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2화
322. 박선재 2
박선재 조연출이 아르바이트하는 편의점.
박선재 조연출이 주민증을 보여 달라고 하자 파란 모자를 쓴 남학생이 씩씩대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편의점 밖에서 그 광경을 본 난 급히 문을 열고 들어가 파란 모자의 손을 붙잡았다.
파란 모자를 쓴 고등학생이 손을 붙잡힌 채 악을 써댄다.
“뭐야! 이거 안 놔?”
덩치는 꽤 크긴 했지만 일반인 정도의 근력 그것도 아직 고등학생 정도로는 내 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자기 친구를 돕겠다며 곁에 있던 붉은 모자 고등학생이 내게 다가온다.
“씨X! 그 손 안 놔?”
난 그 틈을 타 푸른 모자 남학생의 손을 내 앞으로 잡아당겼다.
“어. 어?”
푸른 모자 남학생이 힘없이 끌려와 내 앞을 가렸다.
그 결과 달려오던 붉은 모자 남학생과 푸른 모자 남학생의 입이 충돌해 버렸다.
“으으읍!”
“읍!”
졸지에 입을 맞춘 두 남학생이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악! 뭐야!”
“XXX!!”
“웁쓰. 미안. 지금 건 고의가 아니야.”
순간 그 광경을 본 여자 고등학생이 빽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도망쳐 버렸다.
입술을 닦던 푸른 모자 남학생이 증오가 가득한 표정으로 외친다.
“씨X! 내가 오늘 넌 확실히 조진다.”
하지만 난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들어오기 전에 경찰 불렀는데 괜찮겠냐? 아 참고로. 밖에 있던 네 일행들은 다 튀고 없다.”
눈앞의 상대가 고등학생이란 것을 안 건 편의점에 들어오기 전 밖에서 기다리던 교복을 입은 일행의 대화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잠깐 쳐다본 뒤 슬슬 뒷걸음질을 친다.
“X새꺄! 뒤통수 조심해라!”
두 사람은 조잡한 욕설을 내뱉고는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어디서 대학 점퍼는 구해왔는지······.”
난 혀를 한번 찬 뒤 박선재 조연출을 향해 말했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아 예. 예. 그런데 어떻게 쟤들이 고등학생인 거 아셨어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선재 조연출은 깎듯이 고개를 숙인다.
“감사는요. 그리고 아까 밖에서 일행 두 명이 교복 입고 이야기하는 거 듣고 알았어요. 술 담배를 사려고 옷을 구했다더라고요.”
“아~”
그 순간 문을 짤랑이며 경찰들이 편의점으로 들어왔다.
덕분에 잠깐 박선재 조연출과의 대화가 끊겼다.
“신고하신 분~”
“예. 여기입니다.”
난 어떤 상황인지를 경찰에게 말했고 박선재 조연출은 편의점에 있는 CCTV를 보여주며 조금 전 상황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일단 수사는 하겠습니다. 근데 체포는 힘들 겁니다.”
특별한 피해가 없는 데다 상대가 미성년자라고 하자 경찰은 어차피 잡지 못할 거라며 귀찮다는 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살펴들 가세요.”
박선재 조연출이 인사를 하자 경찰이 손을 살짝 들어 올린다.
하지만 난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은 것에 실망해 고개도 까닥하지 않았다.
경찰들이 나간 후 박선재 조연출이 안도하며 말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난 그제야 박선재 조연출에게 명함을 건넸다.
“전 굴렁쇠 엔터의 정윤호 팀장이라고 합니다. 박선재 씨가 준비 중인 ‘지리산’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박선재 조연출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죄송합니다만 그 작품은 아직 제작사도 못 구한 작품입니다. 현재 배우 캐스팅 같은 건······ 엄두도 못 내고요.”
한없이 부끄러워하는 그에게 재차 말했다.
“아뇨. 전 지금 박 감독님께 투자와 배급사를 소개해드리려고 온 겁니다. 제작사는 직접 설립하시죠.”
