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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옛시조의 왕도(2)
“별것도 아닌 게·”
털썩! 두 소녀를 내려놓으며 땀을 닦는 백유설· 옛시조의 왕도라고 불 리던 ‘백야가람’은 이미 풍비박산이 나 있었다·
목적지까지 일직선으로 쭉 달렸으 면 이 정도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왠지 경쟁심이 들어서 도시 이곳저 곳을 들쑤시다 보니 아예 폭삭 무너 져내린 것!
“아〜 간만에 재밌얽!”
퍽! 빡!
풀레임과 젤리엘이 눈물 가득 고인 눈동자로 백유설의 뒤통수를 후렸 다· 그가 도시 전체를 상대로 신나 는 술래잡기를 하는 동안 도대체 몇 번이나 심장이 철렁했는지 모르 겠다·
“우씨 주먹만 아프네····”
백유설은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소녀들의 주먹 정도로는 이제 아프
지도 않았다·
“그래도·· 어찌저찌 무사히 도착
했네· 왕궁까지·”
풀레임은 후들후들 떨리는 자리에 억지로 힘을 줘서 일어섰다·
백야가람의 중심부·
마치 탑처럼 높게 솟아오른 이곳 왕궁만큼은 완전히 폐허가 된 도시 에서도 유일하게 멀쩡한 모습을 유 지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았을 땐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가까이 와서 목도하니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뭐야? 뭔가에 막혀서 들어갈 수가
없어·”
왕궁 근처로 다가가려던 풀레임은 마치 투명한 벽으로 가로막힌 듯 앞으로 나아갈 수 없자 고개를 갸웃 했다·
단순한 투명벽도 아니다· 그냥 다 가가려고 발을 뻗으면 중력에 의해 뒤로 밀려나는 느낌이었다·
“뭔가에 막혔다고?”
백유설도 그것까지 예상하지 못했 기에 천천히 왕궁에 다가갔다·
손을 가져다 대니 정말로 밀어내 는 듯한 묵직한 감각이 느껴졌다·
-시간의 힘이로군· 왕궁 전체의 시
간을 얼려두었어· 네가 서 있는 그 곳이 그 경계선이다·
,,우왓!,,
이번에는 은세십일월이 현신하여 모습을 드러내자 풀레임이 화들짝 놀라서 물러났다· 젤리엘도 적잖이 놀란 모습이나 이번에는 티를 내지 않았다·
“시간을 얼리다니· 진짜 어지간히 중요한 뭔가를 봉인해둔 모양이네 요· 이거 슬슬 입질이 오는데요·”
-그래··· 이곳에서 유난히 시조 마법사님의 기운이 많이 느껴지는구 나· 어째서 이런 장소를 여태까지
발견하지 못했는지 의문이군·
“서리구릉의 중심부 지하에 위치해 있어서 그런 것 아닐까요?”
-그럴 리가· 서리구릉은 나도 종종 들르곤 했다· 단순히 지하에 위치해 있다면 나도 알아차렸을 것이야· 아 마도 특정 조건을 달성해서 커맨드 를 입력해야 이 공간으로 올 수 있 는 모양이로군·
“커맨드라··· 확실히·”
바나륨 석판 그중에서도 시조의 유적지로 향하는 지도를 가려내는 것은 온전히 연금술사의 몫·
그 수많은 원석 중에서도 하필이면
알테리샤에게 들어가고 그녀가 의 문을 품은 사이 타이밍 좋게 백유설 과 만나게 되어 그의 손에 들어오게 될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정말 극악이라고 봐도 좋으리라·
‘회공시월이 아직 이곳을 찾지 못 한 이유가 있었군·’
백유설은 시간이 멈춰 버린 경계선 에 손을 뻗었다·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시간의 경계를 바라보던 은세십일 월은 수염을 쓰다듬더니 씨익 미소 지었다·
-문제없다· 애당초 시간의 힘을 지
닌 나에게는 별로 어려울 것도 없 군· 장소를 발견하는 게 어려운 것 이ス1 찾기만 하면 얼마든지 출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렇다면···
-다만 시간막을 전부 거둘 수는 없다· 멈춰버린 시간 속을 직접 걸 어 들어가서 견뎌내야만 한다는 의 미다· 자신 있나?
