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6화
336. 그림자 3
양평 촬영 현장.
유진이에게 보호대를 씌워 또 한 번의 위기를 넘겼다.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은 난 차에서 내린 유진이에게 물었다.
“불편하진 않아?”
유진이가 양손을 이리저리 들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네. 생각보다 괜찮네요. 티도 안 나고 편하고. 어디서 이런 걸 구했어요?”
“파는 데 있어. 그나저나 괜찮으면 바로 촬영 준비하자.”
난 이영진에게 유진이를 맡긴 후 급히 차수연 실장에게 달려갔다.
잠시 후 촬영이 이뤄질 신당 세트장 앞.
차수연 실장은 천막 아래 혼자서 흐트러진 소품들과 큐시트 정리를 하고 있었다.
“실장님. 바쁘세요?”
“어. 정 팀장님. 여긴 웬일이에요?”
“아 뭐 좀 여쭤보려고요.”
난 유진이가 다칠까 걱정되니 소품 칼을 다시 확인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차수연 실장이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그거 잘못 만지면 소품팀에서 난리가 날 텐데······. 가짜 피 채워 넣기가 어려워서 실수로라도 피 새어 나오면 촬영 전부 다 딜레이 걸려요.”
소품 칼이 2개였는데 하나가 고장 난 상태란다.
“그러면 보기만 할게요.”
잠깐 고민하던 차수연 실장이 알겠다고 말한다.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잠시 후.
차수연 실장의 연락을 받은 소품팀 막내 김영주가 쟁반에 칼을 받쳐 가지고 왔다.
손잡이에 넣어둔 가짜 피가 혹시라도 흘러내릴까 조심하고 있었다.
“실장님. 여기요. 칼 가지고 왔어요.”
“잠시만.”
차수연 실장이 내게 확인해 보라 말한다.
손을 대지 않고 자세히 본 순간 뭉툭해야 하는 칼날이 날카롭게 세워진 게 보인다.
“실장님. 이거 날을 누가 갈아 놨는데요?”
“예?”
“여기 좀 보세요.”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날을 갈아 놓았다.
“이 이게 뭐야?”
강화 플라스틱으로 만든 칼날이라 이대로 칼을 휘두르면 다치고도 남을 거다.
더군다나 자세히 보니 가짜 피가 뿜어져 나올 미세 구멍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오기 전에 손잡이를 닦았는지 지문을 채취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고.
칼의 상태를 확인한 나는 내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 덥석 소품 칼을 잡았다.
“어?”
김영주와 차수연 실장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이거. 오늘 쓸 칼이 아니네요. 무게도 살짝 무겁고요.”
외관은 같은 플라스틱 칼이지만 칼날의 경도가 달라서인지 미세하게 무거웠다.
“그리고······ 이거 보세요.”
난 곧바로 테이블 위에 있는 김밥 보관용 스티로폼 박스에 칼날을 꽂았다.
푸욱!
플라스틱 칼이지만 칼날이 휘어지거나 안으로 들어가기는커녕 5cm쯤 되는 단단한 스티로폼 뚜껑을 그대로 관통해버렸다.
“응? 이 이거 왜 이래?”
놀란 차수연 실장이 당황해 소품팀 막내 김영주를 쳐다본다.
소품팀 김영주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손을 젓는다.
“저 저 아니예요! 실장님! 소품 팀장님이 그냥 가져가라고 해서 들고 온 거예요. 진짜예요!”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한 상황이었기에 김영주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차수연 실장도 흥분을 가라앉히더니 손톱을 깨물며 고민을 시작했다.
“소품 팀장님이 이런 실수를 하실 분이 아닌데······.”
심각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이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만요. 촬영 중지 요청할게요.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나 역시 촬영을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위기의 뿌리를 뽑으려면 여기서 승부를 봐야 했다.
만약에 범인이 누군지를 못 밝혀낸다면 유진이가 더 위험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니까.
“실장님. 잠깐만요.”
칼을 들고 김성운 PD에게 가려던 차수연 실장이 발걸음을 멈췄다.
“왜요?”
“일단 촬영부터 하죠.”
“이 칼로요?”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난 얼어 있던 김영주에게 소품용 혈액 팩이 있냐 물었다.
“예. 4개 정도 비상으로 준비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거 2개 정도만 좀 가져다주실래요? 아무도 모르게요.”
김영주가 눈을 끔뻑인다.
“지금요?”
차수연 실장이 김영주를 닦달했다.
“지금 바로 가지고 와요 영주 씨.”
“예. 예. 실장님.”
소품팀 김영주가 차수연 실장의 눈치를 보다 급히 소품팀 쪽으로 뛰어간다.
김영주가 사라지자 차수연 실장이 걱정하는 눈빛으로 묻는다.
