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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자아(5)
눈을 떴을 때·
백유설은 스텔라 아카데미의 어느 복도 한복판에 서 있었다·
‘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 니 노을 지는 햇빛이 희미하게 새
어 들어와 복도를 비추었다·
,뭐야···
방금까지 뭘 하고 있었더라?
천천히 기억을 더듬던 백유설은 담갈토이월을 떠올렸다·
그래 분명 담갈토이월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연두림사월의 신물을 사용하 여 마침내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명 을 얻게 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어마어마한 생명력의 파도에 휩쓸렸 고····
그 직후 정신을 잃은 뒤 ‘나’와 마 주하게 되었다·
어쩌면 백유설의 スト아·
어쩌면 또 다른 백유설·
자아 속에 구현된 PC방에서 그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별자리가 잘 보이는 언덕으로 이동했고 그 별들 사이로 또 다른 백유설이 사라지는 장면을 목격한 것까지는 떠올랐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에?’
무심코 한 걸음 발을 내디딘 백유 설은 온몸을 묵직한 무언가가 감싸 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이 이건···?”
마치 달빛을 머금은 듯 은은한 은
백색을 띠는 갑옷이 몸을 철저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허 리춤에는 기다란 검 한 자루가 착용 되어 있었는데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나 백유설은 이것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신화급 갑주·
‘회광반조 (回光返照)’·
죽음의 위기에 닥쳤을 때 단 한 번이지만 목숨을 되돌리는 말도 안 되는 개사기 아이템·
제작 조건도 굉장히 까다로웠는데 은세십일월이 이 갑주에 직접 가호 를 부여해야만 했으며 세상에서 가
장 희귀한 달빛을 머금은 광석 월광 석(月光石)을 대량으로 구해야만 했 으니····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럼 설마 이것도···r
스르릉!
검을 뽑으니 귀가 녹아내릴 듯한 맑고 고운 음률이 복도를 진동하였 다· 노을빛을 받아 은은한 황금색으 로 빛나는 이 검의 이름은·
신화급 신검·
‘섬광예찬 (閃光禮讚)’·
순간적으로 빛에 가까운 속도를 내
어 적을 ‘반드시’ 베어버리는 기능 을 가진 무식한 아이템·
세계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이라 할 지라도 섬광예찬에게 닿는 순간 가 볍게 베어지고 만다·
“진짜잖아···r
이걸 만드느라 몇 년 동안 얼마나 개고생을 했던가· 전 세계 플레이어 중에서도 단 한 명 자신밖에 가지 고 있지 않았던 초희귀 아이템·
현물로 보게 될 줄은 몰랐기에 손 을 벌벌 떨며 검신을 쓰다듬던 백유 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잠깐·’
이 아이템들은··· 현실에 존재하 던 것이 아니다· 아이테르 월드 ‘온 라인에서 제작했던 것들이란 말이 다·
즉 게임 속 물건이라는 뜻인데·
‘이게 왜 현실에···?
그는 서둘러 장갑을 벗어서 손바닥 을 만져보았다· 그제야 아까부터 느 껴지던 이질감이 단순히 장비 때문 은 아니란 것을 알았다·
‘내 몸이 내 몸 같지가 않아·’
마치 또 다른 누군가의 몸을 뒤집 어쓴 듯한 어색한 감각·
육감이 둔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선명해져서 낯설게만 느껴졌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봐야 해·’
서둘러 복도를 달렸으나 학생은 아 무도 보이지 않았다· 학교 바깥으로 뛰어나가 제1 본탑을 향해 달리는 데 기존의 스텔라 아카데미와 다른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여긴 원래 정원이 있지 않았나?’
정원이 있던 자리에는 웬 석상 같 은 것이 자리하였고 분수대가 있던 자리에는 못 보던 건축물이 생겨 있 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뭐야 이건···
제1 본탑의 높이가 거의 두 배 이 상 높아져 있었다· 본래는 80층 정 도였기에 고개를 들면 바라보는 것 정도는 가능했는데 이제는 목이 꺾 일 지경이었다·
본탑의 정문에는 갑옷 차림의 스텔 라 기사 두 명이 서 있었는데 그들 에게 달려가자 갑작스레 백유설을 향해 경례하였다·
“수고하십니다!”
