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3화
343. 하루살이 2
하루가 <먹방의 대가>에서 받았던 한 회당 출연료는 2백5십만 원.
난 거기에 딱 20배를 곱해서 <먹방의 대가> 후속편의 출연료를 불렀다.
조응천 이사가 침을 꼴딱 삼키며 대답한다.
“저 정 팀장. 5천만 원은 너무 과한 거 아닌가?”
하지만 상황이 여기까지 온 이상 하루의 출연료를 낮출 생각은 없다.
하루의 차기작에 관한 문의가 쏟아지고 있는 이 타이밍이 바로 하루의 몸값을 올릴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하루를 출연시켜달라는 제의가 많이 오고 있어서······.”
유현지 PD가 눈을 끔뻑이며 불쌍한 표정을 짓는다.
“하루 출연료는 조금만 양보해주세요. 하루는 어리니까 앞으로도 얼마든지 출연료를 올릴 기회가 있잖아요?”
“죄송합니다. 현재 하루의 몸값은 두 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올라가 있습니다.”
도저히 내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유현지 PD가 승부수를 띄운다.
“하루 출연료를 올리게 되면 스태프들 수를 줄이는 수밖에 없는 거 아시죠? 요즘 경기도 어려운데 외주 제작사 쪽 애들 다 잘리면 너무 불쌍하지 않아요?”
뻔히 아는 협상 방법이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다.
협상이 깨지면 프리랜서들이 일자리를 잃는 것만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내 계산으로는 TVM은 충분히 하루의 출연료를 낼 여력이 있었다.
“현재 하루가 나오는 프로 앞뒤로 붙는 광고 단가가 연일 최고가를 갱신하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재방송 시청률도 높아서 재방송 광고 단가도 높게 잡으셨다던데요?”
유현지 PD가 움찔한다.
“그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아무리 방송국에서 쉬쉬해도 광고 회사에서 다 흘러나오는 거야 뻔한 일 아닙니까?”
하루가 나오는 드라마는 이상할 정도로 재방송 시청률이 높았다.
그래서 광고 단가가 다른 드라마보다 훨씬 높은데도 두 사람은 하루의 출연료를 깎으려 들고 있었다.
<먹방의 대가>로 수십억의 광고 추가 수입을 얻었으면서도 말이다.
데이터를 들이대며 반박하자 유현지 PD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감정적으로 나온다.
“진짜. 이렇게 빡빡하게 나올 거예요?”
난 당연한 말을 왜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거래는 원래 빡빡하게 하는 거 아닌가?
그때였다.
조응천 이사가 이대로 밀릴 수 없다는 듯 또 다른 수를 내민다.
“정 팀장. 쉽게 가자 쉽게. 편당 4천! 그게 한계야. 5천? 줄 수야 있지. 하지만 거기까지 가면 스태프들 페이컷 될 거야.”
끝까지 돈을 아끼시겠다?
그러면 나도 벼랑 끝 전술로 나갈 수밖에.
“알겠습니다. 그러면 SBC에서 이번에 만든다는 프로로 넘어갈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거긴 하루 출연료로 5천만 원 이상도 너끈히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SBC에서 새롭게 기획하는 밤 10시 드라마 <사연 포차>에서 주연을 맡아 달라는 제안이 들어와 있는 상태.
할머니를 도와 포차를 운영하는 손주 역할인데 할머니 역에 이사랑 배우가 거론되고 있었다.
순간 유현지 PD가 먼저 두 손을 들어 올린다.
“자 잠깐! 잠깐만!”
유현지 PD와 조응천 이사가 잠깐 기다려 달라며 대화를 시작한다.
잠시 후.
조응천 이사가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알았어. 이번에는 내가 잘못한 것도 있으니까 편당 5천에 맞춰줄게. 됐지?”
“그러면 외주 제작 스태프들 페이컷은요? 그분들 돈 빼서 하루 출연료 올려주시는 거라면 저 안 합니다.”
