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0화
320. <경계 너머로> 시사회 2
대형 스크린을 가득 채운 이태풍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다.
머리카락을 기른 꽃미남 대신 짧은 머리카락에 날카로운 턱선을 드러낸 남자가 한껏 야성미를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이태풍의 모습에 관객들은 조용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연신 감탄을 연발했다.
잠시 후.
이태풍은 상의를 탈의한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비 내리는 훈련소를 홀로 뛰기 시작했다.
깔끔하게 갈라진 구릿빛 식스팩 사이로 빗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에 남녀 가릴 것 없이 감탄사를 내뱉는다.
“와~ 씨. 몸매 봐라. 부럽다. 난 아무리 해도 안 되는데.”
“저 얼굴에 저 몸은 반칙 아니냐?”
“이대로 계속 태풍 씨만 나왔으면 좋겠다······.”
“세상에 복근 좀 봐. 저게 사람이야 짐승이야?”
“크흠~!”
최성문 감독이 헛기침을 내뱉자 그제야 관객들이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곧이어 북한군 특수 부대 복장을 한 이태풍이 중국을 건너 북한에 들어가는 장면이 나왔다.
빠르게 흐르는 차가운 압록강의 강물 위로 얼굴을 검게 칠한 이태풍의 머리가 반 정도만 드러났다.
물 밖으로 드러난 이태풍의 번뜩이는 눈빛은 마치 야생의 들개처럼 날이 서 있어 소름이 오싹 돋을 정도.
관객들은 이태풍의 표정 연기에 몸을 부르르 떨며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이어서 작전을 위해 북한으로 침투하는 씬에서는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액션이 펼쳐졌다.
이태풍은 대역을 쓰지 않았는데도 전문 액션 배우가 촬영했다고 생각할 만큼 격렬한 움직임을 멋지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후 주인공의 이중 신분을 추적하는 북한 보위부의 수사망이 좁혀오는 씬에서는 이태풍은 손에 땀에 쥐어질 정도로 아슬아슬한 탈출 장면들을 선 보였다.
관객들 모두가 손에 땀이 날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자 액션 위주로 진행되던 이야기에 로맨스가 섞이기 시작했다.
무사히 북한의 천재 핵물리학자와 그 딸을 구출해 서울로 도착한 이태풍에게 상부는 구출 대상인 딸과 함께 생활하며 직접 보호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 순간 영화가 시작하고 무뚝뚝한 모습만 보이던 이태풍의 연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어색한 말투.
부족한 표현력.
주춤대는 몸동작에 말도 안 되는 이벤트를 벌이는 것까지.
한 번도 여자를 사귀어 본 적 없는 남자의 어수룩한 실수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관객들은 말도 안 된다며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이태풍이 첫사랑의 연기를 너무 디테일하게 펼친 까닭이다.
하지만 실은 이게 이태풍의 진짜 모습이다.
이태풍은 자신을 협박했던 전 여자 친구 한 명 이외에는 누구와도 사귄 적이 없으니까.
그렇게 살인 병기로 키워진 국정원 정예 요원이 인간성을 회복하며 그 나이 또래의 보통 남자가 되어가는 연기가 펼쳐지자 관객들은 다시 한번 감탄을 터트렸다.
<경계 너머로>에 담긴 주인공의 다양한 캐릭터성을 이태풍이 온전히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연못 다비드’라고 불리던 이태풍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연기 광인 이태풍이라면 또 몰라도.
마침내 극의 클라이막스가 되었다.
북한 공작조에 의해 사랑하는 여자가 인질로 잡힌 순간 이태풍은 머리를 땅에 처박은 채 절규하기 시작했다.
처절한 이태풍의 연기에 관객들은 입을 막고 눈물을 흘려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난.
<경계 너머로>는 천만 관객을 돌파할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태풍이 탑스타가 될 거라는 것도 말이다.
* * *
[CAST]
국정원 요원 최성하 / 이태풍
북한군 최인솔 소좌 / 이태풍
⦙
영화가 끝난 순간 엔딩 크레딧엔 캐스트된 배우들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한다.
가장 맨 윗부분을 당당히 차지한 건 자랑스러운 내 배우 이태풍.
이 감격스러운 순간을 담기 위해 폰으로 촬영을 시작했다.
‘태풍아. 수고했어.’
가슴이 먹먹해진 탓일까.
폰을 든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사이 먼저 상영관을 나갈 사람들을 위한 조명이 켜진다.
하지만 일어서서 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엔딩 크레딧을 보며 영화의 감상을 늘어놓고 있었다.
“영화 진짜 잘 빠졌네.”
“내일 다시 와서 봐야겠다.”
“아까 이태풍. 절규하는 거 봤지? 와~ 나 진짜 가슴 철렁하더라.”
“근데 이태풍 연기 너무 좋아지지 않았어? 액션이면 액션 로맨스면 로맨스 빠지는 게 없던데?”
관객들이 술렁이는 동안 엔딩 크레딧도 끝나고 마침내 상영관 전체에 불이 켜졌다.
