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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바람에 드리운 그림자(8)
풍제국은 드넓은 대지가 장점인 나 라였기에 건축물을 드높이 세우는 문화가 비교적 최근부터 유행하기 시작했고 왕궁 근처 반경 18km 의 공간에는 일정 높이 이상의 건축물 을 지을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어 고층 건물이 드물었다·
그러나 부자들은 어떻게든 스스로 를 과시하고 싶은 법이었고 외국식 고층 빌딩이 하나둘 들어와 ‘자칭 7 성급 호텔을 세우기에 이르렀으니·
그곳은 이제 귀빈들이 만족스럽게 쉴 수 있는 휴식터가 되었다·
물론 일개 평민인 나와는 아주 별 개의 이야기가 되었어야만 정상이지 만 이번에는 아주 예외로 풍제국의 태유산에서도 120층이나 하여 귀족 들의 성지라 불리는 ‘호텔 청파단 에 방문할 수 있었다·
사실 알테리샤와 협업하는 아이템 기술 덕분에 나도 어지간해서는 귀
빈으로 취급받기는 하나 굳이 귀찮 게 그러지는 않는 편이었는데 내 맞 은편에 앉아 있는 상대방은 다른 모 양이다·
“되게 비싼 곳에 왔네·”
별구름 상회장의 딸 젤리엘·
엘프라고 하면 보통 숲속에서 풀이 나 뜯어 먹을 것 같은 이미지겠지 만 젤리엘은 완전히 자본주의에 찌 든 하이엘프인 모양이다·
스테이크를 우아하게 썰어 내리는 저 폼만 봐도 그녀가 육식에 익숙하 다는 사실 정도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나저나 다행이네· 거기서 우연 히 너를 마주칠 수 있어서·”
페르소나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우연히 젤리엘을 만난 것은 정말이 지 행운이었다· 당장 별구름의 이름 으로 풍령대학병원의 VIP룸을 예약 할 수 있었고 혹여나 아넬라의 신 체에서 혹마력이 검출되더라도 입막 음이 가능한 인물이었으니까·
또한 스텔라에 입학하기 전까지 아 넬라의 신변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내 유일한 조력자이기도 했다·
기술적으로 알테리샤가 가장 든든 한 우군이라고 하면 젤리엘은 권력
적으로 믿을 수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다·
홍비연조차 아직 스스로의 권력을 제대로 다룰 수 없는 데에 베해 젤 리엘은 처음부터 돈과 권력을 완벽 하게 부릴 수 있는 포지션이었으니 까·
그러···게····”
우연히 마주쳐서 다행이라는 내 말 에 젤리엘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 자 옆에서 피식 비웃는 소리가 들 려왔다·
홍비연 공주였다·
젤리엘보다도 더욱 귀족 같고 품격
있는 분위기를 팍팍 풍기며 포크에 샐러드를 꽂아 넣은 그녀는 머리카 락을 목 뒤로 쓸어넘기며 조용히 속 삭였다·
“우연이라··· 사람 인연은 참 신 기흐)■네· 그렇ス] 평민? 하월 평야에 있을 사람과 페르소나 게이트 입구 에서 우연히 다 마주치고 말이야·”
뭔가 미묘하게 비꼬는 듯한 말투 같기는 했으나 진짜 우연이 맞지 않았던가? 젤리엘이 나를 괜히 찾아 왔을 리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우연이란 게 그런 거 아니겠어? 되게 신기하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서 포크로 스테이크를 팍팍 찍어대자 젤리엘은 묘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홍 비연은 짜증스럽게 포크로 샐러드를 뒤적거렸다·
그나저나 저 둘은 참 성격 안 맞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쪽은 속에 화가 가득한 여자고 한쪽은 머리가 차가운 대신 완전히 미친년이었으니 까·
둘이 함께 뒀다가는 뭔가가 폭발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 미 함께 식사하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신경전 좀 벌이면 어때·
밥만 맛있으면 됐지·
젤리엘은 평소의 그 무뚝뚝한 얼굴 로 돌아와 입술을 떼었다·
