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9화
299. 한우주 3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1년 3월 17일]
-PM 01:00 <화란전> 저작권 소송 관련 회의. (보고 사항 : 보조 작가 출신 한우주. 스승인 유선정 작가의 시나리오를 탈취했다는 혐의로 피소.)
아직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이어리의 일정은 그대로였다.
하긴 그 독한 유선정 작가라면 눈여겨 둔 작품이 손에서 벗어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리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잠시 고민하던 난 도움을 받기로 마음먹었다.
“작가님. 아직 가실 곳이 한 군데 남았습니다. 서두르시죠.”
전화하던 한우주 작가가 날 쳐다본다.
“어 어딜요?”
“이지연 작가님 댁이요.”
방송국의 편성이 제한되어 있기에 얼마 안 되는 밥그릇을 두고 전쟁 같은 경쟁이 매일 벌어지곤 한다.
그 아귀다툼 속에서 자신의 이름값을 가장 잘 이용하는 게 바로 유선정 작가였다.
그런 유선정 작가를 상대하려면 그보다 더한 이름값을 가진 아군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이지연 작가였다.
한우주 작가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 예. 잠시만요. 아빠랑 통화 끝낼게요.”
한우주 작가가 전화에 대고 말한다.
“아빠. 우혁이 보낼 테니까 일단 수술 날짜부터 잡아라. 아라째?”
-아라따. 우리 딸. 그리고 아빠가 마이 사랑하는 거 알재?
아빠의 응원에 한우주가 부끄러워하며 말한다.
“뭐라카노? 사람 듣는데 남사스럽게! 치아라~”
전화를 끊은 한우주 작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빠랑은 부산 말투로 대화를 하는 게 편해서 그만······.”
동생인 한우혁이 피식 웃는다.
“그렇게 찐한 사투리를 쓰더니 갑자기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
한우주 작가가 입술을 앙다물고 동생의 팔을 꽉 꼬집는다.
“아아아악. 왜?”
“빨리 아빠한테 내려나 가 봐!”
“알았어.”
그러나 난 일단 한우혁을 붙잡았다.
한우혁도 돌아가는 사정을 알아야 누나의 곁에서 도와줄 수 있을 테니까.
“우혁아. 이따가 서울역 데려다줄 테니까 일단은 너도 나랑 같이 좀 가자.”
한우혁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 예. 그래요. 그럼.”
그리고 난 곧장 이지연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우주 작가의 사정을 말해주자 이지연 작가가 흔쾌히 대답해준다.
-알았어. 일단 와. 자세한 건 대본부터 보고 나서 이야기해.
이지연 작가는 유선정 작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유선정 작가가 자기 유명세를 올리기 위해 늘 이지연 작가를 언급하기 때문이다.
최근만 하더라도 <신의 이름으로>를 뛰어넘는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며 언론 플레이를 하기도 했었고.
“예. 작가님! 바로 가겠습니다.”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운전 조심하고.
전화를 끊은 난 두 사람과 함께 이지연 작가의 집으로 향했다.
* * *
이지연 작가의 집으로 가며 조심스레 물었다.
“한 작가님은 집필하게 되면 다른 보조 작가님을 쓰실 생각은 있습니까?”
뒷좌석에 앉은 한우주 작가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보조 작가님이 능력만 있으시면 도움을 받는 게 좋죠. 아무래도 장편은 혼자 하기 버거우니까요.”
한우주 작가는 <화란전>의 대본 앞에 자기 이름만 적히면 된다고 말한다.
그 순간 꽤 발칙한(?) 방법 하나가 떠올랐다.
‘이지연 작가를 꼬셔 봐야겠네.’
회귀 전 이지연 작가는 자신의 제자인 김솔잎 작가의 보조 작가를 한 적이 있다.
정확히는 24화 중에서 2화 정도를 맡아서 집필한 거였기에 보조 작가라기보다는 서브 작가에 가까웠지만.
아무튼 이 시도가 성공하면 유선정 작가는 한우주 작가뿐 아니라 이지연 작가랑도 저작권 소송을 벌여야 할 거다.
물론 이지연 작가에게 무슨 일이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모조리 다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지연 작가의 집에 도착했다.
