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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옛시조의 왕도(3)
멈춰 버린 시간 속에서 움직이기 위해서는 평범하게 두 다리로 걷는 다는 발상 자체를 버려야만 했다·
순수하게 시간 에너지로 신체를 움 직여야 한다·
이를테면 ‘한쪽 다리를 뻗어서 앞 으로 걷는다’라는 과정에 0·5초가
걸린다면 백유설은 발을 실제로 내 딛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0·5초’를 시간 에너지로 끌어와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멈춰 버린 시간 속에서 앞으로 한 발자국이 나아가 는 것이다·
말은 복잡했지만 간단하게 설명하 자면 쉽다·
마치 상상 속 가상의 팔을 만들어 내고 물구나무를 서서 나아가는 느 낌이라고 보면 아주 좋을 것이다·
-준비됐나?
순수 시간 에너지만으로 몸을 움직
이던 백유설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 상태로라면 왕궁 내에서 누구를 찾 기는커녕 걸어다니는 것조차도 버거 울 지경·
하지만 뼈와 살을 부수는 고통을 겪더라도 반드시 적응해야만 했다·
내가 아니면 멈춰 버린 풀레임과 젤리엘을 구해낼 수 없다·
그런 필사의 다짐으로 백유설은 은 색의 에너지를 서서히 몸 전체로 퍼 뜨렸다·
-음! 확실흐】 예전보다 훨씬 낫구 나· 그 정도라면··· 내 도움이 없 더라도 왕궁에서 점멸을 한 번 정도
사용할 수 있겠어·
그간 워낙 바쁘게 지내는 탓에 수 행을 제대로 하지 못했음에도 예전 보다 훨씬 성장해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성장하는 단 계에 다다른 것이다·
싸우고 이야기를 겪으며 그것을 헤쳐나가는 모든 과정에서 백유설은 성장하며 점점 더 강해진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더라도 어제 의 백유설보다 오늘의 백유설은 조 금이지만 강해져 있다·
시간 에너지의 힘만으로 주먹을 쥐 락펴락하던 백유설은 숨을 크게 들
이마셨다· 긴장되는 큰 사건을 앞에 두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예 준비됐어요· 들어갑니다·”
-부디 무운을 빌겠다·
은세십일월의 배웅을 받으며 백유 설은 눈을 크게 뜨고서 시간의 경계 선 속으로 발을 들였다·
‘흡!!’
직후 깨닫는다· 숨을 쉬는 사소한 행동조차도 시간 에너지를 통해 조 절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신체 전체에 시간 에 너지를 둘러서 항상 약간의 시간을 흐르도록 만들면 심장박동 등의 기
관은 정상작동되었으나 근육을 움직 이는 모든 사소한 행동은 그렇지 않 았다· 하나하나 백유설이 직접 제어 해야만 정상적으로 움직인다·
‘이거 생각보다 힘든데···
밖에서 충분한 연습을 했음에도 불 구하고 멈춰 버린 시간 속에서 실 제로 움직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느 낌이 었다·
바깥에서는 힘을 완전히 빼고 시간 에너지만으로 움직였다고 생각했으 나 본능적으로 저도 모르게 근육에 힘이 들어갔던 것이다·
이 멈춰 버린 시간은 그런 본능조
차 허락되지 않는 곳·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디딜 때 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괴로움과 답답함에 백유설은 차라리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치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괴로울 줄은 상상도 하 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야만 했다·
‘그 아이들은 지금도 이런 고통을 느끼고 있을 거야···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자신과 는 달리 아예 굳어버린 그녀들은 불행하게도 의지만은 남아 있는 채 영영 그렇게 고통받을 것이다·
멈춰 버린 시간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멈춰 있는 게 얼마나 무서울지 감히 상상이나 되겠는가? 그것은 백유설조차 두렵고 끔찍한 일이었다· 결코 소녀들에게 그런 고 통을 짊어지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조금씩 속도가 붙는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던 백유설은 손 을 들어서 땀을 닦아냈다· 이제는 이런 쓸데없는 동작을 추가할 수 있 을 정도로 서서히 여유가 생겼고 걷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백유설은 몰랐으나 이 공간은 그 자체만으로도 백유설이 가지고 있는
은색의 기운을 성장시킬 수 있는 최 고의 공간이었다·
은색의 기운은 현재 백유설이 다룰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운 중 하나 였으나 평범하게 시간이 흐르는 곳 에서는 그것을 성장시키는 게 쉽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바깥의 세상은 이미 시간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시간 에너지를 항상 느끼며 살아가고 있 었기 때문에 그것을 억지로 느끼는 것이 어려운 탓이다·
사람은 산소의 소중함을 모른다·
산소가 사라지고 숨이 막혀올 때
쯤에야 비로소 가장 소중한 것이 사 라졌음을 깨닫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이라는 존재는··· 시간의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
그것이 모두 지나쳐서 없어진 뒤에 야 뒤늦게 시간을 그리워하며 뼈저 리게 후회한다·
백유설은 시간이 완전히 사라진 공 간에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들어오 고 나서야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시간의 부재· 단지 그것을 느낀 것 만으로도 그의 몸속에 내재되어 있 던 은색의 시간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었다·
마침내 왕궁의 무도회장에 들어섰 을 때는 완전히 바깥세상처럼 걷고 움직이는 게 가능해졌다·
자신의 신체를 한정으로 완벽한 시 간 제어가 가능해진 것이다!
