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8화
298. 한우주 2
한우주 작가의 집.
얇은 현관문 밖으로 두 남매의 다투는 소리가 그치지 않고 있다.
-알았어. 그 아줌마한테 안 갈게. 대신에 이번 작품은 그 아줌마랑 같이하지 마!
-우혁아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니까. 드라마는 연줄 없으면 못 만들어. 그래서 어떻게든 유 작가님이랑 같이 하려는 거야.
한우주 작가는 지난 작품을 뺏기고도 또다시 유선정 작가와 함께 작업하려는 모양이다.
난 좀 더 자세한 사정을 알기 위해 초인종을 눌렀다.
삐리리리~
오래된 초인종 벨을 누르자 힘이 빠진 벨 소리가 울린다.
순간 고함을 치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잦아든다.
그리고 이내 한우주 작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굴렁쇠 엔터에서 나왔습니다.”
-예? 엔터 회사에서 여긴 왜······.
“배우 정유진 씨 아시죠? 전 정유진 씨 매니저인 정윤호라고 합니다. 작가님이 쓰고 계신 작품에 관심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자 잠시만요!
내 소개를 하자 인터폰이 덜컥 끊겼다.
그리고 잠시 후.
쇳소리를 내며 낡은 현관문이 열렸다.
현관에 선 한우주 작가는 고무줄로 질끈 묶은 머리에 검은색 바탕의 흰 줄무늬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엔 교복을 입은 남동생이 서 있다.
밖으로 새 나오는 이야기를 못 들은 척 한우주 작가에게 명함을 건넸다.
“굴렁쇠 엔터의 정윤호 팀장입니다.”
“진짜 정유진 배우님이 제 작품에 관심을 가진다고요?”
키가 160cm 조금 안 되는 한우주 작가가 날 올려 보며 묻는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반신반의.
믿고 싶지만 너무도 뜬금없는 상황일 거다.
“예. 시놉시스를 봤는데 이거다 하고 필이 확 왔다고 하더라고요.”
한우주 작가가 환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데 어디서 제 시놉시스를 보셨어요?”
“KBC 작가실에서 봤습니다. 제목이 ‘화란전’이라고 되어 있던데요?”
회귀 전 한우주 작가는 자기가 쓴 첫 대본을 KBC 작가실에 먼저 보냈다고 했었다.
‘하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었지.’
KBC에는 작가들이 일할 수 있는 작가실이 있는데 그곳으로는 작가 지망생들이 한 번만 봐달라며 시놉시스나 대본을 잔뜩 보내온다.
작가실을 정리하는 막내 작가들은 시놉시스와 대본을 모아 한 데 꽂아두지만 그걸 보는 사람은 없다.
그냥 쓰레기처럼 한데 쌓여 있다 때가 되면 청소부 아저씨가 수거해 버릴 뿐이었다.
그러나 난 태연히 한우주 작가가 보낸 시놉시스를 봤다고 말했다.
“일주일 전에 보냈는데 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운이 좋았습니다.”
한우주 작가가 놀라서 입을 막자 동생 한우혁이 애원하듯 말한다.
“팀장님! 그럼 저희 누나 작품을 드라마로 만들어요?”
한우주 작가가 급히 한우혁을 말린다.
“우혁아. 그런 거 아냐. 배우가 있어도 드라마 만들려면 제작사랑 투자자랑 편성까지······.”
난 한우주 작가의 말을 막으며 대답했다.
“유진 씨가 주연을 맡게 되면 편성까지는 탄탄대롭니다. 작가님은 그저 집필에만 신경 써 주시면 됩니다.”
내 말을 들은 한우주 작가가 바싹 얼어버렸다.
생각지도 못하게 단숨에 입봉할 수 있게 된 까닭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저기 형. 그러면 유선정 그 아줌마는 이제 신경 안 써도 돼요?”
난 한우혁에게 고개를 돌렸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사정을 여쭤봐도 될까요?”
한우혁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인다.
“유 작가는 우리 누나가 쓴 시놉시스를 보고서 공저를 하자고 그래요. 그런데 예전 작품도 그렇게 해놓고 자기 이름만 올렸어요. 그런데 이번에도 또 똑같은 짓을 하려고 하잖아요!”
