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8화
318. 서재일 2
“그게 무슨 소리야? 서 검사가 왜 좌천을 당해?”
“윗선에서 수사 중단 지시가 내려왔대. 서 검사는 항명하고 있지만 이대로라면 지방으로 좌천될 거라더라.”
서재일 검사는 날새의 납치범이 경기도 이천에서 활동하는 이천파라는 폭력 조직이라는 걸 밝혀냈다고 한다.
하지만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간 순간.
이천파가 갑자기 와해 되더니 납치범들의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행방이 묘연해진 납치범들에게 지명 수배를 내릴 틈도 없이 윗선에서 압박이 들어왔단다.
눈이 돌아간 서재일 검사는 성질을 못 이기고 윗선을 들이받았고 그 결과 좌천을 코앞에 둔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거 아무래도 최만식이 손을 쓴 것 같은데?”
강은기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윤호 너 서 검사한테 최만식의 이름까지 말했냐?”
“아냐. 날새 납치범을 알아보라고 귀띔만 했어.”
서재일 검사가 뛰어나다고 해도 여권 실세의 사위가 될 최만식을 단번에 쳐낼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의 수족이라도 끊어낼까 했는데 최만식 쪽에서 내 예상보다 더 단호하게 손을 쓴 모양이다.
“서 검사가 좌천되면 넌 어떻게 되는데? 네 안전은 어때?”
“걱정하지 마. 여기 우리 애들 많으니까.”
“그딴 소리 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조금 피곤해지긴 하지.”
서재일 검사가 좌천당하면 다른 검사가 배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경우 강은기의 신상을 노리는 놈들이 더 설칠 수도 있었다.
어떻게든 서재일 검사가 좌천되지 않게 도와야 했다.
‘어떻게 한다?’
순간 박상곤의 보좌관 사건을 제보한다면 서재일 검사가 그 카드로 좌천을 막아낼 수 있겠다 싶었다.
난 혹시나 하고 다이어리부터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9월 30일]
-PM 11:30 서울 낙산공원 주차장. (보고 사항 : 강명길 팀장에게 지시 전달.)
역시 일정에는 아직 변화가 없다.
다만 이걸 써먹기 전에 강은기에게 확인할 일이 있었다.
“은기야. 그런데 넌 서 검사. 진짜 믿어?”
“어. 그 인간 생긴 건 더러워도 속정은 깊어. 나 칼에 찔리고 나서 바로 연실이에게도 사람 보냈고. 프라이드가 세서 그렇지 절대 나쁜 편에 설 인간은 아냐.”
이수찬에게 들었던 것과 같은 대답이다.
“알았어. 그럼 서 검사 문제는 내가 해결해 볼게.”
“어떻게 하려고?”
“뭐 그런 게 있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강은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윤호야. 그런데······ 그 영감은 어때 보이디?”
“뭐가?”
강은기가 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툭 하고 말을 내뱉는다.
“거······ 있잖아. 그 돈 많은 영감.”
차마 아버지란 말이 나오지는 않는지 말을 더듬거린다.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릴 줄 알았다.
하지만 구치소에 갇혀 있다 보니 평소보다 조금 약한 모습을 보이는 강은기였다.
그래도 난 일부러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나이가 들어서 힘도 없어 보이더라. 죽기 전에 자식을 찾는 게 마지막 소원이란다.”
“······.”
“근데 내가 볼 땐 그거 다 쇼야. 안 보려고 결심했으면 마음 모질게 먹고 확실하게 선을 그어.”
강은기는 마지못해 대답한다.
“그래. 그래야지······.”
청개구리 자식.
아무래도 조만간 먼저 만나보겠다고 이야기가 나올 분위기다.
“그러면 나 간다. 몸조리 잘하고.”
“어. 너도 몸조심해.”
강은기와 그렇게 인사를 나눈 뒤 구치소를 나왔다.
정문으로 나오자마자 함께 찾아온 이수찬에게 말했다.