“알았대도? 제작비 20% 정도 더 늘리면 아슬아슬하게 맞춰지겠지.”
역시나 이 연예계라는 판은 재미있다.
보편적인 기준인 돈 권력 실력보다 인기가 갑인 세상이니까.
“자자. 그러면 어서 계약한 거 녹음부터 하자. 말 바뀌기 전에!”
내일 계약하면 내가 또 금액을 올릴 게 틀림없다며 두 사람은 날 채근했다.
‘딱 걸렸네.’
결국 유현지 PD와 난 서로 폰을 꺼내 녹음으로 구두 계약을 마쳤다.
계약을 마치고 감사하다고 말한 순간 유현지 PD가 웃으며 한 가지를 부탁한다.
“이제 하루는 저희 거니까 오늘 꼭 우승하세요.”
“예. PD님!”
인사를 마친 난 잠시나마 가벼운 발걸음으로 우리 팀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 * *
<먹방의 테이블> 결승전 1부가 시작되기까지 남은 시각은 2시간.
세트장 가장 앞에 위치한 요리용 테이블 옆에서 하루와 이진택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출연진 게스트 석에는 이제까지 경연에 참여하다 떨어진 스타들과 체리블라썸 TK 엔터의 이병준이 자신들의 인터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객석은 텅텅 비어 있었기에 모든 스태프들은 세트장에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잠시 후.
하루와 이진택의 인터뷰가 끝나자 조한일 PD가 잠시 쉬어가자며 외친다.
“10분만 쉬었다 가겠습니다. 휴식 후 체리블라썸이랑 이병준 씨 인터뷰부터 갈 테니까 매니저분들은 미리 준비시켜 주세요.”
난 곧장 게스트 석에서 기다리던 체리블라썸을 한데 모았다.
“인터뷰가 시작되면 세리 너한테 집중적으로 질문이 쏟아질 거야. 알지?”
세리는 어제 있었던 일 이야기가 나올 거라는 걸 알고 고개를 끄덕인다.
“하루랑은 소꿉친구고. 어제 그건 완전 거짓말이라고 말하면 되죠?”
“그래. 무슨 질문이 있든 간에 그렇게 대답하면 돼. 낚이지 말고.”
“넵!”
“그리고 너무 짓궂은 질문이다 싶으면 연희랑 은비가 중간에서 커트하고. 알았지?”
우연희와 양은비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네.”
잠시 후.
게스트 석으로 돌아간 체리블라썸 멤버들에게 마이크가 주어졌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역시나 진행자는 세리를 집중 타깃으로 삼고 위험한 질문을 난사했다.
하지만 세리는 완벽한 철벽 방어로 인터뷰를 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세리 씨와 하루 씨는 그냥 친구다 이거죠? 방송용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아닌가요?”
“그냥 친구가 아니라 진짜 친한 친구요. 아기 때부터 같이 자랐으니까요.”
세리는 어떠한 질문에도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마지막으로는 역습까지 한다.
“그리고 할머니가 용한 무속인에게 점을 봤는데 전 26살까지는 연애하면 안 된댔어요!”
세리의 발언에 현장이 웅성거린다.
“26살이면······ 앞으로 10년이네요?”
“네. 그때까지는 팬들 말고는 누구도 사랑할 생각 없어요. 사랑해요~ 벛꽃패밀리!”
세리가 인터뷰 화면을 보며 작은 손가락 하트를 연신 날려댄다.
팬클럽에게 보내는 마음이라면서 말이다.
세리를 낚기 위해 온갖 질문을 던지던 김진태 MC도 결국엔 두손 두발을 다 들 수밖에 없었다.
* * *
오후 4시.
경연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1시간이다.
하지만 지금 내 관심은 하루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하루의 아빠가 이곳에 나타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50명이나 현장 추첨이라니······.’