“정말입니까?”
그 순간 한우주 작가가 동생의 입을 막으려고 손을 뻗었다.
“우혁아 그런 거 아냐!”
한우주 작가가 폴짝폴짝 뛰며 동생의 입을 막으려 한다.
하지만 동생의 키는 180cm 정도 되었기에 한우주 작가는 동생의 입을 막지 못했다.
누나의 손길을 피하며 한우혁이 내게 묻는다.
“형. 혹시 ‘아름드리나무 아래서’라는 드라마 아세요?”
“압니다.”
“그거 누나가 다 쓴 거예요! 그런데 그 선생인지 뭔지 하는 아줌마가 자기 이름으로 냈고요! 누난 고작 300만 원 받은 게 전부라고요!”
한우주 작가가 얼마나 당황했던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우 우혁아! 그런 건 함부로 말하면 안 돼! 누나 이 업계에서 매장당하면 어쩌려고!”
유선정 작가의 <아름드리나무 아래서>는 서정적인 분위기의 작품치고는 평균 시청률 19%의 준수한 성적을 드러내었다.
작품에 녹아든 감성과 톡톡 튀는 캐릭터들 덕에 출연한 배우들도 광고를 쓸어 담았고.
그런데 그걸 한우주 작가가 썼단다.
“어떻게 된 겁니까? 작가님?”
한우주 작가가 포기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사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하아~ 실은 ‘아름드리나무 아래서’는 제가 쓴 게 맞긴 해요. 대신 차기작은 제 이름으로 입봉하게 해주신다고 해서······.”
메인 작가들이 보조 작가들에게 에피소드 몇 개를 맡기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아름드리나무 아래서>는 그와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한우주 작가가 홀로 썼단다.
유선정 작가는 대본에다 공저로 이름을 올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막상 출력된 대본 책에는 한우주 작가의 이름이 없었다고 한다.
방송국과 PD가 신인 작가를 꺼려서 그랬다는 얼토당토않은 핑계를 대며 말이다.
그런데 이번 <화란전>의 시놉시스를 본 순간 또다시 같이 쓰자는 제안을 해왔단다.
이번엔 공저뿐 아니라 차기작을 한우주 작가 단독으로 낼 수 있게 해주겠다면서.
곁에 있던 한우혁이 가슴을 부여잡고 울분을 토했다.
“형. 정유진 같은 유명한 배우 매니저면 힘 있는 사람 맞죠? 우리 누나 좀 도와주세요!”
나는 한우혁을 달래며 진정시켰다.
“알았으니 안심하세요. 이제부터는 한 작가님과 저희 굴렁쇠는 한 몸입니다.”
그리고 난 연이어 말했다.
“작품만 계약하는 게 아니라 저희 소속 작가님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저희 굴렁쇠에서 모든 걸 책임질 수 있습니다.”
스승과의 충돌을 걱정한 탓일까.
한우주 작가가 고민에 빠진다.
“유 작가님 허락 없이 그렇게 해도 될지······.”
그때였다.
동생인 한우혁이 뭔가 각오한 듯한 표정으로 묻는다.
“저기 형. 계약하면 계약금 같은 것도 받나요?”
“예. 2천만 원까지 선 계약금으로 지급됩니다. 수익 배분은 작가님이 7이고 저희가 3이고요.”
한우혁이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누나를 바라본다.
“누나. 그러면 잔말 말고 어서 계약하자. 아빠 지금 부산에 있는 백병원에 입원해 있어.”
순간 한우주 작가가 정신을 차렸다.
“뭐? 아빠가 왜?”
“일하다가 다치셨어.”
“어 어딜?”
“물건을 나르다가 허리를 다쳤어. 벌써 일주일째 일도 못 나가고 병원 신세야.”
두 남매의 아빠는 부산에서 건설직 일용 노동자로 일하는 중이다.
그런데 일주일 전 타일을 옮기다 허리 디스크가 터졌다고 말한다.
순간 한우주 작가가 외친다.
“야! 한우혁! 일주일이나 된 일을 왜 이제야 이야기해!”
