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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무도회(5)
조금은 오래된 이야기지만 홍시화 는 사실 백유설에게 약간의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건 아주 어처구니 없는 착각 때 문이었는데 바로 백유설이 1학년 1 학기에 자신의 소개를 적으라는 숙 제에 ‘어머님께’라는 노래의 가사를
적었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의 20대 청년이라면 절대 로 모를 수 없는 노래 어머님께·
이 노래는 심금을 울리게 만드는 슬픈 가사가 매력이었는데 어차피 이 세계에서는 표절 신고를 당할 일 도 없고 눈치챌 사람도 아무도 없겠 다 자신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과제 에 어머님께의 가사를 그대로 적어 넣은 것이다·
그것을·
홍시화가 읽었다·
웃기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백유 설이 GOD의 노래를 고스란히 가져
온 ‘어머님께’의 가사는 그녀에게 여러 부분에서 굉장히 충격적인 이 야기 였다·
불우한 이들의 생활 따위 신경 써 본 적도 없었으니까·
그런 백유설이·
지금 아돌레비트의 최고 귀족들 사 이에서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떨치 고 있다는 것·
그것이 홍시화로서는 상당히 낯선 광경이었다·
불행한 평민은 그대로 불행한 삶에 찌들어가다가 죽는 게 정상이다·
귀족으로 태어난 이들은 처음부터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게 정상이 다·
백유설은 그 불변의 법칙을 깨뜨리 고서 모두의 중심에 서있다·
홍시화는 그 사실에 상당히 깊은 흥미를 느꼈었다·
사실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다·
···나를 물러 터지게 만든 게 눈앞의 저 소년이겠지·’
백유설의 과거를 처음 알게 된 이 후· 홍시화에게는 약간의 변화가 생 겼다· 그것은 너무나도 사소하고 별 것도 아닌 변화였기에 주변인들조차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나 그녀는 스
스로의 변화를 냉철한 시점으로 받 아들이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제3 자의 시점으로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홍시화는 자신 스스로를 마 치 타인이라고 생각한다·
눈을 뜨는 순간 홍시화라는 인물 이 되어 연기를 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자신의 삶이라고 그리 생 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누구보다 객관적 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변했어·’
그녀는 자신의 죄악을 알고 있다·
아마 그녀는 머지 않아 죽을 것이 고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마지막 가는 길어1 평생을 바라던 목표를 그리는 것 정도는····
‘어이가 없네·’
홍시화는 헛웃음을 쳤다·
자기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대하 지 못하고 양심없는 생각을 해버리 려고 하다니·
그건 홍시화답지 않았다·
“춤 잘 추네?”
홍시화는 잔잔한 음악에 맞춰서 스 텝을 밟는 백유설에게 말했다·
“원래 잘 췄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춤을 제대로 배울 생각도 없었는데 대충 강사가 하는 것을 눈대중으로 보고 따라하니까 30분 만에 마스터 해 버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몸 쓰는 일에 대한 천부 적인 재능이 있는 모양이다·
“오랜만에 보는 거지?”
“그렇게 되나요·”
예전에 한 번씩 마주친 적은 있다·
딱히 임팩트 있는 사건은 없어서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다만 홍시화가 무슨 짓을 했는지·
어떤 여자인지는 전부 기억하고 있 다· 당시에는 큰 감흥이 없었으나 이제 백유설은 에이젤 홍비연과 더 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기에 그녀에 대한 원망이 가슴 깊이 새겨져 있 다·
다만 연홍춘삼월의 가호로 인해 분 노는 쉽게 표출되지 않고 잔잔하게 가라앉아 타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 으며 표정으로는 온화한 미소를 연 기한다·
이제 백유설도 다른 이들 못지 않 게 ‘가면 쓴 얼굴에 자신있었다·
“그래서 저랑 이렇게 춤 추자고 권하신 건··· 역시 홍비연을 엿먹 이려고 그런 거겠죠?”
“어머· 그걸 알면서 응했어?”
“가만히 앉아있기도 뻘쭘했거든요· 그리고 제가 진짜 당신한테 들러붙 을 것도 아니고 화를 내진 않겠죠·”
그리 말하는 와중에도 무언가 뜨거 운 살기가 느껴져서 백유설은 등골 이 오싹했다·
“그래? 아쉽네에~ 나는 네가 나와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제가 그래서 좋을 게 뭐가 있죠?”
“음~ 너를 아돌레비트의 국왕으로 앉혀 버릴 수도 있다는 거?”
-···예?”
