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1화
321. 박선재 1
조재경은 <경계 너머로>의 VIP 시사회장에서 자기 영화가 개봉한다는 사실을 외쳤다.
“예? 정말입니까? 이번엔 상업 영화라고요?”
“이제까지 예술 영화만 찍으셨잖습니까? 갑자기 왜 상업 영화로 방향을 트셨습니까 감독님!”
“그런데 홍보도 없이 이렇게 바로 개봉하시는 겁니까?”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조재경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한다.
“원래 상업 영화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영화 홍보는 한 주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작품만 괜찮으면 관객은 입소문을 타고 알아서 몰리잖습니까?”
보통 영화 프로모션 기간은 개봉 전 6개월에서 짧아도 2주에서 3주는 들이지만 조재경은 CK 엔터테인먼트의 뒷배로 상식을 무시하고 있었다.
조재경의 도발에 겨우 진정시켰던 최성문 감독이 다시금 발끈한다.
“저거 완전 미친놈 아냐? 남의 잔칫집에 와서 저게 무슨 황당한 짓이야?”
우선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최성문 감독에게 조재경의 약점 한 가지를 알렸다.
“감독님. CK 엔터에서 미는 금수저라고 도발해보세요. 먹힐 겁니다.”
“그런 유치한 수작이 먹힌다고?”
“예. 저 한번 믿어 보세요.”
“그래. 알았어.”
최성문 감독이 숨을 들이마신 뒤 큰 소리로 외친다.
“역시~ CK 계열 도련님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구만. 프로모션도 제대로 안 한 영화를 전국 동시 개봉? 이제 천재 감독이 아니라 금수저 감독이라고 불러야겠어?”
순간 이제껏 웃던 조재경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그에게 금수저란 말은 역린이었기 때문이다.
이태풍이 연못 다비드라는 비아냥을 듣고 살았듯 조재경 역시 마찬가지.
그의 성공에는 언제나 외가인 CK 엔터테인먼트 덕분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었다.
그래서 유독 그 말을 싫어했었다.
고작 금수저란 말에 조재경이 흔들리자 최성문 감독은 신이 나 입을 털기 시작했다.
“아~암! 엄마 찬스를 이용해서 작품을 걸면 어때? 하긴 그래도 감독은 감독이지. 인정. 부럽다 금수저 도련님!”
“최 감독님! 말조심하시죠?”
걸걸한 최성문 감독의 입담에 조재경이 참지 못하고 빽 하고 소리쳤다.
아아마 조재경은 스타 감독인 최성문 감독이 이럴 줄은 몰랐을 거다.
지나가던 관객들 또한 당황했지만 원래 최성문 감독은 소싯적에서부터 주연배우와 주먹다짐을 벌인 일로 유명한 기인.
그래서인지 전혀 부끄러운 표정을 짓지 않고 있었다.
“꼬우면 주먹으로 하는 건 어때? 왜? 금수저라서 주먹질은 안 해? 같은 감독이라며? 계급장 떼고 한판 붙어 인마!”
조재경은 걸걸한 최성문 감독의 입담에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
결국 안 되겠다 싶은지 조재경이 몸을 돌려 버렸다.
그 순간 기자들은 다시 한번 플래시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조재경 감독님! 이대로 물러나시는 겁니까?”
“몇 말씀 더 해주고 가시죠!”
다행히 최성문 감독의 활약(?) 덕에 조재경이 일방적으로 득을 보는 상황은 막을 수가 있었다.
* * *
[<경계 너머로>의 최성문 감독 VIP 시사회장의 충돌!]
[최성문 감독의 <경계 너머로> vs 조재경 감독의 <천년 여우>]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신세대와 구세대의 충돌!]
[<경계 너머로>의 성공적인 VIP 시사회! 영화도 성공! 화제 몰이도 성공?]
[이태풍. 연기에 미치다!]
[CK 엔터테인먼트. <천년 여우> 다음 주 전격 공개!]
VIP 시사회장의 소란이 끝난 이후.