한우주 작가의 외침에 한우혁이 어쩔 수 없었다며 항변했다.
“아빠가 말하지 말랬어! 누나 작품 쓰는 데 방해된다고!”
한우주 작가가 눈물을 글썽거린다.
“바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빠가 다쳤다는 말에 눈물을 펑펑 쏟으며 제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한우혁이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누나. 그러니까 이제 누나가 작가 되는 것만을 바라면서 뒷바라지하는 아빠 생각 좀 해! 누나 이름 단 작품을 아빠가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는 알아?”
회귀 전 한우주 작가가 어떻게 유선정 작가의 제의를 물리치고 자기 작품을 해 볼 용기를 내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가족을 위해서였다.
잠시 후.
눈물을 그친 두 남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우주 작가의 눈에는 조금 전과 달리 각오가 담겨 있었다.
“계약할게요. 팀장님.”
“잘 생각하셨습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때 한우혁이 집 안쪽을 가리킨다.
“일단 안으로 좀 들어오세요.”
이제껏 현관에 서서 이야기한 터라 두 사람이 허둥지둥거렸다.
“일단 계약서는 잠시 후에 쓰고 시놉시스 저작권 등록부터 하시죠.”
한우주 작가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아직 대본은 1화밖에 못 썼는데 저작권 등록이 되나요?”
“대본이 아니라 시놉시스. 아니 트리트먼트도 등록 가능합니다. 설마 유 작가님이 그런 것도 알려 주지 않던가요?”
“네. 전 몰랐어요.”
작가의 창작물은 간단한 줄거리와 인물 배경이 있는 시놉시스만으로도 저작권 등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방송작가 교육원 출신이 아니었기에 이런 기초적인 일도 모르고 있었다.
컴퓨터가 있냐 묻자 쓰던 노트북이 있다며 가져오겠노라고 말한다.
“누나 내가 가져올 테니까 거실에 있어.”
한우혁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그사이 나와 한우주 작가는 거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이번 시놉시스. KBC 작가실에 보낸 것 말고 누구누구에게 보여드렸습니까?”
한우주 작가가 시놉시스를 보여준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기 시작한다.
“일주일 전에 작가실에 놓고 오기 전에 KBC 작가실에서 계은숙 작가님께 보여드렸고요 그리고 어제 저희 유 작가님께 보여드린 게 다예요.”
계은숙이라면 KBC와 주로 일을 하는 20년 경력의 작가다.
제대로 된 작품을 낸 적은 없고 단막극 작가와 보조 작가 생활을 겸하고 있고.
‘계은숙 작가를 포섭해야겠네.’
그녀의 증언이 있다면 유선정 작가와의 소송에 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다른 분은 보여드린 적이 없습니까?”
“예. 유 작가님이 어제 자신이 본 뒤로 절대 누구한테도 보여주지 말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아직 유선정 작가가 사고를 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사이 한우혁이 노트북을 가지고 왔다.
“형! 여기요!”
한우혁이 들고 온 노트북은 5년이 더 되어 보인다.
한시라도 빨리 저작권 등록을 하고 싶은 마음에 난 가지고 온 태블릿을 꺼냈다.
노트북보다 태블릿이 빨랐기 때문이다.
회원가입부터 저작권 등록 직전까지 빠르게 진행을 한 다음 태블릿으로 공인인증서와 파일을 복사해 넣었다.
그리고 이내 저작권 등록을 마무리 지었다.
“하아~”
한우주 작가가 날 빤히 쳐다본다.
“이 이러면 된 거예요?”
“아뇨.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저작권 등록을 했다지만 이걸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문제를 풀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
그래도 한고비를 넘었다고 생각한 나는 한우주 작가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굴렁쇠 엔터 표준 전자 계약서]
태블릿에 열린 전자계약서를 가리키며 사인을 해야 하는 위치를 가리켰다.
“여기 여기 그리고 요기 3곳에 사인해주시면 됩니다. 계약 후에 법무팀에서 대처 들어갈 겁니다.”
