게 낫지. 안 그렇습니까?”
김동수가 날 빤히 노려본다.
“넌······ 어떻게 그렇게 날 잘 아냐?”
그거야 당연히 회귀해서지.
그 뒤 몇 가지 질문이 서로 오갔지만 확인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적어도 김동수는 회귀 전 내가 경험한 대로의 삶을 살아갈 게 틀림이 없었다.
그렇다면 철저히 그를 막아서야 했다.
내 연예인들을 지키고 굴렁쇠를 지키기 위해서.
난 이글대는 김동수의 눈빛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우린 같은 길 위로 올라왔습니다. 그러니까 끝까지 한번 가봅시다. 어차피 당신도 그걸 원하잖습니까. 안 그래요?”
김동수가 킥킥거리며 웃는다.
“큭큭큭. 가만히 보면 넌 나를 닮았어. 그래서 네가 싫으면서도 가끔은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쉽사리 대답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내 속에는 분명 여전히 김동수와 같은 일면이 남아있었으니까.
김동수는 더 이상 내게 시선을 두지 않고 고량주에 손을 대었다.
마치 오늘은 밤새도록 혼자 취하고 싶은 듯 말이다.
난 킥킥대는 김동수를 놓아둔 채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마도 이 길의 끝에는 둘 중 한 명만 남겠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 * *
달캉.
태성 반점의 문을 나온 난 골목 밖으로 나섰다.
최영호가 굳은 표정을 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도청기가 있었기에 안에서의 대화를 다 들은 까닭이다.
“흔들리지 말게. 김동수와 자네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니까.”
“······”
“그는 철저히 자기만을 생각하는 타입이지. 하지만 자네는 어떤가?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구할 친구가 있고 가족이 있지.”
순간 회귀하고서 그토록 바뀌고자 한 내 노력이 헛되지 않게 느껴졌다.
적어도 타인에게 이런 평가를 들을 정도로 바뀌었다 싶었으니까.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사실을 말했는데.”
그때 최영호 은행장이 찬 무전기가 울린다.
-죄송합니다. 영호 형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영호 형님. 여기도 흔적이 없습니다. 근처 CCTV도 차량 블랙박스도 없어서 추적은 힘들 것 같습니다.
-영호 형님. 이 인간 어디로 갔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골목길을 다 뒤졌는데도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다 다시 뒤져 봐!”
-예!
무전을 마친 최영호 은행장이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우리가 늦었나 보군.”
그 순간 난 조금 전 가게가 김동수가 자주 찾지 않던 곳이라는 걸 말했다.
“김 실장은 이런 초라한 중국집이라면 질색을 하곤 했습니다. 가게가 텅 비어있는 것도 이상하고요. 혹시 여기가 백 대령이 사람을 불러서 만나는 장소가 아닐까요?”
최영호 은행장이 눈을 번뜩인다.
“그거 말 되는군. 백 대령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낯선 장소를 꺼리는 법이지.”
최영호 은행장이 곧장 무전기를 들어 올린다.
“상식아. 태성 중화반점 주인이랑 주방장 연락처 당장 알아봐라.”
-예.
‘그러고 보니 아까 주방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난 가게 안에 들어갔을 때 김동수를 빼고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도 전했다.
최영호 은행장은 알겠다며 말한 뒤 이제 뒤는 자신들에게 맡기라며 가슴을 툭툭 쳤다.
“일단 가게 주인을 캐서 백 대령에 관해 알고 있는지 알아보겠네. 어떻게든 백 대령을 찾아낼 테니 걱정하지 말게.”
“부탁드립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난 그래도 그에게 부탁했다.
김동수를 막아내고 내 연예인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욕심 많은 인간들로 인해 누군가가 다치는 걸 막기 위해서.
저딴 인간들에게 내가 사는 세상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 * *
김동수와의 만남 이후로도 매니저로서의 일상은 하루하루 이어지고 있었다.
<신의 이름으로>의 마지막 촬영 당일.
수개월을 달려온 대단원의 막이 내려가고 있었다.
“커~엇!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김성운 PD가 오랜 행군의 끝을 알렸다.
배우와 스태프를 가리지 않고 손뼉치며 촬영의 끝을 축하하기 시작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주연 배우들에게 꽃다발이 주어지고 난 뒤 차수연 실장이 직접 유진이에게 꽃다발을 내민다.
“수고했어요. 유진 씨.”
“감사합니다.”
유진이가 꽃다발을 받으며 웃자 차수연 실장이 장난스레 말한다.
“아~ 우리 ‘만신 월아’ 님도 여기 계셨어야 했는데 아쉽다.”
“지금 제가 빨리 분장하고 올까요?”
“농담이에요. 농담.”
연이어 스태프들이 유진이에게 다가와 손을 맞잡고 악수를 청한다.
다음에도 작품을 함께 하고 싶다는 모습에 내가 칭찬을 받기라도 한 듯 기분이 들떴다.
하지만 마지막 촬영을 보러 온 이지연 작가의 표정이 편치 않았다.
작품이 끝나면 찾아오는 허탈감 때문에 그런가 싶어 진심으로 존경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덕분에 유진이가 주연급 배우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이지연 작가는 그런 게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다.