난 미소와 유진이 그리고 체리블라썸을 이영진에게 맡겨 돌려보낸 뒤 이태풍과 그의 사촌 형 이대호를 데리고 LT 엔터테인먼트 본사로 향했다.
배급을 책임진 신종기 대표가 대책 회의에 나도 불렀기 때문이다.
먼저 LT 엔터테인먼트의 신종기 대표가 입을 열었다.
“그래. 조재경. 그 썩을 놈이 사고를 쳤는데 우린 어떻게 대응하는 게 좋겠나?”
점잖기로 유명한 신종기 대표가 거친 말을 내뱉자 분위기가 싸늘해진다.
순간 최성문 감독이 말한다.
“정 팀장이 해결 방법이 있다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정 팀장이?”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천년 여우의 조연출을 맡은 박선재 씨가 아직 임금을 단 한 푼도 받지 못한 상황입니다.”
“미국에서 촬영한 작품에 한국인 조연출을 썼다고?”
“네. 영어를 잘하는 조연출이라 특별히 고용해서 데리고 갔답니다. 그런데 연출료 1억을 체불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다들 눈을 번뜩이기 시작했다.
임금 미지급은 소송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건이었으니까.
* * *
올해 34살인 박선재 조연출은 가난한 집안 사정에도 영화 하나에 모든 것을 건 청년이다.
소품 제작 연출부를 두루 거친 만능 인재인 데다 카투사 출신이기에 영어를 잘하기로도 유명했다.
그렇게 서서히 경력을 쌓아나가던 박선재 조연출의 이름은 영어에 능숙한 조연출을 찾던 조재경의 귀에도 들어갔다.
조재경은 박선재 조연출의 영입에 공을 들였고 결국 미국에서 촬영이 끝나는 대로 1억을 주겠다는 조건으로 <천년 여우>의 조연출을 맡았다.
그런데 미국 현지에서 촬영이 시작되고 한 달 정도 지난 후.
조재경은 우연히 들렀던 카지노에 푹 빠지게 되고 결국 CK 엔터테인먼트에서 마련해 준 제작비에까지 손을 대게 된다.
이후 조재경은 제작비 전액을 도박장에서 날렸고 스태프들에게 줄 임금을 체납하는 사태까지 일으켰다.
그러자 미국 현지 스태프들은 곧바로 변호사를 선임해 소송을 준비했다.
예상치도 못한 일에 화들짝 놀란 CK 엔터테인먼트 미국 지사는 명예 회장님의 외손자를 지키고자 대신 임금을 지급해 사태를 덮어버리게 된다.
다만 유일한 한국 스태프인 박선재는 조재경이 직접 영입한 데다 차후 감독으로 입봉할 수 있게 지원하겠다는 핑계로 주기로 한 돈의 지급을 미뤘다.
재벌가 외손자인 조재경 측이 돈을 떼먹을 리도 없다고 생각한 박선재 조연출은 특별히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고.
그러나 조재경은 약속했던 임금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고 영화 제작 지원에 대한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한 박선재 조연출은 언론사를 찾아가 이 일을 폭로하려 했다.
그제야 조재경은 외가인 CK 엔터테인먼트의 힘을 동원해 황급히 박선재 조연출의 입을 막았다.
약속했던 영화를 만들어 주겠다며.
하지만 그건 덫이었다.
총 투자액 30억짜리 계약을 맺고 계약금 조로 1억 원을 지급한 CK 엔터테인먼트는 이후 온갖 핑계를 대며 대금 지급을 미루기 시작했다.
CK 엔터를 믿고 영화 제작에 돌입했던 박선재 조연출은 그대로 큰 빚을 지게 되었고.
그 이후 박선재 조연출에 관한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 일에 관련된 일정들은 여전히 내 다이어리에 남아 있었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1년 3월 13일]
-PM 10:00 배우 3실 회의. (회의 내용 : 조재경 감독 박선재 조연출과 합의 완료. 회사 내부 직원들의 입단속을 철저히 시킬 것.)
[날짜 : 2021년 5월 15일]
-PM 11:00 <연예가 빅잼!> 조재경 감독. 라스베이거스 LCM 카지노 상습 도박 의혹 보도. (회의 내용 : 회사 내 배우들 도박 사건 확인해 볼 것.)
