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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자아⑶
첫눈이 내렸다·
12월의 초순 어느 날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늦게도 내리는 첫눈 을 맞이하며 스텔라의 생도들은 신 나게 학구를 뛰어다니며 어린애라도 된 것마냥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 움을 벌이고 있었다·
‘명문이고 뭐고 애는 애라는 건 가·’
파릇파릇한 새싹들 사이로 초췌한 몰골의 아류문 블르슌이 고개를 내 밀었다· 교육 기관이라고 담배도 못 태운다더니 정말 공기가 맑다·
‘좋을 때지·’
비록 외견은 20대 중후반의 미청년 이었으나 실제로는 무려 150년이나 살아온 9클래스의 위대한 대마법사·
“학회장님· 이곳에 계셨군요· 저희 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스텔라의 정문을 장난으로 몰래 통 과해서 들어왔건만 10분도 되지 않
아 기사들이 찾아왔다·
깜짝 놀래켜줄 생각이었는데 별로 놀라지도 않은 모습이다· 자신의 성 격을 엘트먼이 미리 언질해 둔 걸까·
“재미없긴·”
피폐한 인상의 아류문을 보고서도 전혀 동요치 않는 기사들·
병을 시름시름 앓고 있어 그의 상 태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어지간한 마법사라면 모두 알고있는 사실이다·
기사들을 따라 거닐며 아류문은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이를 이만큼 먹어도 첫눈이 주는 감흥은 매번 새롭기만 하다·
···내년의 첫눈을 보지 못할 수도 있 다는 생각으로 살아가서 그런 걸까·
‘내가 처음 마법을 배우던 날에도 이렇게 눈이 내렸었지·’
아류문의 어린 시절은 마법학교라 는 게 존재하지 않아 고약한 성격 의 마법사들을 따라다니며 어깨 너 머로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건 이 학교의 교장 엘트먼 도 마찬가지일 터· 그런 과거를 겪 고서 마법학교를 설립하여 세상에 대마도시대를 전파하게 된 그가 새 삼 존경스럽기만 하다·
같은 9클래스의 마법사라지만 인
류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온 엘트먼 엘트윈과 자신의 업적은 감히 비교 조차 할 수 없으리라·
안내원으로 찾아온 기사를 따라 걷 다 보니 어느덧 스텔라 종합병원에 도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다친 학생들의 진료를 보 는 양호실에서 시작했으나 양호 선 생님이 알고 보니 천재적인 마법의 사였던 것인지 뒤늦게 재능을 발견 하게 되어 세계적인 병원으로 발돋 움하게 된 아주 특이한 케이스·
지금도 외부에서 찾아온 환자들이 바글거린다고 했던가·
그는 이곳에 오기 전 챙겨온 황금 사과 바구니를 확인하였다· 모든 병 을 치료할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지만 사실 굉장히 맛있는 게 전부일 뿐인 아주 귀한 사과·
병문안 선물로는 제격일 것이다·
“여기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안내원이 돌아가자 뒤쪽에서 쭈뼛 거리며 간호사가 고개를 들었다·
“레이미 간호사? 안내해 주게·”
“앗··· 넵!”
“백유설은 어디에 있지?”
“맨 윗층으로 올라가야 해요····”
“허 아주 귀빈이군· 엘트먼 본인이 다쳤을 때나 사용하라고 만든 병실 아니던가?”
“교장 선생님께서는 한 번도 사용 하지 않으셨어요····”
“아무도 안 쓰는 것보다는 낫겠지·”
레이미는 소심한 손동작으로 아류 문을 안내하였다·
‘으으 총괄학회장님 이라니···!
마법계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있 을까·
이 사회에서 무슨 사건이 터질 때
면 반드시 그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그의 입김이 작용하게 된다·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마법 범죄자 를 잡은 것은 물론 혼란스러웠던 대마도시대의 초창기 사회를 바로잡 아 규율을 정한 이가 바로 아류문 블르슌이 었으니 까·
항상 신문의 일면을 장식하는 그의 얼굴을 못 알아보는 것도 어려울 지 경·
“여 여기에요···
백유설의 병실에 도착한 레이미·
아류문이 문을 열라며 턱짓을 한 다· 그 익숙한 하대에 그녀는 흠칫
놀라고서 병실 문고리에 손을 가져 다 대었다·
“잠깐·”
“네엣···?”