은세십일월은 백유설 혼자 들여보 낼 생각으로 살짝 겁을 주었으나 그것을 먼저 눈치챈 풀레임과 젤리 엘이 서둘러 대답했다·
“자신 있어요!”
“갈 수 있습니다·”
-아니····
예상했던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은세십일월은 잠시 당황했으나 백유 설이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한 숨을 내쉬었다·
-그래 좋다· 견딜 수 있는 시간은 3시간이 고작이다· 그전까지 안에 들어가서 원하는 것을 찾고 나오거 라·
“맡겨만 주세요·”
-나는 여기서 너희들의 시간을 흐 르도록 유지해야 하니 남겠다· 만약 3시간이 지나도록 나오지 못하면 내
힘이 복구되기 전까지는 그곳에서 시간이 멈춘 채 정신만 멀뚱멀뚱 돌아온 상태에서 보내야 하니 주의 하도록· 그건 굉장히 고통스러운 시 간이 될 테니까·
그건 좀 힘들겠는데····”
-뭘 그러나· 그것보다 위험한 건 연결이 끊기는 상황이다· 내가 내부 에서 너희를 찾지 못하면 영영 시간 이 멈춰 버린 채 돌아올 수 없으니 마법을 사용하지 않도록 단단히 주 의해라· 특히 점멸은 절대 사용하지 말도록· 너의 점멸은 시간에 간섭하 는 힘이라 연결이 끊겨버릴 위험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 으 ”
—ロ ·
그렇게까지 위험할 줄은 몰랐는데·
고개를 슬쩍 돌려보니 젤리엘과 풀 레임도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그래봐야 멈춰 버린 시간 속에 위험한 건 없겠죠?”
-모르는 소리를· 중요한 것을 보관 하는데 시간만 멈췄겠나? 당연히 시 간의 파수꾼이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놈 쎕니까?”
-본래의 너라면 충분히 당해낼 수 있겠지만 글쎄· 점멸을 사용하지 않 으면 아직 장답할 수 없겠군·
“검기까지는 되겠죠?”
-···그것까지는 허용하겠네· 그래 도 너무 오래 유지하지는 말도록 해·
“그것만이라도 된다니 다행이군요· 그 시간의 파수꾼이라는 건 어떻게 생겼습니까?”
케르베로스 같은 외형을 상상한 백 유설이었으나 은세십일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모른다· 다만 시조 마 법사께서 중요한 물건을 이런 식으 로 보관한다고 알고 있을 뿐· 그러 니 내부에서는 항상 신경을 곤두세 우거라·
“후우 알겠습니다·”
그래도 시간의 파수꾼이 존재한다 는 사실을 들은 것만으로도 큰 수확 이다· 놈이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다 는 것도 알았으니 여차하면 신체 능력으로 도주하는 것도 고려해 봐 야 할 것이다·
‘점멸을 못 쓰더라도 이제 내 달 리기 속도는 마음만 먹으면 치타를 능가할 정도니까·’
싸우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될 것이 다· 그리 굳게 마음 먹은 백유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가 봅시다·”
-부디 무운을 빌겠네·
은세십일월이 양손을 펼쳐서 은색 빛의 기운을 끌어모으기 시작하자 젤리엘과 풀레임 백유설은 서로를 바라보고서 고개를 끄덕인 뒤 한 걸 음 앞으로 나아갔다·
우웅!