박선재 조연출이 임금을 받지 못한 상태라는 말에 신종기 대표가 흥분해 물었다.
“자네도 잘 아는 사람인가?”
“예. 뭐 잘 압니다.”
아직은 모르지만 곧 알게 될 사이였기에 얼른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러면 박선재라는 그 친구부터 한번 보도록 하지. 지금 바로 부를 수 있나?”
“혹 뭘 제안하실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우리가 제작 중인 영화가 많으니까 그중 하나를 골라 현장 스태프로 꽂아주는 건 어떨까?”
난 그걸로는 부족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대표님. 이참에 영화 하나 더 만들어 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박선재 씨가 이번에 준비 중인 시나리오가 끝내주게 잘 빠졌습니다.”
영화 제작이 한두 푼 드는 일은 아니었기에 신종기 대표는 고민에 빠졌다.
잠시 후.
생각을 끝낸 신종기 대표가 묻는다.
“준비하는 작품의 장르는?”
“재난 스릴러랍니다.”
“재난 스릴러? 그건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장르인데?”
“지리산에서 찍을 테니 비용은 크게 들지 않을 겁니다.”
나는 박선재가 제작하려다 엎어졌던 <지리산>에 관한 시놉시스를 설명했다.
등산을 갔다 폭설로 산장에 낙오된 일행 중에 사이코패스 살인자가 있어 벌어지는 이야기를 말이다.
“그 정도면 20억에서 30억 정도 들겠군.”
시놉시스만 들어도 제작비가 척척 나온다.
“예. 그 정도 될 겁니다. 아마 LT 쪽에도 초창기 시나리오를 보내놓았을 거고요.”
신종기 대표가 잠깐 고민에 빠진다.
“끄응······ 하반기에 들어갈 작품이 많은데······.”
난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
“만약에 제작과 배급을 사장님이 책임져 주신다면 주연은 우리 태풍이가 맡을 겁니다.”
순간 신종기 대표의 눈이 번뜩인다.
“진짜야?”
30억이 크다면 큰돈이지만 이태풍이 나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경계 너머로> 시사회에서 뜨거운 반응을 확인한 이태풍이 다음 영화로 <지리산>을 선택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화제가 될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지리산>은 충분히 흥행할 수 있는 작품.
당시 업계에선 어처구니없이 사라져 버린 비운의 명작이라고 아까워들 했었다.
“무르기 없네?”
“예. 그리고 리스크를 낮추기 위해 태풍이 출연료는 없이 올 러닝 개런티로 하겠습니다.”
그 순간 신종기 대표가 신이 나서 외친다.
“그러면 무조건 오케이지! 알았으니까 무조건 데려와! 영화 만들어 준다고 하고 박선재 그 친구 이름으로 고소를 진행하자고!”
“예.”
난 이대호와 이태풍에게는 내일부터 무대 인사를 돌 준비를 하라고 지시한 뒤 즉시 박선재 조연출이 사는 구로로 향했다.
* * *
밤 12시.
초췌한 몰골을 한 34살의 박선재가 구로의 한 편의점 카운터에 앉아 폰을 만지작대는 중이다.
“연락을 준다고 했는데 왜······ 연락이 없지.”
한국에 돌아온 지 한 달.
<천년 여우>의 연출료 1억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재촉하지 않았던 건 입봉을 시켜주겠다는 조재경의 약속 때문이었다.
하지만 매일 <지리산>의 대본을 수정해서 보내도 조재경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상투적인 말만 반복했다.
심지어 최근 일주일은 답장도 없었다.
“그냥 찾아가서 밀린 연출료라도 달라고 말해야 하나······.”
현재 생활비는 10년 사귄 여자 친구 안유주가 대고 있다.
뒷바라지는 자신이 할 테니 시나리오에만 집중하고 감독이 될 생각만 하라고.
하지만 계속 신세를 질 수는 없었기에 박선재는 대본 집필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하루 4시간 일하는 편의점 야간 알바를 시작했다.