“평소에 어떻게 지내나 궁금했어·”
“엉? 뭐 잘 지내고 있지· 따지고 보면 개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 고·”
“···가끔은 연락하도록 해·”
무심하게 지나가듯· 부산 사나이처 럼 젤리엘은 말한다·
“그러라고 내 개인 회선 번호를 알 려준 거니까· 그거 아무나 알 수
있는 거 아니야·”
상회장 딸의 공식적인 번호라면 모 를까 개인 번호는 정말로 극히 희 귀한 게 맞긴 할 것이다·
젤리엘과 사적으로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통신망이었으니까·
그래· 나도 알고는 있다· 그게 얼 마나 귀한지는 아는데··· 그렇다고 젤리엘을 상대로 시도 때도 없이 연 락하기는 좀 그렇지 않은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젤리엘은 아 마 내 또래 중에서 가장 바쁠 텐데·
“어··· 가끔 할게· 심심할 때·”
대충 내뱉은 내 대답에 젤리엘은
만족한 것인지 아닌지 모를 표정으 로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조용히 스 테이크를 썰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문 득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쪽 벽이 전부 유리창으로 이루어 져 있어 풍제국 태유산의 풍경이 한눈에 훤히 들어왔다·
옛날에 서울 남산타워에 올라갔을 때 딱 이런 느낌이었는데 그 비슷 한 분위기가 풍겨서 참 묘한 기분이 다·
생각해 보면 아이테르 월드는 지구 와 많은 부분이 닮아 있었다· 풍제
국과 요정들을 비롯하여 많은 국가 에서 세 글자로 된 한국식 이름을 짓는가 하면 전체적인 문화도 중세 혹은 근대적인 분위기로 현대의 느 낌이 잘 살아 있다·
‘정확히는··· 뭔가 죄다 짬뽕해 놓은 느낌이었지만·’
어느 국가는 근대와 중세를 섞어놓 았고 어느 국가는 중국과 한국을 섞여 있는 등 나라와 시대를 뒤죽박 죽으로 섞어서 박아넣었다고 할까·
슬쩍 고개를 돌려 젤리엘을 바라보 았다· 스테이크를 썰어먹는 저 문화 도 따지고 보면 지구에서 가장 유명 한 식습관이 아니던가·
레이스가 달린 횐색 셔츠에 검은색 오피스 치마조차 내게는 너무나도 현대적으로 보이기만 하는데 그녀 의 뾰족한 귀가 현실감각을 흩트렸 다·
···아니지·
따지고 보면 이곳에서 지낸 지 아 직 일 년도 되지 않았거늘 나는 이 곳이 더욱 현실처럼 느껴졌다·
너무나도 익숙한 감각·
그 이유가 뭘까 하고 생각하니 지 구에서 살던 시절의 나는 참으로 삭 막하고 건조한 삶을 살았다·
공부 집 게임 공부 집 게임·
성인이 된 이후에는 출근 퇴근 게임의 무한 싸이클·
그래 내 삶의 회로 안에는 ‘아이 테르 월드 온라인’이 반드시 껴 있 었다·
캐릭터 백유설을 비롯한 아이테르 의 무수한 등장인물들· 비록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가상의 존재들이었고 스토리조차 스킵하고 하루 종일 PVP 에만 몰두하였지만 나는 이 게임에 푹 빠져서 진심으로 임했던 것 같다·
인생의 절반 정도를 이곳에 바쳤으 니 무미건조했던 현실의 삶에 비하 여 이곳에서 살아가는 감각이 더욱
생동감 넘칠 수밖에 없겠지·
지금의 삶을 감히 ‘재미있다’라고 말하려는 생각은 아니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항상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위험천만한 사건사고가 계속 발생하니까·
다만··· 이곳에서의 내 삶에는 색 깔이 있었다· 나는 그것에 퍽 만족 했을지도 모르겠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젤리엘을 보게 되었다· 게임을 플레이하던 내내 악 역으로서 ‘그저 싫은 캐릭터’라고 생각했던 여자와 실제로 이렇게 만 나 고급 레스토랑에서 단둘이 식사 를 나누고 있는 이 감각·
새삼 이 느낌이 낯설면서도 굉장 히 소중하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 자니 젤리엘은 접시에 시선을 박은 채 고개를 들지 못하고서 안절부절 하지 못하였다·
,,평민·,,
“엉?”