주차장으로 다가가자 자동으로 주차장 문이 위로 열린다.
차를 대고 내리자 한우주 작가와 한우혁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잔디가 깔린 넓은 마당과 커다란 저택이 새삼 놀라운 모양이다.
“우와! 집 끝내준다.”
“역시 이 작가님······. 사시는 곳부터 평범하진 않네요.”
어마어마한 크기인 이지연 작가의 집에 압도된 기색이다.
“나중에 한 작가님도 성공하면 이런 집에 사실 수 있을 겁니다.”
한우주 작가가 말도 안 된다며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한우주 작가도 <화란전>을 성공시키고 전작 <아름드리나무 아래서>의 수익을 되찾아올 수 있다면 이런 대저택에서 사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았다.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에 도착했다.
이지연 작가가 직접 나와 문을 열고 우리를 마중했다.
“어서 와. 정 팀장. 두 사람도 어려워 말고 들어오고.”
이지연 작가가 반기자 내 뒤를 따라오던 한우주 작가와 한우혁이 허리를 반으로 굽힌다.
“반갑습니다! 선생님! 저 선생님 팬이에요!”
“아 안녕하세요.”
두 남매의 인사에 이지연 작가가 빙긋이 웃는다.
“잘 왔어. 한 작가. 그리고 동생도.”
한우주 작가가 놀라서 고개를 치켜든다.
“자 작가라뇨······ 다 당치도 않으세요.”
이지연 작가가 한우주 작가와 시선을 맞춘다.
“아름드리나무 아래서. 한 작가가 쓴 거라며?”
“예······ 그렇긴 하지만.”
“그러면 작가 맞지. 안 그래? 설마 작가가 되어서 자기 작품에 애착도 없는 거야?”
마치 엄마가 자식을 버린 거냐는 듯한 말투에 한우주 작가가 악을 쓰듯 말한다.
“아 아니에요. 작가님! 제가 그거 쓴 거 맞아요! 엄청 힘들게 쓴 제 작품이에요.”
한우주 작가의 애타는 표정에 그제야 이지연 작가가 빙긋이 웃는다.
“이제야 작가답네. 그래. 자기 새끼를 그렇게 내팽개치면 안 되지!”
작품을 소중히 하라는 이지연 작가의 말에 한우주 작가의 눈빛에는 조금 더 힘이 실리고 있었다.
“네! 그럴게요.”
“자자. 인사는 됐고 들어와서 이야기해.”
단 몇 마디 말로 기를 살려준 이지연 작가가 새삼 존경스럽고 놀라울 뿐이었다.
“예. 작가님.”
우린 그렇게 이지연 작가를 따라 거실로 향했다.
* * *
구체적인 사정을 들은 이지연 작가가 고개를 끄덕인다.
“선정이 걔 예전부터 그럴 싹수가 보였어.”
이지연 작가는 유선정 작가가 보조 작가의 아이디어를 훔치고 대본도 가로챈단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피해자인 보조 작가들이 입을 다문 터라 확인된 바는 없다고 말한다.
한우주 작가가 날 쳐다본다.
“저도 정 팀장님이 설득해 주신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이지연 작가가 날 보며 피식 웃는다.
“하여간 우리 유노 오지랖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나저나 유 작가랑 붙으면 만만치 않을 텐데 굴렁쇠는 끝까지 해 볼 생각 있는 거 확실해?”
“예. 한 작가님의 작품을 유진이의 첫 주연 도전 작품으로 정했습니다.”
나로선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 순간 이지연 작가가 샐쭉이 째려본다.
“아직 내 작품도 끝나지 않았는데 새 작품을 한다고? 그것도 유진이를 주연으로?”
난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절대 안 도와준다고 할걸!”
“죄송합니다. 작가님.”
이지연 작가는 자기 다음 작품에도 유진이를 쓰고 싶었다며 투정을 부려댔다.
하지만 이럴 줄 알고서 유진이의 이름을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었다.
날 빤히 쳐다보던 이지연 작가가 포기한 듯 한숨을 푹 내쉰다.
“대신에 유노. 다음에는 유진이 내 작품에 주연해줘야 해?”