그 순간 가장 앞 열에 앉은 최성문 감독과 이태풍 그리고 조연 배우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발을 떼지 못한 관객들을 보며 최성문 감독이 큰 소리로 외친다.
“재미있게들 보셨습니까?”
그와 동시에 관객들의 환호 소리가 터져 나왔다.
“네~~!!”
“최고예요!”
“감독님. 이번에도 천만 명 가겠는데요?”
이태풍은 눈물을 가득 머금고는 연신 고개를 숙였고 이태풍의 부모님들도 주변에서 들려오는 극찬에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난 기쁨을 억누른 채 스태프들과 함께 관객들을 출구로 안내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난 VIP 시사회가 이렇게 대성공으로 마무리되는 줄로만 알았다.
* * *
VIP 시사회가 열리면 상영관 출구 쪽에는 포토존을 마련해 둔다.
연예인과 일반 관객들이 관람하고 나온 소감을 홍보에 쓰기 때문이다.
워낙에 관람 분위기가 좋았기에 당연히 좋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유진이와 미소를 데리고 상영관을 나온 순간.
포토존에 선 한 사람이 터무니없는 소감을 늘어놓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조재경.
천재 감독이라 불리는 그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영화 감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역시 최성문 감독님다운 작품이네요. 빠른 스토리 진행에 박진감 넘치는 액션까지. 하지만 클리셰 범벅이라 조금은 고루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더군요.”
기자들이 깜짝 놀라 되묻는다.
“고루하다고 하셨습니까?”
“예.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대중들의 요구에 맞추려다 보니 틀에 갇힌 작품 아니던가요? 도전보다는 현재에 만족한 느낌?”
유학파에 국제 영화제를 수상한 젊은 천재 감독이 천만 감독에게 던진 도전장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좋은 소재다.
기삿거리를 받은 기자들이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감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 그리고 이태풍 씨 연기가 달라졌다는 기사들을 많이 봤는데 여러분도 같은 생각이신가요?”
순간 기자들의 손이 일제히 멈췄다.
또 어떤 어그로성 발언을 할까 잔뜩 기대에 찬 기자들의 시선을 즐기던 조재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볼 땐 그냥 평범한 액션 배우던데? 내 눈이 이상한가? 아. 물론 여전히 잘생긴 건 인정! 실제로 보니 얼굴 하나만큼은 대한민국 원탑 맞습니다.”
순간 울컥하고 치밀어 오른다.
조재경은 말 몇 마디로 한 사람의 절절한 노력을 바닥으로 깔아뭉개고 있었다.
이래서 내가 저 인간이라면 질색을 했다.
남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는 인간이었으니까.
분노가 차올라 나도 모르게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따듯하고 부드러운 작은 손이 내 옷자락을 잡고 흔드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미소가 날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삼촌.”
미소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화내지 마세요!”
“응?”
“삼촌. 지금 엄청 무서운 얼굴 하고 있어요!”
옛날부터 난 정말로 화가 나면 표정이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내가 화가 났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눈이 좋은 미소는 단번에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읽어내고 있었다.
“화난 거 아닌······데?”
“거짓말하면 못써요! 엄청 화나 보이는데. 막 이러케!”
미소가 두 검지로 도깨비 뿔 모양을 만든다.
그러자 곁에 있는 유진이도 내 기분을 달랬다.
“오빠가 예전에 그랬잖아요. 연예계에 저런 사람들 많다고. 참아요. 릴렉스~ 릴렉스~”
그 순간 신기하게도 안도감이 들며 분노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난 짧게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알았어 미소 말대로 할게.”
미소가 씩 하고 웃는다.
“응! 참는 게 이기는 거랬어요!”
하지만 내 속내는 달랐다.
내가 참는다고 해서 조재경이 그걸 알아줄 리가 없다.
오히려 더 만만하게 보고 심하게 나올 거다.
그러니 조재경에게 맞서야 했다.
난 우선 유진이와 미소를 안심시킨 뒤 이제부터 일어날 일을 머릿속에 정리했다.
일단 조재경이 사고를 쳤으니 언론들은 신이 나 관련 기사를 쓸 거다.
지금에 와서 기사를 막는 건 불가능한 상황.
그렇다면 최소한 조재경의 기사에 밀려서는 안 된다.
‘어떻게 균형을 맞추지?’
그때였다.
주영인이 빠른 발걸음으로 내 곁에 다가왔다.
“오빠. 낚이지 마세요. 저 인간. 지금 일부러 저러는 거니까.”
“예?”
“미국에서 영화 한 편을 완성해서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설마.
조재경이 일찍 돌아온 이유가 <천년 여우>의 제작을 빨리 마친 탓인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미래가 바뀌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 짓거리가 CK 엔터와 조율된 내용이라는 거군요?”
“빙고. 지금이 최 감독이랑 일 대 일로 붙어 볼 적기로 판단하나 봐요.”
다른 영화사들이 최성문 감독을 피해 개봉 시기를 바꾼 시기를 노리다니.
영리한 선택이다.
<천년 여우>는 예고편도 나오지 않았으니 최소 3주는 지나야 상영을 하게 될 터.
