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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신입생(3)
인간 드워프 엘프·
지상을 대표하는 세 종족은 안타깝 게도 역사적으로 화합이 잘 이루어 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서로가 서 로를 꺼려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는 데 최근 들어서 엘프와 인간 사이
에 교류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였고 드워프도 엘프에게 마음을 열었다고 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거리감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런 와중 외교에 치명적일 수도 있는 조건을 ‘십이신월’ 중 하나가 내걸고 말았다·
다른 그 무엇도 아니고 엘프왕을 제물로 바치라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
아무리 제 잘난 맛에 사는 드워프 제왕 금강팔정이라지만 지극히 합리 적인 사내였기에 위의 조건은 결코 들어줄 수 없음을 인지했다·
“그렇게 된 일이군요·”
침울한 목소리로 사건의 경위를 설 명하는 드워프 제왕의 이야기를 듣 고서 꽃서린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건이 어찌 되었든 간에 금강팔정 은 이 일을 그녀에게 상담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책 감에 자존감이 떨어진 듯 여러모로 예전같지 않은 초췌한 몰골이었다·
“그대에게 와달라는 말은 결코 하 지 않겠네· 자네는 엘프왕으로서 목 숨 걸고 엘프를 지켜야만 하는 존재 이나 드워프를 위해 희생할 필요가
없음은 내가 더 잘 알고 있네·”
즉 금강팔정이 꽃서린을 찾아온 이유는 그녀에게 제물이 되어달라고 부탁하려는 것이 아니라 엘프왕의 지혜를 빌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맞아요· 저에게는 지금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 많아요·”
꽃서린은 죽을 생각이 없다·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았던 1년 전의 자신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절대로 안 된다·
살아갈 이유가 생겼으니까·
가슴 설레고 심장이 세상 끝까지 요동칠 정도로 어떤 행복한 감정을
느껴버렸으니까·
그녀는 평생 그 감정을 되뇌이며 살아갈 것이다· 그것을 충분히 만끽 하고 만족하기 전까지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제가 희생하지 않아 도 되는 또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희생하지 않는 방법이라···· 고 민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 만 상대는 십이신월 중에서도 가장 고집불통이라는 ‘금강칠월’· 결코 쉽 지 않을 걸세·”
그리 말한 드워프 제왕은 슬그머니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제왕으로서 이런 굉장히 자존심이 도 상상조차 하지 를 보여준 소년이
말을 꺼내는 것이 상했으나 그로서 못하는 어떤 행보 떠오른 것이다·
“혹시 그 소년의 지혜를 빌릴 생 각인가?”
비록 자신들에게는 방법이 없을지 라도 혹시 그 아이에게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런 심정으로 물었으나 꽃서린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번에도 도움을 청하 지는 않을 거예요· 제게도 좋은 묘
책이 떠올랐거든요·”
“묘책이라고?”
십이신월 금강칠월은 아름답고 반 짝이는 것을 사랑한다·
아주 끔찍할 정도로 사랑한다·
“제게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더욱 아름다운 무언가 를 손에 쥐여주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자 제왕은 표정을 찌푸리고선 한숨을 내쉬었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그렇네 만 그대보다 아름다운 무언가가 세 상에 있을 것 같지는 않군·”
“에··· 그런가요?”
설마 드워프 제왕이 칭찬을 해올 줄은 몰랐기에 꽃서린은 고개를 살 짝 갸우뚱했다·
백유설이라면 모를까 앙숙 관계로 지내던 금강팔정이 칭찬해 봐야 기 쁘다기보단 당황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우리도 시도해 보지 않은 건 아니네· 자네를 찾아오기 전에 이미 수많은 보석과 악세서리를 비 롯하여 역사적인 대작을 갖다 바쳤 는데도 소용이 없었지· 아예 쳐다보 지도 않더군·”
그래서 더욱 갑갑하다는 것이다·
당장 꽃서린을 갖다 바치지 않으면 드워프가 멸망하게 생겼는데 그렇다 고 꽃서린을 제물로 바치는 건 현실 적으로 불가능·
“그런가요···r
잠시 고민하던 꽃서린이 물었다·
“혹시 그분은 단순히 아름다운 것 을 좋아할 뿐인가요?”
“그렇지· 성욕이라든가 하는 그런 감정은 일절 없을 걸세· 다만 아름 다운 것을 곁에 두고 싶은 소유욕이 워낙 강렬해서 문제지만···
“그런가요?”
그렇다면 문제없다·
“제가 직접 갈게요·”
“···뭐라? 제정신인가?!”
제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탁자 를 쳤다·
“그건 내가 반대하겠네· 자네 또한 한 종족의 왕으로서 백성을 보살펴 야만 하는 몸· 스스로를 귀중하게 여기게!”