“어쩌려고요?”
“촬영용 소품이 칼로 바뀐 게 실수가 아니면 어쩌실 겁니까?”
“실수가 아니라고요?”
“안 그래도 오늘 스토커가 유진이를 노린다는 소문 때문에 매니저들을 다 끌고 온 겁니다.”
차수연 실장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러면 더더욱 촬영을 멈춰야죠. 유진 씨가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유진이한테는 미리 보호대를 채웠습니다.”
“예?”
“혹시나 몰라서요.”
차수연 실장이 안도의 한숨을 쉰다.
“다행이네요.”
“하여튼 소품을 바꿔치기한 누군가는 유진이가 칼에 찔리는 걸 기대하고 있을 겁니다. 그때를 노려 범인을 찾아볼까 합니다.”
잠깐 고민하던 차수연 실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요. 그러면 PD님께도 협조를 구해 볼게요.”
유진이가 칼에 찔리는 장면은 가슴을 찌르는 척하면서 겨드랑이 아래의 틈을 찌르게 된다.
그러니 겨드랑이 아래에 혈액 팩을 붙여둔다면 칼날이 손잡이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도 피가 뿜어져 나오게 할 수 있었다.
그 순간 김영주가 숨을 헐떡이며 혈액 팩을 가져왔다.
“티 팀장님 여기요. 아무한테도 안 들켰어요. 진짜예요.”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입조심 하세요. 혹 이 일이 새 나가면 영주 씨가 제일 의심 사는 거 알죠?”
“네!”
김영주가 고개를 미친 듯 끄덕거렸다.
“그러면 티 내지 말고 저 따라오세요.”
“예. 팀장님.”
난 혈액 팩을 받아 품속으로 숨긴 뒤 김영주와 난 함께 촬영장소로 향했다.
* * *
‘만신 월아’ 분장을 한 유진이와 이병준이 이야기를 나누며 소품 칼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영주가 칼을 가져오자 이병준이 조심스레 쟁반에서 받아들었다.
누르면 피가 나오는 특수 장비로 생각한 까닭이다.
“제발 한 방에 끝내야 하는데······.”
이병준은 NG라도 나면 피 묻은 의상을 갈아입고 다시 칼에 피를 채우느라 촬영에 딜레이가 생길까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병준은 진짜 아니군.’
안심한 난 조용히 이병준에게 다가갔다.
“병준 씨. 놀라지 말고 티 내지 말고 제 말만 들으세요.”
이병준이 움찔하더니 금세 웃음을 짓는다.
“왜 갑자기 분위기를 잡고 그럽니까?”
“그 칼. 특수 처리된 소품이 아닙니다. 자세히 보세요. 날이 서 있는 거 보이시죠?”
이병준이 힐끗 칼날을 쳐다보더니 문제를 알아차렸다.
“엑? 뭐 뭡니까? 이거?”
“표정 관리하세요. 누군가 칼을 바꿔치기했습니다.”
이병준이 애써 당황한 티를 숨겼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까지는 멈추지 못했다.
“그 그러면 일단 촬영 중단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뇨. 유진이에게는 미리 보호대를 착용시켰습니다. 누군지 범인은 잡아야 할 것 같아서요. 지금 못 잡으면 또 이런 장난질을 할 겁니다.”
난 이어서 유진이를 불렀다.
“유노 오빠. 왜요?”
“유진아. 병준 씨가 들고 있는 저 칼. 칼날이 안으로 안 들어가.”
“예?”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소품을 다른 거로 바꿔놨어. 강화 플라스틱 칼인데 날도 벼려져 있더라고.”
유진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는다.
“그럼 어떻게 해요? 촬영 못 해요?”
“아냐. 어차피 보호대를 입고 있으니 합만 맞추면 다칠 일은 없을 거야. 일단 이대로 가 보자.”
“이대로요?”
“어. 그리고 지금 범인을 잡으려고 다들 대기 중이야.”
더 큰 위험을 막기 위한 거라지만 액션 합을 맞추는 위험한 연기를 해야 하는 당사자는 내가 아니라 유진이다.
그래서 난 유진이에게 협조를 구했다.
“지금 범인을 잡지 못하면 또 수작을 부릴 것 같아서 그래. 물론 네가 무섭다면 여기서 촬영 중지할게.”
가만히 듣고 있던 유진이가 고개를 젓는다.
“아뇨. 오히려 긴장도 되고 좋은데요? 그리고 보호대도 착용했잖아요.”
하여튼 얘도 참 강심장이다.
“알았어. 그러면 부탁할게. 그리고 우리만 믿어.”
“네 오빠.”
“그러면 잠깐만 기다려 봐.”
