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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각성(2)
검붉은 천둥벼락 수백 다발이 세상 을 찢어버릴 듯이 내리치고 있었고 죽음을 먹는 새 수십 마리가 창공을 비상하며 대지의 모든 영혼을 흡수 하는 와중에도·
뇌운 심장부·
연녹탑의 정상·
쿠르릉···
번쩍-!
벼락이 자신의 바로 지척에 떨어지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녹탑주 토 아 레그론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뜨지 않았다·
그의 뺨에는 피가 흥건하게 흘렀 고 오른팔은 번개에 지져져서 익는 냄새가 나고 있었거늘 고통스럽다는 표정 한 번 짓지 않는다·
“오오! 의지가 대단히 충만하군요! 참으로 고결합니다 고결해! 그 고 통을 모두 짊어지고 인내하는 모습 에 저는 그만! 반해버리고 말았습니
다!”
연녹탑의 상공에는 흑색의 로브를 펄럭이며 부유하는 트와일리스가 양 팔을 펼친 채 서 있었다·
그의 양손 끝에서 발광하는 검붉은 마법진은 이미 창공을 거의 다 뒤덮 기 시작하여 도저히 다른 마법이 파고 들어갈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마법으로는 소용없다·’
단순한 인간의 주문과 마법으로는 저것을 꿰뚫을 수 없다· 인류의 정 점에 오른 마법사 여럿이 작정하고 만들어낸 최강의 마법진이다·
제아무리 9클래스의 마법사라고 하
여도 혼자의 힘으로 저것을 깨부술 수는 없다·
‘평범한 마법이라면 말이지·’
토아 레그론은 서서히 눈을 떴다·
인류의 의지를 상회하는 또다른 초월적인 ‘어떤 힘’을 사용한다 면····
저 마법 또한 가뿐하게 꿰뚫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십이신월의 힘·
또는··· 이 세계를 마법의 시대로 만들어버린 시조 마법사의 초월적인 힘이라든지·
토아 레그론은 십이신월의 힘을 사 용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조 마 법사의 힘이라면 어느 정도 흉내 내는 것도 가능했다·
‘흉내일 뿐이야·’
이면 세계로부터 힘을 빌려오는 것 이 아닌 이면 세계를 진정으로 지 배흐】는 능력·
만약 그 세계를 완벽히 지배할 수 있다면 시조 마법사와 동급의 능력 을 지닐 수도 있겠으나 현재 토아 레그론의 지배력은 1%도 채 되지 않는다·
돌이켜 생각하면 고작 이 정도 능
력으로도 이미 여타의 9클래스 마법 사를 초월할 만한 경지를 이룩해 냈 다는 사실이었으나····
‘이 정도로는 부족해·’
훨씬 더 강한 힘이 있어야만 흑마 신교의 사제 트와일리스의 마법을 부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트와일리스의 의도 이기도 했다·
만약 억지로 이면 세계에 지배력 을 행사하려고 했다가는 그대로 자 멸해 버릴 게 뻔했으니까·
‘죽는다·’
그걸 알면서도 토아 레그론은 자신
의 흑마력을 모두 개방할 수밖에 없 었다·
화악-!
검은색 안개가 세상을 뒤덮으며 마 침내는 뇌운마저도 스멀스멀 잠식해 나가자 트와일리스의 표정이 기괴 하게 뒤틀렸다·
“오오 오오오··· 이 힘이로군요! 흑마신교주께서 탐내셨던 더럽고 추악하지만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바로 그 힘···!!”
쿨럭! 토아 레그론의 입에서 피가 한 움큼 흘러나왔다·
안다· 이미 몸은 예전에 한계를 맞
이했다· 그런 주제에 인류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으니 육신이 소멸되는 정도로는 대가가 싸게 먹힌다고도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놈을 죽여야 한다·’
번뜩! 토아 레그론의 눈에서 안광 이 스산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흑마력이 백마력을 잠식해 나가면 서 그의 이성이 흐트러지고 본능적 인 욕망이 더욱 강렬하게 발산되었 다·
이겨낸다는 감정은 모조리 부수고 싶다는 감정으로·
나아간다는 감정은 지배한다는 감
정으로·
지키고 싶다는 감정은 소유하고 싶 다는 감정으로·
감정이 욕망으로 변질되고 있음에 도 단 하나만큼은 확신했다·
‘저놈을 죽이고 찢어발겨야 나의 스승님을 지킬 수 있다·’
양손에 힘껏 끌어모은 이면 세계의 흑마력을 마법진으로 그려내자 연 녹빛이 섞인 흑색의 룬어가 허공에 각인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꾸드득! 꾸득-!