단기간에 어마어마한 성취도를 누 렸기에 평상시 같았다면 기뻐했겠으 나 지금은 그럴 새가 없었다·
‘어디지? 어디에 있는 거지?’
백유설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향했 던 장소와 그녀들을 찾기 위해 뛰어 다닌 장소를 모두 제외하고서 움직 이기 시작하였다· 왕궁은 쓸데없이 넓었고 소녀들은 각각 양옆의 복도
로 흩어졌으나 여기에도 여러 갈래 로 길이 나뉘어 있었다·
그러면서 여전히 머릿속에 드는 의문점 하나·
왕궁 내부로 들어온 지 꽤 한참의 시간이 흘렀는데 여전히 그에게는 시간의 파수꾼이 다가오지 않았다·
어째서 일까·
사실은 소녀들에게도 시간의 파수 꾼이 다가가지 않았으며 단순히 왕 궁 내에서 길을 잃는 바람에 돌아오 지 못했다면?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렇게나 꼼꼼한 그 아이들이 그런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이런 중요한 장소에서 저지를 리가 없었다·
,이건···!)
예상대로 풀레임의 발자취를 뒤쫓 던 백유설은 복도에 묻어 있는 스텔 라 아카데미의 도장 자국을 발견하 였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하여 군데군데 도장을 찍으며 걸어간 것이다·
계단과 복도를 따라서 한참을 나아 가니 어느 넓은 식당 홀이 나타났다·
이곳에도 수많은 귀족들이 모여서 먹고 마시고 떠들며 웃는 모습 그대 로 멈춰 있었다· 마치 그림의 한 장
면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은 이질 감·
사람들을 지나치던 백유설은 마침 내 풀레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풀레임! 이건 대체···
그녀는 왼손에 지팡이를 꽉 쥐고 있었다· 마법을 사용하지 않기로 약 속했기 때문에 출발할 당시만 해도 지팡이는 꺼내놓지 않고 있었다·
백유설은 그녀의 오른손을 주목하 였다· 왼손에 지팡이를 쥔 채 풀레 임은 오른손으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대체 뭘 가리키는 거지?’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 으나 그곳에는 사람들밖에 없었다·
와인을 나르던 웨이터와 우아하게 장인어른에게 인사를 건네는 귀족 아가씨··· 사랑하는 여인을 다정하 게 바라보는 사내와 그런 그를 향해 미소짓는 여인·
다양한 사람들이 풀레임의 손가락 끝에 걸려 있어서 도대체 뭐가 문제 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상관없어· 우선은 데리고 나간다·’
그는 풀레임의 손을 다정하게 잡으 며 말했다·
“풀레임 아마 지금 정신이 돌아와
있을 거야· 네가 무슨 일을 겪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 믿고 맡겨· 내가 꼭 해결할 테니까···
그리 말한 뒤 풀레임의 팔과 다리 를 업기 편한 자세로 만든 뒤 등에 업고서 움직였다·
‘살짝 부담은 되는군·’
백유설은 표정을 찡그렸다· 근육을 아예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 에 풀레임의 무게를 지탱하는 것은 온전히 시간 에너지뿐이다·
그의 시간 에너지를 근육으로 치환 하자면 현재 일반적인 청소년보다도 훨씬 약한 상태다·
뛰는 것조차 못하는 연약한 신체라 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래도 데리고 갈 수는 있어·’
등 뒤에 업힌 풀레임은 숨을 쉬지 도 않았고 평상시처럼 시끄럽지만 귀엽게 재잘대지도 않았다·
그것이 퍽 싸늘하게만 느껴져서 가 슴이 서늘했다· 이대로 영영 그녀를 구할 수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하는 공포감에 사로잡힌 것·
“···찾았다·”
젤리엘 역시도 복도마다 자신의 흔 적을 표시해 두었다· 하이 엘프를 상징하는 나뭇잎이 곳곳에 떨어져
있던 것이다· 한 번 왔던 길을 또다 시 가지 않기 위함과 돌아가는 길 을 헷갈리지 않기 위함이다·
풀레임을 구출하고 나니 의문점은 더더욱 커졌다· 이렇게나 조심성이 많은 그녀들은 대체 무엇에 당했나·
마지막으로 풀레임이 가리키고 있 던 손가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복도를 따라서 한참을 걷다 보니 왕궁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 나타났 다· 왕궁은 네모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곳은 그 중심부였다·
외부는 커다란 정원이었는데 중앙 에는 호수가 있었고 그 위로 나룻
배를 띄워 연인들이 포옹하거나 키 스를 하는 등의 모습을 볼 수 있었 다·
물론 그들은 모두 연애를 하던 도 중 멈춰 버린 상태였지만·
“행복해 보이네·’
왕궁에 들어와서 느낀 점은 행복 이었다·
모두가 행복한 채로 멈춰 버렸다·
이 왕궁의 주인은 누구일까· 도대 체 누구길래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 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었던 걸까·
“···찾았다·”