물컹이는 감촉을 통과하는 듯한 느 낌이 들더니 허공에 메시지가 떠올 랐다·
[멈춰 버린 옛시조의 왕궁에 입장 하였습니다」
[행운을 빌겠습니다 백유설·]
* * *
시간이 멈춘 궁전이라고는 들었으 나 이곳에 살아 있는 생명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감히 예측한 백 유설이었다·
하지만 그런 예측을 건방지다고 비 웃기라도 하듯 궁전에는 살아 숨 쉬는 생명으로 가득했다·
다만·
모두가 멈춰 있었을 뿐·
“이건···
백유설도 살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 보았기 때문에 사색이 되었다·
궁전은 말 그대로 옛 시절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런데· 그 옛 시절이 하필이면 무 도회가 열리는 날이었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도시에도 멈춰 버린 사람들은 있었 다· 매혹 석화의 힘에 당해서 멍하 니 궁전을 바라보다 굳어버린 이들·
궁전 내부는 그보다 더 심했다·
이제 막 무도회장에 도착해서 행복
한 표정으로 자신의 기사님에게 에 스코트를 받는 아가씨와 뛰어노는 아이들 정원에 나와 알콩달콩 산책 을 하는 남녀와 근엄한 표정으로 궁 전을 지키는 병사들·
천천히 궁전을 들어서니 내부는 더 가관이었다· 한때 이곳은 굉장히 굉장히 번성했던 국가였는지 궁전의 크기는 어마어마했고 무도회는 그 야말로 현재의 아돌레비트를 보는 것처럼 휘황찬란하기 그지없었다·
모두가 행복한 표정을 지은 채 춤 추는 무도회장의 얼어버린 단면을 보게 된 백유설과 두 소녀는 굳어버 린 얼굴로 천천히 내부를 거닐었다·
궁전 전체를 무도회장으로 사용하 였던 것일까 여기저기 춤추는 연인 이 없는 장소가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 커플이 많았었다니 믿기지 않는 시대였다·
“뭔가 소름끼쳐·”
와하하하!
어디에선가 행복이 넘치는 웃음소 리가 들려온 듯한 착각이 일어서 풀 레임은 오싹해졌다·
천국이라는 이름의 지옥을 표현하 자면 바로 이 장소가 아닐까·
다만 백유설은 궁전의 다른 이면
을 생각하고 있었다·
얼어버린 행복의 무도회장 속에서 도 신경을 곤두세운 채 자신의 목 적을 잊지 않는다·
‘이곳에 시간의 파수꾼인지 지킴이 인지 뭔가가 있다는 말이지···
놈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가·
시조 마법사는 대체 무엇을 숨기고 자 이 공간을 통째로 얼렸는가·
‘점멸을 사용할 수 없으니 답답하군·’
궁전을 순식간에 휙휙 뒤지며 돌아 다니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니·
“공간이 너무 넓어 아저씨·”
“응· 여기서는 흩어지는 게 좋겠어· 3시간 안에 도저히 둘러볼 수 있는 크기가 아니야·”
소녀들의 제안에 백유설은 잠시 망 설였다· 내부에서는 마법조차 사용 할 수 없는데 적을 만나기라도 하 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지금 그런 거 따질 때야?”
“벌써 30분이 지났어· 아직 궁전은 조금밖에 못 둘러봤고· 2시간 뒤에 왕궁의 홀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모두 흩어지자·”
“···그래· 꼭 시간까지 돌아와야
한다· 한 명이라도 안 오면 나도 돌아가지 않을 거니까·”
“난 약속 어긴 적 한 번도 없는 거 알지?”
“장사꾼에게 시간 약속은 생명이나 다름없어·”
젤리엘은 손목시계의 알람을 작동 시키며 여유롭게 웃으며 오른쪽으로 걸어갔고 풀레임은 팔을 마구 흔들 며 왼쪽으로 떠나갔다·
백유설은 한숨을 푹 내쉬며 정면을 향해 걸었다·
‘그래 차라리 잘됐지· 시간의 파수 꾼이라는 놈이 나만 쫓아온다면 그
걸로 충분한 거야·’
만약 자신이 위협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된다면 소녀들은 오히려 안 전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백유설은 뛰어난 신 체 능력을 이용하여 전력 질주를 하 기 시작하였다· 왕궁을 효율적으로 둘러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속도 를 올리는 게 중요해 보였다·
휙 휙! 주변의 모든 풍경이 빠르 게 스쳐 지나가며 그의 위치가 순식 간에 이동되었다·
왕궁 벽을 타고 고층으로 향하는 것은 기본이요 성 꼭대기는 물론
시계탑이나 종탑 등 인상적인 장소 는 하나같이 모조리 뒤져보았다·
‘뭐가 안 보이는데?’