얼굴에 핏줄이 솟아오르며 토아 레 그론이라는 사람의 형체조차 알아보
기 힘들게 되었지만 외형쯤이야 아 무래도 중요할까·
마지막 순간까지 마나를 끌어모아 서 담는다는 역할만 다한다면 육신 은 그것으로 족하다·
“소용없습니다!”
“···윽!”
그러나 자신의 모든 염원을 담아 서 끌어모았던 마나가 허무하리만치 트와일리스의 뇌운 속으로 서서히 빨려들어가기 시작하자 토아 레그론 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이면 세계! 당신이 정말 그 세계 의 지배자라도 되는 줄 아셨습니까?
하하핫! 어림도 없습니다! 그곳을 진정으로 지배할 왕은 바로 흑마신 교주 단 한 분밖에 없습니다! 당신 은 그저 흑마신교주님의 허락하에 그 세계의 일부를 통치하고 있었을 뿐! 지방자치 영주가 왕에게 대들겠 다고 나서는 꼬라지라니 참으로 우 습군요!”
토아 레그론은 자신의 몸에서 힘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이미 해골과 별다른 바 없을 정도로 쇠약해진 신체였으 나 여기서 가만히 당해줄 수는 없었 다·
“흐읍!!”
주먹을 움켜쥐고 자신의 가슴팍으 로 서서히 끌어당기자 뇌운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연녹색의 마법진이 마지막 저항의 의지를 표한다·
“오호··· 이건 조금 놀랍군 요···· 참으로 고결한 의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최후의 발악일 뿐 이 정도로 트와일리스를 죽일 수는 없다·
···하는 수 없군·’
그는 눈을 질끈 감고서 심호흡을 했다· 고작 육신을 버리는 정도로는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영혼을 바쳐서라도·
“으음? 이 기운은···!”
토아 레그론이 또다시 영기를 끌어 모으자 무언가를 눈치챈 트와일리 스가 눈동자를 부릅떴다·
그때는 이미 늦었다·
토아 레그론의 기류는 멈추지 않을 것이며 끝끝내는 이 공간에 있는 모든 것을 소멸시킬 것이니까·
-그만! 그만둬라 토아!
그 순간·
스승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더 라면 토아 레그론은 틀림없이 자신
의 영혼을 분쇄하였을 것이다·
“이건···!”
황급히 고개를 돌리니 뇌운이 찬 란하게 반짝이는 빛무리와 함께 걷 어지며 그 틈새 사이로 새하얀 백발 의 소녀가 등장하였다·
“아····”
뇌운 사이로 뚫린 구멍 틈새로 햇 살이 쏟아져 내렸는데 그것은 마치 그 소녀만을 위한 한 줄기 축복처럼 만 보였다·
눈부셨다·
여전흐] 그리고 언제나 항상·
그녀는 아름다웠다·
스러져가던 자신의 손을 붙잡아주 었던 그때 그날과 마찬가지로·
“하 하핫! 재미있군요· 고귀한 재 물이 이곳까지 직접 행차하시다니 그녀는 틀림없이 거룩한 희생을 기 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아··· 안 돼!”
스칼렛을 보고서 가장 먼저 반응한 이는 토아 레그론이 아닌 트와일리 스였다· 그는 마녀왕이 나타난 즉시 검붉은 번개 사슬을 뻗어서 그녀를 옭아매려고 했으나·
채앵!!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스칼렛의 뒤에서 등장한 한 명의 기사로 인해 허무하리만치 번개 사슬이 끊어져 버렸다·
번개 사슬이 너무나도 잔혹하게 찢 겨나가는 바람에 마나의 흐름 자체 가 흐트러져버린 트와일리스는 살짝 안색을 찌푸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녀왕과 기사의 등 뒤로 붉은 불 사조의 날개를 펼친 은발의 소녀와 금색 빛무리를 휘날리며 등장한 청 년 역시도 트와일리스의 심장을 두
근거리게 만들었다·
“오오 이 어찌 경사스러운 날이 아닐 수 있을까···· 정녕 신은 내 게 죽복을 내려주시려고 하시는구 나!!”