“저도 알아요· 요새는··· 제 자신 을 아끼는 법도 배워나가고 있구요·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예요· 저를 제 물로 바치겠다는 말은 한 적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꽃서린은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무언가를 깊게 고민할 때 나오는 그 녀의 버릇이었다·
“제가··· 직접 가서 십이신월을 설득해 보겠어요·”
“말도 안 된다네· 그대의 얼굴을 보 는 순간 영원히 놓아주지 않을 걸세·”
불가능하다·
드워프 제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 으나 꽃서린은 빙그레 웃었다·
“걱정마요· 세상에 불가능한 것은 없으니까요· 설령··· 제게 위기가
닥치더라도 문제 없어요·”
그 말에 드워프 제왕은 아주 살짝 이지만 납득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누군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 지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망설임 없 이 움직일 수 있으리라·
‘대단하군·’
자칫 잘못했다가는 목숨을 잃지도 못한 채 영원히 십이신월의 컬렉션 으로 박제되어 살아갈지도 모른다· 하늘꽃요람이 혼란에 빠지는 것은 당연지사”·
자신의 목숨과 나라가 걸린 일·
위험부담이 어마어마하게 컸음에도 불구하고 저토록 담담하게 직접 나 서겠다고 말할 정도로 그녀는 어떤 소년을 신뢰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맹신하고 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이 눈앞 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더 웃기는 점은 본인 또한 그 현실을 납득하고 있다는 것·
고작 20년 남짓밖에 살지 못한 인 간 하나로 인해 역사의 흐름이 흔들 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300년이 나 살아온 드워프 제왕은 새삼 세상
이 많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 로 체감하였다·
“···그대가 그렇게 말한다면 좋 아· 한번 시도해 보지· 단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야만 한다네·”
마침내 제왕이 납득하자 꽃서린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끄덕였다·
“물론이죠·”
* * *
입학 심사까지 앞으로 일주일·
시험을 매년 약간씩 다른 방식으로
치른다·
실전 시험이라고 해봐야 마법을 선 보이는 것밖에 없기는 하지만 아주 간혹 시험에서 출제되는 단 하나의 마법만을 연습해서 합격하는 등 기 묘한 사례가 있었기에 스텔라 내부 에서도 철저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 었다·
아넬라는 크게 문제가 없어 보였 다· 본디 흑마인이던 시절에는 지력 을 포기하고 근력에 몰빵한 듯한 ,무식한 육체파’ 타입에 가까웠으나 마법사가 된 지금은 확실하게 지적 으로도 충분히 똑똑한 면모를 보이 고 있었다·
“이 정도면 A반을 노려도 되겠는 데···r
아넬라에게 모의고사를 치른 백유 설은 그녀의 지식 수준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공부한 기간은 반년도 채 되지 않는다· 태어나서 17세가 되는 날까지 10년이 넘도록 공부해온 천 재들이 모이는 장소가 바로 스텔라 였는데 아넬라는 그들의 재능을 가 뿐히 뛰어넘은 것·
단순히 반년 동안 서적을 읽기만 해도 시간이 부족했을 텐데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 기억나? 나 예전에··· 상대 방의 트라우마를 자극할 수 있는 능 력이 있었잖아·”
“어· 기억나지·”
그때 아넬라가 보여주었던 환상 덕 분에 백유설도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으니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당시에 보았던 무수히 많은 백유설 의 잔영을 떠올렸는지 아넬라도 잠 시 눈빛이 멍해졌으나 금세 되돌아 왔다·
“인간이 되면서 그 능력이 완전히 사라졌는데 대신 눈을 감고 집중하 면 나만의 세계에 빠져들 수가 있거
든· 거기서는 시간이 조금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아·”
“···뭐? 그게 가능해?”
실제로 저 능력은 백유설도 사용하 고 있기는 하다· 바로 연홍춘삼월의 권능 중 하나였으니까·
그러나 아무 때나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여 백유설조차 아주 특수 한 상황이 아니면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
“자아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서 공 부를 한다는 거야?”
“으응 비슷해·”
생각보다도 대단하고 생각보다도
위험하다·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아넬라의 재능은 가히 주인공들과 필적하는 수준이었으니까·
“마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야·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어· 가끔은 시간이 느리게 가기는커녕 더 빨리 갈 때도 있고···
“그래도 대단한 건 사실이야· 자아 를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너밖에 없을 거야·”
“그으래에··?”
백유설의 칭찬이 못내 좋았는지 아 넬라가 몸을 배배 꼬며 실실 웃었다·
“꼭 오빠에게 칭찬받는 여동생을
보는 느낌인데···T
옆에서 지켜보던 풀레임은 아넬라 를 한심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뭐 뭐라고? 나는 너네 둘의 나이 를 합친 것보다도 나이가 많거든?!”
아넬라가 그리 외치スト 풀레임은 백유설을 바라보았다·
“네가 한 1만 년 정도 살았으면 그럴 수도 있겠네·”
“앗·”
“···뭔 소리야?”
“그리고·”
채점을 도와주던 풀레임은 아넬라
의 시험지를 톡톡 쳤다·
“아직 부족해· 이런 간단한 응용 문제를 대체 왜 틀린 거야?”
“아앗···! 실수했다!”
시험지를 허겁지겁 가져가고서는 아넬라가 울상을 지었다·
확실히 아직까지는 부족한 부분이 많다· 순수 재능으로만 따져도 아마 그녀는 아주 평범한 수준일 것이다·
오로지 자아의 세계로 빠져들 수 있는 능력 하나만으로 단기간에 여 기까지 성장한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능력인지 몸 소 체험했던 백유설이었기에 아넬라
에게 신신당부했다·
“아넬라·,,
“으응?”
