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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담갈토이월(2)
‘거인’·
한때 지상에 존재했던 최강의 종족·
지금은 그저 역사 속 혹은 전설 속 존재로 이야기를 타고 흘러내릴 뿐이지만 한때는 이 대륙 전체가 그 들의 발자취에 벌벌 떨던 시절이 있 었다·
목을 뻗으면 가히 구름에 닿을 정 도였으며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 있었고 원한다면 산과 바다마저 반으로 갈라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진 그들의 육체 능력을 거스를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아주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그 들은 태초부터 아이테르 월드에 10 〇개체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대부 분 온순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 싸움 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점·
다만 ‘대부분’의 거인이 온순했을 뿐 아주 극히 일부의 거인은 그렇 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였다·
거인과 인간의 전쟁은 역사가 기록 되기도 이전부터 시작된다·
바야흐로 천 년 전·
인간이 이제 막 발리스타 따위를 제작하고 있을 때 거인들은 산을 뽑 아 던져 성벽을 마구 부수었고 화살 따위는 그저 바늘에 찔렸다는 듯 가 볍게 뽑아내는 그들에게 대항할 방 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시조 마법사가 등장하기 전까지 는·’
역사는 그의 등장 이전과 등장 이 후로 나뉜다·
그 이전에도 마법은 일종의 주술적
형태로 존재했었으나 그것을 수학 적으로 확립하여 체계적으로 세상에 퍼뜨린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시조 마법사는 불길을 일으키고 운 석을 떨어뜨리며 거인들을 물러냈고 전쟁은 마침내 인간의 승리로 끝을 맺으며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다·
흑마인의 존재가 나타나기 전까지 는 말이다·
키이이이잉-!!
고막을 찢어버릴 듯 울려오는 괴성 에 백유설은 미간을 찌푸렸다·
미리 괴성을 차단하는 이어플러그 를 귀에 꽂아두지 않았더라면 진작
에 고막이 터져 나갔으리라·
[아이템 ‘고스트 이어플러그,가,죽 은 거인의 망령’이 내지르는 절규를 71% 차단합니다·]
허공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치우며 백유설은 전방을 응시하였다·
*···직접 보니 속이 메스껍네·’
마치 검은색의 안개가 인간의 모습 을 흉내 내는 느낌이었다· 불쾌한 골짜기가 느껴지는 이목구비와 제대 로 형태를 잡지 못하고 흩날리는 듯 지직거리는 형체 불규칙적으로 길
이가 들쭉날쭉한 팔다리·
실체화되기 직전의 망령의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피하십시오!”
엘프 기사 한 명이 백유설에게 소 리치며 붉은색의 구체를 전방으로 날렸다· 그러자 거인의 망령 하나가 소멸되었으나 그 뒤로 두 배는 더 거대한 망령이 걸어 나왔다·
“크윽··· 끝이 없군·”
아이테르 월드에는 귀신이 실제로 존재한다· 극히 희귀하지만 무당이 나 고스트 헌터 따위의 직업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대부분의 귀신은 인간 혹은 이종 족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그들이 가 진 원한에 따라 그 힘이 막강해질 때도 있다고 한다·
하물며···
한때 지상 최강의 종족 중 하나였 던 거인의 망령이라면 어떨까?
시조 마법사를 저주하며 쓰러져간 거인들은 죽어서도 구천을 떠돌며 지상을 어지럽혔는데 대부분 마법 사들이 봉인하였으나 너무나도 막강 하여 그러지 못한 망자들이 여럿 있 었다·
하는 수 없이 마법사들은 거인의
망령을 분리하여 수십 수백 조각으 로 나누어 담갈토이월이 잠든 이 땅 에 봉인하였고 그 뒤로 수백 년·
담갈토이월의 태동이 진행되며 봉 인 역시도 점차 약해졌는데 게임 내에서도 아주 간혹 망령이 깨어나 는 사태가 벌어지고는 했다·
보통은 ‘서브 퀘스트’의 형태로 의 뢰를 받아 퇴치하는 초고레벨 전용 의 컨텐츠였는데 망령이 너무나도 막강하여 엔드 스펙을 갖추지 않는 이상 상대하기 버거웠기 때문이다·