난 이어서 조건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계약금은 2천만 원. 그리고 수입은 작가님 7 그리고 저희가 3입니다. 국내외를 포함하는 계약이고 계약 종료 기간은 작품이 방영된 후 5년 뒤입니다.”
난 계약 항목을 설명해 주며 두 사람의 궁금증을 하나하나 풀어 설명했다.
사람 좋은 한우주 작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사인을 한다.
하지만 동생인 한우혁은 꽤 꼼꼼하게 계약서상의 문제가 없는지 체크했다.
‘이 녀석. 매니저로 키우면 딱이겠는데?’
한우혁이 고등학교 3학년이었기에 진로를 묻고 싶었지만 일단은 한우주 작가의 일이 우선이다.
“그런데 우혁 씨.”
“말씀 편하게 하세요. 형.”
잠깐 고민하던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혁아. 당분간은 유 작가님이나 상대 로펌에서 전화가 많이 올 거야. 하지만 누나가 전화를 못 받게 하고 네가 대신 받아. 그리고 내 연락처를 알려 주고 거기로 전화하라고 해.”
“아 예.”
“그리고 한우주 작가님은 오늘부터 출근하지 마세요.”
한우주 작가가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사무실에 제 옷들을 몇 벌 놔두고 왔는데······ 그것만 가지고 나오면 안 되나요?”
“제가 사 드릴 테니까 포기하세요. 괜한 의심을 살 수 있습니다.”
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난 한우주 작가와 한우혁과 함께 회사로 가자고 말했다.
이제부터 벌어질 일을 두 사람 또한 알고 있어야 했으니까.
* * *
굴렁쇠 엔터.
강지영 본부장은 현재 상황을 듣고서 곧바로 법무팀을 움직였다.
회사 법무팀은 법적인 보호를 위한 증거자료를 모으고 한우주 작가의 증언을 녹취했다.
그리고 즉시 계약금 2천만 원을 지불했다.
통장에 2천만 원이 찍히자 한우주 작가는 곧장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순간 한우주 작가가 갑자기 찐한 경상도 방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빠! 내 우주다!”
-아이고! 사랑하는 우리 장녀 아이가?
다정한 경상도 방언이 전화를 타고 흘러나온다.
한우주 작가의 아버지는 부산 출신.
그리고 한우주 작가 본인도 어릴 적에는 부산 쪽에서 학교를 다닌 터라 방언으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아빠. 근데 내한테 진짜 이랄끼가?”
-그기 뭔 소리고?
“내가 아빠 딸 맞나?”
-야가 뭘 잘못 묵었나? 니 와 그라는데?
한우주 작가가 눈물을 뚝뚝 흘린다.
-우주야! 니 우나? 누고? 누가 우리 딸 울리노? 아빠가 가서 궁디를 확 주차삐께!
허리 디스크 때문에 입원을 해놓고도 딸을 먼저 챙기고 있었다.
한우주 작가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닦으며 투덜거렸다.
“차긴 뭘 차? 아빠가 깡패가?”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근데 왜 우노? 아빠 마음 아프게.
“내 마음 아픈 건 모르나? 다치고도 내한테는 말도 안 하고!”
-······.
“그러니까 다시는 그러지 마라. 내 안 그러면 아빠 딸 안 할끼다!”
-우혁이가 말하드나?
“그래! 그리고 아빠 소원대로 나 작가 됐다! 그니까 빨리 수술부터 받아라. 2천만 원 다 보낼께!”
-2천만 원? 진짜가?
“그래! 우혁이 부산 내리 보낼 테니까 바로 수술부터 받아라! 앞으로는 내가 돈 벌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라째?”
그때였다.
전화기 너머로 그녀의 아버지가 떠나가라 외쳤다.
-진짜 우리 딸이 작가 된 기가?
“진짜다! 그것도 유지니 언니가 주연이다!”
-하하하! 이래 좋은 일이 다 생기네! 우주야. 아빠 다 나았다! 수술도 필요 없다! 우리 딸 최고다!
딸의 소원이 이뤄진 순간 아빠는 그렇게 환호를 지르며 소리 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 다이어리의 일정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계약도 맺고 시놉시스 저작권 등록도 마쳤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