“사람 밥 먹는데 그렇게 빤히 바라 보는 건 예의 있는 행동이 아니야·”
홍비연의 뒤늦은 지적에 내 실책을 깨달았다·
“···사람 밥 먹는데 얼굴을 그렇
게 빤히 바라보는 건 인간들의 예 의 없는 문화 같은 거야?”
,,아 미안·”
“상관없어···
상관없다고는 하는데 뭔가 영 고 개를 들지도 못하고 스테이크를 써 는 모습이 이상하다·
‘그렇게 부담스러웠나?’
젤리엘은 아마 이런 시선에 익숙할 것이다· 별구름 상회장의 딸이기에 항상 주목받는 입장이었을 것이고 그 이전에 너무나도 아름다운 외모 탓에 어딜 가든 항상 모든 사람의 시 선을 강탈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그것도 사람이 적을 땐 부담스럽다 는 걸까· 그것도 아닌데· 보통의 젤 리엘은 상대방을 눈빛으로 죽여 버 릴 기세로 빤히 꼬나보는 역할이었 으니까·
그래도 저렇게까지 무안해하는 얼 굴로 입술만 달싹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미안해졌다·
“너는···
스테이크를 반밖에 먹지 못하고서 나이프로 깨작대던 젤리엘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고개를 들고서 나와 홍 비연 공주를 번갈아 보았다·
“두 분은 평소에도 함께 임무를
자주 수행하시는 편입니까?”
그건 나보다는 홍비연에게 하는 질 문이었으나 내가 답변하려고 했다·
“딱히 그런 건 아니-”
“자주 하는 편이죠·”
홍비연이 내 말을 잘라버리고서 대 신 대답해 버리는 바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군요·”
젤리엘은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잠 시 침묵했다가 무심히 말했다·
“임무 파견을 나갈 때 남부 평야 로 자주 오도록 하세요· 제가 지원
해 드릴 수 있으니까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평민은 당신의 도움 없이도 알아서 잘 해결 할 수 있습니다·”
“모르는 일이죠· 오늘처럼 백유설 도 곤란한 일이 발생할 수 있으니까 요· 그렇지 않나요?”
“어··· 그 그렇긴 하지?”
따지고 보면 결국 젤리엘 덕분에 아넬라를 치료하고 안위를 보장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제 말이 맞았죠?”
젤리엘이 미소 지으며 그리 말하자 홍비연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고개
를 끄덕여서 수긍했다·
그 뒤로도 식사는 묘한 신경전의 반복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아돌레비트 가문과 별구름 상회 사이에 무언가 불화가 있었던 건지에 대해 궁금해졌다·
두 가문은 워낙 세계적으로 널리 영향력을 떨치고 있어 분명히 어디 에선가 자주 마찰을 빚기야 했겠지 만 그렇다고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 럼 으르렁대는 경우는 또 낯설었으 니까
‘직박구리· 그런 거 없어?’
[최근 50년 동안 별구름 상회와 아
돌레비트 왕가의 사이에 큰 불화는 없었습니다·]
‘진짜로?’
[오히려 3년 전 ‘세계상인대연합’ 을 체결하는 데에 아돌레비트 가문 이 큰 도움을 주면서 둘의 사이는 굉장히 우호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 니다·]
···그럼 대체 왜들 저런대?’
