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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시조 마법사의 유물(2)
얼떨결에 백유설의 여정에 함께하 겠다고 못을 박아버린 젤리엘은 짧 은 티타임을 빠르게 끝내버린 뒤 자 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문에 기대고 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고선 뒤늦게 머리칼을 쥐어뜯 으며 후회했다·
“내가 미쳤지····”
항상 철두철미하고 어떠한 사태에 서도 결코 당황하지 않은 채 냉혹하 고 철저한 판단만을 내려오던 천하 의 젤리엘이 어쩌다 이렇게 망가졌 을까
순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스케 줄을 이틀이나 미뤄 버린 채 난데없 이 던전 공략에 참석하겠다니·
이 말을 전해 들은 부하직원들에게 는 이미 비상이 걸려서 여기저기 전 화가 오고 난리도 아니었다·
쿵쿵쿵!
-아가씨! 아가씨! 대답 좀 해주십
시오! 아가씨!
밖에서는 벌써 비서들이 몰려와 젤 리엘의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에 소 리를 꽥꽥 질러댄다· 저들로서도 이 미 약속을 전부 잡아뒀는데 갑자기 젤리엘의 독단으로 모조리 취소했으 니 아주 죽을 맛일 것이다·
-아가씨이이이!!
예전 같았다면 사무실 내에서 저렇 게 소리를 지르는 행위 자체를 감히 젤리엘이 용납하지 않았으나 이제 는 죄인 신세가 되었기에 아무런 말 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쥐 죽은 듯 사무실에 틀어박 혀 있는 것 외에는·
’···일단 저질렀으니까 준비를 하기는 해야지 ;
백유설은 앞으로 1시간 뒤에 출발 할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충분히 휴식을 취하라고 일러뒀으니 젤리 엘은 고작 1시간 남짓밖에 되지 않 는 짧은 시간 사이에 이틀간의 업무 를 모두 인수인계해야만 했다·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선 젤리엘 은 통신구를 조작하여 직원들을 한 꺼번에 호출했다· 그와 동시에 다른 한쪽 손을 바삐 움직여 서류철을 정
리해 꺼내는 것은 덤·
’···바나륨의 양산 버전에 대한 연구 기획서도 작성해야 하지 참·’
생각보다 할 게 많다· 하는 수 없 이 눈치가 조금 따갑더라도 문 밖 에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문을 두드 리고 있는 비서를 전부 불러내는 수 밖에 없었다·
잠시 뒤 젤리엘의 사무실에는 10명 이 넘어가는 고위 간부급으로 들어서 게 되었는데 난데없이 불려온 그들 은 주말 이틀간의 업무를 모두 인계 받게 되자 황당함을 금치 못하였다·
“아니 아가씨· 놀러 가십니까?”
“급하게 던전 탐사를 할 일이 생겼 어요· 안 그래도 이번 일 때문에 솜 씨 좋은 마법전사 출신 탐험가를 몇 몇 빼두었으니 그렇게 알아두세요·”
“허허··· 참·”
간부들은 그런 젤리엘의 모습에 황 당해하면서도 묘한 기분을 받았다·
예전의 냉혈한 사이코패스 아가씨 보다는 그래도 갑작스럽게 제멋대 로 구는 저런 아가씨도 나쁘지 않았 으니까·
이미 10대는 다 지났지만 뒤늦게 철없는 10대의 사춘기가 찾아오기 라도 한 것처럼 보여서 어떤 면에서
는 흐뭇함을 느끼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평상시에 이것들을 모 두 혼자서 처리하셨군요·”
젤리엘이 넘겨주는 업무의 양이 상 상을 초월했기에 모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머리로는 인지하고 있었으나 이렇게 막상 눈으로 보니 까 확실히 체감이 되는 것·
“아뇨· 이건 주말 동안만의 업무라 서 별로 많지는 않아요· 아무튼 저는 준비하러 가 볼테니 부탁드릴게요·”
달칵!
그리 말한 뒤 휑 사라져 버린 젤 리엘·
간부들은 이게 얼마 되지 않는 양 이라는 말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평소에··· 잠을 주무시기는 하시 는 건가?”
