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44화
260화. 가주 계승식(1)
1805년 8월 1일.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인파가 검의 정원으로 몰리고 있었다. 룬칸델은 이례적으로 검의 정원을 완전히 개방해서 찾아오는 이는 누구든 가주 계승식을 지켜볼 수 있게 만들었다.
이미 수일 전부터 칼론의 모든 여관이 가득 찼고, 검의 정원 앞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천막이 세워진 상태였다.
심지어 바멀 연합의 황금함대에 탑승한 채 상공에서 가주 계승식을 기다리는 군중들도 있었다. 모두 무작위 추첨을 통해 선정된 일반인들이었다.
“판다, 장어, 말린 장어, 장어 꼬치…!”
“자자, 금팽이 상단 신상품 체험장은 저쪽 천막입니다! 오늘은 전 품목 특별히 반값으로 할인, 다시는 없을 파격 기회!”
금팽이 상단은 이번 행사에서 상업행위를 할 수 있는 단독 권리를 얻어 매일 영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으, 야! 너네 1번 행수 어디 있어. 어, 그래 여기 있네. 이 자식들, 내가 진 자기 얼굴 들어가는 광고판은 제일 잘 그려진 걸로 직접 골라준다고 했지? 누가 이런 그림 쓰래?”
“으앗 노다브 사르생이다 튀어!”
“튀긴 어딜 튀어 여기 튈 곳이 어디 있냐?”
콩!
산드라가 가볍게 팽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옆에 있던 어둠불꽃도 괜히 한 대 함께 맞았다.
“왜, 나는. 때려. 왜…? 나는, 판다, 장어.”
“연대책임이라는 것이지.”
“아, 아.”
산드라는 씨익 웃으며 어둠불꽃이 깜찍해 죽겠다는 듯 그의 둥그런 머리를 깨물고는 장어 꼬치를 하나 빼앗아 입에 넣었다. 팽이는 그런 산드라의 정강이에 발길질을 하려다 헤도를 보곤 흠칫하며 헛기침을 뱉었다.
“아가씨, 영업 방해는 이쯤 하시지요.”
“하지만 광고판에 있는 진 씨 얼굴이 아쉬워. 이것보다 훨씬 잘생겼는데, 하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날에 이런 그림을.”
“그래도 이 정도면 제 눈에는 훌륭합니다. 화가의 신 케이탐 님의 작품이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군요.”
세상이 복원되며 신들은 대부분 실체를 잃었다. 그러나 케이탐이나 올망고처럼 무해한 신들은 여전히 사람들의 사회, 혹은 자연에 섞여 살아가고 있었다.
헤도는 턱을 어루만지며 금팽이 상단의 천막마다 붙어 있는 거대한 광고판들을 바라보았다.
진, 베라딘, 단테, 시리스, 발레리아, 산드라, 엔야, 카시미르 등… 금팽이 상단은 바멀 연합의 주축이라 할 만한 인물들을 죄다 공짜 모델로 사용하고 있었다.
“제 그림은 아주 마음에 드는군요. 남자의 육체미, 멋을 아는 수컷의 향수, 사르생5.”
“푸하하, 멋을 아는 수컷이래. 징그러워서 진짜.”
“많은 남성들이 실제로 제 패션을 따라 하고 있습니다, 아가씨. 이른바 헤도 열풍이라고 하더군요.”
“예, 예, 헤도 사르생 씨. 그러시겠죠.”
사르생, 헤도와 산드라는 지플의 성을 버리고 둘만의 새로운 이름을 갖기로 결정했다. 헤도 사르생, 산드라 사르생. 다만 두 사람은 늘 베라딘을 돕는 중이고, 그들은 여전히 가족이었다.
헤도는 광고판에 새겨진 동료들의 모습을 보며 잠시 감회에 잠겼다.
짐승처럼 흑해를 전전하던 날들, 산드라를 만난 지플의 제12실험동, 2마탑, 그리고 바멀 연합과… 세계를 파괴한 마신대와의 마지막 전투까지.