이지연 작가는 앞으로 1년 반 뒤 평균 시청률 21%의 <아름다운 세상에서 사는 법>이란 작품을 선보인다.
상당히 높은 시청률이었지만 난 장난스레 대꾸했다.
그맘때 엇비슷한 성적을 내는 작품이 또 하나 있었으니까.
“대본이 좋으면요?”
“이거 왜 이래? 나 이지연이야!”
이지연 작가가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편다.
하지만 적어도 작품의 선정에서만큼은 누구에게 휘둘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결국 내 고집을 꺾지 못한 이지연 작가가 한발 물러섰다.
“하여간 한 번을 쉽게 가는 법이 없지! 알았어. 내가 눈 돌아가는 대본 써서 제발 넣어달라고 애원하게 할 거야. 유노. 그때 가서 후회하지나 마?”
다행히 이지연 작가가 장난스럽게 받아들여 무난히 넘어갔다.
“일단 시놉시스랑 대본부터 보여줘.”
“아 예.”
난 내 태블릿에 담긴 <화란전>의 시놉시스와 대본 1화를 건넸다.
“이거야? ‘화란전’?”
“예.”
파일을 읽기 시작한 이지연 작가가 이내 빙긋이 웃는다.
“신라 시대 배경으로 한 퓨전 사극이네?”
이지연 작가가 흥미로운 듯 쳐다보는 사이 회사에서 타온 정 커피를 슬며시 내려놓았다.
그녀의 앞에 있는 컵에 정 커피를 따랐다.
이지연 작가는 시선을 태블릿에 둔 채 손만 쓰윽 뻗어 잔을 붙잡은 뒤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곁에 있는 한우주 작가에게도 커피를 내밀었지만 긴장했는지 입에도 대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5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태블릿에서 눈을 뗀 이지연 작가가 한숨을 길게 내쉰다.
그리고 눈을 번뜩이며 우릴 쳐다본다.
“뭐야? 완전 재밌잖아?”
이지연 작가의 짧은 평가에 한우주 작가가 환한 표정을 짓는다.
“저 정말요?”
“그래. 캐릭터도 잘 나왔고 사건도 시작부터 재미있어.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물건 하나 나왔는데?”
<신의 이름으로>의 성공으로 한국 최고의 작가 소리를 듣고 있는 이지연 작가의 대본 평가.
한우주 작가는 감격한 듯 큰 소리로 외쳤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감사는 무슨. 잘 쓴 걸 잘 썼다고 한 것뿐인데.”
그 이후 이지연 작가는 날 쳐다보며 묻는다.
“도와줄게. 그런데 선정이랑은 어디까지 갈 거야?”
“끝까지 갈 생각입니다.”
회귀 전 유선정 작가는 한우주 작가를 작가 업계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 아직 일정이 지워지지 않은 걸 보면 이번에도 그런 시도를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나 역시 아예 유선정 작가를 드라마 판에서 쫓아내 버릴 계획을 짜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이지연 작가가 고개를 끄덕인다.
“오케이. 나도 찬성. 작품을 훔치는 도둑 X이라면 이 판에 발을 못 디디게 해야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도와줄게.”
“감사합니다. 작가님.”
이지연 작가가 묻는다.
“그러면 어떻게 할 생각인데?”
난 씨익 웃으며 내가 생각한 계획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 * *
“보조 작가를 해 달라고?”
“네.”
이지연 작가가 어처구니가 없는 듯 날 빤히 쳐다본다.
<화란전>은 50화짜리 장편 드라마.
난 그중 한 에피소드를 이지연 작가가 통째로 맡아서 써달라고 부탁했다.
어차피 줄거리와 배경 등장인물에 대한 시놉시스가 있기에 틀 안에서 쓰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 이건 함정 카드나 마찬가지다.
이지연 작가의 이름을 숨겨놓고 유선정 작가가 소송을 걸어오면 이지연 작가의 이름을 팔겠다는 뜻이니까.
순간 이지연 작가의 어깨가 들썩거린다.
그러다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푸흐하하!”
내 곁에 앉은 한우주 작가는 정신줄을 놓고 있다.