“그 그러게· 퇴근하는 모습을 마지 막으로 언제 봤는지 기억도 안 나는 데···
그제야 그들은 사무실 구석 한편에 고이 접힌 담요와 안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여차할 때 사무실 의 자에 앉아 담요를 덮고 쪽잠을 자면 서까지 업무를 처리해왔던 것이다·
“평소에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되는구먼·”
저렇게까지 일에 미쳐 사는 아가씨 라면 가끔은 자유로이 개인행동을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나을지도 모 르겠다·
* * *
젤리엘이 서리구릉 탐사를 위해 탐 험가를 소집흐卜자 총 일곱 명의 베 테랑 마법전사들이 모였다·
애당초 연꽃객잔에서 비상사태가 발발했을 때를 대비해 30초 만에 출동하는 번개조와 3분 만에 출동하 는 3분 대기조도 있는 만큼 1시간
이라는 시간은 7명의 탐험가가 모이 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일곱 명의 탐험가는 특이하게도 모 두 수인족이었는더1 3명은 늑대 수 인이었으며 2명은 사자 수인 2명은 호랑이 수인이었다·
그들이 가진 공통점은 바로 서리 구릉 출신이라는 것·
서리구릉의 수인족이 인간을 혐오 하는 사회가 형성되어있기는 했으 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부족의 품에서 벗어나 하월평원으 로 나온 수인들의 대부분은 처음으 로 진실을 맞이하게 되는데 어릴
적부터 귀에 때가 앉도록 듣던 ‘모 든 인간은 악하다’라는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인간들의 문화와 기술은 서리구릉 이라는 좁디좁은 우물 속에서만 살 아오던 수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고 자연스럽게 하월평원의 수 인족에게 풍요로운 자본을 풀어놓은 별구름 상회에 흡수된 것이다·
즉 그들은 별구름 상회에 대한 충 성심이 꽤 높았다·
별구름 상회장에게 왕이라고 부르 라고 시킨다면 정말 폐하라고 곧바 로 외칠 수도 있을 것이다·
충성심이 그럴 정도이니 젤리엘 아 가씨 역시 그들이 충성하고 매우 아 끼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런 와중·
“백유설입니다· 서리구릉의 지형에 능하다고 들었습니다· 잘부탁해요·”
웬 연놈 하나가 굴러 들어와서 아 가씨 옆에 착 달라붙어 있는데 어 디 꼴이 좋게 보이겠는가?
심지어 아가씨는 저 백유설인지 뭔 지 하는 놈■이 싫지 않은 듯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는 했다·
아가씨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보호해왔으나 저런 눈빛을
보인 적은 처음이다·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저 썩을 놈의 인간이 아가씨를 홀 라당 흘렸구나!’
7인의 수인 모두 그런 생각으로 눈빛을 활활 불태우고 있자 백유설 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연홍춘삼월의 가호를 통해 그들의 투쟁심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온다·
‘왜들 저래···?)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아무튼 현 지인 출신이 안내를 해준다니 백유 설로서는 마다하지 않을 이유가 없 었다·
“뭐··· 좋습니다· 바로 출발하죠·”
젤리엘의 장비는 예전에 비해 훨씬 수수해졌다· 화려하고 값비싼 장비 를 전신에 치장하고 다니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때는 아마 과시욕이 머 리를 지배했던 탓이 컸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젤 리엘의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¹⁴평원에서는 ‘호른’을 타고 다니는 게 좋아·”
“호른?”
“호른이라면··· 헉 설마 내가 아 는 그 백마?!”
백유설이 고개를 갸웃하는 와중 풀 레임이 먼저 알아듣고서 화들짝 놀 랐다·
“넌 뭔지 알아?”
“당연하지! 아이테르 대륙의 삼대 명마 중 하나로 불리는 명품종이잖 아· 단순 교배로는 절대 새끼를 치 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이걸 설마 열 마리씩이나····”
젤리엘의 장비는 분명 수수해졌다· 평범한 마법사 망토에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지팡이와 작게 감춰진 보 호 마법 인챈트 액세서리까지·
눈에 띄지 않도록 최대한 꾸민다고 는 했지만 역시나 어딘가에서 돈이 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무작정 사치를 부린 게 아니었기 때문에 젤 리엘도 할 말은 많았다·
“알다시피 평원은 지형이 험산해서 평범한 말이 그냥 뛸 수가 없어· 중 심부로 들어갈수록 살아 움직이는 넝쿨이 자꾸만 발목을 낚아채고 구
름 아래에 피어난 ‘도력화에 고여 있는 이슬 우박이 떨어져 내리거든· 게다가 지하에서 꿈틀거리는 생명체 들의 기척 때문에 평범한 말은 근처 에 다가가지도 못해·”
“흐음···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 도 하네·”
하월평원에서 말을 타고 다녀본 적 은 없었기에 그런 줄은 몰랐다·
‘말을 타보는 건 또 처음이네·’
판타지 하면 보통 기마를 먼저 떠 올리고는 했지만 아이테르 월드가 어디 보통의 판타지던가·
충분히 발달한 마도공학 덕분에 말
은커녕 구식 마차도 거의 타본 적이 없었다·
“말을 탈 줄은 알지?”