그 모든 순간이 꿈처럼 흘러 마침내 이 시대에 다다랐다. 어떤 끔찍한 전쟁도 없는, 평화의 시대에.
별안간 누군가 헤도에게 팔짱을 끼며 가까이 붙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나? 길고양이. 산드라 아가씨도 안녕.”
“안녕 바네사 경!”
산드라는 헤도와 결혼한 바네사에게 유달리 호의를 보였다. 대체 이게 앞으로 누구랑 살 수 있을까, 헤도와 산드라는 늘 서로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해왔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아, 바네사. 그냥 옛 생각을 좀 하고 있었소.”
“옛 생각?”
“지플을 배신하고 바멀 연합에 들어가기로 했을 때… 나는 진에게 이렇게 말했었지. 티칸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난 주저하지 않고 아가씨를 데리고 또 떠나겠다고.”
“그때 길고양이가 떠났으면 지금 이런 풍경은 볼 수 없었겠군. 마신대를 이길 수 없었을 테니까.”
“그 정도인가?”
“그 전투에서 싸웠던 이들이 한 명이라도 부족했다면, 우린 분명히 졌을 거다. 약하든 강하든, 창성이든 아니든. 모두가 매 순간 기적을 일으키며 싸운 덕에 소가주께서 유산을 얻은 것이지.”
“뭐, 헤도가 잘했다는 걸 인정하긴 싫지만 바네사 경 말이 맞지.”
“산드라도 그때 온몸이 불타는 고통을 견디면서 계속 사람들을 구했다지?”
“진 자기를 위해서라면야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으니까, 뭐.”
“흠, 이제 슬슬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게 좋을 텐데.”
“바네사는 다 좋은데 가끔 이럴 때 내 성질을 긁더라. 난 진 씨 아니면 누구도 안 만나. 빨간 머리… 언제든 빼앗아 주마. 크하핫…!”
헤도와 바네사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다른 무리도 고개를 젓고 있었다.
“부바르여, 너는 이 몸이 좋아도 저렇게는 되지 말도록.”
“부디 아이나스 님도.”
비슈켈은 서로 좋다고 시시덕거리는 부바르와 아이나스를 보며 그들을 어디 둘만의 섬 같은 곳으로 영원히 보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매일 느끼는 충동이었다.
킨젤로.
이제 공식적으로 킨젤로라는 3류 테러 단체는 사라졌다. 구 킨젤로의 단원들은 이제 바멀 연합 소속으로 주로 해난 구조나 산불 진화 같은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진 공자가 드디어 가주가 되네요, 오라버니. 마지막 연회 때 오라버니와의 대련 후 쓰러진 진 공자의 모습을 본 게 엊그제 같은데.”
마르지엘라의 말에 비슈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네가 진 경이 자기보다 약한 우리의 친구를 괴롭혔다며 복수를 해달라고 했었지… 그때 나는 속으로 이런 말을 했었다.”
“어떤?”
“부바르는 진보다 약자도 아니고, 우리의 친구는 더더욱 아니다.”
“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니. 다만 가까이서 자주 보고 싶지는 않은 친구일 뿐이지.”
“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하나.”
“오셨어요 단장님?”
오르갈과 마족들, 수인들이 남매의 곁으로 다가왔다.
“옛날 일을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진 경이 처음으로 연회에 나타난 날을.”
“그때 나는 그 자리에 없었으니 아쉽군. 이런 거물이 되기 전의 새파란 진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오르갈은 이제 광증이 가라앉아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그는 다중세계의 오류로 시작된 그 수많은 전쟁이 마침내 끝났음에 매일 감사하며 지내는 중이었다.
태양신, 완전한 세계, 그딴 건 이제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세상을 뜻대로 움직이려는 초월적 존재들이 모조리 자취를 감춘 지금이야말로, 창성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지금이야말로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세계였다.