“네 네?”
갑작스러운 경례에 백유설이 놀라자 도리어 당황한 것은 기사들이었다·
“저희가 뭔가 실수했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왜 저 한테 경례하십니까?”
그러자 기사 두 명이 서로를 물끄 러미 바라보더니 그게 무슨 생뚱맞 은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기사단장님이시까요·”
“누가요? 내가?”
,,예·,,
“아레인 기사단장님은 어쩌고?”
기사들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돌아가셨잖습니까· 몇 년도 더 전의 일입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평소와 너 무 다르십니다·”
“맞습니다· 평상시에는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침묵만 을 고수하셨는데····”
“하하 갑자기 말이 많아지시니 저 희는 좋군요· 개인적으로 너무 존경 하고 있습니다· 저희 세상을 구하셨 잖습니까? ···비록 스텔라를 제외 한 대부분은 무너졌지만요·”
칼 그 얘기는 왜 하는가!”
“앗! 죄송합니다!”
이럴 수가·
백유설은 아찔한 기분이 되었다·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긴··· 게임 속이잖아?’
고등학교 1학년의 게임 속이 아닌 최종보스 흑야심삽월을 물리친 이후 의 세계·
단순히 게임이라고 생각했던 그 세 상이 실제의 현실이 되어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더듬더듬 묻는 백유설의 질문이 기 사들의 표정이 또다시 어두워진다·
”돌아가셨지···r
예 스텔라를 지키려다가···· 대
륙 하나가 통째로 떨어져 나갈 정도 의 위력이었는데 스스로를 희생하 셨죠·”
어지럽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그리고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백유설은 퍼뜩 생각난 것을 물었다·
“풀레임 풀레임은?”
“예에?”
“풀레임은 찾았어? 분명 찾고 있 었는데···
“아 천상탑의 탑주님을 말씀하시 는군요· 저희도 찾아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천사 들도 지금 완전 패닉 상태에 빠졌더 군요· 만나보시겠습니까?”
“그 그래· 만나봐야겠어·”
백유설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으 나 그 순간 갑자기 귓가에 목소리 가 들려왔다·
-딴짓하지 마·
그것은····
-시간이 없어·
-너는 곧 돌아가야만 해·
-네가 살아날 힌트를 찾아·
-그것만이 희망이니까·
틀림없는 나 자신의 목소리·
그런데 모든 목소리가 전부 다른 백유설의 목소리였다·
한 명 한 명이 같은 백유설이 아 니라 마치 수십 명의 또 다른 백유 설이 말하는 듯한 오싹한 감각에 그 는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났다·
“어라? 왜 그러십니까?”
“아니··· 천사는 나중에····”
횡설수설 대답한 백유설은 허겁지 겁 질주하여 서쪽 정원으로 향했다·
인적이 아예 없는 장소· 새가 지저 귀는 소리가 아주 간혹 들려온다·
‘시간이 없다·’
또 다른 백유설들이 했던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 었다·
‘이 세계에 내가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눈을 감고 조용히 감각을 되살리 니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앞으로 고작해야 30분·’
목소리들은 말했다·
되살아날 힌트를 찾으라고·
이곳에 오기 전 자아 속에서 또 다른 백유설이 말했다·
힌트를 주겠노라고·
’···그런 거였나·’
단순히 키보드의 단축키로 조작하 던 게임 속 ‘자연천기ス]체’의 감각 을 현실의 백유설이 느낄 수 있을 리는 없다· 하지만 만약 그 감각을 백유설에게 체험시켜 준다면?