그렇다면 그때까지 나 역시 총력전을 펼쳐야 했다.
아무튼 주영인 덕에 돌아가는 상황을 명확히 알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난 주영인을 향해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주영인이 생각지도 못했는지 흠칫거린다.
“진짜요?”
“예. 덕분에 머릿속이 깔끔해졌습니다.”
순간 주영인이 눈을 깜빡이며 말한다.
“저기······ 그러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어요?”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요.”
“별로 안 어려워요. 중국 갈 때 저랑 같이 가주세요. 왕룽 본부장이 오빠도 같이 오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이거 보세요.”
주영인이 폰을 꺼내 들고 왕룽에게 받은 메일을 보여준다.
그녀는 조만간 중국에서 촬영할 <전장의 늑대> 때문에 중국 미팅이 잡힌 상황.
중국어를 하는 매니저가 에이스 엔터에 없는 데다 왕룽과 내가 친하니 함께 가줬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해 왔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유진이를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린다.
“제가 이 건에 한해서는 정 팀장님에게 중국 에이전시 수입을 일임할게요. 굴렁쇠 엔터에 협조 공문도 보내고. 그럼 공식 업무가 되잖아요.”
에이스 엔터 대표가 싫어하겠지만 주영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장의 늑대>에 출연이 성사되기까지 에이스 엔터의 공이 없으니 할 말도 없을 거라나.
그 순간 유진이가 곁에서 말한다.
“오빠. 다녀오세요.”
“응? 진짜?”
“네. 왕룽 오빠랑 그분 아버지를 만나는 약속도 있고 링링도 만나보려면 한 번은 중국에 가봐야 한다면서요. 가는 김에 일 다 하고 오면 되죠.”
“그렇기야 하지만······ 진짜 괜찮겠어?”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예. 괜찮다니까요?”
싱글벙글 웃고 있는 까닭에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나는 주영인의 제안을 승낙했다.
“대신 스케줄은 제가 잡겠습니다. 그리고 일단 저 인간부터 처리하는 게 우선이니까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죠.”
이야기를 마친 난 조재경을 상대할 사람을 부르기 위해 상영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상영관에서 인사를 마치고 최성문 감독이 나왔다.
“정 팀장. 무슨 일이라도 있나? 표정이 왜 그래?”
“감독님. 마침 잘 나오셨습니다.”
최성문 감독이라면 충분히 조재경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
난 곧장 그에게 조재경이 <경계 너머로>를 깎아내리고 있다는 걸 알렸다.
그 순간 최성문 감독은 조재경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조 감독! 자네 지금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가?”
조재경이 태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인다.
“같은 감독으로서 감상도 못 말합니까?”
아무리 조재경이 천재 감독이라고 해도 최성문 감독이 한참 어린 후배로부터 이런 소리를 듣고 참을 사람이 아니다.
“뭐? 같은 감독?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뭐가 어쩌고 어째?”
다혈질인 최성문 감독이 삿대질하며 덤벼들자 조재경은 도발의 강도를 더욱 올렸다.
“말씀이 너무 심하시네요. 솔직히 감독님 작품이 통속적인 건 사실 아닙니까!”
고성이 울려 퍼지며 두 사람이 주먹다짐이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가 펼쳐진다.
난 흥분하는 최성문 감독을 일단은 꽉 붙들었다.
내가 원한 건 조재경의 입을 막는 거지 최성문 감독의 폭행 같은 기사 타이틀이 아니었으니까.
난 곧장 최성문 감독만 들을 수 있게 귓속말을 전했다.
“감독님. 제게 조 감독을 밟을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진정하시고 기자들의 관심부터 저희 쪽으로 돌려주십시오.”
최성문 감독이 씩씩거리며 내게 묻는다.
“저 자식을 밟을 방법이 있다는 거 진짜야?”
난 조재경의 약점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예. 감독님!”
“알겠네. 그럼 그리하지.”
최성문 감독이 숨을 몰아쉬며 진정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때였다.
조재경은 최성문 감독에게 말싸움에서 이겼다 싶은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기자들에게 폭탄 발언을 내뱉었다.
“아 그리고 다음 주에 제 첫 상업 영화 ‘천년 여우’가 전국에 동시 개봉합니다. 제 영화에는 훨씬 세련된 연출이 담겨 있으니 ‘경계 너머로’와 비교해서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그 순간 시사회장이 발칵 뒤집혀 버렸다.
남의 시사회장에 와서 축하는 못 할망정 무례하게도 자기 영화를 홍보한 까닭이다.
주영인의 말대로 CK 엔터는 이참에 조재경을 최성문 감독의 경쟁자로 각인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물론 조재경이 그 일에 먼저 손을 들고 나섰음이 틀림없다.
회귀 전에도 조재경은 다른 영화감독들을 짓밟으면서 위로 올라간 녀석이었으니까.
‘한번 해보자 이거지 조재경?’
난 <경계 너머로>와 전쟁을 선포한 조재경을 바라보며 그에 관한 기억을 모조리 떠올렸다.
그를 밑바닥부터 무너뜨리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