난 전의를 불태우는 유진이를 뒤로하고 김성운 PD에게 달려갔다.
“PD님. 메이크업 수정 좀 하고 갈 여유 있을까요?”
김성운 PD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곁에 있는 차수연 실장이 작게 손가락으로 ‘O’ 자를 그리는 걸 보니 이야기가 끝났다는 거다.
“2분 뒤에 슛 들어갈 겁니다. 빨리하세요.”
난 유진이를 부른 뒤 겨드랑이 아래에 혈액 팩을 붙이기 위해 차로 데려갔다.
유진이는 양소리 대리의 도움을 받아 눈 깜짝할 사이 혈액 팩을 달고 나왔다.
“범인 꼭 잡으세요.”
“걱정하지 마.”
유진이가 두 팔을 옆구리에 붙인 채 조심조심 촬영장으로 향했다.
* * *
매니저들 모두는 폰으로 유진이를 찍는 척하며 현장을 녹화하기 시작했다.
혼자만 다른 행동을 할지 모르는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김성운 PD가 마이크를 잡는다.
“자. 이번 씬은 NG가 나면 딜레이가 엄청~ 걸리니까 한 방에 가겠습니다. 배우들 준비되면 사인 주세요.”
신당으로 쓰는 집 마루에 앉아 있는 ‘만신 월아’가 한숨을 내쉬며 몰입한다.
이내 가볍게 손짓하며 준비되었단 신호를 보내자 김성운 PD가 외쳤다.
“레디~ 액션!”
슛이 들어간 순간 ‘만신 월아’가 긴 한숨을 내쉰다.
『죽기에는 너무 좋은 날씨구나······.』
하늘을 보고 처연한 표정을 짓던 ‘만신 월아’가 폰을 살포시 쥐어 든다.
이어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꾹꾹 누른다.
뚜르르르.
스피커 폰으로 되어 벨 소리가 다 들리고 있다.
하지만 상대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마지막 통화를 직감이라도 한 듯 ‘만신 월아’가 조용히 음성 메시지를 남기기 시작한다.
『우리 딸. 술 그만 먹고 끼니 좀 잘 챙겨. 김치 보내뒀으니 너무 익기 전에 냉장고에 꼭 넣고~. 알았지?』
말을 마친 ‘만신 월아’가 전화를 끊는다.
그녀가 회한 가득한 눈빛으로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유언이라도 한마디 남기려 했더니 잔소리밖에 할 말이 없네. 이러니 청명이가 날 꺼린 게지. 한심하고 또 한심하구나.』
잠시 후.
‘만신 월아’는 눈물을 닦고 신당에 있는 마당 너머 대문 쪽을 쳐다본다.
『뭐 하시는가? 안 들어오시고?』
이병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신당 입구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에 문제의 칼이 들려 있었다.
『따님에게 작별 인사를 하시는 것 같기에 기다렸지.』
『다 들었으니 알 거다. 내 딸에게는 네놈에 관해 한마디도 안 했으니 그 애는 건드리지 마!』
이병준이 킥킥대며 칼을 들어 올린다.
『당신이 이 칼에 찔리고 신음 소리 한 번 안 내고 참는다면 그 정도 소원은 들어줄 수도 있지.』
극 중 사사건건 자신을 방해하는 ‘청명’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이코패스는 ‘만신 월아’를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만신 월아’가 이병준을 노려보며 말한다.
『그렇다면 네 몸에 깃든 그 귀신에게 맹세해라! 네 요구를 들어주면 내 딸을 안 해치겠다고!』
이병준이 흠칫하더니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입맛을 다신다.
『괜히 만신 만신 하는 게 아니군. 좋아. 내 영혼을 넘긴 이놈에게도 맹세하지.』
그제야 안도한 ‘만신 월아’가 두 손을 펼친다.
『그럼. 어디 마음대로 해 보시게나.』
『좋아. 어디까지 참는가 보지. 딱 네 번 찌를 건데 바로는 죽지 않을 거니까 한번 잘 참아봐. 딸내미 지켜야지.』
이병준이 킥킥 웃으며 ‘만신 월아’에게 뚜벅뚜벅 걸어간다.
이병준이 칼을 천천히 들어 올리자 ‘만신 월아’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순간 나 역시 긴장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분명히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때였다.
모두가 긴장하고 있는 이 순간.
오직 단 한 명.
스태프들과 확연히 다른 표정을 보이는 여자 한 명이 내 눈에 들어왔다.
주영인의 열성 팬으로 유명한 스크립터 장시아.
그녀가 웃음을 가까스로 참고 있는 게 보였다.
‘당신! 나한테 뒤졌어!’
난 이를 꽉 깨문 채 장시아 스크립터를 응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