이 뇌운 속 공간에서 트와일리스는 무적이다· 그러기 위해 8클래스급 마법사의 심장을 수도 없이 많이 쥐 어짜내지 않았던가?
자신이 지배하는 이 공간에 들어온 이상 마녀왕도 삭월탑주도 자연만 물의 체계에서 벗어난 기사도 불꽃 의 선택을 받은 소녀도·
아무도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한
다·
저들 모두를 자신이 처리할 수만 있다면 세계의 균형은 모조리 흑마 신교주의 방향으로 치우칠 터·
“하 진심으로 경탄스럽-”
“시끄럽다 더러운 것·”
그러나 스칼렛의 말 한마디에 갑작 스레 뇌운 바깥에서부터 빛무리가 내리치더니 공간 자체가 뒤틀리며 트와일리스의 복부를 꿰뚫었다·
고작 이 정도의 상처로 죽지는 않 겠지만 육체적인 충격보다도 정신 적인 충격이 훨씬 더 컸다·
,어찌···?!’
뇌운 바깥과 이곳은 완전히 단절된 공간일 터· 그런데 외부에서 생성된 빛의 기둥을 내부까지 침투시켰다 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그것이 마녀왕의 권능이라는 사실 을 알지 못했던 트와일리스는 방금 가볍게 날린 일격이 스칼렛의 모든 힘을 끌어모은 결과였다는 것을 전 혀 알지 못했다·
‘마녀왕은 약해진 게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토아 레그론의 사념은 대 체 무엇인가!’
사념을 거짓으로 전달했나?
그럴 리가 없다·
트와일리스는 살짝 경직된 표정으 로 복부의 상처를 순식간에 치유했 다· 이 무한한 마나가 자신만을 위 해 움직이는 이상 죽을 일은 없다고 자신하고 있었기에 간신히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이거 마녀왕의 힘이 제 상상보다 도 대단해서 놀랐군요·”
“약올리는 거냐? 바로 치료해 버린 주제에 말이야·”
“후후·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당신의 제자는 피를 토해 가면서조 차 제게 상처를 하나도 입히지 못했
습니다· 당신을 진정으로 경외합니 다 마녀의 왕이여·”
마치 자신이 더 우위에 있다는 듯 한 말투에 스칼렛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자신의 역할은 저놈을 공 격하는 게 아니었다·
공간 단절마저도 무시하고서 움직 일 수 있는 이 마력의 힘으로 뇌운 을 흐트러뜨리는 것·
그리고·
“준비됐어 홍비연?”
“···아직·”
“충분하네· 그럼 시작하자고·”
“아 아직이라고!”
그로 인해 저 소녀가 뇌운을 걷어 낼 수 있도록 서포트하는 것·
우습지만 지금 당장 그것이 마녀왕 의 역할이었다·
“자 한번 힘내봐·”
“으읏···「
다짜고짜 홍비연에게 그린 코어가 봉인되어 있는 상자를 건넨 백유설 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홍비연· 내 눈 똑바로 바라봐·”
“자 잠깐····”
“넌 할 수 있어· 알고 있지? 네가
어떤 사람인지·”
“···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는데·”
“차라리 잘됐네· 늘 말했잖아· 나를 믿으면 된다고·”
제멋대로 말하는 저 입을 당장이라 도 틀어막고 싶었으나 이상하게도 마음에 차분하게 놓이고 있어서 그 럴 수 없었다·
홍비연은 그린 코어의 상자를 받아 들고서 천천히 봉인을 해방했다·
그러자 마침내 세상으로 모습을 드 러내는 그린 코어의 진정한 형태·
그것은 구슬의 형태일 줄 알았으나 십육면체의 크리스탈에 가까웠다·
녹색으로 희미하게 빛나는 크리스 탈을 가슴으로 끌어당긴 그녀는 자 신의 마력이 그린 코어를 서서히 불 태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뒤늦게 눈을 뜬 그녀는·
“어 앗···T
자신이 방금 전 뇌운과 전혀 다른 공간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 고서 바보같은 소리를 내고 말았다·
-흠· 그린 코어라··· 이것을 사념 으로 끌어당기다니· 어지간히도 정 신이 나간 여자로군 너도·
굵직하고 중저음에 어쩐지 발랄하
고 활기찬 분위기의 목소리·
일전에 들어본 적 있다·
홍비연은 그곳을 향해 서서히 고개 를 돌렸다·
마치 자신과 똑 빼닮았으나 여성 이 아닌 남성체의 형상을 가진 또다 른 홍비연이 그곳에 서서 그린 코어 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마 주쳤다·
-이야하 오랜만이지?