당연히 탈 줄 몰라야 정상일 것이 었으나 스텔라 아카데미에서는 교양 과목으로 기마를 가르친다·
풀레임은 기마를 배워두었기 때문 에 익숙하다는 듯 호른의 등에 탑승 했다· 백유설은 비록 기마가 처음이 었으나 뭔가 느낌이 될 것 같아서 훌쩍 위로 올라타자 곧장 안정적인 자세가 되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그냥 저 일곱 명의 수인들이 하는
자세를 똑같이 따라 하면 그만이었다·
그들이 말을 어떤 식으로 제어하는 지 다리를 어떻게 이용해서 말을 붙잡아두고 중심을 유지하는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금세 이 해하고 따라 할 수가 있었다·
“쉽네·”
“···말에 타보는 건 지금이 처음 인 거야?”
“내 발이 더 빠른데 딱히 그럴 필 요가 없었지·”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풀레임 이 옆에서 작게 “아하·”라며 중얼거 리는 모습에 젤리엘은 눈썹을 꿈틀
거렸다·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무의식적으 로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쬐끄만 여자는 이상하게도 사소한 행 동 하나하나가 귀여워서 신경 쓰인다·
그런 자연스러운 애교는 젤리엘로 서는 감히 시도조차 해볼 수 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에 묘하게 부럽기 도 하고··· 질투심도 들었다·
“그럼 저희가 먼저 가겠습니다·”
4명의 수인이 출발한 뒤 3명의 수 인은 백유설 일행의 뒤쪽을 따라왔 다· 혹여나 그들이 뒤처지면 인솔하 기 위해서였다·
그런 걱정은 필요도 없었다는 듯이 백유설과 풀레임은 하월평원의 복잡한 지형에서도 시원스럽게 달려나갔다·
말에 타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이 런 상쾌한 기분이라면 자주 타도 괜 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주변의 풍경이 휙휙 스쳐 지나갔다·
봄바람은 시원하고 비에 젖은 듯 한 공기 중의 습한 기운은 촉촉하게 코끝을 적셨다·
그렇게 한 시간쯤을 달렸을까 저 멀리 거대한 벽같은 것이 시야에 들 어오기 시작하였다·
아니 정확히는 벽이 아니었다·
마치 벽처럼 솟아 있는··· 거대한 하나의 산맥·
구름마저 뚫고 솟아 있는 그 산맥 의 꼭대기가 바로 하월평원에서 가 장 위험한 장소 ‘서리구릉’·
”저곳입니다· 멀리서 보면 이만큼 이나 절경이 따로 없지요·”
“오···
서리구릉의 또다른 이름은 ‘세계의 벽’이었는데 그 명칭을 곧바로 납 득할 수 있을 정도로 위용이 굉장하 였다·
“처음 가는 인간은 고산병으로 고 생을 하기도 하지요· 그런 복장으로
는 추위를 이기기 힘들 텐데 괜찮겠 습니까?”
은연중에 무시하는 듯한 말투였으 나 그런 건 이미 준비해 두었다·
“문제없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요· 저 둘의 복장은 제가 세심 하게 준비했으니까요·”
“아 그렇군요· 아가씨께서 준비하 셨다면···
겉보기엔 별것도 없어 보이는 코트 였는데 사실은 방한 효과가 확실하게 보장되는 명품 중의 명품 로브였다·
특히 백유설이 자연천기지체의 특 성상 추위를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탄다는 특성까지 잘 알고 있는 데다 가 손끝이 시리고 차가운 증세가 있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젤리엘의 재력으로 어지간히 평범한 것을 준 비했을 리는 없었다·
째릿!
젤리엘이 묘하게 노려보는 듯한 느 낌에 늑대 수인족 마법전사는 귀와 꼬리를 내리고서 풀이 죽었다·
아가씨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그들이었기에 그녀에게 미움받는 것 만큼은 싫었기 때문·
‘저 인간이 뭐라고···
난데없이 굴러들어온 백유설이 원
망스럽기만 했으나 어쩔 수 있겠는 가· 그들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아가 씨의 호위이자 길잡이· 그저 시키는 대로 명령받은 대로 하는 것 외에 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