“백유설 씨· 약한 거인은 저희가 손쉽게 쓰러뜨릴 수 있으나 커다란 놈들은 피해가는 게 효율적으로 보
입니다· 하나하나 상대하다가는 근 처까지 가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거인의 망령은 그 크기가 다양했 다· 하나의 거인이 수백 조각으로 분리되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다만 그 거인의 조각들이 주꾸미 처럼 하나하나 살아서 꿈틀거린다는 점이 극히 혐오스럽고 징그러울 뿐·
“일단 뒤로 물러나죠·”
“네? 뒤쪽으로 돌아가면 다시 망령 들을 상대해야 합니다·”
“루트를 변경해야 할 것 같아서요·”
제아무리 직박구리 안경이라도 불 규칙적인 공간 내에서는 한계가 있
다· 죽은 거인의 땅은 담갈토이월의 저주로 인해 시시각각으로 지형이 변화하였는데 ‘벽 없는 미로’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충분한 탐색의 시간이 주 어지기만 하면 문제는 없지·’
여전히 직박구리 안경에 루트가 표 시되지는 않았으나 여기부터는 자 신의 감에 의존하기로 했다·
게임을 플레이하던 시절 레벨 업 을 하기 위해 이 퀘스트를 수십 번 이나 반복해가며 클리어하였기 때문 에 모든 규칙을 완벽하게 외워둔 상 태다·
직박구리 안경이 주변을 탐색하여 미니맵에 표시해 주기만 한다면 목 적지를 찾는 일쯤이야 어렵지 않다·
너I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엘프 기사들은 백유설의 터무니없 는 소리에도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데없이 10대 소년의 말을 믿는 게 아니다· 그들은 백유설을 신뢰하 는 꽃서린을 신뢰하였기에 이러한 판단이 가능했다·
‘역시 누님이 사람 하나는 제대로 붙여주셨군·’
안타깝게도 현재의 백유설은 너무
나도 약하여 망령 하나를 상대하는 것도 굉장히 힘겹다· 쓰러뜨리는 것 까지는 문제가 없겠으나 그것이 수 십 마리가 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런 이유로 백유설은 엘프 기사들 의 뒤를 쫓아가는 신세였는데····
*···그럴 필요가 있나?’
그는 생각을 달리했다·
그래 분명 거인의 망령은 아직 자 신의 수준으로 터무니없이 부족한 상대일 수도 있다· 하지만 높은 수 준의 괴수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많은 양의 능력치를 얻을 수 있다·
게다가 지금의 그는 예전의 백유 설이 아니지 않던가·
주인공들의 성장에 맞춰서 아니 그 이상으로 수많은 사건 사고를 겪 으며 빠르게 성장해왔고 덕분에 백 유설은 평범한 1학년과는 궤를 달리 하는 경험치를 보유하게 되었다·
‘까짓거 뒈지기야 하겠어?’
그리 생각한 백유설은 대뜸 테리폰 소드를 뽑아 들고서 전방을 향해 점 멸하였다· 물론 무작정 거인들의 품 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엘프 기 사들의 진형을 해치지 않고서 보조하 는 느낌으로 자연스럽게 합류하였다·
스적!
검끝에서 푸른색의 빛이 맴돌더니 순식간에 망령 한 개체의 목을 베어 냈다·
“오···
기뻐하기도 잠시 질긴 영혼 가닥 을 완전히 베어내지는 못했는지 가 느다란 실가닥 만큼이나 얉게 연결 된 부분을 통해 순식간에 재생하기 시작하는 망령·
“이런 씨!”
재차 검을 휘두르고 나서야 아주 자그마한 개체 하나를 소멸시킬 수 있었다·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사실에 살짝 식은땀이 났으나 이 정도라면 엘프 기사들을 보조하며 싸울 수 있겠다 는 확신이 든 백유설은 검을 단단히 쥐었다·
“위험하니 물러나 계십시오·”
“괜찮습니다· 저도 버스 좀 탑시다·”
“예? 여기에는 버스가 없습니다·”
비록 엘프 기사들은 백유설의 의도 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미 약하게나마 도움을 주겠다는 뜻으로 판단하였다·
‘놀라운걸· 엘프로 치면 갓난아이 의 수준일 텐데···
‘인간은 원래 저렇게 성장이 빠른 건가?’
백유설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는 상당히 놀라울 정도로 단단히 가다 듬어져 있었다·
개인의 무력이 강하다는 의미가 아 니었다· 압도적으로 강한 괴수를 앞 에 두고서 굳이 싸울 필요가 없음에 도 나설 수 있는 용기와 수십 년간 호흡을 맞춰온 엘프 기사들의 협동 을 망치지 않을 정도의 눈치와 센스 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목적지가 보입니다!”