“수찬아.”
“예. 형님.”
“은기한테 명동 최 회장 이야기를 종종 꺼내 봐.”
“불편해하실 텐데요?”
난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은기 녀석. 늘 그렇게 말만 하지 속은 또 안 그래. 만나서 싸우고 다시 갈라서는 한이 있어도 일단 만나게 해줘야지.”
이수찬이 구치소 쪽을 힐끗 쳐다본다.
본인도 고아라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 탓에 누구보다 우리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 억지로 밀어붙이지는 말고 가끔 이야기만 꺼내면 돼. 분위기 파악 잘하고.”
“예.”
재차 당부한 난 이수찬과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 형님. 그리고 날새 그 양반은 미국으로 보냈습니다.”
“많이 다쳐서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질 것 같더니. 벌써 다 나았어?”
“아뇨. 여기 남아 있으면 위험할 거 같아서 치료는 미국에서 받기로 했습니다.”
미국으로 간 날새는 김동수의 약점인 최성애를 찾겠다고 했단다.
“그리고 어떻게든 최성애를 찾아올 테니까 꼭 복수해달라고 하더군요.”
여전히 정이 가지 않는 날새지만 그래도 이번엔 나름 공을 세웠다.
그의 이름에서 내 이름이 나왔더라면 다친 건 강은기가 아닌 나일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 그러면 수고하고. 나 먼저 간다.”
이수찬과 헤어진 난 서재일 검사를 만나기에 앞서 명동의 최은태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로 사정을 들은 최은태 회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상처가 깊진 않던가?
“예.”
최은태 회장이 안도와 안타까움이 섞인 한숨을 내쉰다.
-아직은 만나자는 이야기는······ 없고?
“몇 주는 걸릴 테니 마음 편하게 가지시고 기다리세요. 조급하게 진행하면 오히려 일을 망칠 겁니다.”
-끄응······ 알겠네.
이어서 난 서재일 검사의 현재 상황을 전했다.
그리고 박상곤 의원 보좌관이 돈 받는 사진을 서재일 검사에게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알겠네. 대신 내게도 꼭 한 장은 건네줘야 하네. 그래야 나도 움직일 수가 있어.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서재일 검사에게 은기가 내 아들이라는 사실은 숨기게.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전화를 끊으려던 난 궁금한 사실 한 가지를 물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혹시 하나 앞으로 온 99 복분자 광고는 회장님께서 손을 쓰신 겁니까?”
강하나의 평균 계약 단가는 9천만 원에서 1억 2천만 원이었는데 ‘99 복분자 캔’은 무려 1억 5천만 원짜리 계약이다.
그것도 1년 계약이 아닌 6개월짜리 계약.
유독 좋은 조건이었기에 꼼꼼히 살폈지만 문제점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계약서에 사인하고 난 순간 문득 최은태 회장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최은태 회장이 헛기침을 내뱉는다.
-커험! 난 모르는 일이네.
그는 내가 100억 매출을 달성하지 못할까 봐 밀어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 그럼 서 검사 일은 나도 알아보도록 하지! 끊네?
달칵.
최은태 회장은 당황했는지 급히 전화를 끊어 버렸다.
모질기로 유명한 명동의 사채왕은 아들의 친구인 내게 나름의 호의를 베풀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 * *
서재일 검사에게 만나자고 전화를 걸자 그는 곧장 회사로 찾아왔다.
차분하게 날 압박하던 과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며칠간 잠도 못 잔 초췌한 모습이다.
머리는 부스스하고 얼굴엔 기름기가 흘렀다.
날 발견한 서재일 검사는 다짜고짜 따지듯 물었다.
“대체 누구랑 싸우고 있는 겁니까?”
지난 며칠간 날새의 납치범을 조사하면서 재벌 총수나 국회의원 다선 의원급을 상대할 때나 벌어지는 일이 생겼단다.