“누 누구?”
-나야 나· 이러면 기억 안나려나?
화륵!
남성체 홍비연은 순식간에 모습을 바꾸더니 한 송이의 붉은 꽃이 되 어 버렸다·
‘화령꽃·’
기억 못 할 수가 없다·
수백 년 역사의 가문을 통틀어 오 로지 단 한 사람·
전설의 아돌레비트만이 통제했다고 알려진 바로 그 ‘화령꽃’이었으니까·
-그래 그게 바로 나다!
”어떻게···!”
-그날 해적제왕 블랙 벨리즈를 잠 재운 뒤 나의 자의식도 너에게 삼켜
졌지· 기억 안 나는가? 하핫 솔직 히 너의 행보에는 놀라고 있다· 적 하유월조차 흡수해 내다니 말이야!
왜 저 남자가 이곳에 나타났는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그 린 코어를 만지는 순간 상황이 이렇 게 변했으니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도와줘· 그린 코어를 제어해 야만 해·”
-응? 미쳤어? 우린 불꽃이야· 모든 생명을 태우는 불꽃· 그런데 생명을 살리는 나무의 기운을 제어하겠다 고? 차라리 죽여달라고 하지 그래?
“알아· 나에게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어·”
그린 코어를 만지는 순간 깨달았 다·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그린 코어를 무기력하게 태워 버릴 뿐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것을 알아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마지막 순간 자신의 양손을 꽉 쥐 고서 신뢰의 눈빛을 보내던 백유설 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야 사랑이군· 사랑이야·
“놀리지 마·”
-놀리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는 기쁘다고도 할 수 있겠지·
불의 화신은 팔짱을 낀 채로 고개 를 끄덕였다· 표정에는 어딘지 모를 씁쓸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그 아돌레비트도 너만큼이나 대 단한 힘을 지녔으나 사랑이라는 감 정을 알지 못한 채 힘에 취하여 결 국은 몰락하고 말았거든·
“뭐···r
아돌레비트가 몰락했다니· 정말 그 랬다면 왕가가 남아 있을 리가 없 다·
“그건 무슨····”
-뭐 그런 얘기다· 사랑하는 자를 등지고서 혈통을 위해 아돌레비트는 사랑하지 않는 자들과 자식을 가졌 거든· 그 결과 훌륭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자식이 왕국을 세웠지· 아돌레 비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선 택을 후회하다가 숨을 거뒀어·
-그러니까 너를 도울 테니·
불의 화신은 그린 코어가 아닌 흥 비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몸속에서 불꽃이 발 생되어 화신을 향해 모조리 빨려들
어가기 시작하였다·
-너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말도 록 해·
“이건····”
몸에서 불꽃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 진 것을 느낀 홍비연은 저도 모르게 그린 코어를 바라보았다·
현재 그녀의 몸에는 마나가 단 한 톨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더 이상 불꽃을 일으킬 수 없는 중립의 상태가 되었다는 의 미나 다름없었다·
‘이 상태라면····’
그린 코어를 충분히 만지고 또 제 어할 수 있다·
그 생각이 든 즉시 그녀는 그린 코어에 손을 대어 초록빛과 함께 이 공간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쯧쯔 성격도 급하지·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도 못하고·
그러면서도 화신의 표정은 뿌듯하 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고맙다는 인사 마저도 잊어버릴 정도로 급히 나아 가는 그 모습은 이전 세대의 아돌 레비트가 갖지 못했던 것이었으니·
-그 감정을··· 네가 영원히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