박선재 조연출이 멍한 표정을 짓는다.
“예? 예? 정말이십니까?”
“예. 단 주연배우는 이태풍으로 하셔야 한다는 제약이 있지만 말입니다.”
“이 입봉? 이 이태풍?”
어찌나 놀랐는지 박선재 조연출은 뒤로 물러나다 의자에 발이 걸려 발라당 엉덩방아를 찧어 버렸다.
* * *
난 바닥에 쓰러진 박선재 조연출을 일으켜 세웠다.
“LT 엔터테인먼트가 박 감독님의 대본에 투자하고 배급도 할 예정입니다. 예산은 30억으로 잡고 있고요.”
“30······억!”
조건을 들은 박선재 조연출이 입만 뻐끔거린다.
“주연으로는 말씀드렸다시피 이태풍이 출연해야 하는 게 조건입니다. 그런데 혹 따로 생각해 두신 주연감이 있으신지······.”
꿀꺽!
박선재 조연출의 목울대가 요란하게 움직인다.
“아 아뇨! 없습니다! 그보다 이게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네요.”
“믿기 힘드시면 LT 엔터의 신종기 대표님과도 전화 통화를 해보시죠.”
12시가 넘었지만 신종기 대표는 조재경의 일로 아직 안 자고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박선재 조연출은 내가 전화를 걸려는 걸 막았다.
“잠시만요.”
“네?”
“제게 왜 이렇게 좋은 제안을 해주시는 겁니까? 영화사에 돌렸던 시나리오 초본은 급하게 돌린 원고라 이런 제안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난 그의 눈을 마주한 채 솔직히 말했다.
“실은 ‘천년 여우’의 조연출 시절에 당했던 일을 기사화하고 싶습니다.”
조재경에 관한 내부 고발을 해주는 대가로 영화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자 박선재 조연출이 움찔거린다.
잠시 고민에 빠졌던 그는 몇 번 심호흡을 한 뒤 정중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조건이라면 좀 힘들 것 같습니다.”
CK 그룹은 한국 극장의 40% 정도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니 조재경을 고발하는 순간 배급의 절반을 버려야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박선재 조연출이 내 제안을 거절하는 건 그렇게 당하고도 남에게 해를 끼칠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늘 도와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지금 제안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물러날 순 없었다.
난 여기에 오면서 생각한 방법을 한 가지 꺼내 들었다.
“그러지 마시고 이 제안. 여자 친구분과 상의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알고 있기로 여자 친구분께서 박 감독님이 입봉하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걸 어떻게······.”
현재 박선재 조연출의 여자 친구인 안유주는 박선재 조연출이 감독이 될 수 있게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녀에게 최소한 말을 하는 게 도리 아니겠냐는 말에 박선재 조연출이 고민에 빠졌다.
현재 시각 12시 15분.
결국 그는 마지 못해 전화를 들었다.
잠시 후.
15분이 지나자 여자 친구인 안유주가 숨이 턱에 걸리도록 헐떡이며 달려왔다.
“진짜야? 오빠 작품을 영화로 만들어 준다고? 누가?”
어깨까지 오는 단발에 정장을 입고 나타난 안유주는 이선 필름이라는 소형 영화사의 경리 겸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어.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박선재 조연출은 여자 친구에게 자신이 받은 조건을 설명했다.
영화를 제작해 주겠다는 제안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조재경을 저격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는 것을.
사정을 다 들은 안유주가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조재경 감독을 저격하면 오빠의 감독 인생은 끝이에요. 죄송하지만 거절해야겠어요.”
안유주가 딱 부러지게 말한다.
하지만 난 그녀의 미래를 알고 있기에 딱 잘라 말했다.
“지금 이선 필름에 다니시죠? 지금 그 회사. 재무 상태가 엉망인 걸로 압니다. 이대로 회사가 부도나면 두 분 생계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안유주가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다 알고 오셨군요.”