그리고 지금도 윗선의 부당한 지시에 맞서기 위해 잠도 안 자고 증거를 뒤지다 온 길이라며 한숨을 쉬는 서재일 검사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를 비밀로 해주셔야 합니다.”
“저 입 무겁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빨리 말해 보세요.”
나는 흥분한 서재일 검사의 눈을 보며 다시 한번 당부했다.
“한두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 아닙니다.”
서재일 검사는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 싶은지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화장실로 향했다.
잠시 후 깔끔하게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서재일 검사가 정자세로 내 앞에 앉았다.
“이 서재일. 검사 임관 후 한 번도 정보원의 신상을 분 적 없는 사람입니다.”
너무도 당당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약간의 신뢰가 생겨나고 있었다.
“실은 이 일에 박상곤 의원이 얽혀 있습니다.”
박상곤이라는 이름을 듣자 서재일 검사는 순간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설마 똥 밟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거물의 이름 앞에 꼬리를 말 타입은 아닌 것 같았는데.
고개를 든 그의 얼굴에 희열이 어려 있었다.
“어쩐지······ 박상곤 그 인간이라면 그럴 수도 있죠.”
“거기다 미래상상 저축은행의 최만식도 얽혀 있습니다.”
순간 서재일 검사가 더욱 군침이 돈다는 표정을 짓는다.
“명동의 최만식이라면 제가 벼르고 있던 놈입니다.”
서재일 검사 역시 나처럼 최만식과도 과거 악연이 있다고 한다.
불법 대출과 횡령 건으로 조사를 했는데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면서 말이다.
“대충 상황을 보니 은기 그 친구가 박상곤의 더러운 비밀 같은 걸 알아차린 모양이군요. 그래서 박상곤의 사주를 받은 최만식이 강은기를 노린 거고요. 맞습니까?”
“비슷합니다.”
아들이라는 사실을 숨기다 보니 자연스레 이런 결론이 난다.
난 그 뒤로 그의 상상력에 맞춰 적당히 맞장구를 쳐줬다.
서재일 검사가 수사 방향을 잡았다며 손뼉을 친다.
“오케이. 그러면 박상곤 의원에게 타깃을 맞춰야겠습니다. 돌아가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니까.”
서재일 검사는 막힌 구석을 뚫어낼 방법이 생겼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정보를 주려면 처음부터 제대로 줄 것이지 뭘 이렇게 빙빙 돌려서 사람을 고생하게 만듭니까?”
“죄송합니다. 그땐 진짜 못 미더워서······.”
“거참. 제 얼굴이 그렇게 험악하게 생겼습니까?”
솔직히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상처를 받을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제가 의심이 좀 많습니다.”
못 믿겠다는 눈치였지만 난 딱 잡아뗐다.
대신 좌천 위기인 그를 구하기 위해 한 가지를 제시했다.
“혹 박상곤 의원의 보좌관이 돈을 받는 사진 같은 게 있으면 검사님께 도움이 될까요?”
급히 주변을 둘러본 서재일 검사가 목소리를 낮춘다.
“당연하죠. 그런 게 있습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서재일 검사의 얼굴에 화색이 만연해졌다.
다만 미리 말을 한다면 다이어리의 내용이 바뀔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난 대략 월말이라는 사실만 알린 뒤 당일 증거를 넘기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최만식의 양부인 최은태 회장을 한번 만나보면 이 일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최은태라면 명동의 거물 사채꾼 영감 말이군요. 현업에서 거의 손을 뗐다고 알고 있는데······. 설마 그 영감도 이 일에 연관되었습니까?”
“아니요. 그보다는 여권 실세인 박상곤이 지하 금융권의 거물인 최만식을 사위로 삼으려는 이유를 생각해보세요.”
서재일 검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최은태의 재산을 날로 삼키려고?”
“예. 두 사람이 손을 잡은 건 최은태 회장의 재산 때문입니다. 양자도 법적으로 상속 자격이 있으니까요.”