“…뒤늦게라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게 무엇인지 깨달았고, 운이 좋게도 진과 동료들 덕분에 얻게 되었으니. 나는 복 받은 사람이로군. 안 그런가, 제피린.”
“뭐, 전 지금도 진 경이 조금 얄밉기는 하지만. 맞는 말이죠.”
“얄밉긴 뭐가 얄밉다는 거냐, 감히 우리 형제한테. 미쳤어?”
테토였다. 막 금팽이 상단의 신제품을 체험한 명왕족들이 구 킨젤로의 단원들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아, 무서워서 말도 못 하겠네요. 좀 얄미울 수도 있죠? 나름 전우라면 전우인데, 그 정도 말도 못 하나?”
“그건 그래 테토, 내가 저번에 쟤랑 술 마시면서 들어보니까 나라도 얄미울 것 같긴 했어.”
“나도 전우끼리 그냥 장난 좀 친 거지, 크크. 제피린 쫄았냐?”
“쫄기는… 투왕 최약체 주제에 잘도 그런 말을 하시네.”
“이게!”
“그만해라, 테토 형제.”
“넵, 투신 형제.”
“반, 안채로 가던 길인가?”
“그래, 시론을 만나러. 같이 갈 텐가?”
“좋지. 너흰 둘러보고 있어라.”
오르갈과 반 두 사람은 무리에서 떨어져 안채로 걸음을 옮겼다.
“왔군. 반, 오르갈.”
시론, 반, 탈라리스, 오르갈, 아메리스, 엘티엇, 루나, 카시미르, 퀴칸텔, 오울, 단테, 베라딘, 라니 등.
안채 응접실에는 시대의 어른, 혹은 거인이라 할 만한 이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즈도크와 제트가 분주히 그들의 술잔과 찻잔, 리트라 제과점의 다과를 채우며 수발을 들었다.
“반 대나으리 자리는 이쪽입니다요!”
[오르갈 님 자리는 여기입니다요!]
시론은 자리에 앉은 이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든든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룬칸델, 지플, 킨젤로. 그리고 비궁과 고대의 패자들, 제국과 성국, 무명까지 한자리에 앉아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다과를 즐기는 시대라….”
“아쉬운가? 싸움이 없어서.”
“그대는 싸움이 없어서 아쉬운가? 반.”
“아니.”
“그러면서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군.”
“아무리 짧아도 앞으로 백 년은 이런 태평성대가 지속될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 길지도 모르지. 우리 중엔 앞으로 천 년 이상도 더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어렵게 얻은 이 시대를 지키려는 마음은 분명 변치 않을 테니.”
“이것 참… 여기 있는 사람 중엔 나와 퀴칸텔 둘뿐인데, 너희가 다 땅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우리끼리 계속 지키라는 건가. 후후, 물론 그렇게 해야지. 우리 동료 중 오래 사는 존재들은 여기보다 다른 곳에 더 많으니까. 또 다른 켈리악이 탄생하는 일만큼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은 변치 않는다. 적어도 그 싸움을 겪은 이들은 그럴 것이다. 백 년이 지나도, 천 년이 지나도 죽지 않고 그 싸움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터였다.
“물론 영원이라고 할 수는 없을 테지만, 유사 이래 사람들이 이런 평화를 맞이한 건 처음이 맞지. 우리 비궁도 당분간은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를 즐길 거다. 적어도 나는 이제 복잡하고 힘든 꼴을 볼 일이 없겠지. 흐응, 우리 딸은 모르겠지만. 아니, 우리 아이들 시대까지는 분명 유지될 평화야.”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탈라리스.”
“그럼 이 좋은 날에 내가 좋지 슬프겠어? 쳇, 사위로 키우고 싶었는데 결국 룬칸델의 가주가 되는 건 속상하네.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진에게 검을 물려줘, 시론.”
그 말에 시론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답했다.
“걱정은 없다. 그저 조금 아쉬울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