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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피의 마녀 이야기⑺
쏴아아-!!
쏟아지는 폭우 속 우중충한 회색 의 신전 하나·
오래된 신전은 아니다·
백유설은 신전의 겉모습을 보고서 건물이 세워진 연도를 쉽게 추정할
수 있었다·
‘신전의 정문에 들은 대략 70년 이 적용돼 있어· 기술이었던 자체
세워진 방범 석상 전의 인챈트 기술 당시에는 획기적인 기동 석상인가·’
신전의 벽면이나 근방에 그려져 있 는 마법진 등을 가볍게 스캔한 백유 설은 말했다·
“딱히 위협은 안 되겠네요·”
“그래?”
방수 후드를 뒤집어쓴 채 살짝 경 계하고 있던 피날렛은 앞장서서 걸 어 나가는 시클렌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미 진작에 방범 경계선을
넘었음에도 신전 측에서는 어떠한 대응도 없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찰팍!
한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대리석 을 닮은 바닥에 부츠가 닿으며 물방 울이 튀었다·
백유설은 묘한 눈으로 신전을 둘러 보았다· 마법 결계나 마방진 자체는 별것도 없는 느낌이었으나 묘하게 위화감이 들었다·
‘인테리어를 빡세게 꾸며둔 느낌인 데·’
일자로 쭉 이어진 이 길목을 거닐 며 백유설은 자꾸만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되었다·
“저기 누님· 이거 일자로 이어진 길 맞습니까?”
“맞지? 일자잖아·”
“근데 왜 자꾸 옆으로 가는 거 같 지?”
“뭔 소리···· 어라?”
백유설이 길바닥을 보며 고민을 하 는 와중 피날렛은 뭔가 이상한 낌 새를 눈치챘다·
“그 미친년 어디 갔어?”
,,예?,,
바닥을 유심히 살펴보던 백유설은 피날렛의 말에 고개를 황급히 들었 다·
방금까지 앞서 나가던 시클렌이 감 쪽같이 사라졌다· 그녀의 걸음 속도 로는 아직 신전까지 한참이나 남아 있었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마법을 사용한 기색은 없 다· 그랬다면 마력의 흐름이····
‘아니 ス1 잠깐·’
백유설이 우뚝 멈춰 서자 피날렛도 덩달아 멈췄다·
“뭐야? 너까지 왜 그래?”
“··잠깐만요·”
백유설은 후드를 뒤로 넘겼다· 빗 물에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어 들 기 시작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고 개를 들어 눈을 감았다·
쏴아아아-!!
시야를 가릴듯이 쏟아지는 폭우의 감각을 저 멀리까지 날려버리며 동 시에 공간 감각을 확장시켰다·
[육감]
자연천기지체의 감각은 자연과 뒤 섞여 폭우가 쏟아져도 태풍이 몰아
쳐도 변함없이 주변의 모든 것을 관 측할 수 있다·
다만 그렇게까지 감각을 확장시키 게 되면 일상생활은 불가능·
평상시에는 감각을 조절하여 억제 하고 있지만 유사시에 감각을 크게 넓히게 되면····
번뜩!
눈을 뜬 백유설은 차분하게 가라앉 은 눈으로 신전을 바라보았다·
“아까 했던 말 취소해야겠네요·”
“앙···T
“보통 놈들이 아니었어요·”
백유설은 신전까지 일자로 쭉 뻗어 있는 길목이 아닌 바로 옆쪽·
길이 아니라 온통 자갈과 돌멩이 투성이로 이루어진 곳을 바라보았 다·
“이 근방의 공간이 전부 왜곡되어 있어요·”
“그 미친년이 터 잡고 있던 숲의 대저택처럼?”
“아뇨· 급이 달라요· 시클렌 씨는 환영으로 공간을 비틀린 것처럼 보 이게 해뒀지만··· 이건 진짜입니 다· 정말 공간 그 자체를 미로처럼 꼬아놓았어요·”
이 거대한 공간을 전부 비틀어 놓 았다· 그것도 본인들이 원하는 모양 대로 미로처럼 조각하여 세세하게 나누어 놓다니·
그런 기술은 엘트먼 엘트윈조차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거 점점 흥미가 생기는데····’
본디 스칼렛을 찾기 위한 여정이었 으나 회공시월의 기술을 이렇게까 지 다루는 이들이 있다는 건 백유설 로서도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 없 었다·
회공시월은 백유설이 앞으로 상대 해야 하는 가장 강력한 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궁금한 것이 있 다면 왜 이런 기술력을 가진 이들 이 세상 바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 았냐는 점·
‘듣자 하니 철저하게 정체를 숨기 고 있던 것 같은데···
일전에 쓰러뜨린 인신매매 용병들 에게 캐물으니 이 신전은 회색 신 월교 같은 게 아니라 일종의 마피아 라고 한다·
이 근방의 모든 불법적인 거래를 중재하면서 경비대로부터 보호해 주 고 툭 튀어나온 범죄자가 약속을
어기거나 도망칠 경우 잡아 와주는 그런 존재·
즉 저들의 정체가 회색 신월교라 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 다· 당장에 백유설만 해도 이곳에 직접 와서 공간 감각을 확장하지 않 았더라면 전혀 눈치채지 못할 뻔하 지 않았던가·
“그럼 어떻게 해야되는 거야?”
