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0
77· 흑마타락(4)
어린 시절의 토아 레그론은 꿈 많 은 소년과는 거리가 먼 아이였다·
그에게 있어서 마법이란 중오의 대 상이었다· 하늘을 빗발치는 운석 덩 어리는 그의 터전을 무너뜨렸고 꽈 리를 틀며 타올랐던 불꽃은 그의 가 정을 불살랐으며 세상을 잠길 듯이
차오르던 차디찬 빙산은 마침내 그 에게서 희망마저 앗아갔다·
전쟁 통의 고아가 맞이할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기껏해야 빵 몇 조각 먹겠답시고 좀도둑질을 하다가 어른들에게 걸려 서 불구가 되거나 죽는 정도면 양반 이며 잔혹한 군인들에게 잘못 걸려 서 장난감이 되거나 마법사회에 숨 어 있는 흑마법사들에게 잘못 걸려 서 실험대상이 되는 일도 빈번했다·
재수 없게도 토아 레그론은 제일 마지막 경우에 속했다·
어쩌면 흑마법사보다도 마법사회가
가장 증오하는 마녀 그중에서도 최 고의 위치에 군림해 있는 최강이자 최악의 존재에게 잘못 걸렸으니까·
친구들이 노예로 팔려가서 실험 쥐 로 쓰인다는 소문을 처음 들었을 때 만 해도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이 최흉의 마녀에게 잘 못 걸려서 잡혀왔다는 사실을 깨닫 게 되었을 때 그는 절망했다·
그런 절망은 처음이었다·
가족과 고향이 무너졌을 때조차도 이 정도까지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하필이면 마녀의 실험 쥐가 되다니·
토아 레그론은 갑옷으로 만들어진
골렘들의 손에 이끌렸다·
토아는 상상했다·
칙칙한 어둠과 끔찍한 비명 기괴 한 괴물이 가득한 깊은 동굴 속에 위치해 있을 흉측하게 생긴 마귀 할 망구를·
그런데·
– 너로구나·
처음 맞이한 ‘마녀’의 모습은 토아 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어른들이 항상 이야기하던 마녀는 그림자 속에 숨어 사는 끔찍한 괴물 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을 텐데 눈앞 의 저 천사님이 정말로 그 ‘마녀’가
맞기나 한 것인가·
화려하진 않지만 수수한 흰색 원피 스를 걸친 10대 중후반의 소녀는 낡아빠진 의자에 다리를 꼰 채로 앉 아서 매혹적인 미소로 이곳을 내려 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일렁이는 햇살 에 백색 머리카락이 찰랑이며 흔들 렸는데 그때마다 토아 레그론의 마 음 역시도 거세게 요동쳤다·
처음이었다·
심장이 그토록 뛸 수 있다는 사실 을 알게 된 날은 말이다·
그랬다·
반했던 것이다·
청소년기의 토아 레그론에게 스칼 렛의 미모는 너무나도 자극적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동화 속에 나올 법 한 ‘흉악한 마녀’가 아니었다·
스칼렛은 자신을 두고 끔찍한 실험 따위를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내린 첫 심부름·
-밖에 가서 이 물건을 팔고 빵을 사 오거라· 그럼 살려주겠다·
조각상 같은 것을 손에 쥐여준 스 칼렛은 거기까지 말한 뒤 고개를 까 딱였다· 어서 가 보라는 뜻이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으나 돌이켜보면 그것은 무려 마녀가 만든 부적·
효력은 확실했다·
토아는 얼떨결에 마을에서 부적 한 상자를 전부 완판해 버렸고 꽤 많 은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생각했다·
이대로 도망친다면 그녀에게 다시 붙잡히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토아는 그러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발걸음은 스 칼렛에게 향했다·
특별한 마법이나 주문에 걸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스 칼렛에게 되돌아갈 뿐이었다·
그래서 토아는 부적들을 좋은 빵으 로 그녀에게 되돌려줄 수 있었고·
그때 스칼렛이 미소를 지었다·
-오오! 생각보다 대단하구나!