“예. 그리고 제가 하는 제안이 감독님에게 얼마나 리스크인지도 잘 압니다.”
박선재 조연출은 몰랐다는 듯한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유주야. 니네 회사가······ 망해?”
박선재 조연출이 흔들리는 순간 안유주가 똑 부러지게 말한다.
“오빠는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내가 서빙을 하든 공사판에 가서 일하든 뭘 해서라도 오빠가 입봉할 때까지 지원할 거니까.”
“아 아니 그래도······.”
“오빠! 지금 나 오빠 대리인으로서 이야기하는 중이니까 조금만 조용히 해줄래?”
안유주의 따끔한 질책에 박선재 조연출이 입을 닫았다.
하긴 10년을 서포트 해준 여친이면 죽는 날까지 업고 다녀도 부족하지.
난 그때부터 안유주를 설득하는 데 집중했다.
“유주 씨. 박선재 씨에게 정말 재능이 있다고 믿습니까?”
안유주가 기분이 상한다는 표정을 짓는다.
“당연하죠! 제가 영화사에서 경리로 일하지만 저도 원래는 작가예요. 우리 오빠만 한 스토리텔러는 대한민국 전체를 둘러봐도 손에 꼽을걸요? 혹시 저희가 없이 산다고 얕잡아 보시는 거라면 전 더 할 말 없구요.”
난 발끈한 안유주를 다독였다.
“그렇다면 박 감독님의 ‘지리산’ 시나리오에서 부족한 점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안유주가 당황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 그건······.”
“생각 안 나시죠?”
곰곰이 생각하던 안유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CK가 돈이 없어서? 박선재 씨가 현장을 몰라서? 설마 함께 일해 본 사람의 실력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 순간 안유주가 뭔가를 알아챘는지 눈을 끔뻑거린다.
“설마······.”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질투 때문입니다.”
안유주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박선재 조연출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천재 감독 조재경이 절 질투한다고요?”
* * *
회귀 전에 들었던 떠도는 소문 하나가 있었다.
천재 감독 조재경이 술자리에서 거하게 취하자 진짜 천재는 따로 있다고 푸념을 했다는 소문이다.
그리고 그 소문이 가리키는 주인공이 바로 흙수저 조연출 박선재였다.
물론 조재경의 방해로 박선재는 입봉조차 못 하게 되지만 말이다.
그때의 기억으로 말을 꺼내자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니 조재경 감독이 있는 한 절대 박선재 씨는 입봉 못 합니다. 그런데도 싸움을 피하기만 하실 겁니까?”
“······.”
“다 가지려 하지 마시고 반이라도 확실히 챙기십시오. 그러면 나머지 반은 제가 어떻게든 채워 드리겠습니다.”
박선재 조연출과 안유주가 서로를 바라본다.
내가 말해준 이유가 아니라면 <지리산>의 시나리오가 이렇게 반려되는 게 설명이 되진 않을 테니까.
그때였다.
박선재 조연출이 결심한 표정으로 편의점 계산대를 열고 나왔다.
“하겠습니다. 정 팀장님!”
안유주가 깜짝 놀라 외친다.
“오 오빠!”
“유주야. 붙잡자 이 기회!”
“그래도 CK랑 싸우면······.”
박선재 조연출이 다가와 안유주의 볼을 양손으로 붙잡는다.
“나 너 밤에 잘 때마다 일하느라 힘들어서 끙끙거리는 소리 더 이상 못 듣겠어.”
“······.”
“그리고 너. 요즘 밤에도 서빙하고 온다고 늦잖아.”
“······.”
“정 팀장님 말씀대로 입봉한 뒤에 우리 결혼하자. 응? 너 혼자 고생시키는 거 솔직히 더는 못 하겠어.”
멋없어 보이는 프로포즈지만 안유주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리고 오빠 미안. 더 제대로 데뷔시켜주고 싶었는데······.”
