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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결석(7)
북부의 아침은 서늘하게 낀 안개를 맞이하며 시작된다· 창창한 햇살을 기대할 수는 없다지만 이렇게까지 서리안개가 가득 내려앉아 있으니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기까지 하다·
부스스 눈을 뜬 꽃서린은 이불을 걷어내고서 옆을 바라보았다·
본디 백유설이 자기로 했던 자리였 거늘 밤새 이곳에 누운 흔적조차도 없다· 쇼파에 담요 하나가 올려져 있는 것을 보아하니 그녀를 배려해 서 따로 잠을 청한 듯 보인다·
“어 깼어요? 아침밥 먹을까요?”
이제 막 씻고 나왔는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백유설이 식탁을 가리 켰다· 접시로 덮여 있는 쟁반 하나 가 놓여 있었다·
“일찍 깨셨네요·”
“제가 잠이 좀 없어서요·”
그는 자신보다도 늦게 잤으면서 자 신보다도 일찍 일어났다·
꽃서린은 슬며시 자리에서 나와 창 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새어 들어와서 개운한 공기가 폐에 한가 득 들어찼다·
그녀는 어제의 도시를 기억한다·
그리고 오늘의 도시가 어제와는 사 뭇 달라졌음을 느꼈다·
도시 여기저기의 건축물에 나있는 흉터들· 그건 어제까지는 분명 존재 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마치 칼로 새긴 듯한 저 흉터들은 어젯밤에 백유설이 누군가와 전투를 했다는 흔적·
“어제··· 무슨 일이 있던 거죠?”
쟁반을 정리하던 백유설의 손이 잠 시 멈칫하더니 볼을 긁적인다·
“뭐 ‘사냥꾼들이 찾아왔었죠· 아 무래도 어디선가 누님의 얼굴을 본 것 같아요·”
“저 때문에··· 제가 싸워도 괜찮 아요·”
“글쎄요· 저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세계수가 없는 꽃서린이 약해서라 고 콕 찝어서 말하지는 않았다·
“어째서죠?”
“왜냐하면···
그는 꽤 진지한 표정이었다·
“여자를 지키면서 싸우는 게 뭔가 폼나고 멋있으니까···
생각보다도 어처구니없는 이유였기 에 꽃서린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밥이나 먹죠·”
“네·,,
식탁에 꽃서린이 앉자 백유설은 식 기구를 챙겨주었다·
“폐광으로 출발하기 전에 오늘 준 비물을 좀 챙길 거예요· 뭐 많이는 필요 없지만요·”
“혹시··· 오늘 밤에도 불청객들이 찾아올까요?”
백유설은 빵을 입에 물고서 어깨를 으쓱 올렸다·
“글쎄요· 본거지까지 찾아가서 싹 털어놨는데 확실하지는 않네요· 워 낙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라·”
“그래도 만약 또다시 찾아오면····”
“그때도 싸그리 박살 내면 됩니다·”
“그 그렇군요····”
정말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 모 기가 나오면 파리채로 죽이면 되지 않겠냐는 듯 말하는 백유설을 보며 꽃서린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 * *
덜컹 덜컹-!
리듬감 있게 흔들리는 열차·
창밖으로는 휙휙 풍경이 지나간다·
“커허····”
“헤····”
홍비연은 자신의 양어깨에 기대고 서 곯아떨어진 이 푸르고 거무죽죽 한 소녀들을 어떻게 내칠지 정말 오 래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이내 포기 했다· 자신보다 몸집이 작은 이 소 녀들이 지금부터 하려는 사명이 꽤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한 번 정도는 봐줄 생각이었다·
그녀는 다리를 꼰 채로 오래간만에 책을 펼쳐 들었다· 병세에 시달리기 시작한 이후로 책을 읽을 새가 없었기 에 글자가 유난히 눈에 잘 들어온다·
두통이 없다·
갑자기 상태가 호전되었느냐?
그건 아니다·
이 모든 건 풀레임의 마법 덕분이 었다· 들어본 적도 없는 어떤 신비 로운 축복을 걸어주며 말하길 일종 의 진통제 역할일 뿐 열을 완전히 내린 것은 아니니 주의하라고 했다·
그 말대로 아직까지도 몸에서 뜨거 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으나 어쨌든 고통이 일시적 으로 사라진 관계로····
신전으로 갈 이유가 없어졌다·
‘어차피 열은 내가 알아서 내릴 거 니까····’
고통만 어떻게든 잡아두면 된다·
축복 내성 때문에 효과가 그리 오 래 가지는 못할 거라고 풀레임이 신 신당부하기는 했으나 오늘 하루만이 라도 버티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런 축복이라면 이왕이면 무도회 에 쓰는 게 좋았을지도 모르겠어·’
무도회는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 요한 날· 단 한 번밖에 사용하지 못 하는 진통제라면 역시 그때 사용하 는 게 옳았겠지·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덜컹 덜컹-!