“무슨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최만식이 양부를 배반하고 친자인 강은기를 찾아내 제거하려는 이유는 당연히 최은태의 재산을 독점하기 위해서다.
박상곤과 손을 잡은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게 확실했다.
혼자 먹기엔 너무 큰 먹거리다 보니 정치권의 보호가 필요했겠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도 나름대로 뒤를 캐보도록 하죠.”
좌천성 인사는 다음 달 중순.
그때까지는 시간이 있다고 말한다.
나는 서재일 검사와 악수를 나눈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만식의 일을 처리하는 것 이외에도 본업이 잔뜩 밀려 있었으니 말이다.
* * *
[<신의 이름으로> 17화 시청률 32.7%! “마의 35% 벽은 몇 화에 뚫나?”]
[<경계 너머로> VIP 시사회 9월 24일. 연예인들 총집합!]
[올 하반기 최대의 기대작 <경계 너머로> 9월 25일 정식 개봉!]
9월 24일.
이태풍의 복귀작 <경계 너머로> 개봉 하루 전 연예인들이 참석하는 VIP 시사회가 열린다.
나는 정 팀 소속의 연예인들을 모두 데리고 잠실에 있는 LT 타워 내 LT 시네마로 향했다.
뒷좌석 한가운데에 앉은 미소는 유진이와 체리블라썸 멤버들 그리고 하루와 강하나까지 모두 모이자 흥분이 이어지고 있었다.
“미소야. 시사회 가는 게 그렇게 좋아?”
“네~ 완전 좋아요!”
신이 난 미소가 파워터프걸 인형을 꼭 껴안았다.
“아 맞다 삼촌. 근데요~ 드라마는 왜 시사회 안 해요?”
“왜? 드라마도 이렇게 시사회 같은 거 했으면 좋겠어?”
“응! 언니랑 오빠들이랑 예쁜 옷 입고 다 같이 모이면 좋잖아요.”
미소가 설레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인다.
그 순간 세리가 그건 안 된다며 고개를 젓는다.
“미소야. 시사회는 영화만 하는 거야.”
미소가 눈을 끔뻑인다.
“그럼 안 돼? 드라마는 시사회 못해? 응? 세리 언니?”
“응. 미소야. 못 해.”
미소가 살짝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순간 한 가지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안 되긴 왜 안 돼? 돼!”
순간 미소의 눈이 동그래진다.
“진짜요?”
“드라마 상영 전에 다들 모여서 너튜브로 실시간 방송 하나 해주면 되지.”
드라마를 소개하는 프롤로그 방송을 만들고 그 방송을 너튜브 라이브로 하면 될 것 같다.
진행자도 뽑고 출연 배우를 모은 다음 채팅창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말이다.
‘홍보엔 딱이겠는데?’
내 나름대로 해결책을 제시하자 미소가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성을 지른다.
“삼촌~ 최고!”
“그래? 그럼 나도~ 미소 최고!”
미소는 신이 나 노래를 불러대기 시작했고 우린 즐거운 분위기 속에 LT 타워로 향했다.
주차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VIP 지정 주차 층으로 차를 가져다 대었다.
차에서 내린 우린 상영관에 들어가기 전 가지는 포토 타임을 위해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주차장으로 노란색 람보르기니가 한 대 들어왔다.
눈에 튀는 색이다 보니 모두의 시선이 람보르기니 쪽으로 향했다.
차가 멈춰선 순간 오른쪽 걸윙 도어가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드라마에서 경쟁했던 충무로 출신의 여배우 소이영이다.
‘쟨 또 여기 왜 왔지?’
차에서 내린 소이영은 몸에 착 달라붙는 은빛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이어 운전석에서 한 남자가 내린다.
그 순간 주먹이 꽉 쥐어졌다.
‘XX. 저 인간이 여긴 왜 왔지?’
회귀 전.
이가 갈릴 정도로 나와는 지독한 악연이었던 천재 영화감독 조재경이 나타나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