오늘 경연을 관람하기 위해 들어오는 방청객 100명 중 절반이 현장 추첨으로 입장하기에 안심할 수 없었다.
그때 이수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침 무렵 하루의 엄마가 있다는 수원 요양병원으로 사람을 보냈는데 이제야 결과가 나온 모양이다.
난 잠시 스튜디오 밖으로 나가서 이수찬의 전화를 받았다.
“찾았어?”
-예. 나탈리아 씨가 아직 그 병원에 근무하는 게 맞답니다. 요양보호사로 지낸다네요.
드디어 하루의 엄마를 찾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후우~ 그 그러면 만났어?”
-아뇨. 야간조 근무라 아직 출근을 안 했다고 합니다.
하루의 엄마가 근무하는 요양병원은 경호 시설이 워낙 철저해 안으로 들어가지조차 못했단다.
대신 면회를 마치고 나오는 방문객에게 물어서 하루의 엄마가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인했단다.
병원에서 나탈리아가 아닌 ‘나영희’라는 이름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어. 그러면 하루 엄마가 출근하면 나한테 바로 전화해 줘. 할 말이 있으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고맙다. 내가 늘 신세를 지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희가 도움받은 게 얼만데······.
전화를 탁 끊고 나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운명의 장난인지.
하루의 결승전 날에 하루의 엄마도 찾을 수가 있었다.
“다행이다······.”
덕분에 만약 하루의 아빠가 하루를 데려가겠다고 난리 피운다고 해도 또 한 명의 친권자인 하루의 엄마를 설득할 수 있다면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있었다.
그사이 시간은 흘러 오후 4시 20분이 되었다.
“일반 방청객들 입장시키세요.”
조한일 PD가 무선 인터콤으로 지시를 내리자 2층 방청객석 입구의 문이 열린다.
우르르.
미리 추첨한 50명의 방청객과 현장 추첨 방청객이 들어온다.
주로 가족들을 뽑았는지 최소 구성이 3명 이상이다.
그런데 줄을 지어 들어오던 가족들 사이로 홀로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운명이라 이건가?’
현장 입구에서 막아달라고 말했지만 하루의 아빠 이형문이 운명의 장난처럼 결국 이곳에 나타나고야 말았다.
위치는 오른쪽 라인 맨 끝 열.
그를 보자마자 난 곧장 매니저들을 불러 모았다.
“하루 아빠가 현장에 들어왔습니다.”
순간 이영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는다.
“예? AD한테 사진 보여주면서 절대 들어오면 안 된다고 했는데요?”
방송 현장은 너무도 바쁘게 움직이기에 매니저들이 부탁한 일이 종종 씹히는 게 태반이다.
이런 일로 잘잘못을 따져봤자 우리 입만 아프다.
“밖에서 담당하던 이 AD가 실수라도 했나 보지.”
이영진이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제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 건데.”
“됐어.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관람객 석 오른쪽 끝 열 맨 위. 검은 야구모자를 쓴 남자가 하루의 아빠야. 다들 명심하고 혹시라도 하루의 곁에는 못 다가가게 막아야 해. 알지?”
“예.”
하루의 아빠가 하루를 어떻게 대했는지 알기에 매니저들의 안색이 흐려진다.
“정신 차려. 그러다가 하루가 알면 어쩌려고?”
“예 팀장님.”
“일단 여유가 조금 있으니까 내가 지금 바로 객석에 가서 저 인간과 만나 볼 거야. 내 선에서 처리할 생각인데 혹시 돌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 각자 위치들 잘 지키고 있어.”
난 지시를 받고 각자 자리로 돌아가려는 매니저들에게 한 가지 희망적인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지금 막 하루 엄마 찾았대. 그러니까 오늘 이 무대만 막으면 돼.”
그제야 매니저들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정말입니까?”
“이야. 일이 이렇게도 풀리네요.”
“하루 엄마만 있으면 다 끝난 거 아닙니까?”