그 순간부터 그에게 꿈이 생겼다·
‘저 미소를 계속 보고 싶다·’
토아 레그론은 그날 이후 어떻게든 스칼렛의 마음에 들고자 노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에게 부족한 것을 알아야 한다·
첫째로 스칼렛에게는 돈이 부족했 다· 그녀는 낡은 오두막에 지내며 조각상을 깎고는 했는데 그것들이 모두 돈을 벌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았다·
그렇게 깎은 부적을 마을에 가져다 팔고는 했으나 그녀가 직접 팔지 못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에는 주문이 걸린 부적을 여인 이 팔면 마녀라고 돌팔매를 얻어 맞 던 시기였다·
그렇다·
둘째로 그녀에게는 대리인이 필요 했다·
추정컨대 여태껏 스칼렛에게는 여 러 대리인이 있었으나 모두 도망치 거나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지 못했 던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니 부적을 모두 팔아치웠을 때 스칼렛이 그토록이나 기쁜 미소를 지었겠지·
‘나는 그녀에게 필요한 존재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토아 레그론은 조금 더 자신감 있게 행동 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토아는 사시사철 항상 그녀와 함께할 수 없었다·
스칼렛은 때때로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우고는 했다·
그때마다 토아는 그녀를 기다렸다·
길게는 반 년이나 돌아오지 않았 던 스칼렛을 대신해서 낡은 오두막 을 지키던 어느 날이었다·
-···뭐야· 네놈 아직도 여기에 있던 것이냐?
달밤이 유난히 눈부시던 저녁·
돌아온 스칼렛은 지쳐 잠들어 있던 토아를 보고서 혀를 차더니 어이없 다는 듯 웃었다·
그건 자신에게 호의가 있어서 보내 는 미소가 아니었다·
아마도 그때 스칼렛이 느꼈을 감 정은 애완견이 집을 잘 지키고 있어 서 기특하다는 데에서 나온 미소였 을 것이다·
그것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바치는 정성이 모두 돌아 오지 않아도 좋았다·
미소를 볼 수만 있다면·
그날 이후 토아는 스칼렛에게 마 법을 배우게 되었다·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게 시작된 마법 수업 에서 토아는 상당한 재능을 보여주
었고 그가 마법을 잘 다룰 때마다 스칼렛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했 다·
그래서 더욱 정진하였다·
마법을 잘 다루게 될 때마다 그녀 가 웃었으니까·
아마 그맘때쯤이었을 것이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 하나를 토아 레그론이 알아낸 것은·
별것도 아닌 비밀이었다·
그것을 스승님 스칼렛에게 말했더 니 그녀가 동공을 크게 뜨고서 토아 의 어깨를 세게 부여잡았다·
-그건··· 이제부터 너와 나만이 아는 비밀이다· 알겠느냐? 똑똑히 기억하거라 결코 다른 사람에게 발 설해서는 안 된다·
두근!
심장이 떨려왔다·
오로지 스승님과 나만이 공유하는 비밀· 세상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단 둘만의 비밀이 처음으로 탄생하 는 순간이었다·
토아 레그론은 그날부터 미스테리 에 집착하였다· 단순히 마법 실력을 성장시키는 것뿐 아니라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비밀을 풀어내기 위
해 노력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날 이후 밝혀낸 다른 비밀 에 대해서는 스승님은 별말을 하지 않으셨다· 밝혀도 좋고 그러지 않아 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래도 토아는 그 비밀들을 굳이 숨겼다· 어찌 되었든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감추기만 한다면 그것은 스 승님과 자신만의 비밀이 될 테니까·
세월이 흘렀다·
오두막에 숨어 지내던 토아 레그론 은 어느덧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 치는 존재가 되었고 자연스레 그 기술력을 팔아치우면서 떼돈을 벌게
되었다·
그는 재산에 집착하지 않았다·
재산을 갖고서 기뻐하는 스칼렛의 미소에 집착했을 뿐·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스승님 또한 어떠한 비밀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 을 때 토아 레그론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언제나 저 높은 달빛의 호수 아래 에서 고고하게 빛나던 스승님의 수 준과 자신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 거였다·
완벽하게만 느껴지던 스승님 또한
더욱 더 갈구하던 지식이 존재한다 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그것을 자신이 알아낸다면·
수백 년의 세월을 풀지 못했던 스 승님의 궁금증을 자신이 풀어내기만 한다면·