한 엘프 기사의 외침에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던 백유설은 고개를 들 었다· 저 멀리 둥그런 산봉우리 하 나가 옆으로 기울어진 형태로 지평 선을 굳건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산봉우리가 아니다·
뒤늦게 보이는 이목구비 형태의 그 림자· 그것은 너무나도 거대하여 가 까이서 보았다면 드넓은 골짜기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마치 사람의 얼굴이 옆으로 누워 있는 듯한 형태의 저 바위산은 어찌 나 거대한지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
였는데 저것의 정체는 바로 담갈토 이월의 얼굴·
또한··· 담갈토이월에게로 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별꽃나 무와 스텔라의 합동 수업이 진행되 었다· 엘프 학생과 인간 학생 사이 에 벌어진 마음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은 채 시간은 꾸준히 흘러갔다·
어느덧 마지막 4주 차·
이쯤 되니 슬슬 별꽃나무의 교수들 도 불안했다· 인간과 엘프의 화합을 위해 마련한 특별한 이벤트인데 오히 려 학생들의 사이가 더 나빠지다니·
어른의 사정을 생각하자면 참으로 곤란하기 그지없었으나 그 누구도 이 상황을 깔끔하게 해결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그건 풀레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엘프와의 사이가 굳이 좋아져야 하 나 싶은 생각도 있었고 여전히 치 근덕대는 블라썸 트리오가 짜증 났 기 때문·
한데 그것보다는 더욱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었다·
며칠 전부터 백유설이 완전히 자취 를 감춘 채 소식이 끊겨 버린 것·
교수님에게 여쭤봐도 ‘특별한 사정 이 있다’라고 말해줄 뿐 자세한 이 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교수님들이 백유설에 대해 쉬쉬한다는 것은 무언가 그들보다 더 높은 누군가에게 압력이 가해졌 다는 의미인데····
‘별꽃나무의 교수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
굳이 한 명 따지자면 젤리엘을 꼽 을 수 있겠으나 그녀는 일단 용의
선상에서 제외된다·
젤리엘도 마찬가지로 백유설의 행 방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을 며칠 전부터 확인하였으니까·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띵동~ 月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 자 사념에 빠져 있던 풀레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재빠르게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또다시 블라썸 트리오 가 귀찮게 하기 전에 기숙사로 도망 쳐 버릴 생각이었다·
그 순간·
···쿠구구구궁!!!
와장창!
“꺄아아악!”
“지 지진!”
“바닥으로 숨어!”
요란스러운 진동이 울리며 창문이 깨지고 복도 벽과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풀레임은 잽싸게 머리 를 보호하기 위해 실드를 펼친 뒤 지팡이를 휘둘렀다·
콰득!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굵은 나무가 자라나더니 무너질 뻔한 복도를 지 탱하였다·
“사 살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남학생의 어깨를 짓밟고서 뛰어넘은 풀레임은 창백해 진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미친···
쿵···쿠궁····
진동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만 근원지가 멀어서 여기까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을 뿐·
하늘에서 거대한 먹물 같은 것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땅에서도 흑색 먹물이 스멀스 멀 피어오른다·
‘망령!’
빛을 다룰 수 있는 풀레임이었기에 멀리서도 그것들의 정체를 금세 깨 달을 수 있었다·
‘세계수에 어떻게 망령이···?
신성한 힘으로 보호되는 세계수에 는 타락한 존재가 쉬이 침입하기 어 려워 망령은 아예 얼씬도 못할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나 많은 망령의 흔적이 세계수를 뒤덮고 있 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학생 여러분께 알립니다!
-현재 3급 재난 상황이 발생하였
으므로 지하 방공호로 급히 대피하 여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현재 3 급 재난 상황이 발생하였으므로····
긴급하게 안내 메시지가 교내 방송 을 타고 송출되었으나 스파크 튀는 소리와 함께 끊기고 말았다·
“3급 재난? 침입이 아니고?”
“모 모르겠어· 이런 경우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
마법 전사는 재난과 침입 상황을 모두 상정하여 교육을 받는다· 인간 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나 엘프들에 게는 그렇지 않았다·
세계수는 재난으로부터 비교적 안 전했으므로 이에 대해 전혀 가르치 지 않았던 것·
“야 이 답답하게! 빨랑빨랑 지하 로 내려가!”
하는 수 없이 풀레임이 소리치자 몇몇 엘프 생도들이 화들짝 놀라고 서 계단으로 달려갔다·
-방호 마법 가동·
-별꽃나무 마법학교 지부 내에 ‘초 신령의 가호’가 전개되었습니다·
-학생 여러분은 지하····
“미친·”
초신령의 가호는 별꽃나무 마법학 교를 보호하는 최고의 방호 시스템 으로서 어지간해서는 절대 가동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것마저도 가동되었다는 건 정말 로 이 상황이 위급하다는 의미·
풀레임 또한 가만히 있을 수는 없 었으므로 급히 지하 방공호를 향해 내려가려고 했으나 불가능했다·
“계 계단이 무너졌어!”
“지하 방공호로 향하는 입구가 아 예 막혔어요!”
••교수님! 교수님!”
일전에 울린 지진의 여파인 것인지 지하 방공호로 향하는 입구가 완전 히 무너진 상황· 잔해가 차곡차곡 쌓여 천장을 지탱하는 형태가 되어 버려서 치우고 들어가는 것도 불가 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 순간마저도·
학생들은 무심코 생각했다·
‘별꽃나무라면 그래도 안전하지 않 을까?’
최고의 배리어가 둘러져 있고 최고 의 교수진이 즐비해 있으니 정체불 명의 검은 물체가 나타났다고 하더 라도 이곳은 외부에 비해 상대적으
로 안전할 것이라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뚜욱!
하늘에서 검은색 액체가 떨어져 내 리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