“노크는 안 하나?”
“아앗!,,
이런 멍청한 실수를 하다니· 황급 히 노크를 하자 안쪽에서 들어오라 는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레 문을 연 레이미는 마침내 백유설의 병실 내부로 들어갈 수 있 었고·
“허 거참·”
“···에?”
그곳에 자리잡은 무수히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서 레이미의 사고회로 가 순간 멎어버렸다·
스텔라의 교장 엘트먼 엘트윈·
모든 요정과 엘프의 왕 꽃서린·
그리고··· 형형색색의 형상을 한 사람들을 보고서 레이미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어이쿠·”
뒤로 넘어지려는 그녀를 붙잡은 아 류문은 피곤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거 참 고작해야 고등학생 한 명
의 병문안치고는 지나치게 화려하 군·”
“왔어? 마침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 던 참이었거든·”
“엘트먼· 그 어린애 같은 말투는 못 고쳤나?”
“뭐 어때· 어려진 것 같고 좋잖아?”
십이신월이 백유설의 곁에 착 달라 붙었다는 언질을 미리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실제로 보니 놀랍기만 하다·
솔직흐1 9클래스의 마법사인 아류 문조차 심장이 벌렁거릴 지경이었는 데 평범한 간호사는 어떻겠는가·
‘저쪽의 소녀들은··· 백유설의 친
구들이 로군·’
최고의 천재들이 모인 것으로 화제 가 되었던 아슬란 세미나에서 직접 그녀들을 만나보았기에 이름과 얼굴 을 기억하고 있었다·
툭 황금 사과 바구니를 내려놓으 려던 아류문은 백유설의 곁에 수북 하게 쌓여 있는 병문안 선물을 보고 서 혀를 내둘렀다·
지금의 손님들도 대단하지만 여기 는 더 가관이다·
만월탑주 해성월의 꽃다발이라든가 그 괴팍하고 제멋대로 행동하기로 유명한 황금의 연금술사 활석코든이
직접 만든 조각이 세워져 있었고 최근 최고의 발명가로서 10대 소년 소녀들의 희망으로 자리매김하고 있 는 알테리야의 손편지까지·
세계 최고의 상회 별구름의 회장 멜리안이 보낸 선물 박스도 있었고 스텔라 마법기사단장 아레인이 보내 온 예식용 검도 눈에 띄었다·
···예식용 검은 왜 보낸 거야?’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말했다·
“이거 원 내가 가장 초라하군·”
“마음이 중요하지 않겠어?”
-하하 그래! 마음이 중요하지·
불쑥 엘트먼과 아류문 사이에 끼어 든 푸른색 덩치의 사나이· 그는 아 류문을 향해 손을 척 내밀었다·
-인간의 신체로 위대한 경지에 도 달한 사내로군· 존경을 표하겠다·
“과찬이십니다· 아류문 블르슌이라 고 합니다·”
-그 이름 기억해 두지·
청동십이월의 손은 아주 차디찼다· 보통의 마력으로는 버틸 수 없을 정 도로·
*···아니 정신력인가?’
정신력에 따라서 차갑게 느껴지기
도 따스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신비 로운 냉기· 과연 이게 십이신월의 권능인 걸까 싶었다·
“이쪽에 계신 분들 모두 십이신월 이세요· 백유설의 상태가 위독하여 찾아오셨죠·”
“반갑습니다·”
한 명씩 정중하게 인사를 나눈 아 류문은 마지막으로 마주한 사내를 보고서 눈썹을 떨 수밖에 없었다·
온통 갈색의 형상을 한 젠틀한 이 미지의 사내·
‘담갈토이 월!’