그건 꽤 파격적인 헛소리였다·
아돌레비트는 철저하게 혈통 계승 으로 이어져 내려와 ‘아돌레비트’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아 폭발적인 불 꽃 마법을 다루는 이가 국왕이 된 다·
때로는 남자가 국왕이 될 때도 있 으나 특이하게도 아돌레비트가 여인 이었기 때문인지 혈통 대대로 여자 가 불꽃을 잘 다루어 여왕이 아돌레
비트를 통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아돌레비트도 아니며 심지 어 성별도 남자인 백유설을 국왕으 로 앉히겠다고?
이런 헛소리도 없다·
“개소리하지 마십쇼·”
“개소리라니 너무하네· 나는 진지 했는데·”
백유설은 눈에 살짝 힘을 줬다·
연분홍빛으로 빛나며 홍시화의 내 면을 파악하려고 했으나·
[즐거움 ??? 진심 ???]
모든 감정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내 경지가 부족한 탓이겠지·’
연홍춘삼월의 가호는 아무래도 정 신계열인지라 수련을 게을리했다·
하지만 몇몇 감정은 제대로 볼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의아한 것 은 ‘진심’이라는 감정·
‘그럼 진짜였다고···?)
“어머·”
백유설이 생각에 잠기려는 그때 홍
시화가 눈웃음을 지었다·
“너 나한테 무슨 짓 했지? 그치?”
그 말에 백유설은 속으로 살짝 뜨 끔했다· 여태 연홍춘삼월의 가호를 사용하는 것을 들킨 적은 없으나 정 신력이 높은 이라면 언제든 들킬 가 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당황하지 않고 말한다·
예· 당신이 진짜 헛소리를 했는지 아닌지 봤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조금은 진심이 담긴 것 같네요· 전혀 내키지 않는 제안이지만·”
“어머머··· 아돌레비트의 국왕이 된 다는 게 어째서 안 내키는 거아? 왕이 된다는 건 멋지고 즐거운 일일 텐데?”
“아돌레비트의 왕위를 이어받을 사 람은 정해져 있습니다·”
“흐흥 그래?”
홍시화는 미묘한 미소를 짓더니 대뜸 그리 말했다·
“우리 귀여운 동생한테··· 아주 홀딱 반했나 보네?”
별것도 아닌 이야기다·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백유설은 그러지 못했다·
대뜸 홍시화의 팔을 홱 뿌리친 그 는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순간 정적·
음악은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지만 중앙에서 춤을 추던 그들은 모두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남녀가 춤을 추다가 멈추는 일은 국왕이 중앙으로 향했을 때 뿐이다·
그런데 백유설이 홍시화 공주를 뿌려치 다니·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모르겠어요···
귀족들이 작게 웅성거린다·
음악에 묻힐 수도 있겠지만 백유 설의 청각은 그 모든 것을 다 듣고 있었다·
’···미치겠네· 실수를 하다니·’
포커페이스를 유지했어야 하는데 홍비연이라는 단어에 연홍춘삼월의 가호마저도 벗겨지고 말았다·
“예민한 이야기였나 봐?”
“후우 예민하다면 예민할 수도 있 겠군요·”
“혹시 내가 정곡을 찔러버렸나〜?”
바보처럼 반응했으나 그녀의 페이 스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
“공주님 정말 실망스럽군요· 그럼 시답잖은 농담으로 사람을 무시하려 고 춤을 추자고 하신 겁니까?”
“어머나· 그럼 이 사실을 모두에게 밝혀도 되는 걸까나〜?”
백유설은 어깨를 으쓱 올렸다·
“하십시오· 대신 저도 공주님의 비 밀 하나를 밝히면 수지타산에 맞지 않겠습니까?”
그에 음악마저 연주를 멈춰 버렸고 모두가 춤을 추다 말고서 뒤로 슬금 슬금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내 비밀?”
홍시화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그리 되물었다·
그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 문이었다·
‘저 아이가 알 만한 비밀은··· 없 을 텐데·’
비밀이 참 많은 여자다·
홍시화는 스스로를 그리 생각했다·
죄를 너무나도 많이 지었기 때문이 겠지만 그 외에도 감춰진 진실이라 고 할 만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그 모든 비밀은 철저하게
지켜왔다고 생각한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사람 하 나 죽이는 것쯤은 우습게 여겼다·
절대 그 사실이 바깥으로 새어나갈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홍시화에게는 정말로 안타까운 이야기였지만 백유설은 그녀의 과 거에 대하여 ’3인칭 시점’으로 볼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아이테르 월드 온라인·’
직접 겪지는 않았으나 게임에서는 ,과거 회상’이라며 다른 NPC가 저 지른 사건을 보여주고는 한다·
당시에는 목격자를 개미 새끼 한
마리마저 모조리 죽여 버렸다고 하 더라도·
별의 눈동자마저 가릴 수는 없다·
밤하늘의 별들은 저 수억 개의 눈 동자들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 든 사건을 지켜보고 있다·
백유설은··· 그들의 시점으로 홍 시화의 과거를 모두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미래의 이야기나 3인칭 시점 으로만 볼 수 있었던 진실을 이야기 하는 데에는 여태 많은 제약이 걸려 있었다·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이유 로 입을 열지 못하지 않았던가·
지금은 다르다·
백유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귀엽네· 네가 나에 대해 무엇 을 안다고 생각하는 거지?”