호수의 산책로를 따라서 한참이나 걷던 백유설은 저 멀리에 서있는 키 큰 소녀 한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미인이 넘쳐나는 이 장소에서도 그 녀들은 유난히도 빼어난 외모를 하 고 있으니 못알아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옷차림도 간편해 보이지만 현대적이며 비싼 티가 줄줄 흐르는 장비를 착용하고 있으니 눈에 딱 띄 었다·
“뭐야 대체····”
멀리서 바라볼 때부터 위화감이 들 었는데 젤리엘에게 가까이 다가가 니 그 위화감은 커졌다·
젤리엘 역시도 풀레임과 마찬가지 로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던 것· 그러나 그녀가 가리킨 장 소에도 여전히 사람밖에 없었다·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과 턱시도를 입은 사내 웨이터복을 입은 소년까 지···· 그냥 왕궁이라면 어디에서 든 볼 수 있는 흔한 사람들이었다·
풀레임을 조심스레 내려놓은 백유 설은 소녀들을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 잘 들어· 시간 에너지를 너희들에게 흘려보내서 움직임을 내가 제어할 거야· 간단히 말해서 너희들의 다리를 내가 움직인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믿고 맡기면 돼· 알겠지? 대답은 못하겠지만···
풀레임과 젤리엘의 양손을 붙잡고 서 은색 기운을 흘리スト 서서히 그 녀들의 몸이 조금씩 정상적으로 돌 아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은세십 일월이 했던 것처럼 완전히 그녀들 의 시간을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
‘의식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백유설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 다· 그러자 소녀들이 그의 동작을 정확히 따라하는 것처럼 발을 디뎠 다·
이제 그녀들을 데리고 걷는 것까지 는 가능하다· 그만큼 부담이 심해진 덕분에 다양한 동작을 할 수 없었고 양손으로 그녀들을 붙잡고 있어야만 했기에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대처 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빨리 탈출하자· 다음은 나중에 생 각하는 거야·’
보폭을 맞추느라 뛰는 것은 불가능 하다· 백유설은 정원을 빠져나가기 위해 한 걸음 또 한 걸음 신중하게 걸었다·
왕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정원의 출구에 도착했을 때 백유설은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어?”
문이 닫혀 있었다· 그 거대한 철창 이 굳건히 닫힌 채 공간을 틀어막고 있었다·
‘분명 올 때까지만 해도 열려 있었 는데?’
이곳에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백유설밖에 없다· 그가 하지 않았으 니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설마 시간의 파수꾼이?’
심장이 서서히 달아오르는 것을 느 끼며 백유설은 양옆을 휙휙 둘러보 았다· 어디에도 특이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드레스의 여인 턱시도의 사내 나 룻배를 모는 사공 와인을 나르는 웨이터와 심부름하는 소녀 문을 지 키고 있는 갑옷의 기사들····
그러던 도증 위화감이 들었다·
철창 너머로 보이는·
저 웨이터·
홀에서도 보았고 아까 호수에서도 보았다·
‘왜 웨이터가 정원에 나와있는 거 지?’
그런 의문이 드는 순간 웨이터가
백유설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짓더니 걸음을 돌려 반대쪽으로 사라졌다·
····
백유설은 서둘러 철창에 다가가 문 을 걷어찼으나 현재의 시간 에너지 로는 철창에 흠집 하나 낼 수 없었 다·
“이런 젠장!”
약해진 몸으로는 철창문을 지나칠 수 없었다·
‘아까의 그 웨이터가··· 시간의 파수꾼이라는 건가?’
그것의 정확한 목적은 모르겠으나 백유설은 이곳에 가둬두려는 것만큼
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젠장·”
환자보다도 약해진 신체 능력·
모든 능력 사용 불가·
심지어 소녀 두 명을 양손에 꼭 잡고서 왕궁 내부를 자유로이 움직 이는 시간의 파수꾼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뭐든 쉽게 될 리는 없겠지·’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백유설은 침착하게 심호흡 을 할 수 있었다· 자신이 불안해하 는 티를 낸다면 아예 움직이지도 못 하는 소녀들이 겁을 먹을 수도 있었
기 때문이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고·”
멈춰 버린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지옥의 술래잡기· 백유설은 결코 술 래에게 잡힐 생각이 없었다·
“이런 내기에서 져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