“넌 절대 나한테서 떠나지 마· 알 겠어? 도망치면 잡아 와서 가둬버릴 거니까· 흑마인으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고·”
“무 물론이 ス1! 절대 흑마인 안 될 거야· 이제는 끔찍해! 영원히 안 도 망치고 있을게!”
“좋아· 너는 다시 내 빵셔틀이다·”
백유설과 아넬라가 말장난을 치자
풀레임은 살짝 불만 어린 표정을 지 은 채 펜으로 책상을 톡톡 쳤다· 그 렇게 잠시 기다리니 호텔 내부의 문 이 열리며 다른 소녀들이 등장했다·
그녀들은 각각 시험지를 손에 쥐고 있었는데 벌써부터 나와서 채점을 받고 있는 아넬라의 모습을 보고서 는 깜짝 놀랐다·
“분명 같이 모의고사를 치르지 않 았나요? 벌써 나오다니···
미리내 영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 와 아넬라의 시험지를 살폈다·
대부분 정답이라고 표시된 그것을 보고서는 표정을 굳혔다·
“···믿을 수 없는 수준이군요·”
“자 너희도 시험지 내놔봐· 너희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내가 알아야 지·”
백유설은 소녀들의 시험지를 받아 들고서 풀레임과 함께 빠르게 채점 을 이어나갔다· 그중 몇몇 소녀들은 구석에서 풀레임을 보며 수군거렸다·
‘저분이 그 풀레임···?’
‘평민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생각보다 더····
‘귀족 같은 느낌이 드네요···
뽀얀 피부에 윤기 있는 머리카락과
세상의 모든 사랑을 한몸에 받은 듯 한 귀엽고 사랑스러운 외모까지· 귀 족으로서 평생을 살아온 귀족 아가 씨들이 상상했던 평민의 모습이 전 혀 아니었다·
“야·,,
“네에···?,,
그러다 풀레임이 입술을 떼자 귀족 영애들이 경직되었다·
“다 들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이 귀엽다는 소리거든?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그딴 소리 꺼내면 벽에다 가 대가리 꽂아버린다·”
“네 넵!”
배우지도 않은 차렷 자세까지 하고 서 소녀들이 움츠러들자 백유설은 웃 음이 터질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보통의 소녀라면 귀족 같다는 둥 예쁘고 귀엽다는 등의 소리가 칭찬 이었겠지만 풀레임에게는 전혀 아닌 모양이다·
“채점 끝났어· 이리 모여봐·”
백유설은 안경을 내려놓고서 자신의 탁자 앞에 소녀들이 모이도록 했다·
탁자 위에는 일곱 명의 시험지가 늘어져 있었는데 빨간색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즈
“성적이 아주 개판이야·”
아주 끔찍할 정도로 그녀들의 수 준이 형편이 없다는 의미·
그나마 의외였던 점이 있다면 미 리내 영애의 성적이 아넬라와 필적 하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도저히 부족한 점 하나 없는 소녀 가 대체 왜 가르침을 달라고 찾아왔 는지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일단은 그 부분은 집어넣었다·
“개 개판이라구요?”
“하지만 제 가정교사 윌리엄 선생
님은 제가 스텔라에서도 A랭크 이 상은 받을 거라고 했어요!”
“그래? 그 윌리엄 선생님은 어디 출신이신데?”
그··· 테라린 아카데미···
“명문 학교 출신이시네· 그런데 스 텔라를 졸업하시진 못했잖아?”
“···그렇죠·”
“게다가 나는 입학 시험을 치른 지 일 년밖에 되지 않았고· 그분이 나 보다 대단한 분이라는 것은 알겠지 만 최소한 내가 그분보다는 스텔라 입학 시험에 대해서는 잘 알겠지?”
“네에····”
무어라 반발하려던 소녀들은 금세 시무룩해져서는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막막한 수준이야· 이대로 시험을 치르면 너희 중 미리내 영 애를 제외한 누구도 시험에 붙을 수 없어·”
“그 그럴 수가···广
충격을 먹은 듯한 소녀들을 뒤로하 고서 백유설은 미리내 영애를 바라 보았다·
“자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러자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본인의 실력이 부족하다면 떨어 지는 게 맞겠지요·”
“미리내 영애···!”
“어떻게 그런 말을···
“너무하세요!”
미리내 영애마저도 그렇게 말하니 소녀들은 아예 울상이 되었지만 백 유설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언뜻 비치는 [거 짓]이라는 감정을 읽어냈기 때문·
‘그렇단 말이지···
거짓의 감정까지는 예상대로였으 나 부족하다· 그가 생각했던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럼 역시 남은 건 하나뿐이야·’
백유설은 옆을 흘깃 쳐다보았다·
허둥지둥 소녀들을 위로하는 바보 같고 멍청하지만 그래도 착하고 순 한 아넬라·
확실하다·
미리내의 시선은 백유설을 향해 있 지만 그녀는 아까부터 아넬라에게 온 신경을 쏟아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