그러나 느껴지는 것도 없고 특별 히 보이는 것도 없다· 시조 마법사 는 대체 여기에 무얼 숨겨놓았는가?
2시간은 너무나 빠르게 흘러버렸 고 어느덧 약속 장소로 집결하는 시간이 되었다· 백유설은 땀이 살짝 맺힌 뺨을 닦으며 왕궁 홀로 돌아오 는 수밖에 없었다·
“···젤리엘? 풀레임?”
그러나·
약속 장소로 모이자고 했던 두 소
녀가 모두 보이지 않았다· 멍청하게 도 3분 정도 더 기다리며 소리쳐보 았으나 응답조차 없다· 이런 상황에 서 장난이나 칠 아이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백유설은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아 즉시 바닥을 박차며 도약했다·
“제길! 아무나 응답해! 어디에 있 는 거야!”
궁전은 지나치게 넓었고 백유설은 목소리에 마나를 실을 수 업는 탓에 멀리에 있다면 들을 수 없을 것이 다·
하는 수 없이 궁전을 구석구석 모 두 뒤져보려고 하는데 갑작스레 무 언가가 그를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
졌다·
‘아 안 돼!’
슈우우욱!!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 어가듯 궁전 바깥으로 끌려와 튕겨 져 나온 백유설은 낙법을 시전하여 정면으로 돌진했으나 무형의 벽에 가로막혀 그럴 수 없었다·
-진정하거라! 백유설!
“젠장···!”
쿵! 시간의 경계 바깥을 주먹으로 내리치자 은세십일월이 뒤에서 다가 와 잔뜩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두 아이는··· 도중에 놓치고 말 았다· 강렬한 마법의 사용 조짐이
보이더군· 그 아이들이 내 조언을 섣불리 무시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 럴 정도로 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것 이다·
그에 백유설은 창백한 표정이 되었 다·
“설마··· 연결이 아예 끊어져 버 린 겁니까?”
-유감이지만 그렇다네·
“젠장·”
쿵·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며 백 유설이 탄식하자 은세십일월이 한숨 을 내쉬며 말했다·
-방법이 없지는 않네· 나는 잠시간
휴식을 취해야만 하나··· 네가 멈 줘버린 시간 속에서도 움직이는 능 력을 어느 정도 터득한다면 어느 정도 활동은 가능할 거다·
“그 그렇다면···
-너와의 연결을 최소한으로 유지 한 채 안으로 들어가서 아이들을 터치하면 곧바로 시간을 연결하겠 다· 단 명심해야 하는 점이 하나 있다· 결코 시간의 파수꾼에게 터치 당해서는 안 된다· 나는 내부로 들 어갈 수 없으니 너마저 놈에게 당하 면 그것으로 모든 게 끝장이匸卜·
“시간의 파수꾼은 본 적도 없어요· 대체 왜 그 아이들만 노린 겁니까?”
-글쎄··· 놈에게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는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 만 모두에게 공평하게 쫓아갔을 것 이다· 다만 두 소녀만 당했다면 이 유가 있겠지· 그건 차차 네가 떠올 리도록 해라· 내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해서 너만큼은 파 수꾼으로부터 벗어났는지·
주먹을 불끈 쥔 백유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시조 마법사의 유 산이고 뭐고 아무래도 좋다·
제발 두 아이들을 구할 수 있다 면·
뭐라도 바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 때문에 이렇게 됐어· 책임을 져야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