“그럼 뭘 해? 내 페르소나가 다른 작가랑 일하겠다는데!”
이지연 작가는 유진이와 함께 일하며 느꼈던 기쁨이 컸던 만큼 유진이를 놓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내 남자가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달아나면 이런 기분이려나? 아~ 진짜~ 이 기분. 어쩔 거야?”
이지연 작가의 혼잣말이 점점 세지기에 다급하게 말했다.
“작가님. 이건 어디까지나 작가님께서 새 작품을 준비하시는 동안 잠시 다른 작품에 나들이를 가는 것뿐입니다.”
이지연 작가가 날 힐끗 째려본다.
“유노~ 그거 바람피우는 남자들이 하는 말이랑 똑같은 거 알아?”
“그 그런가요?”
그때였다.
이지연 작가가 피식 웃는다.
“됐어. 그래도 유노 덕분에 큰 도움을 여러 번 받았으니까. 이번에는 봐줄게! 이번 작품 엎어진 거 일으켜주고 도와주고 끌어준 건 다 유노 덕이었으니까.”
이지연 작가는 작품과 이별하는 아쉬움을 이렇게 심술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노~ 내가 뭐라도 선물 하나 해주고 싶은데 바라는 거 있어? 차 바꿔줄까? ”
매니저가 작가에게 바랄 건 하나뿐이다.
“이번 ‘화란전’이 끝나고 나면 유진이를 주연으로 하는 드라마 한 편 부탁드립니다.”
순간 이지연 작가가 혀를 내두르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내가 졌다. 졌어. 선물을 해 달라는 게 자기 배우 작품이라고? 푸흡. 진짜 유노~는 천상~ 매니저야.”
이지연 작가는 알겠다며 대답한 뒤 더는 투덜대지 않고 촬영이 끝난 현장을 지긋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스태프들과 인사를 마친 유진이가 꽃다발을 들고 다가왔다.
“선생님! 언제 오셨었어요?”
“아까 너 마지막 씬 촬영할 때.”
유진이가 정겨운 표정으로 묻는다.
“저 어땠어요?”
“얘는 그걸 말이라고 묻니?”
이지연 작가에게 인정을 받자 유진이가 눈물을 똑똑 흘린다.
이지연 작가가 흐뭇한 표정으로 눈물을 닦아준다.
“왜 울어?”
“좋아서요······.”
“좋으면 웃어야지 울긴 왜 울어!”
이지연 작가는 뾰족한 목소리로 유진이를 다그쳤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눈가에 고인 눈물은 어찌하지 못했다.
그때 저 멀리에서 주저주저하던 주영인이 입술을 꽉 깨물고 다가왔다.
“작가님. 수고하셨습니다!”
이지연 작가가 고개를 돌린다.
“그래. 우리 영인이도 고생 많이 했어.”
유진이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에 잠깐 멈칫했지만 주영인은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 작품에서는 선생님을 만족시켜드리지 못한 거 같아요. 다음에는 꼭! 만족시켜드리도록 할게요.”
“그래. 너도 싹수가 없는 배우는 아니니까 기대하고 있을게.”
주영인은 이어서 유진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도 잘해보자. 정유진.”
이제는 주연이 된 유진이가 주영인의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꼭 부여잡고는 함께 한 드라마의 마무리를 짓고 있었다.
이제는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서로의 입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말이다.
“그래. 주영인.”
* * *
10월 15일.
<신의 이름으로> 24화 마지막 방송이 있는 날이자 유진이와 미소의 팬클럽 첫 번째 오프 미팅이 있는 날이다.
아침 일찍 회사로 출근한 나는 오늘 있을 유진이와 미소의 팬클럽 ‘유앤미’ 회원들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다.
“미성년자들 명단은 전부 다 공유하고 나한테도 줘.”
오늘 미성년자 팬클럽 회원은 매니저들이 각각 3명씩 책임지고 관리하기로 업무를 분담했다.
“팀장님도 맡으시게요?”
“어. 상봉이가 유진이랑 미소 데리러 갔잖아. 그동안은 내가 맡아야지.”
“알겠습니다.”
이영진은 오늘 참석하는 유앤미 미성년자 팬클럽 회원 중 정상봉이 담당할 세 사람의 명단을 보내왔다.
“김유연 이상은······ 그리고 차은솔?”
낯이 익은 이름이다.
난 급히 이영진이 보낸 까톡 메시지를 재차 확인했다.
[이영진 : 1. 차은솔(예성고3 청주) 연락처 010-2345-XXXX 엄마 연락처 010-2346-XXXX ······]
“맞네 차은솔!”
앞으로 3년 뒤.
차은솔은 업계 최정상급의 ‘홈마’가 된다.
그리고 그녀가 올리는 사진 한 장의 평균 조회수는 수십만을 너끈히 찍는다.
‘홈마’는 홈페이지 마스터의 준말인데 자신이 만든 홈페이지에 연예인의 사진과 동영상을 올리는 사람을 뜻하는 말.
그녀 한 사람을 영입하는 것만으로도 업계 최고의 홍보팀을 가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만 회귀 전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차은솔을 스카우트하는 데 실패를 했었다.
‘이번엔 반드시 잡고 만다!’
회귀 전과 달리.
넝쿨째 굴러들어온 기회를 놓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