“딱히 공격적인 것 같지는 않네요· 그랬다면 이 공간을 이용해서 진작 에 무슨 수작을 부렸겠죠· 단순히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해만 하는 걸 보니····”
“시클렌 그 미친년이랑 성격이 비 슷하다거나?”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마 피아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더 맞겠 네요·”
“무슨 정체를 숨기겠다고···
“뒤가 구린 뭔가가 있나 보죠·”
이 정도 공간 왜곡이면 어지간한 대마법사가 와도 결코 돌파할 수 없 다·
아니 애당초 인신매매단의 말에 따르면 이 근방까지 도달하는 것도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만이 가능하다
고 했던가·
이렇게 보란듯이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었던 것도 어디까지나 마녀 사 냥꾼 출신 시클렌 덕분이다·
‘더더욱 의심스러워·’
백유설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자 피날렛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술병에서 손을 놓지 않은 채였는데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술병 을 허리춤에 꽂았다·
“저쪽에서 거부하고 있으니···
“역시 돌아가는 거지?”
“아뇨· 강행돌파를 해야죠·”
“켁 나는 위험한 거 싫은데·”
“잔말 말고 따라오세요·”
백유설은 직진하지 않고서 옆으로 틀어서 걸었다· 공간 왜곡의 미로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직선으로 보이는 길을 구불구불 돌아서 걸을 필요가 있었다·
이리저리 돌아서 백유설이 서서히 앞으로 나아가자 피날렛은 신기하다 는 듯 말했다·
“너는 이런 길을 어떻게 아는 거 야?”
그에 백유설은 웃었다·
“그냥 눈에 보입니다·”
* * *
같은 시각 회색 신전의 내부·
“저 친구는 이 길을 어떻게 아는 거지?”
피날렛과 똑같은 의문을 품은 이가 있었다·
신전의 내부는 의외로 외부와는 달 리 회색이 아니라 오색찬란 휘황찬 란하게도 꾸며져 있었는데 홍비연 의 침실도 이렇게까지 쓸데없이 눈
부시지는 않을 것이다·
마치 어거지로 색감을 집어넣으려 고 한 듯한 모습에 예쁘다기보다는 난잡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그 화려 한 방에는 세 명의 사내와 한 명의 여인이 앉아서 수정구를 통해 커다 란 화면을 띄워놓고 있었다·
“···글쎄· 특이한 소년이라서·”
회색 신관복을 입은 사내의 질문에 대답한 이는 다름 아닌 시클렌·
어느 사이엔가 신전의 내부로 들어 온 그녀는 신관들에게 손님 접대까 지 제대로 받고 있었다·
“쳇 제대로 알려주지 않으면 곤란
하단 말이지?”
“이미 저 아이들을 내버려 두고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미움을 사버릴 텐데 그 이상으로 정보까지 전해주 면 나야말로 곤란해·”
“미움? 미우우움? 마녀 사냥꾼 주 제에 인간에게 미움받는 걸 무서워 한다고? 농담은 재미없어· 집어치우 지 그래?”
그에 시클렌은 살포시 웃었다·
“그 이상 나를 도발하지 않는 걸 추천할게· 나 스스로도 화가 치솟으 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거든·”
“···쳇· 웃기는군·”
신관복을 입은 사내는 그리 말하며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걷었다· 그 의 이마에 자라 있는 붉은 뿔 한 쌍이 눈에 띄었다·
그렇다·
신관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악마·
요즘의 단어로····
흑마인이었다·
“악마가 신월교의 신관 행세를 한 다니· 요즘 것들이 알면 놀라겠어·”
시클렌은 그리 말하며 허공에 떠 있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백유설과 피날렛이 길을 헤매이는
장면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솔직히 헤맨다기에는 너무나도 쉽게 쭉쭉 걸어오고 있어서 놀라울 지경이었 다·
이 신전에 들어오기 위한 첫 번째 조건·
‘스스로 길을 개척할 것·’
저 미로는 9클래스급의 미로지만 사실 통과할 수 있는 조건은 일반인 이라도 의지와 용기가 충만하고 길 을 찾을 수 있는 현명한 지혜와 눈 앞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않는 통 찰력을 갖추기만 하면 누구라도 통 과하는 게 가능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일반인이 저런 모든 조건을 갖추기란 어렵다·
대마법사조차도 이곳에서 길을 잃 고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했으니·
이토록 조건이 까다로운 대신 만 약 스스로 길을 통과해서 들어온다 면 회색 신월교는 손님이 누구든 환 대한다·
설령 그 대상이 한창 대륙에서 흑 마인 사냥꾼으로 유명한 백유설이라 고 할지라도 말이다·
“흑마인 사냥꾼이 온다는데 두렵 지도 않으냐·”
“글쎄올시다· 저런 꼬맹이한테 죽
을 정도로 우리가 나약하지도 않단 말이지·”
“후후 너처럼 객기 부리다가 죽은 흑마인이 한 트럭이더군·”
“쯧· 하여간 한 마디 한 마디가 모 두 재수 없어·”
“그래서····”
시클렌은 비록 백유설을 두고 먼저 이곳에 들어왔지만 기존의 목적을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마녀왕· 찾을 수 있어?”