내달리는 열차·
그렇다· 홍비연은 자신의 왕가 전 용 마차를 탑승하고 있는 게 아니라 풀레임 에이젤과 함께 열차에 탑승 한 채였다·
본래의 목적지였던 신전으로 향하 는 길을 포기한 채 그녀들과 합류한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이 모든 건 풀레임의 잘못이다·
작년 여름방학쯤에 있었던 일 ‘별 의 서고’를 운운해 버렸으니까·
그녀는 그때 보았던 광경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시간을 수천 번이나 되돌려가며 세 상을 구하기 위해 내달리는 소년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
그리고 그 소년이 자신의 인생에 너무나도 깊게 들어와버린 이상····
이는 자석에 이끌리는 것처럼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다· 만약 지금보다 더 아팠더라도 축복으로 두통을 해 결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어떻 게든 합류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에 으음····”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부스스 눈 을 뜬 풀레임은 개운하다는 듯 기지
개를 켰다·
타이밍 맞춰 일어나는 에이젤 역시 풀레임과 정확히 똑같은 동작으로 기지개를 켜는 것을 보면 둘 사이에 뭔가 연결점이라도 있나 싶다·
“벌써 도착이네··· 홍비연 일어 나· 내릴 시간이야·”
“하암··· 도착인가요···? 이봐 요 일어나요· 내려야 해요·”
머리 하나만큼 키가 작은 두 소녀 가 양쪽에서 헛소리를 하고 앉아있 으니 확 불길을 일으키고 싶은 충 동이 일었으나 참았다·
저런 꼬맹이들보단 어른이니까·
위대한 아돌레비트 왕가의 공주니까·
“나 먼저 내린다·”
“어? 뭐야 잠깐만!”
“저도 짐 좀 챙기고···!”
거대한 배낭을 부랴부랴 싸서 온 그녀들과는 달리 홍비연은 가벼운 핸드백 하나가 짐의 전부였다·
열차에서 내려 따스한 햇살을 손 바닥으로 가리며 상쾌한 바람을 맞 이한다· 너무 오랫동안 기숙사에 틀 어박혀 있다 보니 얼마나 오랜만에 하는 외출인지 모르겠다·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긴 홍비연 이 몇 걸음 걷자 곧이어 수십 개의 시선이 한꺼번에 집중되었다·
달리 아름다운 사람은 분명히 많을 것이다· 하지만 홍비연에게는 여타 의 평범한 미인들이 갖지 못한 어떤 아우라 같은 것을 보유하고 있었다·
마치 강력한 자석처럼 혹은 중력 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교복을 입지 않고 나왔던 탓에 홍 비연은 평범한 청바지에 짧은 반팔 흰색 티 하나를 걸치고서 가슴 사이 를 가로지르는 핸드백 하나만을 가
볍게 걸치고 있을 뿐인데도 수천만 달러를 호가하는 고급 드레스를 입 은 사람보다도 더욱 고풍스러워 보 였고 또한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아주 혼자 패션쇼를 하지 그 러냐·”
뒤늦게 배낭을 짊어지고 나온 풀레 임이 괜시리 폼을 잡고 있는 홍비연 을 나무랐으나 그녀는 어깨를 으쓱 할 뿐이었다·
“글쎄· 쳐다보는 시선을 모두 막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대로 홍비연이 딱히 뭐 엄청 대단한 모델 포즈라거나 포토 포즈
를 취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햇살 을 가리기 위해 얼굴을 반쯤 가리는 마이너스 포즈를 취하고 있었는데도 이 정도이니··· 만약 그녀가 정말 관심받기로 마음을 다잡고 옷을 입 고 포즈를 취했다면 더욱 큰 사달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외출하면서 교복을 입는 너희가 더 답답해 보이는걸·”
“스텔라의 생도복은 아주 뛰어난 전투복이기도 하니까요·”
커다란 배낭을 그 왜소한 몸으로 잘도 짊어진 에이젤이 열차에서 내 리며 그리 말한다·
하긴 맞는 말이다·
저 둘은 놀러 가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었으니까·
“흐음··· 근처 명품가게에서 로브 라도 하나 사서 입지 뭐·”
물론 위에서 에이젤의 말은 어디 까지나 평범한 금전을 가진 학생들 에게만 한정되는 이야기·