“휴우. 그래. 내일은 찾아가 보자.”
무턱대고 기다릴 수 없었기에 내일은 조재경을 직접 찾아가서 따져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딸랑~
편의점의 문이 열렸다.
박선재가 복잡한 머리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세요.”
덩치가 큰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이 손님으로 들어왔다.
인사를 했지만 일행들은 말없이 주류 판매대 코너로 향했다.
파란 모자와 빨간 모자를 쓴 남자 둘의 키는 180cm가 넘었고 셋 다 근처의 운정 대학교라는 점퍼를 입고 있었다.
‘대학생들이네······.’
세 사람은 소주 5병에 새우깡깡만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계산해줘요.”
소주는 5병인데 안주는 하나.
돈만 있다면 닭강정이라도 하나 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박선재는 대학생들의 처지가 자기 같아 보여 무심코 입을 열었다.
“이렇게 먹으면 속 버릴 텐데······.”
그런데 그 순간 상황은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뭔 상관이래? 그럼 안주는 아저씨가 사줄 거야?”
날 선 여자의 반응에 박선재가 아차 했다.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바로 계산해 드릴게요.”
“아 짱나. 별 거지 같은 게.”
박선재는 울컥했지만 자신이 먼저 실수를 했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일행 중 파란 모자를 쓴 남자가 째려본다.
“어이. 아저씨. 왜 시비를 걸고 지랄이야 지랄이?”
파란 모자가 쾅 하고 카운터를 내려친다.
박선재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알바 첫날에 말로만 듣던 진상 손님이라니.
“죄 죄송합니다.”
“죄송? 말로만 죄송하면 끝이야? 얘가 짜증 났다잖아! 그건 어떻게 보상할 거냐고!“
박선재는 눈을 질끈 감고 타협안을 꺼내 들었다.
주먹다짐했다간 건장한 두 사람을 이길 길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냥 가세요. 소주랑 새우깡깡은 제 돈으로······ 계산해 드릴게요.”
파란 모자의 남자가 발끈한다.
“이게 누굴 거지로 보나. 그거 가지고 되겠어?”
“그 그럼요?”
붉은 모자가 기다렸다는 듯 여자를 쳐다본다.
“동미야. 뭐 먹고 싶어?”
“나? 하겐디즈 파인트. 안주는 새우깡깡이면 충분하고 소주 먹고 속 아플 땐 아이스크림 먹으면 해장에 짱이야!”
“돈도 없으면서 꼭 아이스크림은 고급으로 먹어요. 가져와.”
박선재의 허락도 없이 여자는 조로로 뛰어가서 아이스크림 2개를 꺼냈다.
2개를 합치면 무려 2만 4천 원이 조금 넘는 금액이다.
그러나 남자가 외친다.
“야! 한 개 더 가져와. 3개는 먹어야지.”
3개면 무려 3만 6천 원이 넘었다.
박선재가 오늘 하루 일한 일당이나 다름없다.
“아 안 됩니다. 이러시면 저 경찰을······.”
그 순간 붉은 모자의 남자가 두툼한 주먹을 쥐어 올린다.
“경찰 부르면 아저씨 뒤져~ 진짜 그러고 싶어?”
박선재가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진즉에 그럴 것이지.”
박선재가 눈물을 머금으며 포스기를 잡았다.
그리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저기 신분증 좀······.”
파란 모자가 인상을 와락 쓴다.
“야! 나 대학생인 거 안 보여?”
“대학생이라도 만 18세는 지나야······.”
그 순간 파란 모자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주먹을 쥐었다.
“안 되겠다! 아저씨! 일단 좀 맞고 이야기하자!”
“으어억.”
그런데 그때.
짤랑하는 소리가 들린다.
정장을 입은 잘생긴 남자가 번개같이 달려와 파란 모자를 쓴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어디서 고등학생이 어른한테 함부로 주먹질이야?”
정장을 입은 미남자는 자기보다 덩치가 두 배나 되는 남자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그 순간 박선재가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고삐······리?”
난동을 부리던 진상 세 사람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