”후우····”
그는 눈을 감고서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미 이 육체는 완벽하게 성 장을 끝마친 상태·
마력누설지체를 극복하여 자연천 기지체를 터득하여 무한한 생명력을 얻었으며 호흡을 통해 체내로 들어 온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 다·
마법검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마나 를 검의 형태로 발산하는 게 고작인 현실의 백유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경지·
이곳의 백유설은 피부에 아주 얇지 만 강철보다도 튼튼한 마나 실드를 두르는 것도 가능했고 맨손에서 투 명한 마법검을 뽑아내 다이아몬드를
자르는 것도 가능했다·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경 ス]·
‘감각을 기억해야만 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체내 에 쌓이는 마나의 감각이 어색하기 만 하다·
마력누설지체는 체내에 마나가 거 의 존재하지 않아 자연계의 마나에 큰 영향을 받는다· 탁한 마나에 노 출되면 그대로 타락해 버리기 일쑤 였고 신성한 마나에 노출되면 순식 간에 신령화되어 육체를 잃어버리기 도 했다·
하지만··· 이 신체는 반대였다·
육신에 확실한 색이 존재했다·
그것으로 하여금 체내로 들어온 모든 마나를 자신의 색으로 물들인 다·
자연의 마나에 내가 물드는 게 아 니라 자연을 도리어 나로 물들여 버 리는 경スI·
눈을 감고 있음에도 주변의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
저 멀리 날갯짓하는 나비·
열을 이뤄 기어 다니는 개미와 코 를 골며 잠들어 있는 강아지·
그 모든 것들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이런 건가···
나만의 색·
나만의 존재감·
그것을 강렬하게 발산할 수 있어야 만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여태까지 자연천기지체를 잘못 생 각하고 있었다· 무협 소설에서 본 것처럼 자연과 하나가 되어야만 한 다기에 나의 몸을 자연에 동화시키 는 줄로만 알았다·
‘그 반대였어·’
백유설은 팔다리를 움직이듯 익숙 하게 존재감을 사방으로 퍼뜨렸다·
본래의 신체였다면 결코 할 수 없 었을 일이건만 이 신체로는 너무나 도 자연스럽게 이것이 가능했다·
손을 슬며시 들어 멀리 떨어진 꽃 잎을 향해 손짓하니 잎이 떼어져 허 공으로 날아올랐다·
‘대단해····’
단순히 게임이라고 생각했던 시절 에는 몰랐다· 나의 캐릭터가 얼마나 대단한 경지에 도달했는지를·
‘현실의 내가 이 경지에 다시 도달 할 수 있을까?’
모른다·
하지만 가능하도록 해야만 한다·
그래야 죽지 않을 수 있으니까·
나는 살아남아야 하니까·
-너는 살아야 해·
-살아서 모두를 구하는 거야·
바람에 흩날리듯 들려오는 목소리·
백유설은 한이 맺힌 그들의 이야기 를 가슴에 담으며 서서히 감각을 확 장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천천히 이 감각을 음미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터무니 없이 부족했다· 고작 30분이라는 짧
은 시간 안에 익히기에는 너무나도 위대한 경지였기에 어설프게나마 흉내 내는 법을 배우는 수밖에 없었 다·
‘찾아야 해·’
어떻게 하면 이 위대한 신체를 따 라 할 수 있을까·
수박 겉핥기식으로라도 좋으니 아 주 잠깐만이라도····
정말 찰나의 순간 단 1초라도 자 연천기지체에 머무르는 게 가능하다 면
순간 백유설은 눈을 크게 뜨고서
숨을 내뱉었다·
심장에서부터 고동치는 알 수 없는 이질적인 감각이 너무나도 낯설었던 것이다·
‘이 이게 뭐야?’
마치 팔다리가 하나씩 더 돋아난 듯한 기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 을 움직이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 었다·
‘이거였나···!’
이 세계 속 백유설의 심장에는 거 대하고 강렬한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곳에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묶인
채 자연에게 발산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야 이 감각을 기억하면 돼!,
백유설은 눈을 질끈 감고서 심장 에 갇혀 있던 기운을 발산하였다·
감각이 점차 멀어진다· 시간이 다 되어 현실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조금만 더····’
이 세계를 전부 백유설의 존재감으 로 물들이겠다는 심정으로 그는 심 장 속에 갇혀 있던 기운을 폭발적으 로 발산하였고·
“아···!”
노을이 지고 밤이 찾아와 서서히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던 하늘이 완전 한 흰색으로 물드는 광경을 마지막 으로 백유설은 눈을 감았다·
– 명심해·
– 해가 뜨지 않는 영원의 밤이 찾 아오고 있어·
백유설의 목소리가 흘러간다·
– 너는·
– 우리는·
– 밤을 거둬들이는····
– 빛이 되어야만 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