아류문이 평생을 쫓고 있는 흑마
인 철리번을 수호하는 십이신월이 바로 저 사내였다·
-아···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 철 리번은 나쁜 애가 아니란 말이야····
“당신으로 인해 수많은 생명이 목 숨을 잃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십이신월과 격돌 해봐야 패배할 게 뻔했으나 그렇다 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야야 아류문· 학회장님? 잠깐 기 다려 봐·”
황급히 엘트먼이 말리러 왔으나 그는 고개를 흔들며 손을 저었다·
“···환자가 누워 있는 장소에서
내가 꼴사나운 짓을 할 뻔했군· 무 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 아니에요 아류문· 저는 당신의 생각과 같습니다· 담갈토이월은 너 무 어리고 철이 없어요·
– 쯧쯧· 저 고얀놈· 현세에 간섭하 지 말라던 말을 무시하고서 얼마나 사고를 치고 다닌 게야·
– 담갈토이월 슬퍼하지 마라· 아플 수록 성장하는 법이니까·
– 젠장··· 너희들이 뭘 안다고····
순식간에 우울해진 담갈토이월은 또다시 구석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꽃서린은 담갈
토이월에게 조용히 꽃 한 송이를 피 워내 가져다 주었다·
담갈토이월에게서 애써 시선을 뗀 아류문은 쓰러진 백유설을 향해 다 가갔다·
그의 곁에는 하늘색 머리칼의 소녀 에이젤이 앉아 있었는데 아류문이 다가오자 긴장 어린 표정을 지었다·
“모르프 대공가의 아이로군· 겁 먹 을 거 없다·”
“···네·”
“이렇게 된 지도 벌써 이 주일이 넘었다고 했던가?”
에이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류문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든 깨워내야 해·”
곁으로 다가온 엘트먼이 말했다·
“이 아이는 우리 모두의 운명을 바 꿔줄 거야· 이런 곳에서 죽어서는 안 돼·”
“환자를 걱정하는 말투치고는 과격 하군·”
“우리 모두를 위해서야·”
“모두를 위해서라····”
아류문은 도저히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애당초·
‘이 상황이 말이 되기나 하는 건가?’
고작 17세의 소년이다·
귀족도 아닌 평민 출신·
마법을 다루지도 못하는 주제에 스 텔라에 입학한 이레귤러·
올해 초 마법계에 처음 모습을 드 러낸 그는 무일푼에 인맥 하나 없는 무가치한 소년이었다·
그런 그가 고작 일 년 사이 아이 테르 월드에 심어둔 존재감은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소년 한 명이 쓰러졌다는 이유로
십이신월이 네 명이나 모이는 게 상 식적으로 가능하냔 말이다·
아류문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착 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십이신월들 을 바라보았다·
“제게 이야기해 주실 수 있겠습니 까? 이 세계에 대체 무슨 일이 발 생하고 있는 건지를·”
그러자 은세십일월은 수염을 쓰다 듬으며 잠시 고민하더니 마침내 입 을 떼었다·
-앞으로 10년 뒤 세상이 멸망한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
너무나도 뜬금없이 저런 말이 튀어
나오자 제아무리 아류문이라도 쉽 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상대방은 십이신월이다·
그것도 시간을 초월한··· 은세십 일월· 그런 자가 저런 말을 허투루 할 리는 없을 터· 아류문이 얼떨떨 한 표정을 짓자 청동십이월이 이어 서 설명했다·
-아니· 그렇게 될 예정이었지·
“예정이었다는 건··· 멸망이 늦춰 졌다는 뜻입니까?”
희망을 담아서 물었거늘 십이신월 들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늦춰질 뻔했スI· 저 소년 덕분에·
-···저희 십이신월이라고 해서 꼭 세상에게 호의적인 것은 아니에요·
– 회공시월·
은세십일월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 에 아류문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자가 세계의 운명을 바로잡기 위해 억지로 이야기의 조각을 비틀 고 다니기 시작했어·
“이야기를··· 비튼다구요?”
-그래· 뒤바뀐 운명을 억지로 다시 한번 비틀어버리는 것이 ス】·
“그러면··· 무슨 일이 발생합니까?”
– 말했잖는가·
은색 머리칼의 노인은 힘없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멸망이 다가오고 있다네· 아주 빠 른 속도로· 안타깝지만 우리는 그것 에 저항할 수 없어·
잠시 침묵한 그는 마지막으로 한마 디를 덧붙였다·
-저 소년을··· 제외하고서는·
저것이 바로 이곳에 십이신월이 모 두 모여 있었던 이유·
“이럴수가····”
생각보다도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 게 된 아류문은 정신이 아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