마치 용과 호랑이의 싸움에 낀 새 우가 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 뒤로도 둘의 조용조용한 신경전 은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듯 계속되 었고 나는 체할 것 같은 분위기 속
에서 간신히 식사를 끝마칠 수 있었 다·
“에휴 밥 한번 먹기 힘드네·”
밥을 다 먹은 뒤 커피를 마신다는 핑계로 자리를 피해 도망쳤다·
뜨끈뜨끈한 고급 커피의 향기가 코 를 자극했으나 뭔가 카페인이 땡기 는 기분은 아니었다·
‘걔네 둘 진짜로 싸우지는 않겠 지?’
커피를 혼자서 조용히 홀짝거리는 데 뒤에서 느릿한 구두 소리가 들 려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익숙한 인상착의를 가진
사람이 서 있었다·
“음 레이딘 교수님·”
스텔라 아카데미의 신월학 교수이 자 흑마인의 집단의 뿌리층·
단정하게 올린 머리에 외안경이 더 해져 지적인 이미지가 짙게 드리운 레이딘 교수는 내 옆에 다가와 나란 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편입 건은 말해두었나?”
“예 뭐· 덕분에요·”
사실 아넬라의 편입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스텔라 내부에 잠입한 흑마 인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웃기는 일이지 않은가?
흑마인에게서 아넬라를 보호하기 위해 오히려 혹마인의 손을 빌리다 니·
만약 상대가 아키헤이든 교감이라 든지 혹은 다른 인물이었다면 나는 단호히 거절했을 것이다· 오히려 엘 트먼 엘트윈 교장을 어떤 식으로든 꼬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이딘의 손이라면··· 조 금은 다를지도 모르겠다·
“이걸로 スト네는 내게 빚을 진 걸 세·”
“예·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꼭 갚
겠습니다·”
아넬라를 편입한다는 그 말도 안 되는 빚을 레이딘 교수에게 지고 말 았다·
아마도 훗날 그는 내게서 어떤 식 으로든 그 빚을 받아내려고 하겠지·
나는 그것을 노리고 있다·
그는 결코 평범한 방법으로 내게서 빚을 받아가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내 존재를 상당히 의식하고 있을 테 니까
“마나의 서약이라고 할까요?”
“필요 없다· 그까짓 게 너에게 통 하지 않는단 사실 정도는 아니까·”
“아쉽게 됐네요· 법적 서약 정도 로 만족하죠·”
“그래· 이 조약을 어겼다가는 어 떻게 되는지 정도는 마법사로서 잘 알고 있겠지?”
법적 서약은 말 그대로 법적 서약 이기에 어긴다고 해서 마나를 빼앗 기지는 않겠다만 마법사로서 사회 적인 제약을 상당히 받는다·
“걱정 마십쇼 사나이로서 약속을 어 겨본 적이 세 번밖에 없습니다·”
“···세 번이나 있군·”
“그렇죠· 약속 시간이 직전까지 다가 왔는데 화장실이 급한 건 어쩔 수 없
지 않겠습니까?”
“쓸데없는 말장난을·”
레이딘 교수는 표정을 살짝 찡그리 고서 그대로 뒤돌아 홀연히 사라졌 다· 저 작자가 여기까지 무슨 일로 왔는지는 모르겠다만 뭐 또 흑마인 들이 풍제국에 꿀이라도 발라뒀겠거 니 싶었다·
흑마인 사회에서 발생한 일들이 전 부 직박구리 안경에 기록된 것도 아 니니 알아내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도 레이딘 교수가 직접 여기까 지 찾아올 정도면 어마어마한 존재감 을 가진 누군가가 혹은 어떤 사건이
풍제국에서 발생했었다는 건데····
‘그걸 내가 모를 수가 있나?’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고민해 보았 지만 역시나 잘 모르겠다·
나중에 아넬라에게 천천히 불어보 면 알 수도 있겠지· 어쨌든 그녀고 흑마인으로서 이곳에 온 것이니까·
‘당장은 그것보다····)
조용히 빠져나왔던 레스토랑에 다 시 시선을 두었다·
여전히 홍비연과 젤리엘이 눈에서 레이저를 발사할 듯 시선을 마주치 고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에휴···
흑마인이고 뭐고 일단은 저 여자 들을 달래는 게 급선무일 것 같다·