“그래. 그래도 방심하지 말고 다들 끝까지 긴장하자.”
매니저들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순간 난 곧장 1층 스튜디오 출입구를 빠져나와 2층 방청객석으로 향했다.
* * *
관계자용 패찰을 목에 걸고 있었기에 날 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방청객 석의 입구는 스튜디오의 2층.
스튜디오 2층의 복도에도 스태프들이 빠르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짧게 한숨을 쉰 뒤 2층 방청객 석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빛이 새어 들어오지 않게 쳐둔 검은 암막을 헤친 뒤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본 대로 2층 객석 가장 외진 자리에 검은 모자를 쓴 남자가 앉아 있다.
하루의 아빠.
이형문이다.
난 그의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
“형문 씨. 잠시 밖에서 이야기 좀 하실까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허억!”
이형문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소란 피우지 말고······ 밖에서 이야기하시죠.”
이형문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럽시다.”
이형문과 방청석 밖으로 나온 난 그에게 대뜸 물었다.
“대체 여긴 왜 왔습니까?”
이형문이 침을 꼴딱 삼키며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다.
“오늘 하루 결승전이라서요. 알코올 중독도 해결해서 얼굴이나 좀 보려고 찾아왔습니다. 저 이제 아무 문제 없습니다. 진짜예요!”
“다 나으셨다고요?”
“예. 그냥 얼굴만 보고 갈 겁니다. 내 새끼 얼마나 컸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경연이 끝나면 사라지겠다고 했지만 난 그를 믿을 수 없었다.
회귀 전에도 내가 가장 골치 아팠던 배우들이 바로 술과 마약에 중독되었던 부류였다.
약물은 사람의 의지력을 약하게 만들고 무너뜨리게 된다.
더군다나 이형문의 태도도 수상했다.
‘너무 멀쩡해.’
중독을 해결하고 나온 사람들은 알코올이 빠진 부작용으로 약한 모습을 보인다.
무기력하고 우울해하는 게 주 증상.
하지만 내 눈앞의 이형문은 너무도 쌩쌩했다.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마셨나 보군.’
아주 작게 한 잔.
그것만 하더라도 가뭄에 단비처럼 일시적으로 온몸의 기운을 되찾게 해준다.
그러다가 한 잔이 두 잔이 되다 결국에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
내가 이런 경우를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닌데 속을 리가 있나.
“하루를 진짜 생각하시면 이쯤에서 돌아가세요. 하루 앞에 나타나면 배상금을 물겠다는 그 계약. 잊지 않으셨겠죠?”
그때였다.
이제껏 이형문이 간절했던 표정을 싹 지우고는 본색을 드러낸다.
“XX······ 꼭 그렇게 해야겠어?”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을 한두 번 본 게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계약한 걸 잊었습니까? 계약금 받고서 다시는 하루 앞에 안 나타나기로 했잖습니까!”
“아~ 그거? 재활원에서 만난 변호사가 조언해 주더라고. 강요에 의한 계약은 무효라고 하던데?”
“어이가 없네. 재활원에서 만난 변호사의 말을 믿는다고요?”
이형문이 키득거리며 웃는다.
“당연히 제정신이지. 그래도 걱정하지 마. 나도 괜한 소란 일으키기 싫으니까.”
“그러면 바라는 게 뭡니까?”
“내가 하루 친아버지인데 괜한 물의를 일으켜 돈 나올 구멍을 막겠어? 대신 수익의 딱 절반만 내 통장으로 넣어. 그러면 내가 입 꾹 닫을 테니까.”
이형문이 이겼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토닥인다.
하지만 하루의 엄마를 찾은 이상 내가 참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이미 소송도 준비 중이었고.
난 내 어깨를 토닥거리는 그의 손을 꽉 하고 붙잡았다.
그 순간 뼈마디가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우드득.
“아으윽!”
이형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고 그동안 참았던 분노를 터트리며 말했다.
“지X하고~ 자빠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