애당초 사회에는 스텔라 생도복 보 다 더욱 기능이 뛰어난 로브가 한가 득 존재한다· 가성비가 떨어져서 대 부분의 학생이 이보다 뛰어난 로브 를 사 입지 못할 뿐·
내뱉은 말은 곧바로 이행하겠다는
것인지 홍비연은 패션과 성능을 모 두 잡은 것으로 유명한 명품 옷가게 로 쏙 들어가버렸다·
장인이 한 땀 한 땀 로브를 만드 는 곳으로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법한 가게였기에 에이젤의 눈동자 가 휘둥그레 떠질 수밖에 없었다·
잠시 뒤 옷가게에서 빠져나온 홍 비연이 선택한 외투는····
다름 아닌 청자켓·
다리 라인을 그대로 드러내는 청바 지와 아주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청자켓은 기장이 상당히 짧아서 살 에 달라붙은 흰색 셔츠의 허리 라인
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는데 다 벗은 건 아니라지만 저런 옷에 과연 방어력이 있는지 의문이었다·
“···로브를 사러 간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응· ‘론리 로브’의 장인이 ‘아이템 의 연금술사들과 협력해서 제작한 특수 로브야· 기존의 로브와 성능은 비슷하거나 더 좋은데 디자인을 챙 겨서 입을 수 있어·”
**···그러시군요·”
새옷을 사서 기분이 좋은지 평소보 다 말이 많아진 홍비연이었다·
그런 모습은 꽤 신선하기도 했고
상당히 잘 어울려서 눈호강도 됐기 에 솔직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정말 어디 꽃밭 에 데이트하러 나가는 여대생의 느 낌이었기에 철저하게 전투 장비로 무장한 풀레임 에이젤과는 분위기가 너무 다르다는 게 단점이었다·
“에휴 아주 혼자 신났지·”
아주 콧노래까지 부르고 신났다·
그래도 최근 몇 주 동안 아파서 골 골 앓던 홍비연이 오랜만에 외출을 해서 저렇게 들떴다고 생각하니 뭔 가 여동생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일단은 빠르게 이동하자· 주말은
이틀밖에 안 돼·”
“네· 서두르죠· 월요일에 결석할 수 는 없으니까요·”
풀레임은 팔에 착용하고 있던 시계 를 조작하여 허공에 홀로그램을 띄 웠다· 휴대형 지도에 이미 목적지의 상세한 지형지물과 랜드마크까지 모 두 손수 등록해 두었다·
“여기는··· 바랑카 절벽이군·”
“응· 우리의 목적지야·”
“바랑카라면 대륙 북서쪽에 있는 그 수천 키로미터의 대절벽을 말하 시는 건가요?”
“오 좀 똑똑한데?”
에이젤의 말대로 풀레임이 표시해 둔 지도의 절반은 모조리 절벽이었 다· 아예 한쪽 면은 바다밖에 보이 지 않았다·
“이 절벽에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 린 은세십일월님의 신물이 잠들어 있을 거야·”
“···은세십일월님의 신물?”
“응· 아마 은세십일월님도 모르고 계실 거야·”
왜냐하면 이건 ‘원작 로판’에서 등 장했던 히든 피스같은 물건이었으니 까· 로판을 읽을 당시에는 풀레임도 그것이 은세십일월의 신물이라고 생
각하지는 못했다· 작중에서는 달리 그런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풀레임은 확신한다·
‘그건 원작 로판에서 시간을 거스 를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어·’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 물건의 발 동 트리거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 원작 로판에서의 에이젤은 아주 우연히 그것을 발동시키는 데에 성 공했지만 현실에서도 그런 우연을 바라기는 어렵다·
‘그래서 콘스텔라티오의 파편을 챙 겨온 거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시간 역행은 불가능하지 않다·
이전처럼 정신체만을 보내서 역사 에 간섭할 수 없는 그런 간접적인 과거 체험이 아닌 진짜로 시간을 역 행하는 것·
,내 과거를 알아야겠어·,
“여기서 이렇게 가는 게 빠르다니 까요? 제가 열차 엄청 많이 타봤어 요·”
“글쎄· 네가 여태 멍청하게 다닌 거겠スI· 내 방법대로 가면 돼·”
그 과정에서 시끌벅적한 소녀 두 명이 끼어버린 건 예상외였지만 아 무래도 좋다·
혼자보다는 든든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