“알 만큼은 다 알죠·”
“후후 우리 동생이랑 어울리다 보 니 왕족이 조금 우스워졌나 봐?”
“그럴 리가요· 저는 여왕 폐하의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로 수억 금의 액세서리까지 선물해 드렸는걸요· 왕족에 대한 존중을 감히 금전 따위 로 환산할 수는 없겠지만 그만큼 예의를 갖추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홍시화가 힐끗 홍세류의 팔목을 보 니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는 팔찌 하 나가 눈에 띄었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뭐어 간혹 그런 경우가 없는 건 아니야· 평민이 귀족들과 친하게 지 내다 보니 동등해졌다고 생각하는 일 말이야· ···네가 홍비연을 짝사 랑하는 것도 그리고 정말 이어질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것도 비슷 한 맥락이겠지?”
홍시화의 폭탄 발언에 좌중이 침묵 했다· 아돌레비트의 왕족은 정통적
으로 공작가 혹은 아돌레비트의 혈 통을 이어받은 고귀한 신분과 맞나 결합을 맺고는 하였다·
홍비연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녀는 비록 왕이 되지 못하더라도 아돌레비트의 직통 혈족으로서 진 한 피를 더럽히지 않고서 더욱 깨끗 하고 고귀한 혈통을 유지해야만 하 는 의무가 있었으니까·
号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r
홍비연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는 와중 홍시화가 말을 이어갔다·
“흔하지만 그래서 재미있는 이야기 야 사람들은 아는 맛을 더 찾게 되는
법이잖아? 평민이 짝사랑하는 공주님! 그러나 이어질 수 없는 사랑〜!”
백유설의 반응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 말해보았으나 기대했던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단지 그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 응하는 게 가장 현명한 판단일지 스 스로 ‘선택지’를 만들고 있었다·
► 긍정하기
► 부정하기
그 선택지는 백유설이 실제로 홍비
연을 사랑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이제부터 백유설은 홍시화의 페이 스에 말려들지 않고서 그녀에게 대 응하기 위한 대답만을 해야한다·
‘부정한다? 이건 좋지 못해·’
이미 그녀가 먼저 선수 공격을 한 이상 백유설이 부정해 봐야 추잡하고 속마음조차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사춘기의 10대 소년이 되어버린다·
긍정한다고 해도 썩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지는 못할 것이나····사
실을 인정함으로써 다음 턴이 자신 에게 돌아온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래서 백유설은 긍정했다·
“예· 제가 홍비연 공주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비밀이었죠·”
”어머· 정말로?!”
홍시화가 억지로 호들갑을 떠는 것 처럼 보였으나 귀족들의 반응도 별 반 다르지 않았다·
건방지게 평민 따위가 다른 장소 도 아닌 왕실 무도회에서 공주를 사 랑한다고 폭탄 발언을 하다니·
철저한 계급 사회라고도 할 수 있 는 아돌레비트 귀족가에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나 홍시화가 반대편에 있기에 귀족들은 감히 나서지 않았다·
그녀를 지지하는 만큼 얼마나 두 려운 인물인지 잘 알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들의 판단은 틀렸다·
차라리 홍시화 공주에게 쓴소리를 듣더라도 소리를 질러서 백유설이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어야만 했 다· 설령 귀족들의 행동이 추잡할지 언정 백유설은 꼴사나운 10대 소년 으로 전락하여 퇴장했을 테니까·
“그럼 제가 꽁꽁 숨기고 싶어 했 던 비밀을 당신이 모두에게 말했으 니··· 저도 당신의 비밀 하나를 말
해도 되는 것이겠죠?”
“물론· 충분한 증거가 있다면야〜” 홍시화는 자신의 완벽함을 믿고 있다· ‘그래서 무슨 비밀을 말하실까?’ 기사단의 금고 횡령?
토지 정책의 함정?
철의 마탑 실종 사건?
크레덴 마을 궤멸 사고?
정말 많고 많은 무수한 비밀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 고·
“10년 전。
“··?,,
10년? 너무 오래전으로 돌아간 것 이 아닌가? 홍시화가 어처구니 없다 는 표정을 짓는 그때·
“당신은 타락한 아이작 모르프를 살해했죠·”
“···뭐?”
그녀의 가슴을 철렁이게 만드는 사 건이 백유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때의 진실을 지금 살짝 언급해 도 문제는 없겠죠?”
홍시화는 침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