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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결석(1)
햇살의 손길이 보드라운 대지를 쓰 다듬고 이슬비에 젖은 새순이 고개 를 내미는 계절 봄·
모든 것이 새롭게 피어나는 계절에 스텔라의 신학기는 시작된다·
이맘때쯤 신입생들은 그런 상상을 하고는 한다·
연홍색으로 물든 벚꽃처럼 화사하 고 생글생글한 캠퍼스 라이프!
꽃길을 거닐며 친구들과 언덕 위에 올라앉아 독서 낭독회를 하기도 하 고 수업 도중 이성과의 두근거리는 눈 맞춤도 하고 밤이 되면 아름다운 공중 도시 아르카니움으로 나가 화 려하게 폭죽 터지는 축제에 참가하 여 신나게 놀기도 하고·
···는 전부 꿈이라는 사실을 신학 기 시작 3주 만에 깨달을 수 있었 다·
신입생들은 과연 스텔라가 왜 명문 인지 알고 싶지 않아도 금방 알 수
밖에 없었는데 다른 학교였다면 오 리엔테이션이나 통성명을 하며 서로 간에 교류를 나눌 시간에도 스텔라 는 그딴 건 필요 없다는 듯 곧바로 스텔라 돔에 집어 던지고서 실전 훈 련을 시켜 버린다·
뼈 빠지게 뛰어다니며 훈련을 끝낸 뒤에는 도저히 인간이 소화할 수 없 는 분량의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인다·
학생들은 ‘내가 지 수업만 듣는 줄 아나 보지’라며 교수들에게 저주를 퍼부었으나 ‘주문 없는 저주는 아무 런 소용이 없답니다! 오늘부터 실전 저주술 배워보도록 해요〜!’라며 과 제를 두 배로 늘려 버리니 그야말
로 생지옥이 따로 없다·
아마 99%의 신입생이 스텔라는 지 옥이라며 고통에 몸부림칠 것이다·
아주 극히 일부 1%도 채 되지 않 는 진짜배기 지옥에서 기어 나와 마 침내 광명을 바라볼 수 있게 된····
이를테면 아넬라 같은 부류의 소녀 에게 있어서 하루 종일 공부를 통해 지식을 쌓게 해주는 스텔라는 그야 말로 천국이 따로 없었다·
개강 후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 지만 아직 친구는 없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하나둘 그룹을 형성하고 저들끼리 만남을 가지는 데에 비해
아넬라는 붙임성이 없던 탓이다·
무엇보다 최근 그녀는 ‘세대 차이’ 를 극심하게 느끼고 있다·
아넬라의 본래 나이 마흔·
10대의 소녀들이 대화하는 주제를 도통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가 겹치고 겹친 탓에 아넬라가 친구를 만들지 못하는 것 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일전에 정말 친하다고 생각했던 미 리내 영애의 배신이 결정적이었다·
나는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 은 아니었다· 그녀는 내게서 무언가 를 얻기 위해 접근했을 뿐이었다·
무일푼으로 태어나 한 번도 무언가 를 가져본 적이 없던 아넬라였기에 이런 기분은 난생처음이었다·
가끔 소설에서 부자 캐릭터가 돈만 바라보고 접근하는 주변인에 대하여 투정할 때가 있는데 아넬라는 그 기 분을 1%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 게 된 부분도 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 이 미 연을 맺었던 젤리엘과 백유설은 자신에게 무언가를 원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이기도 하니까·
단 그럼에도 부담감은 꾸준히 갖
고 있는 상태다·
백유설이 자신에게 무언가 기대하 는 게 있으니 이런 특별한 혜택을 누리게 해주는 것 아니겠는가·
세상에 그 어떤 혹마인이 원한다고 인간으로 되돌아와서 최고의 환경에 서 공부하여 스텔라에 입학하는 혜 택을 누리겠는가·
‘백유설에게 도움이 되려면 친구 같은 걸 사귈 때가 아니야·’
오히려 혼자라면 공부에 더욱 집중 하게 되니 그야말로 최고의 환경이 라고도 할 수 있다·
“저기···
“어?”
“혹시 끝나고 스터디 그룹을 할 생각인데 같이 갈 생각 있니?”