“마지막으로 이런 부탁을 했던 마녀 사냥꾼이 400년 전에 왔었다는 기록 이 있기는 한데··· 뭐 그대로 하기
만 하면 어렵지는 않을 거야· 그런 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백유설이 이곳에 도착해야 된다는 거 알지?”
“당연하지·”
“마녀를 찾기 위해서는 그 마녀와 가장 유대감이 깊었던 자가 소유한 가장 소중한 물건이 필요하다· 그러 니 백유설이 시험을 통과하지 않으 면 우리도 도와줄 수 없어·”
다른 보통 사람이라면 저 ‘시험’이 라는 게 퍽 무섭게만 들렸을지도 모 른다· 하지만 시클렌은 여유만만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그거야 뭐 쉬워 보이는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쭉쭉 다가 오는 백유설을 보며 그녀가 말하자 신관들은 혀를 찼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찾아오는 놈 들은 하나같이 재수가 없군···
이대로 잠자코 기다리면 짧으면 1 시간에서 길게는 3시간 이내에 백유 설은 도착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확정 짓고서 마음을 놓고서 기다리고 있는데·
“어라 잠깐· 저 꼬맹이 뭐 하냐?”
“응?,,
이변이 발생했다·
“검을··· 들었는데?”
그렇다·
화면 속 백유설이 명도 청풍명월 을 뽑아 든 채 허공을 겨누고 있던 것·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신관 하나 가 말했다·
“야 저 꼬맹이 설마···
다른 신관이 말을 이어받는다·
“공간을 베어내려는 건 아니겠 지···r
말도 안 되는 비약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 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달리 백유설의 행동 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소 소리를 틀어봐·”
신관이 서둘러 버튼을 누르자 피날 렛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야야야 이 미친· 뭐 하는 거야!
-아니· 생각해 보니까 제가 왜 남 들이 귀찮게 꼬아놓은 길을 따라줘 야 하는 거죠?
-어? 그러네?
-그리고 생각해 보니까 공간 왜곡 이란 것도 결국은 다 마법이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맞는 말···이네···?
-그러니까 전부 뚫고 지나갑시다· 시간도 없어 죽겠구만 빡치게 이딴 귀찮은 기믹 걸어놓고 지랄이래·
“어어 자 잠깐!”
추측이 기정사실화되자 신관들은 기겁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공간 왜곡 결계는 무려 수백 년 전부터 계승되어 전해져 내려온 역사가 유구한 장치란 말이다!
“그런 게 부서졌다가는 정말 귀찮 아진다고···!”
그러나 비명을 내질렀을 때는 이미
늦었다·
백유설은 가뿐하게 검을 휘두르자 전방의 모든 공간이 베어지더니 모 세의 기적처럼 깔끔하게 갈라지며 숨겨진 진짜 길이 드러났다·
털썩!
신관 한 명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 결계를 수복하는 데에 대체 얼 마나 많은 노동력을 쏟아부어야만 하는가·
털썩! 신관 한 명이 무릎을 꿇었으 나 시클렌은 그 모습을 우습게 쳐다 볼 수 없었다·
’···공간을 베었다고?’
그녀는 눈썹을 떨었다·
원래부터 대단한 소년이라는 사실 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와 별개의 문제다·
지금 저 소년은 ‘불가능’을 가능하 도록 만든 것이었으니까·
이 세상에 공간 계열 마법사는 여 럿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 는 마법 그 자체를 파괴했다는 이야 기는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다· 공 간은 일반적인 속성 계열이 아닌 한 차원 위쪽의 마법으로 제대로 이해 한 자가 아예 없을 지경이었으니까·
즉 백유설은 지금·
다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아 무렇지도 않게 해냈다는 의미다·
‘이런 게 가능한 거였나···?
시클렌조차 긴장으로 심장이 뜨거 워지는 와중 화면 속 백유설의 상 태는 더더욱 이상했다·
“어이 백유설· 갑자기 왜 멍하니 서 있는 거야? 백유설?”
백유설이 검을 휘두르던 자세 그대 로 멈춰 서 있던 것·
“뭐야 백유설···r
피날렛이 황급히 그를 불렀으나 백유설에게는 그녀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이상은 안 돼 백유설!
그의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울려 퍼 졌기 때문·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
백유설은 저 목소리의 정체가 누구 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너는 설마·’
그 목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나 의 자아
그리고 다른 차원의 자신·
-그래 나다!
‘또 다른 백유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