보조 작가가 필요하냐고 물었던 게 설마 이지연 작가를 보조 작가로 두겠냐는 뜻이었는지는 몰랐던 까닭이다.
사색이 된 한우주 작가를 놓아둔 채 태연히 이지연 작가의 웃음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웃음을 끝낸 이지연 작가가 날 쳐다본다.
“하여간 유노. 대단하다니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
“허락하시는 겁니까?”
내 물음에 이지연 작가가 한우주 작가를 쳐다본다.
“그건 메인 작가가 허락해야 하는 거 아냐?”
한우주 작가가 눈을 끔뻑끔뻑거린다.
“한 작가님?”
“예? 예?”
“보조 작가로 이지연 작가님을 두시는 걸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 어 어. 그게······.”
한우주 작가가 말을 버벅거린다.
그러자 이지연 작가가 다시 묻는다.
“메인 작가님. 내가 한 에피소드 맡아도 돼?”
이지연 작가의 다정한 말투에 한우주 작가가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네! 돼요! 무조건 돼요! 영광입니다! 작가님!”
한우주 작가가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인다.
그러자 이지연 작가가 장난스레 웃는다.
“메인 작가가 보조 작가한테 이렇게 인사하는 게 어디 있어? 막 뭐라고 해야지. 앞으로 날 이 작가~ 라고 불러.”
한우주 작가가 그럴 순 없다며 울상을 짓는다.
그러자 이지연 작가가 농담이라며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분위기가 풀어지자 이지연 작가가 내게 묻는다.
“유노~ 그나저나 어떻게 그런 대담한 생각을 했어? 내가 허락 안 하면 어떻게 하려고.”
“다른 사람이라면 어림도 없지만 작가님이라면 승낙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대본이 좋잖습니까?”
이지연 작가가 고개를 끄덕인다.
“오케이. 그러면 내가 이번에 한 번 크게 도와줄게. 그리고 내 이름은 얼마든지 팔아도 돼.”
이지연 작가는 유선정 작가와 어떤 충돌이 있을지를 예상하고서도 우리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
그녀의 통 큰 선물에 나 역시 깊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그때부터 어떻게 대본 작업을 할 건지에 대한 회의를 시작했다.
우선 글의 큰 얼개가 되는 30장짜리 시놉시스를 이지연 작가에게도 전송했다.
이지연 작가는 시놉시스를 숙지한 다음 한우주 작가가 작성한 2화와 6화의 대본을 채워 놓기로 했다.
메인 작가인 한우주 작가가 큰 흐름을 잡으면 구체적인 디테일을 이지연 작가가 살리는 방식이었다.
“일회성 조연 같은 건 내 마음대로 넣어도 돼?”
“네. 얼마든지요.”
이지연 작가는 한우주 작가의 기를 살려주며 여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현관문이 벌컥 열리더니 김솔잎 작가가 양손에 분식을 들고 들어온다.
“뭐야? 나 빼고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 하고 있었어요?”
이지연 작가가 불러서 온 김솔잎 작가가 먹고 하라며 떡볶이와 순대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김솔잎 작가 역시도 사정을 듣고선 돕겠다고 말했다.
본인도 보조 작가였었기에 누구보다 한우주 작가의 심정을 이해한다나?
이지연 작가가 쌍심지를 켠다.
“애는?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뭐가 공감돼?”
“선생님도 참~ 누가 선생님이 그렇대요? 제 또래 보조 작가 중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원론적인 이야기죠.”
그렇게 한우주 작가는 시청률 25%를 넘긴 <푸른 하늘>의 김 솔일 작가와 현재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이지연 작가를 보조 작가로 거느리게 되었다.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다는 한우주 작가에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당부했다.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으면 유 작가님이 전화해 올 겁니다. 그땐 이렇게 말하세요.”
“뭐라고요?”
“이제부터는 제 매니저와 이야기하라고요.”
한우주 작가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노라 대답했다.
“잘 부탁드릴게요 매니저님!”
그렇게 이지연 작가과 김솔잎 작가의 도움까지 받았지만 여전히 다이어리의 일정은 그대로.
하지만 다음 날.
다이어리의 일정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