멍하니 칠판을 바라보고서 사색에 잠겨 있는데 웬 여학생이 접근한다·
이는 분명 좋은 징조라고도 할 수 있으나 이미 이러한 접촉은 열댓 번 도 넘어가서 질릴 정도다·
아넬라는 이제 저들의 눈빛만 봐도 대중 목적을 가늠하는 게 가능했다·
입학시험 당시 아넬라는 ‘마유성의 뒤를 이을 천재 소녀의 등장!’이라 며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켰는데 그 덕분에 무수히 많은 마탑의 마법
사들과 생도들이 접근한 것이다·
일부 어른들은 신입생 자녀에게 아 넬라와의 관계를 유지하라고 명령까 지 내린 모양이던데 그 정도로 그 녀의 존재감은 꽤 뚜렷한 편이었다·
분명 저 제의를 받아들인다면 다른 학생들과 친분을 쌓을 수는 있겠으 나··· 언제 깨질지 모르는 가짜 친 분은 이제는 두려워서 더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미안· 일이 있어서·”
“그으래···? 어쩔 수 없지·”
그녀가 돌아가자 아넬라는 한숨을 내쉬고서 마법서를 펼쳤다·
사회생활에 벌써부터 진절머리를 느끼다니· 인간이 될 자격이 없던 건 아닐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마법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는데 근처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백색 머 리카락을 허리춤까지 길게 늘어뜨린 살아 움직이는 인형과도 같은 소녀 를 중심으로 열 명가량의 학생들이 모여 있다·
1학년 신입생들이 귀족과 국가 마 탑과 가문으로 파벌이 나뉘는데 정 말 이례적이게도 그녀 주변에는 소 속과 관계없이 다양한 학생들이 모 여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스칼렛’·
귀족으로서의 가문명도 밝혀지지 않았고 소속 마탑도 불명이지만 아 무렴 어떠랴·
스칼렛은 입학 심사에서 아넬라와 함께 커다란 임팩트를 보여준 것으 로 화제가 된 소녀였다·
그 여파로 몰려드는 사람을 모조리 쳐낸 아넬라와는 달리 스칼렛은 누 가 자신에게 다가오든 거리낌 없이 받아줬는데 아넬라는 그 이유를 이 해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스칼렛은··· 마녀왕이 었으니까·
백유설에게 그 비밀을 듣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아넬라는 이미 스 칼렛에 의해 고생했던 적이 있었으 니까
스칼렛이 마음만 먹으면 스텔라 아 카데미를 통째로 무너뜨려 버릴 수 도 있는 살아 움직이는 재앙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아넬라였기에 이제 와서 학생 행세를 하는 모습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머?”
흠칫!
그러다 스칼렛과 눈이 마주친 아넬 라· 황급히 시선을 마법서로 돌렸지
만 이미 늦었다·
스칼렛이 주변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
“아넬라?”
“···넵?”
겁을 잔뜩 먹은 표정의 아넬라가 마법서를 쥔 손을 벌벌 떨자 스칼렛 은 말없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겁먹었니?”
“아 아니요····”
“흐음 뭐· 네가 겁을 먹든 말든 상관없어· 다만··· 네가 그 소년의
각별한 관심을 받는 이상 나는 너 에게 절대 해를 가하지 않아·”
“아···
“그러니까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네 마음대로 학교생활 하도록 해· 일부 러 친구도 안 사귀고 조용히 지내려 는 거 같은데 그럴수록 나만 불편 하거든? 백유설이 나 불러서 잔소리 한단 말이지·”
“그 그런가요?”
“잔소리를 듣느라 따로 시간 내서 만날 수 있으니 사실 나쁘지는 않다 만· 아무튼 잘 지내보라고· 쭈구리처 럼 그러고 있지 말고·”
퍽!
“겍
아넬라의 등을 손바닥으로 힘껏 후 려갈긴 스칼렛은 실실 웃으며 자리 로 돌아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넬라는 새삼 백유설의 영향력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녀왕까지 학교에 끌어들이다니·’
대체 무슨 수로 그 무시무시한 마 녀왕을 학교에 입학시켰는가·
그리고·
“야야 너희 백유설 선배 알지?”
“당연하지· 원래 전문의학과 가려 다가 그 선배 보려고 마법 전사 학 과로 왔다니까?”
“근데 너네 그 선배 수업 때 본 적 있어?”
“나 있어· 딱 한 번· 근데 그때 말 고는 맨날 학교에 오는 둥 마는 둥 하던데?”
“내가 다른 2학년 선배한테 물어보 니까 1학년 때부터 그랬다더라· 학 교에 그냥 놀러 오는 수준이라던데?”
“얼굴 비추는 일이 더 적대·”
“스텔라 출석 시스템은 꽤 엄격하 지 않아? 제아무리 황족이라도 결석
하면 그걸로 꽝이라던데··· 대체 어떻게 유급을 안 당하는 거지?”
“그러게·”
“그보다 의외인 건 그 선배의 성적 이 생각보다 평범하더라·”
“아 그것도 들었어· 이론에서는 교 수님들이 배워야 할 정도로 만점 이 상인데 마법 실기를 아예 안 치른다 고····”
1학년 신입생 사이에서도 백유설에 대한 소문은 끊임없이 돌고 돌았다·
그는 이미 스텔라 내부에서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 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백유설이랑 같은 학교 다 니겠다고 1년 동안 벼락치기에 성공 해서 간신히 입학한 여학생의 실화 가 소설로 출간되고 있겠는가·
그런데 정작 백유설은 수업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들었는데 얼마 전에 엘프의 왕이 직접 교장 선생님을 찾아왔다 던데··· 혹시 뭔가 있는 게 아닐까?”