“네가 뭐가 미안해? 조재경이 문제지. 그리고 이태풍 씨가 출연해 주신다잖아. 이 정도면 꽤 빵빵한 감독 데뷔 아냐? 충분히 제대로야!”
박선재 조연출이 여자 친구의 눈물을 닦아준다.
안유주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고서.
그렇게 한참 서로를 달래던 두 사람이 손을 붙잡고 내게 말한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합니까? 전 굴렁쇠의 소속이 되는 겁니까?”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두 분이 제작사를 설립하시도록 제가 돕겠습니다.”
조재경이 어떤 형태로 공격을 해올지 몰랐기에 박선재는 독립된 회사 형태가 좋았다.
잠시의 상의를 마친 난 LT 엔터테인먼트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됐어?
“허락받았습니다.”
-오케이. 내일 새벽에 데리고 와!
“예. 대표님.”
그 순간 일정이 삭제되고 있었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1년 3월 13일]
-PM 10:00 <일정 삭제>
(삭제된 내용 : 배우 3실 회의. (회의 내용 : 조재경 감독 박선재 조연출과 합의 완료. 회사 내부 직원들의 입단속을 철저히 시킬 것.))
* * *
“새벽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내일은 온종일 바쁠 것 같으니 미리 준비 좀 해주십시오.”
안유주는 내일 월차를 내고 LT 엔터테인먼트에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예. 그러면 내일 뵐게요. 팀장님.”
“아 그리고 이것 좀 드세요.”
편의점에 들어오면서 가지고 왔던 한우 선물 세트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한우와 사골입니다. 푹 고아 드시고 힘내셔서 내일 계약 마무리 지으시죠.”
두 사람이 괜찮다며 사양했지만 난 내일 보자며 도망치듯 나왔다.
이중주차가 된 데다 차를 댄 곳이 여기서 조금 떨어져 있었기에 차분히 걸어가며 연예 기사면들을 확인했다.
[조재경 감독. <천년 여우> CK 엔터 전국 동시 개봉! 10월 2일!]
······
“돈 많이 쓰네 조재경.”
얼마나 돈을 썼는지 <천년 여우>에 관한 기사들이 내일 개봉하는 <경계 너머로>만큼 가득했다.
하지만 조만간 헛돈을 쓴 거나 다름없게 될 거라 확신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차를 댄 장소로 가는 순간 어두운 골목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저씨. 편의점에서 라면이라도 먹고 온 거야? 오래 기다렸잖아.”
조금 전 편의점에서 싸웠던 고등학생들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 셋 여자 둘.
주변을 둘러봤지만 CCTV는 보이지가 않는다.
“뭘 봐?”
“CCTV 찾는가 본데?”
“꿈 깨셔 아저씨. 이 동네는 CCTV도 없어.”
차들도 블랙박스가 달리지 않는 게 대부분이라 찍힐 염려가 없었다.
“일단 지갑부터 꺼내고 무릎 꿇어. 지갑이 두둑하면 그냥 보내줄지도 모르잖아. 안 그래 얘들아?”
가소로운 협박이다.
회귀 전이나 회귀 후나.
무리를 짓고 있는 양아치들은 한 치 앞을 보지 못한다.
‘CCTV가 없는 게 누구한테 이로운 건데.’
내가 피식하고 웃는 모습을 보이자 아까 전 내게 손을 붙잡힌 파란 모자 고등학생이 이를 악물었다.
“XX. 웃어? 이 아저씨가 정신이 나갔나? 야! 치자!”
“오케이~”
남자 고등학생들이 내게 덤비려 자세를 잡는다.
그때였다.
고급 승용차 한 대가 골목길로 들어오더니 우리에게서 10m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뭐야? 저건?”
덜컥.
그 순간 동시에 앞뒤의 문들이 전부 열리더니 눈앞의 고등학생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거구 4명이 내렸다.
“정윤호 씨. 저희랑 같이 좀 가시죠.”
이건 또 뭐야.
나 오늘 완전 인기 폭발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