그녀는 자신에게 어떤 미소를 보여 주실 것인가·
상념에 잠겨 있던 토아 레그론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안타깝게도 토아는 실패하고 말았다·
스승님의 가장 오랜 숙원이던 ‘봉
인은 결국 자신이 아니라 다른 누 군가가 풀어내고 말았다·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얼마나 절망했던가·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피눈물 나는 고생을 했음에도 불구 하고 스승님의 소원을 끝내 들어드 리지 못했다·
그것을 고작해야 20년도 살지 못 한 꼬맹이가 해결했다는 사실을 알 았을 때·
토아 레그론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강력한 질투 심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대마법사”·
9클래스의 마법사가 가지는 감정은 화산처럼 폭발적이면서도 잠들어 있 는 대지처럼 조용히 잠들어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잠시 뒤에 찾아올 거대한 재앙을 단단한 대지로 억지로 뒤덮고 있으 니 그것이 마침내 터졌을 때 얼마나 커다란 폭풍이 되어 몰아칠 것인가·
···아직이 다·’
다행스러운 점이 하나 있다면 스승 님에게는 꿈이 하나 더 있다는 것·
그것은··· 인간의 육신을 초월하 여 더 높은 경지를 이룩하는 것·
안타깝게도 당장에는 현실성이 없 어 보였다·
태어날 때부터 최고의 힘을 가졌던 스칼렛조차 한계에 부딪혀서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그보다 뒤떨어진 재능을 가진 자신 이 이루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꿈이 었으니까·
하지만····
특별한 조건이 갖춰진다면·
조금 다른 결과가 나타날지도 모르 겠다·
스승님이시던 스칼렛은 그저 순수 한 마법의 단련만으로 성장하였다·
그것은 지금에 와서도 변하지 않았 다· 한계에 봉착한 지 수백 년이 흘 렀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토아 레그론은 마법이라는 것을 깨우치기 시작한 청소년기부터 어딘가 뒤틀려 있었다·
그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마법의 진실에 집착하던 버릇으로부터 시작 되었는데 9클래스가 된 지금에 이 르러서는 범상치 않은 취미가 된 것 이다·
이를테면
이면 세계의 힘에 지배당하여 흑마 법사가 되어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마력을 증폭시키는 게 아니라····
이면 세계 그 자체를 이용하여 인 간의 육신을 초월하는 방법이라면·
세상은 그 지식을 어떻게 받아들일 까·
쉽지는 않은 일이다·
애당초 이면 세계는 ‘또 다른 세 계’였기에 그곳의 모든 힘을 지배하 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장 아이테르 월드의 순수한 백마 력을 완벽히 지배하는 생명체도 없 는데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하지만 전례는 있다·
‘시조 마법사는 가능했어·’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시조 마법사는 이 세상의 모든 마력을 완 벽히 통제하던 인물이었다·
이 또한 마법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연구하다가 알아낸 사실·
···그리고 여전히 이 세상의 마 력은 시조 마법사의 통제하에 움직 이고 있다·’
즉 시조 마법사는 여전히 살아 있 거나 혹은 그 의지가 숨쉬고 있다·
당장 세간에 내놓는 순간 믿을 수
없다며 질타를 받을지도 모르는 이 야기였으나 이는 전부 사실이다·
‘이제 와서 뒤늦게 시조 마법사의 통제로 움직이고 있는 백마력을 내 것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
초월자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 이 세상의 모든 마력을 통제하에 두 는 것이니 시조 마법사가 살아 있는 한 다음 초월자가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시조 마법사를 찾아서 죽 이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그러니 두 번째 방법·
‘···이면 세계를 내가 완벽히 통
제할 수만 있다면 가능하다·’
시조 마법사와 동급이 되어 하나의 세상을 지배하는 초월자가 되는 것·
그 목표까지 이제 몇 발자국 남지 않았다·
스승님이 평생을 염원해 오던 꿈을 대신 이뤄줄 수만 있다면·
‘그때는····)
그녀가 자신에게 짓는 미소에 단 순한 애착의 감정을 넘어서·
아마도 사랑이 담겨 있을 것이다·
토아 레그론은 그리 굳게 믿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쿠르릉···
붉은 구름과 구름 사이로 빛이 점 멸하며 기괴한 소리를 뿜었다·
빛무리 사이로 언뜻 비춰지는 차 원의 균열· 그 틈새 사이로 흑마력 이 새어 들어와 토아 레그론의 몸을 차갑게 적셨다·
‘이제 조만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