“정말? 난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
“몰래 찾아왔다더라고· 본 사람이 거의 없어서 확실하진 않아·”
“뭔 사건만 터지면 유명 인사들이 찾아와서 백유설 선배한테 의뢰한다
잖아· 무슨 사건이든 죄다 해결해 버린다는 소문이 있던데···
“에이 설마· 마탑도 있고 해결사 기관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니까 소문이라는 거지·”
백유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아 넬라도 생각에 잠겼다·
도통 학교에 얼굴을 비추지 않아서 도대체 그가 뭘 하고 다니는지도 모 르겠다·
“학교에 나오긴 하려는지····’
* * *
한편 북단부행 특급열차·
따사로운 봄의 계절이 왔음에도 불 구하고 찬 바람 몰아치는 북부로 향 하게 된 백유설은 영 찝찝한 기분이 었다·
오랜만에 봄빛 캠퍼스 라이프를 즐 기나 했더니 결국 또 어딘가로 불려 가는 신세라니·
“바쁠 텐데 이렇게 불러서 죄송해 요···
그러나 맞은편에 앉은 꽃서린이 안 절부절하며 사과를 흐}■자 찝찝했던 기분이 싹 사라졌다·
“아뇨·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죠·”
얼굴이 깡패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꽃서린이 부탁하니 봄 날씨에 북부로 향하는 일조차도 행 복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러니까 천황정팔월에게 세뇌당 한 인물을 찾아야 하는데 그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이 북부의 설파람 대 공이라는 거죠?”
“확실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직접 가서 확인해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해 서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백유설도 잘
모른다· 천황정팔월에게 세뇌당했던 NPC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마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엔 딩을 봤던 모양· 워낙 실체가 불분 명했던 천황정팔월이었기에 플레이 어들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것으 로 보였다·
백유설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계 제일이라고 칭할 만한 미인과 단둘이 여행하기에는 별로 아름답지 않은 백색의 풍경뿐이었지만 그래 도 가만히 보고 있자면 그럭저럭 봐 줄 만하다·
의외로 꽃서린이 눈 덮인 풍경을 좋아하기도 했고·
‘세뇌를 당했을 만한 인물은 아니 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설파람 대공은 ‘주인공 풀레임이 스텔라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만나 게 되는 남주급 인물 중 하나로 멜 리안과 마찬가지로 꽤 비중 높은 인 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등장인물이 십이신월에게 세 뇌를 당한 상태였다?
‘쓰읍 모르겠네·’
직접 만난다고 해서 단박에 무언가 를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미리내
영애를 세뇌한 천황정팔월의 기운을 느끼지 못하기도 했고·
그러나 직박구리 안경이 이와 관련 된 상황을 기록하여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했고 또한 백유설의 육감이 그 것을 기억하고 있으니 다시 한번 비 슷한 사례를 만난다면 눈치챌 수 있 을지도 모른다·
“아 그리고··· 선물을 하나 드리 고 싶어요· 일전에 도움만 받고 아 무것도 돌려드리지 못했잖아요·”
“선물이요?”
“네· 아마 꽤 놀라실걸요?”
“아휴 무슨 선물까지야· 물론 받으
면 감사히 받겠지만요·”
사양하지 않는 백유설을 보며 눈웃 음을 지은 꽃서린은 그에게 손을 내 밀었다·
“잠시만··· 손을 잡아도 될까요?”
“물론이죠·”
단 0·1 초도 고민하지 않고 백유설 이 손을 내밀자 꽃서린은 그것을 마 주 잡고서 눈을 감았다·
‘무슨 선물··· 윽?!’
그러다 갑작스레 머릿속으로 무언 가가 들어오는 소름 끼치는 감각이 느껴져 그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황금색의 단단한 무언가가 가슴 속 에서 꿈틀거린다·
금강칠월 (金剛七月)·
그것은 틀림없이 십이신월 중 한 명의 기운·
‘이걸 대체 어떻게···?!’
어떻게 꽃서린이 금강칠월의 가호 를 갖고 있는가·
백유설이 경악하여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자신만만 표정으로 생글생글 웃는다·
“말씀드렸죠? 아주 특별한 선물이 라고·”
이런 선물을 주게 된 것이 많이 기쁜 것일까 꽃서린은 보기 드물게 도 함박웃음까지 지었다·
[금강칠월의 가호가 당신에게····]
이건 틀림없이 백유설에게 어마어 마한 선물이다· 그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겠지만····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있어 금강칠 월의 가호보다 더욱더 큰 선물은 환 하게 웃는 그녀의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